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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풍속도첩-활쏘기 | 활은 신석기시대에 벌써 기본 사냥 무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나진 선봉시 <서포항유적>과 온천군 <궁산문화제1기층>에서도 활촉이 출토되었다. 이밖에 충북 제천군 <청풍면지석묘>와 경기도 가평의 가평천 <마장리유적>, 경남 마산 <성산패총>, 서울 강동구 <암사동선사유적지>에서도 다양한 석촉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화살촉 유물은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어, 일찍부터 우리 민족이 활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각 유적들마다 활촉의 크기와 무게가 조금씩 다른데, 이는 원시시대에 벌써 다양한 활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대의 활과 화살은 원시시대의 것에 비해 발전하였다. 중국의 역사책인 《후한서(後漢書)》권115에는 고조선에는 ‘낙랑단궁(樂浪檀弓)’이라는 강한 활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조선시대 이규경(李圭景)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권6에서는 “단궁(檀弓)이란 박달나무로 만든 활을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박달나무로는 활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단궁을 “단군의 나라에서 쓴 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시대 활쏘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덤 벽화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에 그려진 <수렵도(狩獵圖)>는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당시의 활쏘기 모습을 잘 보여준다. 또한 중국의 역사책인 《신당서(新唐書)》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글읽기와 활쏘기를 병행하여 익혔으므로, 국민 전체가 활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후주서》에는 “백제에서는 활쏘는 사람을 중히 여긴다.”라고 씌어 있어, 백제에서도 활쏘기가 보편화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수서(隋書)》에는 신라가 궁술을 중히 여기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8월 15일 잔치를 베풀고 관인으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말과 베[布]를 상으로 준다.” 라고 쓰고 있으며, 《구당서》와 《신당서》모두에 신라에서 활쏘기를 즐겨함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이어 고려시대에도 상무(尙武)를 중시해 왕이 친히 활쏘기와 말타기를 사열하였고, 현종(顯宗)·선종(宣宗)은 직접 활쏘기를 했다고 한다. 특히 송(宋)나라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당시 활을 ‘활’이라고 하였고, 활쏘기를 ‘활쏘아(활색)’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오랜 옛날부터 활·화살·활쏘기 등을, 활·화살·활쏘아 등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러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시대 활쏘기는 신분과 귀천에 관계없이 대중적인 민속놀이로 널리 행해졌다. 또 활쏘기 기술이 당시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에 사인소(舍人所)를 설치하여 활쏘기를 별도로 훈련시켰으며, 심지어 신숙주(申叔舟)는 “활쏘는 일로써 큰 일을 삼고 있다.”고 하여, 이를 자주 하지 못하도록 간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현종(顯宗)·숙종(肅宗) 연간에도 궁술을 특별히 장려해 궁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습사하여 심신을 단련하는 것이 전국적인 풍속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과녁판의 거리와 모양, 크기와 점수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世宗實錄)》《세조실록(世祖實錄)》 등에 활쏘기와 관련된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활쏘기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남원 풍속에 고을 사람들이 봄을 맞이하면 용담 혹은 율림에 모여 술을 마시며 활을 쏘는 것을 예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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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통(나전전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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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활쏘기 연습과 경기방법
① 고정된 목표를 세우고, 달리면서 활을 쏘아 맞히기 ― <덕흥리 고구려벽화(408년)>에는 사냥과 전투를 위해 사격술을 익히고 있는 고구려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마사희’라고 씌어 있는 벽 그림에는 긴 말뚝 5개에 목표 1개씩을 세우고, 4명의 사수가 활쏘기 경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옆에는 심판원 2명, 기록수 1명이 서서 경기 과정을 지켜보고 성적을 적어 넣으면서 경기를 진행하는 장면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세종실록(世宗實錄)》권35에는 국가에서 무과 예비시험과 훈련관시험 때에 적용한 규칙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즉 달리며 활쏘기 첫 시험은 150보(약 210m) 밖에서 달려가면서 활쏘기를 하였고, 2차 시험 때에는 200보(약 240m), 150보, 70보(약 80m) 밖에서 달려가며 각각 활쏘기를 하였다고 한다.
