"대안학교"는 종래 제도권 일반 학교에서 수행하지 못하는 교육 활동을 행하는 학교를 일반적으로 통칭하는 명칭이다. 대안학교는 법적인 의미 부여와 상관없이 보편화되어 있는 용어이며, 많은 논자들이 대안의 의미를 찾고 규정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정부 공인 이후, 6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지금, 초창기에 대안학교를 열었던 구성원들 자체가 이동을 통해 다양한 변화를 겪었고, 초창기부터 지켜온 구성원들조차 분명한 대안 의식을 가지고 출발하지 못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 "대안"을 짚어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물질 문명의 발달에 대한 정신 문명 확장 교육이다. 현대 과학 물질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쇠약해진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여 은혜, 상생, 평화를 추구하는 이념을 대안학교 개교의 근저로 삼고 있다.
둘째는 도시 중심 문화에 대한 자연 친화 교육이다. 경쟁과 소외의 각박한 도시 문화로 인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감을 잃어버린 학생들에게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상생과 공존의 가르침으로 건강한 정서를 회복시키는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셋째는 대규모 물량주의에 대한 작은 학교 교육이다. 대부분의 대안학교는 거대 학교 과밀학급에 반대하며, 반별 정원 20명에 전체 120명 정원의 작은 학교를 지향하고 있다. 대규모로 물량화된 상태에서는 교육의 진정한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본다.
넷째는 엘리트 위주 교육에 대한 소위 "꼴찌"도 배려하는 교육이다. 입시 교육은 소위 일류 대학을 향하여 서열을 매기기 위한 교육이다. 자연히 그 부산물로 "꼴찌"가 생겨나며, 그 "꼴찌"들은 학교 교육의 들러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다섯째는 지식과 관념에 대한 노작과 체험 교육이다. 이론적이고 관념화된 지식을 머리로 만 익히는 공부를 지양하고, 손과 몸으로 하는 공부를 노작과 체험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고 있다.
여섯째는 개인주의에 대한 공동체 교육을 지향한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통해 공동체 교육을 실시하며, 더 많은 인간적인 접촉으로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대안학교와 대안교육의 현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안교육의 이념은 지난 초창기 6년 간, 학교 교육의 현실 속에서 공유하고 실천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필자도 1997년도에 처음 영산성지학교로 부임하였을 때, 소위 대안학교를 신문 기사를 통해 먼저 접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안 교육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고, 단지 인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대안교육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대체로 환상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원 전체가 깊은 토론과 경험과 학습을 통해 대안 교육의 이념을 공유하지 못하고, 다분히 몇몇 초창기 관리자나 주축이 되는 교사들이 차지하고서 신임 교사들에게 주입하고 이끌어 가는 소위 이념의 독과점 현상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 이념이 아무리 새 시대를 향도하는 아름다운 이념이라 할지라도 구성원들이 주체가 되어 이념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우리는 얻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대안학교 현실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재적응형 대안학교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이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대안학교가 그 동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위 "문제아"들을 끌어안고 살아오며, 일반학교에서는 도무지 수행할 수 없는 교육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대안학교는 인성 교육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였으되, 또 한 편으로는 일탈의 이미지를 함께 심어 도리어 학부모와 학생 자신, 그리고 일반 학교 교사들은 대안학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1998년에 최초로 개교한 6개 대안학교 중, 4개가 영산성지고등학교와 같은 재적응형 대안학교를 모델로 하였고, 언론에서도 그런 학교에 대한 집중적인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런 현상은 이후 대안학교에 대한 불필요한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대안교육을 다루는 잡지인 <처음처럼>이나 <민들레>에서 중도탈락자 또는 부적응 학생에 대한 교육을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도 부적응 학생을 전담하는 재교육을 대안 교육의 본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는 거리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대안 교육의 과제]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대중 가운데 처하여 비록 특별한 선과 특별한 기술은 없다 할지 라도 오래 평범을 지키면서 꾸준한 공을 쌓는 사람은 특별한 인물이니, 그가 도리어 큰 성 공을 보게 되리라.」" <원불교 대종경 제 11 요훈품 40장>
위와 같은 현실적인 제약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안교육은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맞고 있으므로, 다음 몇 가지의 과제를 잘 해결하여 한국 사회에 대안학교의 위상을 굳건히 정립하여야 하겠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1998년에 개교한 대안학교는 이제 5년 간의 초창기를 지내고 새로운 5년,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5년 간은 바탕을 다지고 교육 이념을 실험하는 기간이다. 이제는 새로운 몸부림을 쳐야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정체할 뿐이다. 경남 합천의 원경고등학교는 올해 초에 이러한 상황을 교직원 모두 깊이 인식하여 새로운 변화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두 개의 소위원회 구성과 활동이다.
