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 06. 10
■ 남인「조율이시」과 서인「홍동백서」의 가례 법
●우리나라 가례(家禮) 근원의 약사(略史)
선사시대로부터 공자(孔子 : 522∼479BC)를 거처 주자(朱子 : 1130∼1200)에 이르기 까지 의례에 관하여 구전(口傳)과 관습 체계화
되지 않는 예서(禮書)를 수집 집대성하여 편찬한 책이 주자가례(朱子家禮)이다.
저자는 주자가 아닌 명(明) 나라의 구준(丘濬)이다.
우리나라 개국(開國)초부터 내려오던 민속신앙의 관습과 퇴계『退溪 : 1501(연산군 7)∼1570(선조 3)』와 율곡『栗谷 : 1536(중종 31)
∼1584(선조 17)』에 이르기 까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간으로 우리나라 가례의 근본이념을 정립(定立) 실시 해왔다.
그 뒤 퇴계문인 중심이 된 남인(南人 : 영남학파)과 율곡문인이 중심이 된 서인(西人 : 기호학파)이 가례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로서 시행
해 오던 중 효종조(孝宗朝) 때는, 남인 윤휴『尹鑴/南原人 : 1617(광해군 9)∼1680(숙종 6)』 파와 서인 송시열『宋時烈/恩津人 :
1607(선조 40)∼1689(숙종 15)』파 사이에 예론분쟁을 일으켰으며, 그 뒤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영남학의 류성룡『柳成龍/豊山人 : 1542(중종 37)∼1607(선조 40)』, 김성일『金誠一/義城人 : 1538(중종 33)∼ 1593(선조 26)』 윤
휴(尹鑴) 등은 예서(禮書)를 단권으로 편찬, 즉 상례(喪禮). 혼례(婚禮). 제례(祭禮) 등 단권이며 타례(他禮)는 부수적으로 삽입하였다.
기호학파인 김장생『金長生/光山人 : 1548(명종 3)∼1631(인조 8)』 송시열(宋時烈). 이재『李縡/載寧人 : 1680(숙종 6)∼1746(영조
22)』 .등은 학파를 이어오면서 가례의 정통성을 주장하였으며 이재(李縡)가 사례편람(四禮便覽)을 편찬하게 되니, 이것이 우리나라 가
례의 근간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정약용『丁若鏞/羅州人/남인계열 : 1762(영조 38)∼1836(헌종 2)』에 이르러 가례의 복잡함을 타파하고 시대에 맞는 가례를 주장하였
으며, 갑오경장『甲午更張 :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개화파 내각에 의하여 추진된 근대적 제도 개혁』 이후 가례도
또한 많은 변화를 갖어 왔다.
제례(祭禮) 때 남인과 서인과의 가례의 차이점을 대별(大別)하면 다음과 같다.
1)지방(紙榜) 쓸 때/관직이 없을 경우
◇남인 : 처사부군(處士府君)
◇서인 : 학생부군(學生府君)
2)과실(果實) 진설
◇남인 : 조율시이(棗栗枾梨)
◇서인 : 홍동백서(紅東白西)
3)계반개(啓飯蓋 : 밥 뚜껑을 여는 의식)
◇남인 : 첨작 후(添酌 後)
◇서인 : 초헌 시(初獻 時)
남인(南人)에서는 반주(飯酒) 후에 식사(食事)를 하게 되니 첨작(添酌=첨잔(添盞) : 술을 따라 놓은 잔에 술을 더 따름) 후에 계반삽시
(啓飯揷匙 : 메(밥)그릇의 뚜껑을 열고 수저를 꽂는 것을 말함)를 하며, 서인(西人)은 초헌(初獻) 때에 계반개(啓飯蓋)를 하였기 때문에
남인의 계반삽시(啓飯揷匙)를 할 때는 삽시정저(揷匙正箸)를 하였다.
