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르름과 함께 한 강화 나들이
천혜의 섬 강화로의 여행
강화의 대표적인 국방 유적 용두돈대
천혜의 섬 강화 나들이
강화도를 찾는 여행객의 부류를 보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청동기문화와 국난극복역사의 현장 및 전등사 답사와 더불어 마니산 등반까지 하는 학구적인 답사파, 둘째 연인으로서 외포리를 찾아 석모도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싣고 보문사 앞에서 낙조를 구경하며 사랑을 속삭이는 낭만파, 셋째 낚시를 목적으로 하는 강태공 파, 마지막으로 해산물, 밴댕이회, 인삼막걸리 등 각종 먹거리에 관심을 가지고 찾는 식도락파 등이 있다.
어찌 되었건 강화도를 찾는 목적이야 제 각각 다르지만 강화는 주말이나 휴일이 될라치면 김포에서부터 막혀 한번 들어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또한 휴일 오후에 강화에서 나오는 행로 또한 만만치 않다. 이는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이 새로 만들어진 강화대교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건설중인 2번째 다리가 금년 8월에 완공되면 인천 등지에서 손쉽게 강화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교통 혼잡 또한 훨씬 덜하리라 생각된다.
강화도에 가면 몇 가지 강화의 특산물이 있다. 우선 집안을 꾸미는데 관심이 있고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고자하는 사람은 "화문석"이라 하고, 애주가 여러분께서는 인삼막걸리에 인삼튀김, 또 5-6월 제철인 밴댕이 회를 꼽을 게다. 또 김치를 직접 담그는 주부나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순무"가 뭐니뭐니 해도 제일이라고 할 것이다. 정리해보면 강화도는 왕골로 화문석을 만들고, 인삼을 많이 재배하며 순무 또한 강화도 밥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그런 김치다. 5-6월에 제철이라는 밴댕이 회 또한 별미 중의 별미이다.
강화 첫머리에는
강화역사박물관(강화를 선사부터 근세까지 볼 수있다)
강화를 찾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제일 먼저 강화 역사관에 들르게 된다. 강화역사관은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약 500미터 정도 가서 좌회전을 해서 들어가야 한다. 강화역사관에는 선사시대 구신석기시대 유물인 토기, 석기 등이 전시되어 있고 청동기시대 고인돌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 등이 비교적 소상히 소개되어 있다.
다른 전시실에는 국난극복의 역사 현장으로서 강화라는 부제의 역사 기록과 유물 등이 전시되고 있는데 39년간의 대몽 항쟁에서 조선시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양란 상황도 근세에 서구열강들의 침입에 따른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으로 비롯된 "강화도조약"까지를 전부 담고 있다.
전시관을 나오면 북방한계선이라는 탱자나무가 있고 해변 주위로는 갑곶돈이 복원되어 있다.
갑곶돈대의 탱자나무(탱자나무 북방한계선에 있다)
국난극복의 현장을 돌아보며...
강화도는 외세 침략에 대응하여 수없이 항쟁을 벌인 격전지로서 "국난극복의 생생한 현장 학습장"이다. 고려 때 39년간 몽고의 6차 침입을 견디어 내면서 항쟁을 했던 곳으로서 강화시내의 고려궁지는 당시 개경정부가 옮겨온 궁궐터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려 무인 정권 시 대몽 항쟁은 임금과 권력층은 도읍과 백성을 버리고 강화로 숨어들어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민초인 백성들은 본토에서 몽고의 갖은 수모와 수탈을 견뎌야 했던 쓰라린 기억을 되살려 볼 때 역사는 흘렀지만 민초는 언제나 고통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진리(?)를 알게되어 씁쓸하기 그지없다.
민초는 그 전란 중 고통을 받는 가운데서도 강화정부에게 각종 세금 등을 꼬박꼬박 냈고 몽고 군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과 수난을 당하게 되니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으며 과연 그네들에게는 나라를 위한다는 기본이 있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성이 없는 나라가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있었으며 권력 기반을 유지하고자 민초들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친 나라의 권력층이 과연 잘 되었던가 한번 생각해 볼일이다. 39년간의 대몽 항쟁을 통해 고려는 이루 헤아릴 수없이 피폐되었으며 더 나아가 고려가 점진적으로 붕괴되는 길을 걷게 된다.
광성보 안해루
조선시대의 양대 호란 또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묘호란 때에는 임금과 권력층이 신속히 강화도로 피해 별 탈이 없었으나 병자호란 때에는 피난 시기를 놓쳐 결국 인조가 청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굴욕의 역사를 쓰게 되는 것이다. 또 호란 후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볼모로 잡아 조선을 꼼짝 못하게 하는 등 강화도는 역대 왕조의 몽진 및 피난처로서 톡톡한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청나라에게 볼모로 잡혀갔던 시절을 생각하며 북벌 계획을 세우게 되고 강화도 또한 진, 보, 돈대 등을 정비하여 강화 해변을 요새화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손돌목 돈대에서 바라 본 용두 돈대
근세에 프랑스는 신부 학살을 기회로 삼아 강화도를 침공하여 민간인을 살상하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 및 외규장각의 중요 도서를 약탈해 가는 만행을 저지르니 이것이 바로 병인양요이다. 뒤이어 미국은 우리 나라 개항을 요구하며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마침내 일본은 운요호 사건으로 근세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규)를 맺게 되니 조선은 주권은 있으되 그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식민지 국가로 전락하게 되어 버렸다.
