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호덱스에 참가하고 소쇄원을 찾아 갑니다. 가족 모두가 함께 나설려고 했는데 큰 딸이 내일 개학입니다. 그런데 숙제와 일기가 밀렸답니다. 그 심정 오죽하겠습니까? 아내와 큰 애는 집에 남고 둘째랑 담양으로 출발합니다. 늦은 점심은 관방천 진우네집에서 멸치국수를 먹고 '생활의 달인'프로에 나온 못난이 도너츠도 한통 챙깁니다.
차안에서 아이가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채윤아 방금 부른 그 노래는 제목이 뭐야?"
"응. '잔디밭에는'인데 내가 두번째로 좋아해"
"그래. 그럼 첫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뭔데?"
"첫번째는 '나와 선생님" 이고 두번째는 "잔디밭에는'이고, 세번째는 '들꽃이야기'야. 근데 아빠는 뭐가 좋아"
"아빠는 글쎄......."
세곡 다 알지도 못하고 들어 본것이라고는 방금 들은 '잔디밭에는...공차기...뒹굴기...' 하는 음이 처음인지라
"아빠는 '잔디밭에서'가 젤 좋아"
"'잔디밭에서'가 아니라 '잔디밭에는' 인데"
"아하 그래. 그 '잔디밭에는' 다시 한 번 불러보자"
"잔디밭에는 잔디만한 바람끼리 와서 논다.
뒹굴기도하고 공차기도하고
일 바쁜 개미 등타기도 하고......"
우리 앞에는 도로연수라고 적힌 방범등을 지붕에 단 도로주행용 승용차가 천천히 가고 있습니다. 앞 차에는 이제 운전을 막 배우는 사람이 즐거운 기대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을 것입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조용한 들녁을 연인과 같이, 아니면 가족과 함께하는 것을 꿈꿀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어컨을 끄고 차장을 내려 바람을 맞습니다. 더운 열기는 여전하지만 들판의 풀냄새를 품은 연한 바람이 팔과 어깨에 와닿습니다. 딸아이의 '잔디밭에는'을 들으며 앞 차를 따라 천천히 소쇄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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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은 양산보가 조성한 대표적인 민간 정원입니다. 입구에 서 있는 표지석을 보면 그가 제주 양씨 후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쇄원을 표현한 과거 시들 중에는 여름을 노래한 것들이 특히 많습니다. 여름 소쇄원을 두고 하서 김인후가 양산보에 대한 부러움을 읊은 시도 있는데 그만큼 여름을 나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입구를 지나 대나무로 둘러 싸인 숲 길을 오릅니다. 딸아이 손을 잡고 걷습니다. 대나무 끝에서 댓잎들이 서로의 몸을 비비고 바람과 함께 뒹굴며 부르는 동요가 들려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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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소쇄원이 제일이라면 그 중 가장 시원한 곳은 광풍각과 건너편 초가정자 사이의 계곡일 것입니다. 높지 않은 바윗돌을 감아 내리는 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다시 여러 돌들을 지나 두개의 작은 폭포를 만들어 냅니다. 바위를 적신 물이 대숲을 지납니다. 이끼 낀 돌들을 씻은 물이 골짜기로 흘러갑니다. 크고 작은 돌을 돌아 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바위에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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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각 건너편 초가정자에 앉으면 기와를 얹은 황토 담이 보이고 그 안 쪽으로 오동나무가 서있습니다.
초가정자에는 대봉대(待鳳臺)라는 현판이 있는데 봉황을 대하듯 귀한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봉황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둥지를 틀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는데 초정 옆에 봉황이 쉬는 오동나무를 심어 손님을 귀하게 맞이 하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최근에 새로 심은 작은 나무가 있습니다. 살짝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후손들의 정성과 관리처의 성의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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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 옅어지면서 여름 기운을 조금씩 빼나가는 들녁에 잠시 쉬어 갑니다. 세월 빠르다며 먼산을 바라보는 아빠와 거미줄에 거미가 있다며 길 옆을 살피는 딸이 논 길을 같이 걷습니다. 논에는 쭈그리고 앉아 거미를 찾는 채윤이 만한 나락들이 가득하고 들판에는 나락만한 바람들이 와서 놀고 있습니다. 앞서가는 아빠를 부르는 딸아이의 소리에 뒤돌아 셔터를 누릅니다. 세상이 험하지만 누구에게나 유년의 추억은 아름다워야하니 오늘 채윤이의 작은 여행이 즐거웠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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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빠와 딸의 여행....좋아보입니다.
이런걸 행복이라 부르겠지요.
다음에는 큰딸하고만도 한번 가시길 감히 권합니다.
단둘이라는 의미도 있을터...
이날의 기억은 아마 채윤이에게 소중하게 그리고 오래 남아있을듯하네요.
이런 기록도 함께 물려주실 방법도 고민해보셈.
시집갈때 주면 새로울듯...ㅎㅎ
잔잔합니다.
게임과 K pop만 좋아하는 진원이와는 또 다른듯...
동영상까지...좋은사진.글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