② 이동 목표를 선 자리에서 쏘아 맞히기 ― 이는 고구려 주몽(朱蒙)의 아들 유리왕(琉璃王)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활쏘기를 잘 하였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활을 잘 쏘는지 날아가는 참새도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고 한다. 하루는 지나가던 여인이 이고 가는 물동이를 쏘아 구멍을 냈다. 그 여인이 화를 내자 화살에 진흙을 발라 다시 쏘아서, 그 구멍을 막았다고 한다. 그 내용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3에 기록되어 있다.
③ 이동 목표를 움직이면서 쏘아 맞히기 ―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그림이 많다. 달아나는 범을 쫓아가며 활을 쏘는 장면, 산골짜기를 달리며 노루나 사슴을 활로 겨누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이동 목표와 함께 움직이기 위해 주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인데, 말은 빨리 달리기 때문에 과녁판을 많이 세워 놓고 쏘기를 하였다. 즉 왼쪽 쏘기와 오른쪽 쏘기를 고려하여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5개씩 과녁판을 세웠는데, 붉은 과녁과 흰 과녁을 번갈아 세웠다. 먼저 왼쪽으로 활을 잡는 사람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왼쪽에 있는 첫 번째 붉은 과녁을 쏘고, 다음에는 가로 달리면서 오른쪽의 두 번째 붉은 과녁과 왼쪽 세 번째 붉은 과녁을 쏘았다. 그 후 다시 오른쪽 네 번째 붉은 과녁을 쏘고, 또 왼쪽의 다섯 번째 붉은 과녁을 쏘았다. 이런 방법으로 다섯 개의 과녁을 쏘게 하였다.
④ 고정 목표를 서서 쏘아 맞히기 ― 이는 활쏘기 사격장인 사정(射亭)에서 행해졌는데, 멀리 쏘기와 정확한 과녁판 맞히기를 하였다. 멀리 쏘기에는 일반적으로 나무화살과 쇠화살이 사용되었다. 국가에서 무사를 뽑을 때의 규정이 《경국대전(經國大典)》권4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멀리 쏘기 규정은 나무화살로는 240보(약 288m) 거리에서 쏘게 하였다. 한 번에 세 개의 화살을 쏘게 하였는데, 한 개의 화살이 규정된 거리에 미치면 7점을 주고 규정된 거리를 벗어나면 5보(약 6m) 마다 1점을 더 주었다. 쇠화살로는 80보(약 96m) 거리를 쏘게 하였고, 마찬가지로 5보당 1점을 더 주었다. 과녁판 맞히기는 편전(片箭)을 쏘게 하였는데, 이것은 정확하게 목표를 맞히는 것을 겨루는 것이었다. 편전으로 쏠 때는 과녁판을 130보(약 156m) 거리에 세웠는데, 과녁판은 너비 8자 3치, 길이 10자 8치이며 과녁의 너비는 2자 2치, 길이는 2자 4치 되는 것을 썼다. 활을 쏘아 과녁판을 맞히면 매 화살마다 15점을 주며 과녁을 맞히면 매 화살마다 배의 점수인 30점을 주었다.
⑤ 조선시대에 이르러 활쏘기가 일반 풍속으로 자리잡음과 동시에, 전국에 많은 사정(射亭)이 생겨 다양한 활쏘기 방법이 등장한다. 이 중에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편을 갈라서 활쏘기를 겨루는 편사(便射)이다. 편사는 무사들이나 지방민들이 편을 가르고 선수를 뽑아 활쏘기 경기를 진행하는 것인데, 대개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편을 나누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황학정·백토정·풍소정과 같이 사정 단위로 진행하는 ‘터편사’, 한 지역에 있는 몇 개의 활터들이 연합하여 편을 이루고 지역 사이의 경기를 진행하는 ‘골편사’, 도성 안이 한편이 되고 도성 밖이 한 편이 되어 겨루는 ‘장안편사’ 등이 있었다. 또한 문벌 대항으로 진행하는 ‘사랑편사’를 비롯하여, 신분 차이에 따라 진행하는 ‘사계편사’ ‘한량편사’ ‘한출편사’ ‘삼동편사’도 있었고, 어린이들이 편을 갈라서 하는 ‘아동편사’도 있었다.
