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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4. 05. 16
■ 양평군 용문면의 마을 유례
●상금곡리
◈금당실
◇금당곡
(金塘谷) 혹은 금곡(金谷)이라고도 한다. 甘泉 문씨가 이곳을 개척하였다 하는데 그의 사위인 朴從鱗과 邊應寧이 정착하여 지형을 피니 蓮花浮水形이라 하여 연못을 상징해서 金塘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름난 풍수 南師古가 말하기를 이 마을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음이 아쉽다고 하여 그 뒤부터 "금당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생겼다고 하나 또한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 중의 하나로 정감록에는 "금당실은 우리나라 十勝之地의 하나로 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해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용문면의 요지가 돼 면사무소와 파출소, 우체국, 초.중학교, 농협 등 기관들이 터를 잡고 있다.
용문중학교와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800m나 뻗어있는 수령 200년이 넘는 송림들은 방풍림 역할을 해 마을의 혼풍을 막아 수백년 세월 온화한 전통을 이어지게 하고 있다.
또 면사무소 앞에는 300년된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어 이 마을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으며 면민들의 안식처와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예천군은 금당실 마을에 고가옥과 도로, 담장을 보수하여 전통적인 옛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다.
◈오미봉
금당실 뒤에 있는 산으로 높이 200m이며 매우 수려하다.
다섯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봉우리라는 뜻인데 五美란 雅眉半月, 柳田暮煙, 仙洞歸雲, 龍寺曉鍾, 竹林淸風을 말한다.
◈동지미(동지뫼기) : 오미봉 동쪽에 있는 산이다.
◈명구바우(鳴狗바우)
오미봉에 있는 바위인데 금당실 앞산이 猛虎出林形이고 뒷산 바위형이 鳴狗形 이어서 범이 나타나면 개가 운다고 하여 매사에 조심하
라는 교훈을 준다.
◈양주대감 집터
전 법무대신 李裕寅이 양주목사로 있을 때 피난하기 위하여 여기에 아흔 아홉 칸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팔고 이사해서 지금
은 터와 담장 일부만 남아 있다.
◈느티나무
면사무소 앞에 있는 높이 21m 둘레 7m의 나무로 1830년대에 원주인 邊연錫이 심은 나무에 매년 정월 보름날 洞祭를 지내고 있다.
● 하금곡리
◈여각(閭閣)
하금곡리의 가장 큰 마을로, 醴泉人 權國柱의 아내 함양박씨의 열녀각이 마을 앞에 있다하여 여각 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용두(龍頭) :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지형에서 나온 이름이다.
◈남짝 : 여각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마 : 여각 북쪽에 새로 된 마을로 현재는 龍華寺가 자리잡고 있다.
◈버들밭(柳田, 큰마)
여각 서쪽 들에 있는 마을로 李節이 개척할 때 마을 앞에 버드나무 밭이 있어 버드나무 가지에 꾀꼬리가 둥지를튼 유지앵소형(柳枝鶯
巢) 形局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인산(仁山, 개금재, 계금자, 게금재)
여각 북쪽에 있는 마을로 게금(개아)이 많이 있었으며 또한 仁山書院이 있었다.
◈오룡골(五龍)
하금곡에 있는 집터로서 醴泉人 權善의 다섯 아들이 태어난 곳이다.
그 다섯 아들은 權五行(文科,正郞), 五紀(文科, 左通禮), 五福(文科,校理), 五倫(進士), 五常(進士,參奉)이다.
◈龍華寺
1973년에 김인식이 새마동내에 안으로 이주하여 1980년에 寺刹을 신축하였다.
●성현리
◈복천(福泉. 福田)
성현리에서 두 번째 생긴 마을이다. 왜고개 북쪽에 있다.
高麗때 福泉寺가 있었고 鄭蘭茂, 丁允祐가 차례로 개척한 마을이다.
◈중리(中里, 중마, 지우실)
성현리에서 제일 먼저 생겼고 제일 큰 마을로 紙鳩谷面(渚古面)의 所在地여서 中里라고 한다.
1914년에 폐지되었다.
◈천내( 川內,省岩)
왜고개 동쪽에 있는 마을로, 龍門川 안쪽이 된다.
