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5세 가을 아버지가 집에서 없어진다.
그런 아버지도 집을 나서게 되었다. 해외, 게다가 중미의 가난한 나라, 온두라스라고 하는 나라로 가셨다 아버지는 자선 사업가로, 남을 위해 세계를 위해 일하는 것이 사는 보람이라고 하고 있었다. 급료가 없더라도 세상의 도움이 되는 일을 솔선해서 하셨다. 아버지는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에 가기 전에, 그 당시 집에 남아있었던 한살 위의 형, 남동생, 나, 그리고 여동생을 모아서 사정을 설명해, 가도 좋을지 물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세계에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찬성했다. 내가 고교1학년, 15살 때였다 초등학교부터 계속하고 있었던 야구는, 드디어 동경의 고교야구라고 하는 스테이지에 오르고 있었다. 물론, 꿈은 고시엔(甲子園 : 일본 고교야구 하기 전국 대회 고시엥야구장에서 하기에 그렇게 부른다)이었다. 한살 위 학년 선배가 한사람밖에 없었으니 우리들 1학년생은 빠른 단계부터 시합에 나가고, 레귤러선수가 되었다. 처음의 경식 볼에, 많은 멍을 만들면서도, 곧 익숙해져 갔었다. 1학년이 중심인 팀이라도 이길 수 있게 되었다.
가을.
아버지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아버지와 약속해서 야구를 그만두기로 했었다. 야구를 계속하는 돈도 없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상의하고, 그 해의 마지막 대회인 1학년 대회를 야구인생의 최후로 정했다. 그 대회에서 나는 평소와 다르게 크게 활약했다. 원래 수비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타격 쪽에서도 활약했다. 결코 강호 아닌 우리들이 현 (大分縣)의 결승전으로 나갔다. 결승전에서는 강호 야나기가우라(柳浦)에 아깝게 졌지만 준우승을 거두었다. 나는 준결승 오이타(大分) 상업고등학교전을 잊을 수 없다. 오이타(大分) 상업고는 고호이라서, 내가 고교3학년 때 오이타현(大分縣) 대표로서 고시엔(甲子園 : 일본 고교야구 하기 전국 대회 고시엥야구장에서 하기에 그렇게 부른다)에 갔던 팀이다. 우리들의 나이의 야구세대는 “마쓰사카(松阪) 세대”이라고 불리고 있다. 요코하마(橫浜)고교에서 고시엔(甲子園)을 제패한 마쓰사카(松阪) 다이스케(大輔) 투수를 필두로, 야구인재가 풍부했던 해다. 그 마쓰자카(松坂) 거느리는 요코하마(橫浜)고교와 1회전으로 맞은 것이 오이타(大分) 상업이었다. 만약 우리들이 이겨서 올라가고 있었으면, 마쓰자카(松坂)와 대결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야구를 계속하고 있었다면 베스트4까지 간 그 해의 현(縣)대회에서 우승했었을지 모른다. 지금도 여러 가지 망상으로 과거를 돌이겨 본다. 어쨌든 나의 마지막 대회 1학년대회에서는, 그 오오이타상업고에 이겨 결승전에 갔었다. 마쓰사카(松阪)하고 서로 던진 투수한테 나는 맹타상을 치고, 팀의 우승에 공헌했다. 잊을 수 없었던시합이었다.
그 대회가 끝나고, 나는 감독에게 집의 사정을 말 하고, 야구부를 그만두는 것을 알렸다. 감독 앞에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야구를 그만두는 것, 집이 힘든 사정, 여러가지가 겹쳐서 분했다. 남들 앞에서 우는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아마 중학교최후의 야구의 시합에서 졌을 때 이래라고 생각한다.
1997년 16세 봄 바이트와 쓸모없는 사람
야구를 그만둔 후, 우동집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집에 있었을 때 가족과 함께 자주 갔었던 우동집이고, 싸서 많이 먹을 수 있다. 거기의 “우엉 튀김 우동” “야마카케오로시우동(마를 가라서 우던 위에 언지는 우동)”을 좋아했다. 같은 값으로 사리 3개 까지 먹을 수 있었으니, 400엔으로 배가 터질 정도로 먹을 수 있다. 그런 신세를 진 추억의 우동집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방에서 일하는 고교생의 아르바이트의 급료 따위는 뻔히 아는 정도였다. 시급 580엔으로 스타트했다. 그래도, 한 달 6만엔 정도는 벌고 있었다. 주에 4, 5회, 학교가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에 갔다. 끝나는 시간은 10시반경. 밤길을 마음껏 노래 부르면서 자전거페달을 밟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대개 "더, 블루하츠의(일본 그룹가수)" "쓸모없는 사람”을 외치고 있었다.
* 도움이 되지 않다고 욕을 먹고 최하의 사람이라는 말은 듣고
요령 있게 연기할 수 없고 억지 웃음도 할 수 없다
죽어버리라고 욕을 먹고 이 바보라고 사람에게 말을 듣고
세상과 잘 어울려 살아 갈 수도 없다
모든 나와 같은 쓸모없는 사람들 덕분에
이 별은 빙글빙글 돌다
열등생이라도 충분하다 밀려나온 사람이라도 개의치 않다 *
급료가 들어오면 자신의 돈이 생기는 것 같아서 기쁘다. 대부분 생활비가 되어버렸지만, 용돈을 못 받고 있었던 나에 있어서, 그것은 처음으로 손에 넣은 “자신의 돈”이다. 때때로 남은 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을 샀다. 굉장히 멋지게 보이는 청자켓 이랑 '블르하츠'의 CD를 샀다. 남은 것은 대부분은 저금했다. 나는 힘든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절약 기술을 짜냈다. 머리는 스스로 잘랐다.
야구부 시절부터, 바리캉(hair clippers)을 사 스스로 스포츠머리를 했었다.
야구를 그만두면서 그 바리캉(hair clippers)으로 여러 가지 머리 모양에 도전했다. '블르하츠'의 가지와라(梶原)를 흉내서 파인애플 머리도 해 봤다. 진지한 진학학교에 파인애플을 들이댄 날은 학교에 조용한 충격을 주었다. 뒷 자리 친구는 '수업에 집중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담임 선생님은 “어떻게 할 수 없는가? ”라고 말하셨다. 그 시기부터 나는 26세 된 지금도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어디서 잘랐니? ”라고 누가 묻자, “스스로 잘랐다”라고 답 하는 것이 조금 쾌감이다. 그렇다 해도, 지금은 차마 파인애플 머리는 하지 않지만. 바이트는 생각 이상으로 힘들다. 회전이 생명인 우동집은 어쨌든 바쁘다. 손님 접대는 신경을 쓴다. 마음과 몸을 소모시키고, 자전거페달을 밟으면서 '블루하츠'의 노래를 외치면서 집으로 돌아가면, 이미 남은 체력은 없다. 그 시기는 거의 공부할 수 없었다. 성적은 쭉쭉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