⑥ 활쏘기 경기에서 겨루기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하였다. 첫째는 편을 나누어 매 경기마다 개인의 점수를 종합하여 승부를 가르는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사람들의 점수를 매기는 방법으로 등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경기에서 우수한 궁수에게는 상을 주기도 하였다. 선수들은 활쏘기 연습에 털을 뭉그려 둥글게 만들어서, 일정한 거리에 달아놓고 쏘아 맞히도록 만든 ‘사모구’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세종실록(世宗實錄)》권26에 소개되고 있다.
⑦ 그밖에 활터가 아닌 곳에서 하는 경기 방법으로는, 벌터질과 먼장질이 있었다. 벌터질은 추수가 끝난 뒤 논밭이나 들판에서 목표물을 놓고 쏘는 경기인데, 목표물은 짚단이나 동그라미를 표시해 놓고 쏘았다. 먼장질은 들판에서 과녁 없이 멀리 쏘는 것을 말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 떨어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화살을 주워와야 하는데, 이는 아이들이 주로 많이 했다.
2) 활과 화살의 종류
① 활의 종류 ― 활은 재료와 사격 대상에 따라 7가지 종류가 있다. (ㄱ) 목궁(木弓) ― 호(弧)이며 궁간목(애끼찌나무)과 산뽕나무로 만든다. 탄력이 좋은 나무를 원자재로 쓰기 때문에, 만들기도 쉽고 전투와 사냥에 흔히 쓰였다. 아이들이 흔히 가지고 노는 것은 대나무로 만든 활인데, 이것도 목궁에 포함된다. (ㄴ) 각궁(角弓) ― 뿔활을 말한다. 휘어지는 부분은 참대나 나무로 대고, 나머지 부분에 뿔조각을 붙여 만들었다. 이 활은 전투와 사냥에도 쓰이고, 운동용으로도 쓰였다. (ㄷ) 철궁(鐵弓) ― 쇠활을 말한다. 각궁과 같이 휘지 않는 부분에 쇠를 댄 것으로, 전투용으로 흔히 쓰였다. (ㄹ) 정량궁(正兩弓) ― 큰 활이라고도 하는데, 활의 크기가 보통 활보다 크다. 그러므로 흔히 무사들이 전투용으로 사용했다. (ㅁ) 예궁(禮弓) ― 활 중에 가장 큰 활로 정량궁보다 더 크다. 주로 의장용 활로서 궁중 연사와 대사례, 향음주례 때에 사용하였고, 창덕궁에서 나온 유물이 있어 실물을 볼 수 있다. (ㅂ) 철태궁(鐵胎弓) ― 각궁과 같으나 쇠로 활을 만든 것으로서, 전투와 사냥에 쓰였다. (ㅅ) 고궁 ― 민간에서 동개활이라고 한다. 작은 활로서 등에 지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게 만든 것이다. ‘동개’란 활과 화살을 넣어 지고 다니게 만든 통을 말한다. 그밖에 활에 먹인 칠의 색깔에 따라 활의 이름을 달리 불렀는데, 붉은 칠을 한 것은 동궁이라고 하였고 검은 칠을 한 것은 노노궁이라 하였다.