즉 서인은 계반개(啓飯蓋 : 밥뚜껑을 여는 것)는 초헌 때 하고, 삽시(揷匙 : 숟가락을 밥그릇에 꽂 는 것)는 유식례(侑食禮) 인 첨작 후
에 한다,
●홍동백서(紅東白西)와 조율이시(棗栗梨枾)
◇홍동백서(紅東白西)
홍동백서(紅東白西)를 조동율서(棗東栗西)라고도 하며 동쪽에 붉은 색 과일, 서쪽에 흰색과일을 놓고 그 사이에 다른 과일을 놓는 것
을 말한다. 동쪽에 대추(棗 : 대추나무 조자), 서쪽에 밤(栗 : 밤 율자)을 놓고 그 사이에 다른 과일을 놓는 진설(陳設) 양식이다.
동쪽에 대추를 놓는 이유는, 대추를 한자로 조(棗) 라하며 조(早 : 일찍 조) 또는 조(朝 : 아침 조)로 해석 한다. 즉 이른 아침 동쪽 하늘이
붉게 되어 해가 뜨게 됨으로 붉은 색인 대추를 동쪽에 놓게 된 것이다.
밤을 서쪽에 놓는 까닭은 밤의 한자(漢字)는 율(栗)인데 파자(破字)하면 <서(西)쪽 나무(木)>에 비유 되며, 밤은 서쪽나무에서 맺은 열
매이니 당연히 그 과일은 서쪽에 놓게 된 것이다. 이렇게 놓는 것을 우설(右設)이라 한다.
◇조율이시(棗栗梨枾)
조율이시(棗栗梨枾)는 서쪽으로부터 대추, 밤, 배, 감 순으로 놓은 다음 다른 색 과일을 놓는 것인데, 이런 진설을 좌설(左設)이라 한
다. 이것도 예론분쟁(禮論紛爭)의 일례(一例)이다.
서쪽에 대추를 놓으니 붉은 색이기 때문에 백서(白西)를 하기 위해 대추에 흰 깨를 묻혀 흰색으로 만들고, 밤은 껍데기를 깎아 흰색으
로, 배도 껍질을 깎아 흰색으로 하였다.
곶감은 자연 흰색이니, 서쪽과일은 인위적으로 흰색이 되게 하여 진설하였으며. 다음 순으로 유색(有色) 과실을 진설하게 되니 역시 홍
동백서(紅東白西) 이치에 부합하였다.
수 십 년 전만해도 대추에 흰깨를 묻히고 감 대신 곶감을 썼던 것이다.
그 뒤 세월이 지나면서 조율이시(棗栗梨枾)로 명명(命名)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때 양수선호사상(陽數選好思想)에 의하여 과실의 종류도 양수(陽數), 과실(果實)의 개수도 양수(陽數=홀수)로 한 것이다.
● 우설(右設)
北(北)
율(栗/밤). 시(枾/감). 과(果). 조과(造果/과자류). 과(果). 이(梨/배). 조(棗/대추)
南(前)
홍동백서(紅東白西)=조동율서(棗東栗西)
●좌설(左設)
北(後)
조(棗/대추). 율(栗/밤). (梨/배). 시(枾/감) 조과(造果/과자류). 생과(生果/아직 덜 여문 과실)
南(前)
조율이시(棗栗梨枾)
●제수진설(祭需陳設)
제상(祭床)의 제수진설은 신위(神位)를 기준으로 좌동우서(左東右西)으로 하여 진설하여야 하나, 착오를 일으키기 쉬워 편의상 제관
(祭官)을 기준으로 우동좌서(右東左西)로 진설하는 것이 통용되고 있다.
제관(祭官)이 앞을 바라볼 때 우동좌서(右東左西)이나 신위(神位)로 본다면 좌동우서(左東右西)가 되니 의례상 착오가 없다.
그러나 제사 때 상위(上位)인 북쪽에 제상(祭床)을 진설하게 되여 제관(祭官)은 남에서 북향하여 제사를 올리게 되니 위치계념의 혼돈을
일으키므로 착오를 없애기 위하여 특별한 제사 때에 한하여 우동좌서(右東左西)로 하여 제수를 진설하는 것이 오늘까지의 관습으로 내
려오고 있다.
●제수진설규례(祭需陳設規例)
◇조율시이(棗栗枾梨) : 왼쪽(西)에서부터 대추, 밤, 감, 배 순.