마을 앞길에 큰 바위가 있어 다니기에 不便하므로 살피고 다니라는 뜻에서 省岩이라 했다고 한다.
1580년경 韓漂가 이 마을을 開拓할 때 當時 마을 가운데 냇물이 흘러서 川內라 하였다 한다.
◈왜고개(瓦峴,애고개)
중마 동쪽 왜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에게 쫓겨나 아이를 업고 떠나 가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하여 애고개라
하고 기와공장이 있었다.
◈삼귀정터
福泉 서북쪽 냇가에 있는 터이다.
더미가 셋이 있는데, 흙으로 된 둘은 들 가운데 있고, 돌로 된 하나는 냇가에 있어서, 마치삼태성처럼 되었다.
돌더미 위에 정자를 짓고 삼귀정이라 하였는데, 장마에 떠내려가서 그 터만 남아 있다.
◈병암정(屛巖亭)
정자들 동쪽에 있는 亭子로 屛風처럼 생긴 큰 바위 위에 있는데 뒤에는 푸른 山이 솟아 있고 밑에는 연못이 있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
다. 醴泉權氏의 亭子이다.
● 덕신리(德新里)
◈덕암(德岩, 덤바우)
덕신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全州李氏들이 터를 닦았다.
이 마을 서쪽에 있는 큰 바위 밑에는 굴이 하나 있었는데, 여기는 도둑들의 은거지가 되어 이웃 마을에 피해가 심해져 그 바위에 道德岩
이라 크게 새겨 놓고부터는 도둑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바위의 이름은 도둑바위에서 德岩으로 바뀌게 되었고 마을 이름도 德岩이 되었다.
◈상강골(생강골, 光洞, 生光洞)
덕암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潘南人 박기원이 17세기 후반에 개척하였다.
陽地바른 곳이므로 生光골이라 하였다.
◈대골(댓골, 竹谷, 꼬꼬댓골, 宅谷, 新里)
덕암 북쪽 골짜기에 새로 된 마을로 대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앞산이 닭의 둥지 모습을 하여 닭이 알을 낳고 내려앉은 형국이라 한다.
또한 집터가 좋다고도 한다.
◈고사리골 : 덕암 뒤에 있는 골짜기인데 고사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 방송리(芳松里)
◈개방(開芳, 개뱅이, 개배이)
盤松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丙子胡亂(1636) 後 金爾甲이, 本來 살던 盤松에서 이곳에 와 마을을 開拓하면서, 先代 金주의 忠節이 활
짝 꽃피라고 붙임 이름이라 한다.
◈반송(盤松, 반소이, 陽地마, 陽地村, 陰地마, 陰地村)
芳松里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自然部落이 많아 열두 반소이라고도 하는데 陽地마,陰地마가 대표적이다.
마을 앞에 여러 그루의 盤松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新基(새터)
독적골 남서쪽에 있는 새로된 마을인데 방송리에서 가장 늦게 이루어졌다.
◈독적골(독짓골,독자골)
盤松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에 商店하나가 獨占하여 원래 獨占골이라 하였다.
손동이란 風水가 이 마을 地形이 항아리 모습이므로 항아리는 목이 가장 소중하니 그 목을 다치지 말라는 말에 따라 항아리 목 부분에 該
當하는 陰地마 뒷고개를 소중히 여긴다고 한다.
◈당대(塘頭,당뒤)
盤松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연못이 있었으므로 蓮塘 뒤의 마을이고, 뒷산이 부처등이기 때문에 佛堂 뒷마을이기도 하다.
● 노사리(盧沙里)
◈가실(佳谷,佳實)
國師峰 남서쪽, 沙羅 대방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丙子胡亂 뒤에 의성 김씨가 開拓하였다.
남쪽만 터지고 동남북쪽은 높고 낮은 山들로 둘러싸인 盆地이다. 온갖 山果가 豊盛하여 佳實이라고 한다.
◈沙羅(沙里,새랄)
노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1675년에 江陵 崔氏가 開拓하여 新基라는 뜻의 새랄이라고 했다.
이웃 마을 佳實과는 民俗부터가 다르다. 山中의 마을이면서 洞神祭가 없는 것이 특색이고 平海黃氏의 集性村이다.
