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건너 그리운 고향
고향이란?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 그리고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으로 언제든지 찾아가서 안기고 싶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한 곳일 게다. 그런데 세상살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을 찾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저 하늘 저산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그리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이라고 부르는 한 맺힌 노래 가락이 흘러 다닌다.
혹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고향이라고 내세워 찾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발길이 닿는 데로 부평초같이 흘러 다니다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면 고향이지’라고 애써 그리움을 감추려하지만, 어머니의 젖 냄새 같은 고향의 그리움을 잊을 수 없어 술잔을 기우리며 푸념을 하다가 ♫ 꿈에 본 내 고향을 참 아 못 잊어…라는 망향가로 울컥 치솟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고향, 정녕 그리운 곳, 가고픈 곳, 불러보고 싶은 아련한 노래,♫먼 산에 진달래 울긋불긋 피었고 보리밭 종달새 우지-우지 노래하면 아득한 저산 넘어 고향집 그리워라 버들피리 소리 나는 고향집 그리워라♬ 새처럼 훨훨 날아서 그 시절 고향의 봄 동산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고향을 찾아갈 수 없는 나그네에게 꽃피는 봄이 가고 풀 냄새 물씬 나는 여름이 가면,♫깊어가는 가을 밤에 낯 서른 타향에 외로운 그지없이 나 홀로 서러워 그리워라 나 살던 곳 사랑하는 부모형제 꿈길에도 방황하는 내정든 옛 고향♬이라는 美國 민요가 하모니카로 불러지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게는 바다 건너에 첫 번째 고향이 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던 해 태어나 어린 유년시절을 보낸 日本-고베가 안태고향(安胎故鄕)이다. 조국이 광복되어 귀국 할 때까지 십여 년을 살면서 正一이 형님, 正順이 누나와 나 建次 누이동생 雪子가 태어나고 자라던 곳이다. 따뜻한 항구도시라 푸른 바다는 물론 복숭아 살구 등 온갖 과일들이 풍성하고 산에서 맑게 흘러내리는 작은 시냇물에는 여러 가지 물고기와 참게가 많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천으로 열린 산딸기를 따먹으며 매미와 방아깨비를 잡고 밤에는 마당에 자리를 펴고 반딧불노래를 부르며 어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다.
어머니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옛날 어떤 외딴 시골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외롭게 살고 있었단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고 할머니는 냇가에 나가 빨래를 하는데 위쪽에서 커다란 복숭아 한 개가 할머니가 빨래를 하고 있는 앞으로 둥실둥실 떠내려 왔단다. 할머니는 이상한 복숭아를 건져다가 방에 잘 두었는데, 어느 날 밤 복숭아가 쪼개지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 귀여운 남자 아기가 방긋 웃으며 나왔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깜짝 놀라 기절 할 번했지만, 아기가 너무 사랑스러워 정성껏 잘 키우게 되었단다. 그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청년이 되었는데 힘이 얼마나세고 영리하여 유명한 장군이 되었단다.”라는 일본 설화 <모모다로상>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모진 삶을 살면서 마음으로만 그리워하는 사이에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반세기가 훌쩍 가버리고 가족들은 한분 한분씩 자리를 비우고 있다. 청파동에서 공부를 할 때 일본 상담학 전문가인 다나까 노브오 목사님의 강의를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95년 여름 서울노회 최영완 목사님이 주선하여 다나까 목사님의 초청으로 50년 만에 태어났던 땅을 다시 밟게 되었다. 일본에 대하여서는 사람마다 경우에 따라 감정이 다르고 특히 우리민족의 정서에는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인간은 만사가 人之常情이요. 더욱이 牧師로서 나는 일본에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숙모 그리고 작은 외조부님 댁과 함께 살면서 태어나고 정들어 살던 곳이라 잊을 수 없는 그리운 곳이다.
