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중화전 [德壽宮中和殿─中和門]
정의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에 있는 대한제국기 황제가 하례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정전과 그 정문인 궁궐건물. 보물.
개설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내용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서북으로 피난하던 선조가 환도하여 이곳에서 정무를 봄에 따라 행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1611년(광해군 3)에 경운궁(慶運宮)이란 정식 명칭이 붙여졌다.
경운궁의 정전으로 초기에는 즉조당(卽祚堂)이 사용되었는데 1897년에 이 전각의 이름을 태극전(太極殿)이라 고쳤다. 대한제국의 선포로 왕은 황제가 되어 여기에서 하례(賀禮)를 받았으며 이듬해 2월 다시 전각 이름을 태극전에서 중화전으로 바꾸었다. 그 후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인 1902년(광무 6)에 즉조당 앞에 새로운 중층의 법전(法殿)을 지어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인정전에 비견될 만큼의 격식을 갖추었으나, 1904년(광무 8) 경운궁의 대화재 때 소실되어 다시 중건된 것이 현재 남아있는 단층의 중화전이다. 중화전의 평면은 인정전과 비슷한 정면 5칸(61.4척), 측면 4칸(58척)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고, 넓은 이중의 월대 위에 높직한 초석을 놓아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월대에는 석계가 마련되어 있고, 석계 한가운데에 답도를 놓아 쌍용을 새겨놓았으며, 각 층마다 석계 모서리에는 석수를 조각해 놓았다. 고주와 창방에는 낙양각(落陽刻)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건물 내·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공포는 내4출목, 외3출목의 다포식 구성을 하고 있으며, 중화전에서 사용된 공포 형태는 외부에 쇠서를 달고 있는 운기당초문으로, 이것은 초각형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 다포의 변화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특히 궁궐건축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을 얹어놓고 토수(吐首)를 끼웠다. 단청은 은은한 채색의 모루단청이고 광창과 꽃살분합문을 달아 위관(偉觀)을 돋우었다. 건물의 천장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 두 마리를 조각으로 장식하여 건물의 위상을 높였다. 중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었는데 건축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문의 양 측면에는 남회랑(南回廊: 행각(行閣))이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소실되어 동쪽 모서리 부분만 일부 남아있을 뿐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중화문은 단층의 삼문으로 세벌대의 기단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두, 잡상 등을 얹었다. 석대 앞의 석계는 3등분되었는데 중앙부 좌우에만 석수(石獸)를 두고, 답도(踏道)에는 쌍용문(雙龍紋)이 새겨져 있다. 평면 크기에 비해 기둥 높이가 높아 다른 문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의의와 평가
중화전 및 중화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건축문화재–1 서울편』(홍대형, 기문당, 2011)
『조선시대 궁궐용어해설』(문화재청, 2009)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문화재청, 2005)
『덕수궁』(한국문화재보호재단 중앙문화재연구원, 2003)
『중화전 실측·수리보고서』(문화재청, 2001)
문화재청(www.cha.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덕수궁 대한문[德壽宮 大漢門]
덕수궁 대한문은 서울시 덕수궁에 있는 조선 후기 다포식 우진각지붕 형태의 문이다. 1906년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이 썼다. 대한문은 경희궁 흥화문처럼 단층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이다. 우진각지붕은 네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 형태를 말한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용마루와 추녀마루가 있다. 용마루 끝에는 매 머리모양의 장식이 있고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놓았다. 제자리에서 옮겨지면서 변형되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정의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에 있는 조선후기 다포식 우진각지붕 형태의 문(門). 궁궐문·정문.
개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을 당시, 궁궐이 모두 불타버려서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를 행궁으로 삼아 거처하게 된 것이 덕수궁의 시초이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 이라 하였다.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네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의 건물이다.
역사적 변천
덕수궁은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을 짓기 전에는 임시로 즉조당(卽祚堂)을 정전으로 사용하고, 3문(門)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인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명례궁(明禮宮)을 옛 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2년(광무 6) 들어 궁궐을 크게 중건하면서 정전인 중화전 · 중화문 · 외삼문(外三門)인 조원문(朝元門)을 세워 법전(法殿: 임금이 백관의 경축일 하례를 받는 정전)의 체제를 갖추었다. 얼마 뒤 인화문 자리에는 건극문(建極門)을 세우고 조원문 앞 동쪽에 대한문의 전신인 대안문(大安門)을 세워 새로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광무 8) 함녕전(咸寧殿)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자 1904년에서 1906년(광무 10)에 걸쳐 이를 다시 중건하였고, 1906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수리하면서 겹처마에 단청을 하였으며 지붕마루에 양성(兩城)을 하고 취두(鷲頭) · 용두(龍頭) · 잡상(雜像)을 얹었다. 현판은 당시의 궁전대신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1914년 도로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문 오른쪽에 있던 건물 및 담장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크게 파괴되었고, 이때 대한문도 궁 안쪽으로 옮겨졌다. 또한 1970년에도 도시계획으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 앞에는 돌짐승을 배치한 계단을 두어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었었으나, 지금은 계단 및 기단이 아스팔트 속에 묻혀 버린 채 돌짐승만이 땅 위로 드러나 있다.
내용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이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다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연결하여 짜 맞추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다. 기둥 위와 기둥 사이 평방 위에 촘촘하게 공포(栱包)를 배열하였는데 공포의 짜임새는 외이출목(外二出目) · 내삼출목(內三出目)이며, 바깥쪽 제공(諸工) 위에 놓인 살미첨차(山彌檐遮)들은 그 끝이 가냘픈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안쪽의 공포에는 판형 부재 끝에 구름모양(雲峰)을 조각하였다. 가구(架構)를 보면, 기둥 3줄에 모두 평주(平柱)를 세우되 가운데 줄에 있는 평주 위에 보를 연결하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운 다음, 이 위에 종보[宗樑]를 걸었다. 다시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가운데 칸은 서까래를 드러낸 연등천장으로, 양옆 칸은 소란반자로 마감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용마루와 추녀마루를 양성하고 용마루 끝에 취두(鷲頭: 매 머리모양의 장식), 추녀마루에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놓았다. 제자리에서 옮겨지면서 변형되고, 여러 차례의 보수로 인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의의와 평가
덕수궁 대한문은 경희궁 흥화문처럼 단층이며 우진각지붕으로 된 궁궐의 정문이다.
참고문헌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
『궁궐의 현판과 주련』3: 덕수궁·경희궁·종묘·칠궁(문화재청, 수류산방, 2007)
『(덕수궁)대한문 실측·수리보고서』(문화재청, 2005)
『한국의 고궁건축』(장경호 외, 열화당, 1988)
『서울육백년사』3(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9)
『德壽宮史』(小田省吾, 李王職, 1938)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07-11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