◈산작골(새마,南山)
佳實에서 보면 이 마을 앞山이 남쪽에 있으며 산이 낮고 좁은 골에 1850년경 농토를 라 생긴 마을로서 1987년부터 한집도 없다.
● 구계리(九溪里)
◈九溪(九溪里, 구려울, 구렐, 구럴, 구걸, 구내, 구렬, 구열)
이 마을 앞 개천이 아홉 여울로 되었다 하여 구려울, 줄여서 구렬, 또는 九溪라 한다.
또 陽地마,陰地마로 가르기도 한다. 이 마을 집들이 모두 반듯반듯하여 옛날부터 '구렐가서 집 자랑하지 말고, 금당실 가서 옷자랑 하지
마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주막거리(주막걸, 거리마, 溪村)
구렬 남쪽에 있는 마을로 1830년대 酒幕을 짓고부터 마을이 形成되었다 하나, 현재는 구렬의 마을이 커짐에 따라 마을의 區分이 없어
져 그 位置도 推定하기 힘들게 되었다.
◈흠거리(홍거리, 흠골)
구렬 앞들에 물을 대기 위해 통나무로 만든 홈통을 걸어 두었던 곳에 마을이 생기니 여기를 흠거리 또는 홍거리라 한다.
● 죽림리(竹林里 )
◈대수(대숲, 竹沼, 竹所竹林)
醴泉權氏가 世居하는 마을인데, 마을 中央에는 울릉도에서 15世紀 중엽에 옮겨 왔다는 香나무가 있고, 예천권씨 초간 종가 별당도 있
다.
◈야당(野塘)
대수 동쪽들에 있는 마을로 들에 있는 金塘室이란 뜻이다.
◈草澗精舍(亭)
죽림리 353번지에 있는 亭子로, 큰 盤石위에 亭子 6間, 藏板閣 4間이 있으며, 앞에 큰 내가 돌아 흐르고 소나무 숲이 울창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 직 리(直 里)
◈곧은골(고등골, 渚西谷, 直谷, 直洞)
곧은 골짜기가 되므로 곧은골, 고등골, 또는 直谷이라 하였는데 예천임씨의 集性村이다.
이 마을은 광주 盧氏가 미리 터를 잡아 渚西谷이라 불렀는데 林應樂이 다시 개척할 때 지형을 살피니 마을로 들어오는 골짜기가 매우 곧
고 바르므로 고든골이라하다 1914년부터 直洞으로 표기했다.
● 두천리(杜川里)
◈뒤낫(디낫,니내,杜川,仁川,仁谷洞)
두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寧越 辛氏가 開拓했다고 하나 지금은 沙夫里에서 移居한 慶州孫氏 集性村이다.
杜雲禪師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이 마을에 내(川)가 흐르고 있다.
◈水項(수리목, 수루목, 물목)
醴泉 林氏가 이 마을을 開拓할 때는 물이 貴했으나 將次 물이 이 동네를 넘어 갈 것이라는 뜻으로 물목(水項)이라 이름하였는데, 過然
1952년 마을 서쪽에 雲岩池가 建設되었다.
◈용바우(龍岩, 굼바우, 궁바우)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 크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龍이 또아리 틀던 곳이라 하여 龍바우라 일컫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이에 由來한
다.
◈국사봉(國師峰 )
뒤낫의 뒷 山(732m)인데, 杜川里와 柳川面 麻川里, 聞慶郡 東魯面과의 境界地點이다.
이곳에 明堂 墓터가 있으나 墓를 쓰면 비가 오지 않는다 하여 旱害 때 祈雨祭를 지냈다.
● 사부리(沙夫里)
◈憂忘(憂忘골)
西倉 北西쪽에 있는 마을로, 順興 安氏, 慶州 崔氏가 次例로 들어와서,地形이 오망하게 생겨서 憂忘골이라 하였다 한다.
또 壬辰倭亂 때 安 총각이 崔小姐와 결혼한 이튼날 義兵으로 가서 消息이 없자 崔小姐는 기다림에 지쳐 죽으니, 그녀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고 이제는 근심을 잊으라는 뜻으로 憂忘이라는 마을 이름을 삼았다고도 한다.