이제는 일본에서 같이 사셨던 윗대어른들과 거기서 태어났던 누이동생까지 세상을 떠나고, 팔순에 접어든 손재순 작은 어머니와 칠순이 넘은 형님 그리고 누나와 나도 그 뒤를 따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작은 어머니가 우리 최진열 작은 아버지와 결혼하여 같이 살던 때가 눈에 선하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가족이 모여 온천 나들이를 하면서 케이블카를 타고 또 어떤 때는 어머니와 어린 우리들만 전철을 타고 교토 작은 외할아버지 댁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오기도 했는데, 먼 외국 땅에서 외롭게 결혼을 한 작은 어머니는 늘 나를 데리고 냇가로 들로 놀러 다니셨다.
오사카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교토에 왔다. 어머니랑 외할아버지 댁에 자주 다녔던 옛날을 회상하면서 그때 가족들과 같이 나들이 했을 때처럼, 오늘은 동행중인 목사님들과 오사카성과 고궁을 구경했다. 祖國 광복 후 서둘러 귀국하셨던 작은 외할아버지 내외분도 벌써 저세상으로 가시고 일본에서 나보다 한 살 먼저 태어난 문홍희 아재를 일전에 만났다. 아재는 분명 한국 사람이면서도 어쩌면 일본사람처럼 우직하게 전남 장흥에서 부모님의 고향땅을 지키면서 농사를 짓고 계시는데, 이제는 60년 전 교토의 옛날 집과 선친이 경영했던 비단공장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갈참이라고 했다.
우리일행은 교토관광을 마치고 고베신학교를 방문하게 되어 뜻밖에 고베를 가볼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의 체취와 나의 태(胎)가 묻힌 땅을 밟게 되어 기쁨이 벅차올라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동행중인 최영완 원효식 김상록 김우진 우상배 이태환 황형식 목사님께서 내 사정을 알고 잘 다녀오라하면서 당신들은 먼저 오사카로 갔다. 한나절 시간을 내어 희미한되살리며
어머님이 늘 들려주셨던 이야기를 정리하여 내가 태어났던 동네를 찾으려 나섰다. 일본 택시기사들이 친절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우선 고베 역전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이가 많은 택시기사를 찾았더니 거리를 친절하게 안내해 주면서 히라노마찌의 구수다니라는 곳에 내려주었다.
고베는 일본에서도 살기 좋은 곳이다. 우리나라 부산이나 마산처럼 따뜻한 남쪽 항구도시다. 지금은 新시가지도 생겼다고 하는데 내가 살았던 동네는 산 밑에 절(神祠)이 있는 舊시가지다. 그 옛날 어머니 손을 잡고 다녔던 절에도 가보니 예전 그대로다. 그리고 동네 가운데 있는 노인정을 찾아가 어머님 연배의 할머니들께 인사를 드리고 내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내가 태어나던 무렵부터 지금껏 이곳에서 살고계신 다는 분들이 가족을 만난 듯 손을 털썩 잡아주며 잘 왔다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부근에 있는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서울에 계시는 어머님께 수화기를 들었다. “어머니 제가 지금 고베 히라노마찌의 구수다니에 와 있어요. 옛날 제가 태어나고 우리가 살랐던 곳에 와 있어요. 뒷산아래 있는 절도 그대로 있고요. 동네가 조금은 변했지만 예전대로 있는 집들도 많고요. 우리가 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동네에서 사시는 어머니 연세의 할머니들이 반겨주고 있어요.”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몇 말씀하시다 목이 메어 울먹이시는 것 같아 나도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내가 日本에 다녀온 후에도 또 십년 세월이 흘렀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숙부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늘 돌봐주고 같이 놀았던 두 살 아래 누이 유끼꼬(雪子)가 대구에서 살다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일찍 떠나갔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우리가족은 한국사회에 힘들게 적응하면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 육이오 전쟁을 심하게 겪고 몸과 마음에 얼이 들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받아드렸기에 한 많은 세상에서 힘들게 살다가 먼저 떠나간 가족들이 이 세상 그 어느 곳과도 비길 수 없는 낙원에서 남은 가족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으니 위로가 된다. 언젠가 우리 남은 형제자매와 나도 주님이 부르시면 바다건너가 아닌 영원한 본향으로 달려가 주님을 뵙고, 보고 싶은 가족들도 만나리라 믿으며…
2006년 2월 20일 (月) 水原샘내교회 (순담) 崔 建 次 牧師
1943년 일본 교토 외가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