◇좌동우서(左東右西) : 사람의 왼쪽(조상의 왼쪽이 아님)이 동쪽, 오른쪽은 서쪽.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생동숙서(生東熟西) : 날 것은 동쪽, 익힌 것은 서쪽
◇좌포우혜(左脯右醯 : 포는 왼쪽, 식혜 오른쪽
◇어동육서(魚東肉西) : 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
◇두동미서(頭東尾西) : 생선의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건좌습우(乾左濕右) : 마른 것은 왼쪽, 젖은 것은 오른쪽
◇좌반우갱(左飯右羹) : 메(밥)는 왼쪽, 갱(국)은 오른쪽
◇접동잔서(接東盞西) : 접시는 동쪽, 잔은 서쪽]
◇남좌여우(男左女右) : 제사를 모실 때 중앙을 중심으로 남자들은 좌측에 여자들은 우측에 선다.
◇좌고우저(左高右低) : 산체는 왼쪽에, 낮은 곳에서 난 채소는 오른쪽에 놓는다.
◇좌귀우천(左貴右賤) : 귀한 것은 양이니 왼쪽에 흔한 것은 음이니 온른쪽에 놓는다.
● 제수불용(祭需不用)
◇제수를 장만할 때, 고춧가루, 마늘, 파 등 자극성 물질은 쓰지 않는다.
◇과일 중 복숭아는 제수로 쓰지 않는다.
공자가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청하는 나무이므로 그 열매를 쓰지 않았다는 속설이 있다.
(孔子曰 果品有六(棗栗梨柿杏桃) 桃爲下 祭祀不用 -古禮)
◇과실의 종류가 여섯 가지(조율이시행도/棗栗梨柿杏桃/대추, 밤, 배, 감, 살구, 복숭아)가 있는데 그 중 복숭아는 제일 하등이므로 제사
에 쓸 수 없다.
◇어류(魚類) 중 끝자리에 "치(峙 : 우뚝할 치)"자가 든 고기는 쓰지 않는다.
보기로서 갈치(葛峙), 꽁치, 삼치, 가물치 등은 쓰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갈치를 도어(刀魚)라고 한다. 칼도(刀)가 들면 불길하다는 뜻에서 갈치를 제사에 쓰지 않았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어류
중 고기이름 끝자리에 "치"자가 든 고기는 모두 제사에 쓰지 않는다. (祭需魚類 刀字不吉 刀對刀亡, 刀魚不用 -古禮)
공자는 그 시절, 칼부림만 하는 세상이 너무나 싫었다. 칼은 칼로서 망한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도덕정치를 할 것을 천하에 권했으나 아무
도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위정자는 없었다. 그래서 공자는 제사에 「칼도」자가 든 도어(刀魚)를 쓰는 것마저도 싫어한 나머지 도어
(刀魚)를 쓰지 말라고 하였다.
<참고자료 : 徐寧圭 저 《嘉禮》>
●예송논쟁(禮訟論爭)
기호학파인 서인은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우암 송시열→이재(李縡)→선생으로 이어오면서 이재선생이 <사례편람((四禮便覽)>이라
는 예서 책을 썼다. 이 책의 내용 중 <천상양수(天上陽數), 지상음수(地上陰數)>라는 사상으로 땅위에서 나는 과실은 짝수로 써야 한다
고 하였다.
그러나 남인인 퇴계학파 쪽에서는 陽數選好 사상으로 과일의 종류와 개 수 를 모두 홀수로 써 왔다.
조선시대,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사이에 크게 논란이 된 두 차례의 예법에 관한 예송논쟁(禮
訟論爭)으로 서로 물고 물리는 목숨을 잃는 지경에 이렀다.
그 후 남인계 정약용의 개혁운동으로 오늘날엔 서인의 기호학파 후손까지도 대부분 과일의 수를 홀수로 쓰고 있다.
그러니 안동 지방에서는 더더욱 홀수로 쓰는 것이 관례로 지켜져 왔으며 안동 지방 향사에도 모두 홀수로 쓰고 있습니다.
[참고내용]
이 자료는 서녕규(徐寧圭) 저 《가례(嘉禮)》 자료 및 항국의례연구학회장의 질의 답변을 거친 고증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