◈西倉(새마)
예날 民倉 國倉이 있던 마을로 倉이 이 마을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西倉이라 했는데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여 서창이 되었다고 한다.
◈元沙夫(沙夫領, 沙夫, 사부랭이, 仙遊洞)
사부리의 元마을인데 壬辰倭亂 때 慶州 金氏와 全州 李氏가 들어와 마을이 열렸다고 한다.
그들은 마을 앞의 큰 바위에 三峰山下仙遊洞의 七字를 새기고 仙遊洞이라 하다가 1900年頃 모래가 뜬다는 所聞이 있어 沙夫洞이라
하였다.
◈知道室(知道谷)
지도곡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 뒤의 佛塘골에는 知道庵(지도암)이란 암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을 이름을 지도실이라 지었다고 한다.
또 쥐도새도 모르게 피난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마을 앞에는 盤松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는 壬辰倭亂때名將 李如松이 중국에서 벼루 속에 솔씨를 넣어 와서 심은 나무라고 하는
데, 지금이 마을의 洞神나무라고 한다. 현재는 기념물(제111호)로 지정 되어있다.
● 내지리(內地里)
◈구점(店里, 店地, 博雲堂, 博雲데이, 白雲堂)
둔지방 서쪽 雲岩池의 못뚝 아래에 있는 마을로, 그릇점이 있어서 店里, 店地라고도 하고, 17世紀 後半에 어떤스님이 두 사람이 이곳에
博雲堂이란 道場을 짓고 마을을 開拓하였다 하여 博雲堂이라고도 하고, 또 朴雲堂이란이가 책을 읽던 곳이라 하여 博雲堂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洞口
龍門寺 입구에 있는 마을이며 이 고장 杜川에서 태어난 杜雲禪師가 처음에 이 마을 뒤에 杜雲庵이란 절을 지었다.
高麗 太祖가 杜雲禪師를 만나러 올 때 靑龍 두 마리가 洞口에서 引導한 것을 記念하여 王命으로 뒷 山을 龍門山,절을 龍門寺로 고쳐
부르고, 절 앞 一住門 옆에 있는 龍못은 그 龍이 살던 못이라 전한다.
◈屯地方(屯地坊, 屯地房, 둔지뱅이, 店地)
새마 북쪽에 있는 마을로, 高麗 太祖가 杜雲禪師를 만나러 올 때, 이 곳에 軍士를 駐屯시킨 곳이라 하여 屯地라 부른 다고도하고, 또 屯
士를 두고 屯田兵을 토착시켰던 마을이라 하여 屯田兵里, 또는 屯地兵里라 하다가 屯地坊이 되었다고도 한다.
◈새마(新村)
내지리 남단에 새로된 마을로 내지리에서 가장 크다. 둔지방에 살던 金文龍 등이 1930年代에 이 곳 농장을 따라 내려 와서 새로 이룬마
을이다. 現在 이 마을은 各 姓氏들이 모여와 各姓받이 마을로 알려져 있다.
◈枾木실(枾木谷, 柴木洞, 枾木實, 枾木室, 枾木)
안골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감나무가 많이 있다. 15世紀 後半에 趙氏가 이 마을을 開拓했다고 하는데, 다른 곳은 산짐승이 무서워
入山을 못하고 이 곳만은 山이 낮아 들어왔다고 한다. 땔나무가 많아 柴木室이라 했는데 1830年代부터 감이 많이 나서 枾木室로 改稱
했다고 한다.
◈안골(內洞)
둔지방이나 범드미 안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洞口에 살던 사람들이 農土를 따라 이곳으로 들어왔다.
● 원류리(院流里)
◈새터(새터마, 新基, 草澗亭)
원류리의 가장 中心되는 마을로서, 19世紀 後半에 新院에 살던 사람들이 옮겨왔다고 한다.
앞냇가에 草澗亭(죽림리구역)이 있다. 이 마을은 그냥 초간정이라고도 한다.
