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고 비밀한 일을!
120805 예레미야 33:1-3
1. 하나님 전상서
땅 끝 마을, 일명, 토말(土末)로 유명한 우리나라 최남단에 전라남도 해남이란 곳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이곳에 한 어린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어린이는 초등학교시절 학업에서나 구슬치기에서나 뜀뛰기에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만능학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난으로 인해 꿈에도 그리던 중학교 진학을 접어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도 가슴이 아파 울면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공부 좀 하게 해 주세요!” 이 어린이는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돌아보신 것과 같이 자신을 돌아보아주시리라고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40일을 철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응답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그는 무작정 ‘너무나도 공부가 하고 싶습니다. 야간학교라도 다니고 싶습니다. 편지를 받으신 분이 저를 도와주신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쓴 뒤, 편지 겉봉 수신자란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편지를 쓰는 어린이를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요? 만일에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편지를 쓰는 어린이를 보면서 어떠한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마침내 하나님은 이 어린 사무엘의 정성에 응답하셨습니다. 우편배달부가 편지를 분류하는데 주소지가 하나님으로 되어있단 말이에요. 배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고민 하던 끝에 우체국장에게 전달합니다. 그런데 그 우체국장이 마침 교회 권사님이셨습니다. 해남 지역 교회 권사인 우체국장이 편지의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고심하던 끝에 이를 자신이 다니던 해남읍 교회 목사님에게 전달하였습니다. 당시 해남읍 교회 목사님은 이준묵 목사님이란 분이셨는데, 이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격적으로, 목회적으로 성자처럼 존경받는 분이십니다. 이미 벌써부터 그 지역에서 목회뿐만 아니라 고아원을 운영하며 불쌍한 고아들을 돌보아주시던 분이십니다. 이준묵 목사님께서는 이 어린이를 불러서 중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등대원이라는 고아원에서 먹여주고 입혀주는 가운데 이제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게 된 이 어린이는 아주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고등학교도 갔습니다. 대학교도 갔습니다.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스위스의 신학교로 유학도 갔습니다. 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훌륭한 신학자와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 교단의 오영석목사님이십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성공사례, 인간승리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해피 엔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너무 결말만 바라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신대학교 총장, 신학박사 오영석만 바라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어린 시절, 배고픔을 참으며,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할 수 없었던 그 비참하고 불쌍한 시절의 그 어린이는 기억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린 시절의 그 시련과 고난이 오늘의 오영석을 있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절의 그 가난과 괴로움과 배고픔은 분명 그 자체로는 선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하지 못한 것이 선한 결과를 이루었다.”는 이 역설적인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2. 본문이해
(1)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라는 예언자가 있습니다. 이 예언자에게는 특별한 별명이 있습니다. 이 예언자의 별명은 눈물의 예언자입니다. ‘눈물의 예언자!’ ‘눈물의 예언자!’ 왜 눈물의 예언자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레미야가 살고 예언했던 그 시절이 눈물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완전히 타락하여 이방민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기 시작한 그 시절에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습니다. 타락하여 멸망당하던 그 시절, 하나님의 말씀은 준엄하기 그지없었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운명이었던 예레미야는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만큼이나 예레미야의 운명도 비극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눈물의 예언자’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2) 소망이 없을 때에
때는 주전 597년에서 588,587년 까지의 시기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진작 멸망했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제국에 멸망당할 당시입니다.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침탈당했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바벨론제국에 의하여 시드기야가 왕으로 즉위합니다. 이 멸망의 시기에도 여전히 엉터리 선지자들은 허황된 내용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고 지켜주신다고 전했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고, 바벨론제국의 통치를 인정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반민족적으로 들렸으며, 때문에 예레미야는 구금되어 활동할 수 없게 됩니다. 나라는 멸망의 위기에 닥쳐있고, 정치지도자들과 엉터리 예언자들은 거짓 구원을 외치며, 예레미야 자신은 이들에 의하여 감금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망의 상황 한 복판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참으로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말씀은 머지않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역사책으로 읽는 사람이 있고,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레미야의 이야기로 읽는 사람이 있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말씀을 그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분이 복된 분입니다. 성경은 그 시절, 그 사람의 이야기를 알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읽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1) 우리의 삶 가운데에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하는 노래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천사를 찾아보기 매우 어려운 세상입니다. “온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을 내걸고 유명한 가수들이 합창을 합니다만, 그래도 오늘 우리 지구촌의 현실은 평화보다는 전쟁의 염려가 더욱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건강을 소망합니다만,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매우 드물고 모두가 골골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꿈꾸고 삽니다만, 그러나 가족관계도 내 마음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원치 않는 일이 생기고, 누구도 바라지 않았지만 관계가 상처를 받고 깨지곤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데, 부자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니 부자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꾸지 않는데, 매달 살아가는 것이 걱정입니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데 왜 이럴까?’ 하는 생각에 맥이 빠집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축복과 기쁨, 즐거움과 희망, 건강과 같이 밝은 요소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어두운 요소도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우리 삶의 모습들은 그 자체로 보면, 불행이고 슬픔이고, 괴로움이고 절망의 요소들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 가운데 떡 들어와 앉아 있는 이러한 요소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정적인 요소들을 미워합니다. 당연한 노릇이지요. 제발 좀 사라져주길 바랍니다. 도대체 왜 나를 괴롭히냐고, 제발 좀 내 인생에서 나가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한 복판에 떡하니 버팁니다. 이제 소리 지르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제는 조금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꾼 가운데는 흰 옷을 입은 사자(使者)도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사자(使者)도 있습니다. 우리는 흰 옷을 선호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검은 옷을 입은 사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사자라는 것입니다. 연극에는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이 다 등장합니다. 선한 인물만 등장하는 연극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대단히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 특별히 불행한 사건의 발생이라고 하는 것은 연극에는 빠질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이것이 빠진 연극은 재미없는 것, 아니 극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행과 불행, 건강과 약함, 삶과 죽음, 부와 가난, 사랑과 이별, 좋은 일과 슬픈 일 등이 함께 엮어나가며 짜지는 하나의 천과 같은 것입니다. 이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요소들도 당당히 한 몫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부정적인 요소가 우리의 인생을 더욱 멋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2) 어려운 일 당할 때
우리 모두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로, 가족 간의 문제로, 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그리고 당연한 결과지만 이런 일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에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일을 통하여 우리를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던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실의와 절망 가운데 낙담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 삶 속에 닥친 어려운 일들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