②화살의 종류
(ㄱ) 목전(木箭) ― 순 나무로 만든 화살로서, 무게도 가벼워 활쏘기 연습과 무과시험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ㄴ) 철전(鐵箭) ― 나무나 참대에 쇠촉을 꽂아 만든 화살인데, ‘육량전’ ‘아량전’ ‘장전’ 등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육량전이란 6냥(약 225g 정도)이 나가는 화살을 말하고, 아량전은 그보다 조금 가벼운 4냥(약 150g 정도)이 나가고, 장전은 1냥~1냥 5,6푼 정도(약 40~50g 정도)의 화살이다. 이 화살들은 모두 전투에 사용되었다. (ㄷ) 편전(片箭) ― 속칭 ‘애기살’이라고 하며, 살이 작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로 통에 넣어서 쏘는 1자쯤 되는 짧고도 위력적인 화살이다. 명중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통을 쓰는데, 사수는 통의 끈을 팔뚝에 매고 쏘기 때문에 화살만 앞으로 나가고 통은 다시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편전을 쏘는 것을 일명 ‘통사’라고도 하였다. (ㄹ) 예전(禮箭) ― 길이가 긴 화살로서 깃도 큰 깃을 사용했다. 이것은 의장용 활인 예궁에 쓰는 화살이다. 예전은 동개살이라고도 하는데, 동개활에 쓰는 기마 사격용 화살이다. 깃이 크면 덜 나가는 대신에 정확한 조준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름도 깃이 크다는 뜻을 지닌 ‘대우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ㅁ) 장군전(將軍箭) ― 화살 전체를 쇠로 만들어 무게가 2~3kg이나 된다. 이 화살은 포노를 쏘아 배를 파괴하는데 썼다. (ㅂ) 세전(細箭) ― 가는 대로 격문 같은 것을 처매서 쓰는데 썼다. (ㅅ) 유엽전(柳葉箭) ― 주로 견습, 무과시험용으로 썼다. 이 화살은 각궁에 썼는데, 조선 말기에 널릴 사용된 화살이었다. (ㅇ) 우는 살[嚆矢] ― 이것은 적을 공격하는 신호용으로 쓰이는 화살로, 소리가 난다.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狩獵圖)>에 나오는 활도 우는 살이다. 아마도 짐승들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해서 일부러 소리나는 화살을 즐겨 쓴 것 같다.
이와 같이 활이 발명된 후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사격대상과 용도에 따라 다양한 활과 화살이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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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궁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활을 잘 쏘는 명궁이 많았다.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東明聖王)도 활을 잘 쏘아, 주몽(朱蒙)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조선 왕조를 건국한 이성계(李成桂) 역시 뛰어나게 활을 잘 쏘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40장·43장·57장·63장은 이성계의 활솜씨를 노래한 대목이다. 그밖에 기록에 나오는 명궁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15세기 ‘이석정’은 활을 잘 쏘는 명궁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센 활을 만궁(彎弓)으로 당겨 종일토록 쏘았는데 하나도 빗나간 것이 없었고, 아침밥을 먹고 말을 타고 들로 나가 한낮이 못 되어 돌아올 때에는 화살의 숫자만큼 꿩이나 기러기를 잡아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16세기의 명궁으로 명천사람 ‘장필무’가 있었다. 어느 날 이 고장에 범이 나타나 소동이 일어났다. 북병사가 군사를 동원하여 잡으려 하자, 그는 혼자서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200보(약 240m) 밖에 있는 범을 활로 쏘아 단방에 바위 위에서 떨어뜨렸다. 또한 16세기 명궁으로 ‘황진’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1590년에 사신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적이 있었는데, 사신 일행이 지나가는데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활쏘기 기술을 자랑하려고 50보 밖에 과녁판을 세우고 활을 쏘고 있었다. 황진이 그것을 보고 곧 그 옆에 자그마한 과녁을 세우고 활을 쏘니 한발도 빗나간 것이 없었다. 이어 두 화살을 연발하니 두 마리의 새가 단번에 떨어졌다. 이를 보고 일본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탄복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에는 달려드는 왜군에게 활을 쏘았는데, 화살을 넘겨주는 사람이 3~4명인데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참고문헌> 정진명, 《한국의 활쏘기》, 학민사, 1999. 조완묵, 《우리 민족의 놀이문화》, 정신세계사, 1996. 한성겸, 《재미있는 민속놀이》, 금성청년출판사, 19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