◈팔찌기(八積, 八賊)
문촌 동쪽에 여덟 사람의 부자가 살고 있어 여덟 노적가래가 있었으므로 팔적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하고, 도둑골에 8명의 도둑이 있었다
고 하고 팔적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허릿골(흐릿골, 허리골, 希夷, 希里, 流里, 希弟, 本流)
원류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이 마을 사람들은 鄭鑑錄의 十勝之地가 바로 여기라고 主張한다.
한길에서 안보이는 마을이므로 피난처로 알맞다. 朝鮮時代에 이 마을 이름을 따서 流里面이 되었고, 流里面 所在地이었다.
마을 뒤에 방아 살개처럼 생긴 兄弟峰이 있고 그 峰의 낮은 목의 地形이 허리처럼 생겼다고 허릿골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문촌(文村)
허리골 남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로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전에 甘泉 文氏가 開拓하여 文氏의 마을이란 뜻이라고 하나 지금은 모두 떠
나고 各性村이 되었다.
◈鳴犬地(面境地, 민경지)
민경지라고도 한다. 면의 경계선 지점이란 뜻이었는데 변음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용문면이 流里面과 諸古面으로 되어 있을때, 이 마을이 경계지점이었다.
이 곳 지형이 개처럼 생겼다고도 하고 또 앞산에는 猛虎出林形의 明堂이 있다고 한다.
● 선리(仙 里)
◈두들마(邱村, 邱田, 神仙골, 仙洞, 아랫마, 下村)
구릉지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뒤 바둑판처럼 생긴 神仙바위가 있는데 여기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며 놀았다는 傳說이 있어 선동이란 이
름이 생기게 되었다 한다.
◈聖主골(聖主洞, 큰마, 聖谷)
邱村 동쪽에 있는 마을로, 선리에서 제일 크며, 鄭沃이 마을을 開拓할 때 聖君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聖主골이라 하였다 한다.
뒤에 道德峰이 있다.
◈한밭(大田)
兄弟峰 아래에 있는 마을로, 慶州 鄭氏 集性村이다. 큰 밭 자리에 터를 잡았다고 해서 한밭이라 한다.
◈새마(샘마, 샛마, 新村)
두둘마와 한밭 사이에 새로 된 마을인데 어디든 파면 물이 나온다고 샘마라 부르다가 두들마와 한밭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샛마, 새마
라고 부른다고 한다.
◈城安(城內)
어림서의 안 마을이란 뜻으로 성비라고도 한다. 어림성 醴泉城과 豊基城이 서로 등을 대고 있는 土城이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군 남후면에 있던 공민왕이 친히 임석하여 쌓은 성이란 뜻이라 하나 삼국사기에는 高句麗 동천왕이 여기까지 왔
었다고 적혀 있다. 강원도 등지에서 이주한 各性이 살고 있다가 모두 떠나고 현재는 양수발전소가 조성중에 있다.
◈절골(寺谷)
한밭 뒤 靑龍寺 앞뒤에 있는 마을이다. 청용사의 자리는 큰 호수였는데 어느해 여승이 正月 초하룻날 여기에서 靑龍 두 마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靑龍寺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 능천리(能川里)
◈방두들(안방두들, 內芳邱)
능내 서쪽 둔덕에 있는 마을로서1700年頃 咸陽 朴氏가 開拓 하였다.아름다운 둔덕에 있다하여 芳邱라 하였다.
그 뒤, 이 마의 들머리에 또 마을이 생기자 이 마을을 內芳邱, 새로 생긴 마을을 外芳邱라 하였다.
◈外芳邱
1830年頃 이룩된, 방두들의 바깥 마을이란 뜻이다.
◈웃능내(上能川, 上能內, 上能, 書堂골)
능내 서쪽 둔덕에 있는 마을로서1700年頃 咸陽 朴氏가 開拓 하였다. 아름다운 둔덕에 있다하여 芳邱라 하였다.
그 뒤, 이 마을의 들머리에 또 마을이 생기자 이 마을을 內芳邱, 새로 생긴 마을을 外芳邱라 하였다.
