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계몽 교육으로 독립운동에 몰두하다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이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중국 이주사는 처음엔 조선조 통치의 부패와 해마다 생기는 자연 재해가 그 원인이었다. 주로 국경 지대 가까운 북부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살 길을 찾아 중국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1910년 이후 이주민이 급속도로 증가했는데, 그것은 한일 합방 후 일본이 조선에서 실시한 토지 약탈과 이민 침략 때문이며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증가 추세는 더욱 심화됐다. 1910년대~1930년대의 이주 봉오동 전투의 안무 장군. (가운데 앉은 이) 대한제국 친위대 교련관으로 있다가 1910년 만주로 망명, 대한 국민회를 조직했고 김좌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만주의 조선인 숫자를 당시의 통계에 의해 살펴보면,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두만강 북쪽으로 건너간 자는 9만 3883명, 압록강 북쪽으로 넘어간 자는 9만 8657명, 1920년 만주의 조선인 인구는 45만 9400여 명이 되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제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를 세우고 장춘(長春)과 대련(大連) 간의 철도 경영권을 얻어 그 보호와 관리라는 명목으로 여순(旅順)에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를 설치했다. 여순, 대련은 정문, 연길은 후문이라고 할 만큼 간도 지방을 중요시했던 일제는 용정(龍井)에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 간도파출소(間島派出所)를 설치했다. 이것이 나중에 간도총영사관(間島總領事館)이 되어 간도에 사는 조선인을 감시하는 기구가 되었다. 그 뒤, 간도에는 18개의 경찰서가 세워졌고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가 조선인을 통치했다. 1911년 용정에서 원인 불명의 대화재가 잇달아서 일어났는데, 조선총독부는 용정구제회(龍井救濟會)를 두어 기업소나 개인에게 고리로 돈을 대부했다. 구제회는 1918년에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로 간판을 바꾸고 농민들에게 가옥이나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공개적으로 땅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일본 자본가들은 만주의 광산, 탄광, 임업 경영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또 주조(酒造), 제유업(製油業) 등 다양한 산업을 경영했고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 자본주 밑에서 힘든 노동에 종사했다. 많은 자연 자원이 연변에서 일본으로 보내졌고 많은 생필품이 일본에서 연변으로 들어왔다. 연변은 일본의 중요한 무역 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인의 이민 정책은 일제가 예상했던 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기후의 차이도 있고, 언어도 안 통하고, 만주 지역에 사는 중국인들의 심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만주 이민이 본격화한 것은 1931년 9․18사변 이후이다. 1910년 이후 일제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토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조선총독부에서는 토지조사법을 반포하였고, 1912년 8월에는 또 토지조사령과 그 시행규칙을 조작하여 토지 약탈을 위한 기초 작업을 마무리했다. 8년여에 걸쳐 진행된 토지 약탈은 조선 정부의 공유지와 농민들의 일부 사유지를 독점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식민회사는 조선에서 제일 큰 지주가 되었다. 일제는 만주에 대한 이민 침략이 실패로 돌아가고 조선에서 대량의 토지를 약탈하게 되자 이민 침략 정책을 조금 바꾸어 일본인을 조선으로, 조선인을 만주로 보내는 환위이민(換位移民)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일제는 국내의 농업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의 식량을 공개적으로 약탈하는 산미증산계획(産米增産計劃) 정책을 실시하여 1927년부터 1931년 사이에 조선에서 6600만 석을 약탈해갔다. 이리하여 조선 국내에서 생계를 더 유지하려야 할 수 없었던 많은 파산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했다. 조선인들은 1910년 이전에는 주로 간도와 그 주변의 땅으로 이주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간도 주변을 훨씬 벗어난 더 내륙으로, 지금의 하얼빈이나 몽골 자치주까지 이주하였다. 우리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처럼, 우리 민족은 일본과 중국의 이해 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중 국적이라는 문제 때문에 민족적 압박과 차별을 받았다. 이 시기 일제는 조선 민족에게 치외법권(영사재판권)을 실시하면서 중국의 법률과는 관계 없이 조선 민족을 일본 법률로 통치하려 했다. 이는 1910년 한일 합방 때문으로, 이제 조선인은 일본인이 되었고 중국은 그들을 간섭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만주 군벌인 장작림은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자기의 군사력을 강화하여 전국을 통일하려는 생각으로, 일제가 제기한 만몽조약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조선족한테는 중국에 입적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만약 중국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토지 소유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족은 절대 다수가 귀화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일제의 치외법권도 인정하지 않고 무국적인으로 버티고 있었다. 1910년대 이후 조선족의 반일 운동 안중근 의사, 남자현 여사 등 항일 애국지사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했던 당시의 하얼빈 일본 영사관. 