하나는 학교발전 소위원회이다. 교감을 위원장으로 한 이 위원회는 학교 정체성과 교육의 이념을 다시 점검하여 공유해나가고, 학교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고, 학교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논의하기 위한 소위원회이다. 다른 하나는 교육과정 소위원회이다. 여기서는 발전위원회에서 수립한 학교의 정체성과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교육과정을 구성해나가기 위한 소위원회이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학교장이 최대한 수용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원경고등학교와 같은 형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각 학교 나름대로 실정에 맞는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하겠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은 구성원들의 수평적인 관계로 이루어지는 열린 토론 문화와 역동적인 변화에 대한 공감대 속에서 맺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 대안 학교 교사들은 무척 지쳐 있다. 지난 5, 6년 간 에너지를 쏟아버린 결과이다. 이 상태로는 대안학교의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 학교를 장기적인 안목에서 운영하려면 반드시 교사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교육 활동과 관련하여 학생들이 안심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 "입학에서 졸업까지" 복지를 구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기숙사 청소· 빨래 아줌마 고용, 이불· 요· 베개 등의 침구류를 개선하고, 휴게실을 정비하며, 양호 시설 확충과 문화 시설을 설치하여 학생들의 건강과 정서 안정을 위한 문화적인 배려도 면밀하게 이루어야 한다.
대안 학교가 대안 교육을 온전하게 수행하기 위한 법적인 보장을 최대한 활용하여 학교가 각종 제약을 벗어나 자율적인 교육과정 운영과 학교 운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육과정 구성과 운영의 자율성, 교육내용의 자율성, 교육 평가의 자율성, 교재 선택의 자율성, 수업 시간의 자율성, 수업 시수와 수업 일수의 자율성, 학교 행사의 자율성 등을 확보하고 보장하는 노력을 더욱더 해야 한다. 그 동안 자율 학교로 지정 받아 많은 부분의 자율이 보장되어 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말아야 하며, 좀더 창의적인 학사 운영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안교육의 자율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노력과 함께, 그에 따르는 책임성도 더욱 강화하여야 한다. 사실 자율성은 그 속에 책임성을 포함한 개념이기 때문에 중복 표현일 수 있다. 대안학교는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또한 엄정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엄정함은 냉정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안 학교 교사들은 각자 수신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학교 전체의 영성 수준을 올려, 그 바탕 위에서 대안 교육을 꽃피워나갈 수 있어야 하겠다.
대안학교는 출범할 당시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정부와 교육 관련 조직이나 단체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래서 대안 학교는 교육의 최선봉에서 한국 교육을 앞장서 이끌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다양한 교육 실험을 하면서 그것을 선도자의 긍지로 삼았다. 그러나 때때로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앞서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여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제 대안 학교는 묵히고 익혀서 내 안의 행복과 기쁨을 찾아나가야 한다. 말하자면, 이름난 학교, 잘나고 유명한 학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나가도록 인식을 전환하여야 한다. 오래 평범을 지키면서 꾸준히 공을 쌓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고, 그런 학교가 특별한 학교이니, 그런 사람과 그런 학교가 도리어 큰 성공을 보게 될 것임을 믿는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 교육 기사 중 정일관님의 기사 발췌
대안학교의 모델과 실천
[뉴스피플] 96.9.19
우리 교육현실이 척박하다는 말은 새삼스런 지적이 아니다. 주류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할 때 항상 떠오르는 것은 비주류이고 언더다. 교육분야도 마찬가지다.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관심을 끌었던 거창고등학교나 성지고등학교. 하지만 이 땅에는 더 많은 대안교육이 있다. 이들 대안들의 다양한 모습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대안학교의 모델과 실천',서울평화교육센터 엮음, 내일을 여는 책).