◈아릇마(아랫마, 아래能內, 河能, 능내, 能川)
元來 陵內였으나 잘못되어 能川이 되었고, 웃능내보다 늦게(1850年頃)이루어졌으나 지금은 能川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 제곡리(渚谷里)
◈渚谷(小渚谷, 藷谷, 맏일, 작은맛질)
큰맛질(大渚里)의 西쪽에 있는 이 마을은 큰 맛질과 함께 예부터'금당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있을 만큼 크고 짜임새 있는 마을이었다 하
며, 처음 마을을 開拓한 權儀가 3兄弟 中 맏이어서 맏길(맛질)이라 하였다 한다. 또 높은 산이 四方으로 애워싼 가운데에 큰 들이 열렸으
므로 맏일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양갓(兩岐)
1910年頃 仁同 張氏가 開拓하였고, 곧이어 義城人 金顯模(1881∼ ?)가 보문면에서 이곳에 移居하여 世居하고 있다.
뒷산 六女峰에서 내려 보면 길이 탕건같이 생겼고 길 때문에 나눠진 마을이 두 개의 갓과 같으므로 양갓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는 마을이 산기슭에 있어서 생김새가 기다랗고, 한쪽 구석에 位置하여 讓
岐라고도 한다.
◈野翁亭(야옹정)
작은맛질 西南쪽에 있는 亭子로 縣監 權審言이 權儀의 杖履所에 1566年에 세웠다.
처마끝 기와에 글자를 넣었다.
◈六女峰沼(沼)
양갓 南쪽 육녀봉 아래에 있는 沼로서, 산세가 金盤形이어서 六仙女가 沐浴하고 갔다고 한다.
● 대제리(大渚里)
◈큰맛질(大渚)
작은 맛질과 내를 사이에 두고 東쪽에 이뤄진 마을이다.
이 곳에 옛날 마(藷)가 많이 生産되었기 때문에 藷谷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管衙에서 誤記하여 渚谷이라 하다가 1914年에 大渚라고
하였다.
◈주막걸(주막거리, 酒幕街)
작은 맛질과 큰맛질 사이의 큰 길가에 있는 마을이며 이 곳을 지나 上里의 저수재를 넘어 서울로 가는 나그네들에게 寢食의 편의를 제공
하던 길가의 마을이다. 옛날에 시장이 있어서 장터걸 이라고도 한다. 해마다 정월에 서낭제를 지낸 뒤 그 다음날 여기서 맛질골 열두 마
을 젊은이들이 모여서 줄다리기와 별신굿을 하던 곳이라 한다.
◈민트리고개(민트리재, 밑에고개, 문재, 文嶺, 文峙)
큰 맛질 東北쪽에 있는 고개로 감천면 천향리 석밭으로 넘어간다. 科擧보러 漢陽으로 가는 선비들이 미트리(짚신)를 많이 가지고 이 고
개를 넘었다 한다.
● 하학리(下鶴里)
◈텃골(基洞, 基谷, 初洞, 下里)
하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데, 大渚里와 더불어 큰맛질이라고 한다.
이 텃골은 맛질에서 가장 오래된 첫골이기도 하고 맛질의 본터라고도 한다.
맛질의 세 서낭 중에서 어미서낭당이 여기에 있다.
◈白鶴(재달, 才達, 煮茶谷)
텃골 南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白鶴山 밑이 되는데, 높은 재(고개)가 있다.
이곳 近處(예천읍 생천리)의 鼎山書院에서 工夫하던 선비들이 이곳의 배리산을 白鶴이 깃을 접고 막 둥지를 내려 앉는 모습이라 하여
白鶴이라 불렀다 한다.
◈石立(거리마, 돌신거리, 돌선끝)
텃골 南西쪽 큰길 가에 있는 마을로 큰 돌이 서 있다. 石立은 1960年代부터 불리어졌다.
元來 이 마을 앞에 中洗거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1886年 丙寅年大洪水로 떠내려가고 石立으로 옮겼다고 한다.
◈음지마(陰達마, 아랫맛질)
石立 北쪽 陰達쪽에 있는 마을인데 맛질의 아랫 마을이 된다.
北向이고 뒷산이 높아 햇빛이 잘 안드는 곳에 사는 곳이지만 衣食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明堂 마을이다.
◈기애집골(지애집골, 기아집골)
제달골의 막바지에 있는 마을로서 기와지붕인 金氏들 齋舍가 있었으므로 기애집골이라고 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