지금은 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10년대는 연변 지역을 중심으로 반일 운동이 시작된 시기이다. 1905년 을사5조약, 1907년 군대 해산과 1910년 한일 합방 전후의 일제의 폭력으로 인하여 반일 독립 운동은 국내에서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게 되자 수많은 반일 지사들이 근거지를 만주로 옮겼다. 그리고 이미 형성되어 있던 조선인 집거촌을 중심으로 신식 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을 실시하여 반일 단체를 조직함으로써, 근대적인 민족 의식과 반일 사상으로 조선인 대중을 교양하고 단합시켜 반일 민족 무장 독립 투쟁을 준비하는 데 중점을 둔 항일 운동을 펼쳤다. 민족 교육자이자 천도교 신도인 김소래 선생이 농장을 경영하면서 학교를 세워 많은 조선인 농민을 반일로 계몽했던 시기도 바로 이때이었다. 소래 선생은 1889년 함남에서 태어나 1932년에 사망했는데, 1908년 고향에 동명학교( 明學校)를 설립하고 1909년 항일 운동을 위해 천도교에 입교하고 이삼결의단(二三結義團)을 결성하였으며, 독립 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여 혁명 이론을 가르쳤다. 지금도 중국의 나이 드신 조선족한테 소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이름은 잘 모르지만 카이젤 수염을 기른 분이 항일 운동과 교육에 힘쓴 것을 알고 있을 정도이다. 일제에 대한 무장 투쟁은 1910년 이후에 시작되었다. 1909년 9월 청나라와 일본이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이것은, 일본이 간도 지역에 새로운 철도를 부설하고 탄광을 개발하며 상업지를 개설하고, 또 일본이 간도에서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행사하여 마음대로 조선인을 탄압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인들은 일제와 청나라 정부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것을 계기로 조선 민중들이 항일 운동의 방향을 계몽 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1909년 10월, 만주사철을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안중근 의사가 사살한 소식은 중국에 사는 조선인들의 반일 투지를 크게 자극했다.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3월 13일에는 용정 천주교회당 광장에서는 2만여 명이 모여 독립선고문과 공약 3장을 낭독하였다. 이때 일경과 유혈 사태가 발생하여 13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1920년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이 시기 항일 무장투쟁은 최고봉을 이루었다. 홍범도의 지휘하에 6월 4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 봉오동 전투는 우리 독립군의 첫 전투이자 첫 승리였다. 봉오동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중국의 동북 군벌 장작림과 결탁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훈춘사건이란 중국의 마적을 돈으로 매수하여 훈춘현 성 안에 있는 자기네 영사관과 상점 여섯 개에다 불을 지르고 현금을 강탈하고 일본인 11명을 죽인 사건인데, 이것을 빌미로 삼아 일본 군인이 중국 영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이후 이들은 조선인 반일 무장대를 섬멸하기 위해 경신년대토벌(庚申年大討伐)을 단행하였다. 1920년 10월부터 30일까지 21일 동안 수천 개의 조선인 부락이 잿더미가 되었고 3500여 명의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경신년대토벌을 당하고 있는 중에서도,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우리 역사에 남는 청산리 전투가 있었고, 김좌진 부대, 홍범도 부대, 안무 부대 등 다섯 개 부대의 연합군이 백운평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맹가골 전투, 천보산 전투, 고동하 전투 등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혈전 끝에 승리를 얻었다. 그런데 청산리 전투 이후 만주의 항일 투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장작림에 의해 항일을 기도하는 조선인은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고, 또 하나의 이유는 같은 항일 지사들끼리의 당파 싸움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가 공산주의 사상이 중국의 조선인들에게 보급된 시기인데, 항일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진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싸워야 할 정도로 공산주의에 대한 해석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우리의 민족 영웅인 김좌진 장군을 암살했던 자가 화요파인지 엠엘파인지는 지금도 미궁 속에 남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암살자가 조선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비극이고, 지금도 우리는 그 비극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글/류은규(다큐멘터리 사진 작가로 중국 근대사를 살아온 조선족의 자취를 연구하고 있다.) 李江秀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