대안학교라는 용어가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90년대다. 우리 현대사에는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목표를 지닌 여러 대안들이 발견된다. 우선 60∼70년대 재건. 공민학교를 들 수 있다. 80년대 들어서는 많은 노동자들이 배출되면서 검정고시 야학이 등장한다. 파울로 프레리로 대변되는 민중교육론에 힘입어 이들 중 일부는 생활야학이라는 얼굴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 흐름은 제도권 안이든 밖이든 정규교육에서 소외된 많은 사람들에게 배움 이상의 의미였다. 개발도상에서는 가난 때문에 생긴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적셔 주었다. 민주화 투쟁기에는 공허한 이론 대신 삶과 끈적하게 연결된 참교육을 제시했다. 살 만한 시절이라는 요즘엔 체제에서의 일탈(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감싸주는 아늑한 쉼터였다. 대안문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류가 병들었기 때문이다.`대안학교의 모델…'이 끌어안는 대상은 주류, 즉 정규교육이 소외시킨 이 시대의 `어둠의 자식들'이다. 뒤집어 보면 그것은 그들을 문제아라 낙인찍은 `정규'의 뿌리깊은 병폐다. 일류대 신드롬, 1등, 승리, 경쟁만을 강조하는 물상화된 이 땅의 `스피드'다. 여기에 과감히 반기를 든 마이너의 목소리들을 모았다는 데서 이 책의 의미가 있다.
무대의 주인공은 반골기질의 삐딱한 몇몇 사람이 아니다. 교육의 주체라 볼 수 있는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의 체험과 육성을 담았다. 그 다양한 사례들에서 아직은 미미하지만 폭넓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시대 건전한 비판정신과 만난다. 대안의 얼굴은 크게 정규학교형, 계절프로그램형, 방과후 프로그램형, 아동. 유아교육 프로그램형 등 4부로 짜여져 있다.
이를테면 대안학교의 백과전서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 평민개념에 초점을 둔 풀무농업고등학교, 이른바 문제아들이 `개과천선'(정규쪽 용어로) 해서 거듭난다는 영산 성지고, 죽은 농촌을 살린다는 모토를 내세운 숲속마을 작은학교,빈민층 맞벌이부부의 아동들을 위한 보금자리 서울지역 공부방 연합회등등이 있다.
사실 우리는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교육개혁안들을 보았다. 그리고 지난주에도 그 지루한 행진은 이어졌다. 의례 그랬듯이 `지금까지의 교육형태로는…'식의 부정적 화법으로 시작되었다. 그 많은 제도나 선언에도 불구하고 나아진 것은 없다. 이제는 무슨 교육개혁안이 발표되면 `그러다 또 바뀌겠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다. 제도라는 외피만으로 본질을 고치겠다는 안일함이 난무하는 곳. 그곳이 교육개혁의 현장이라는 의혹은 이제 보편적 인식이 되었다.
이러한 풍토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은 어찌될 것인가. 나만이 아닌 공동체 정서를 길러 주고 생명체를 존중할 줄 알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길러 줄 방법은 없는 것인가. 답을 구하기 위해 잠깐 눈을 돌려 나라 바깥으로 가보자.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지난주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프랑스 엘리트교육의 현장 `그랑제콜'(GRANDES ECOLES)의 교육이념이다. 나라에서 교육비를 지원 받으며 전공과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배우는 학습과정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 뒤켠에 있을 다수의 모습들이 궁금했다. 그들의 교육은 어찌할 것인가.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어쩌면 두 가지 의문에 대한 대답이 `대안학교…'가 아닐까. 소수의 정예보다는 다수의 밀알을 가꾸고 의미 없는 경쟁보다는 함께 가는 삶을 강조하는 곳. 이 `위대한 반항의 현장들'이 뿌리를 내릴 때 우리 아이들의 앞날은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더 많은 대안들이 창조적 에너지를 뿜을 때 건너편에서 신음하고 있는 `정규'의 모습도 치유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