이처럼 강화는 "항전의 본거지""왕조의 피난처""서구 열강의 침략지"로서 그 역할을 하며 마침내 우리 주권을 일본에게 내어주는 치욕적인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IMF시대에 살았던 우리로서는 IMF가 무력은 아니지만 서양의 경제를 무기로 우리를 침략하여 경제식민지로 만들려던 무서운 음모가 숨어 있음을 강화 침탈의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한다. 시대만 달라졌고 그 사용하는 도구만 달라졌을 뿐 그들은 역사 속에서도 우리에게 원하든 원치 않았던 무조건 침략을 해 왔듯이 자국의 이익 앞에서는 정의, 진리도 무시해 버리는 힘의 논리를 우리는 똑똑히 이 역사의 현장에서 느끼고 배워야 한다.
강화도에서 우리는 옛날의 역사가 아닌 지금의 역사를 배우고 있으며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잘 살 수 있는지를 발견해 내야만 한다.
일사천리로 복원하는 시멘트 공화국
강화도에 들어서면서 강화역사관 안에 있는 갑곶돈을 돌아보면서 답사여행객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우리는 일제의 문화재 보수 실력을 그대로 물려받아 문화재를 가급적이면 빠른 시간 내에 손쉽게 복원하는데 길들여지게 됐다. 우선 우리 나라 석탑의 으뜸 기본양식이라고 하는 미륵사지 서탑의 복원을 보면 일제는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아 다시는 복원하지 못하도록 한 흉물스러움을 익히 보아왔다.
여기에서 웬 미륵사지 이야기... 하는 이도 있을 게다. 이는 강화도 유적지 복원이 미륵사지 서탑 복원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군사정권 하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런 말은 한다. "그래도 이렇게 복원해 놓은 게 어딥니까? 말이 복원이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맞는 말이다. 허긴 내가 아무리 시멘트 공화국 운운해도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됐으며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없는 한 시멘트 보수 문화는 계속될 것이다. 광성보에 가보면 옛날의 시설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보도 블럭과 성곽 사이사이의 시멘트 모르타르 등을 볼 때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복원문화재라 하더라도 그 시대의 시설에 가깝게 만든다면 그를 보고 공부하며 답사하는 이들에게 많은 느낌을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길도 보도 블럭보다는 흙이나 모래를 깔아 옛 느낌을 주고 성곽도 번듯번듯함보다는 옛것에 가깝게 복원함으로서 비로소 우리는 그를 보는 느낌 또한 달라지지 않을까?.
어설픈 복원은 문화재를 원래의 모습으로 돌릴 수 없는 과오를 범하기 때문에...
서양문화와 우리문화의 기막힌 조화
성공회강화성당 솟을대문
이번 강화답사에서 감명 깊게 느낀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건물이다. 성공회강화성당은 개화기 우리 나라에 이국 종교가 들어오면서 이곳에 터에 성당을 세운 것인데 이 건물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높은 십자가에 서양식으로 지은 성당이나 교회 건물이 아니고 철저하게 우리 고유의 건축 양식과 닮아 있다는 점이다. 팔작 지붕의 위의 십자가만 빼면 여느 절 집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닮아 있다. 게다가 성당의 주 출입문은 솟을대문을 닮아 있고 종각에는 범종과 같은 종이 건물의 현판에는 "天主聖殿"이란 글씨가 기둥에는 절 집의 주련과 같은 글귀가 있어 여기가 절 집인지 성당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천주 성전(여느 절 집과 같이 기둥에 주련이 인상적이다)
성공회강화성당을 보면서 그들이 이 나라에 들어와서 포교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 문화와 어우러지면서 일반 민중에게 거부감이 없도록 배려를 했는가 하는 점이 돋보인다. 우리 고유의 문화는 문화로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잘못된 신앙 인식을 보면서 한 번 이 시점에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세계문화유산 선사시대 고인돌
무게만도 50톤이 넘는 북방식 고인돌
하점면 부근리에 가면 선사시대 북방식 고인돌 1기가 있다. 남한 최대 규모의 고인돌로서 강화도 일대에는 수십 여 기의 고인돌이 산재되어 있는데 북방식,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어 주로 남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고창 아산면 상갑리 고인돌군과 비교해 볼 때 문화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우선 부근리 고인돌은 그 크기 면에서 다른 그것과 비교되지 않으며 올려진 갑석(덮개돌)의 무게가 약50톤에 달하는 등 대규모의 지석묘로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강화도는 선사시대의 청동기문화가 번성하였는데 이는 한강 하구에 자리잡은 기름진 땅과 풍부한 어족 자원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천혜의 지역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동막 해수욕장
청동기 유물이 많이 출토되는 지역으로 동막리를 들 수 있는데 함허동천에서 해안 길을 따라 포장도로를 따라 계속가면 소나무 밭을 끼고 있는 해수욕장과 민박촌을 형성하여 모꼬지나 단체야유회 장소로 애용되고 있다.
다행히 우리 나라의 고인돌군(고창 및 강화도)은 이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게 되었다니 환영할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