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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19세기의 판화
6-1. 낭만주의 탄생과 근대
a) 고야 (1746-1828)
18세기 이후 막바지에 선 구식 생활방식과 함께 낡은 예술방식도 붕괴했는데, 그 붕괴과정 속에서 예술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방향이 제시되었다. 이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위대한 예술가가 스페인에서 나타난다. 크란시스코 고야(Goya), 그는 근대미술의 탄생을 예고하였으며, 판화를 독립된 예술의 장르로 승격시킨 것이다. 고야는 거칠고 황량한 그페인 북동지방에서 태어났다. 시골지방에서 화가 수업을 조금 받은 후 그는 이태리에서 바로크 회화와 접했고, 그후 스페인으로 돌아와 수도인 마드리드에 정착한다. 1770년에 죽은 이탈리아 로코코의 거장 티에폴로의 에칭은 젊은 고야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티에폴로의 에칭을 모사하면서 판화를 익히고,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 작품을 연구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마드리드 미술학교를 낙방하여 혼자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고야는 자연과 과거의 거장들을 보고 스스로를 키워나갔던 것이다. 특히 고야는 벨라스케스 회화를 에칭으로 옮기면서 그의 예술을 규범으로 삼는다. 말년에 고야는 스페인 궁정화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벨라스케스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면서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자처한다.
판화제작은 고야에게 있어서 회화못지않은 중요한 작업이었다. 중년기를 넘어 병으로 귀가 먹을대까지 색채나 주제가 모두 밝고 명랑한 분위기릐 회화와 타피스트리 밑그림을 그렸으나 병을 앓고 난 후 바로 제작된 판화는 어둡고 우울한 주제와 색조들이었다. 이때 그는 18세기의 밝은 빛을 아쿠아틴트 기법으로 어둡게 표현하고 있다. 판화라는 매체와 기법을 통하여 고야는 근대미술을 탄생시킨다. 즉 주문받기 전에 화가 스스로 주제를 택하고 그리기 시작한다. 실제 고야가 53세대인 1799년 전 시대에는 볼 수 없던 한 작가의 판화집이 셋트로 발간된다.
이것은 <카프리쵸스>(Caprichos)라고 제목을 붙인 판화집으로 80여개의 동판화로 되어있다. 카프리쵸스란 절벽위에서 위험스레 풀을 뜯으려고하는 염소 무리를 비웃는 뜻과 ‘내멋대로’, 즉 기분 내키는 대로 하겠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누구의 주문이 아니 화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주제나 모든 것이 결정되고 만들어진다. 카프리쵸스의 표지는 <이성이 잠들면 악마가 날뛴다>는 것으로 중세 분위기와 같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묘사하고 있으며, 한편 프랑스 혁명과 같은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 한편 어렵게 만들어진 이 판화집은 고야에게 돈을 벌어다주지는 못했지만 후대에 그를 근대미술의 아버지이며 판화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던 거장으로 추모하게 만든다. 당시 고야는 이 판화집이 스페인 사람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이 샀다고 회고했으나, 판매기록에는 스페인 후원자가 4세트를 산 것이 있을 뿐이었다.
<카프리쵸스>판화집 이후 고야는 1808년 나폴레옹 군의 침공과 민중학살장면을 담은 판화집 <디스파라테스>(Disparates)를 제작한다. 에칭과 아쿠아틴트기법의 판화집 <디스파라테스>는 ‘부조화’란 뜻으로 ‘전쟁의 비참함’을 의미한다. 이 판화집에 그려진 주제들은 전쟁의 참화로 인간의 비참한 죽음과 하살당하는 장면들이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교야는 어두운 분위기를 렘브란트작품처럼 밝은데서 어두운 단계로 변하는 과정을 중요시 하였다. 전쟁의 참화는 고야의 삶에 있어서 귀를 먹었을 때의 경험만큼이나 깊은 충격을 주었다.
1808년 5월 3일 밤 마드리드에 나폴레옹군의 침공에 대항하여 폭동과 학살, 이런 흥분과 고통들이 고야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는 실제로도 많은 것을 보고 들었으며 기록을 남긴다. 이러한 모습들을 고야는 17세기 이태리적 바로크에 대한 박식함으로 나타내기보다 자유롭게 변형 시킨 구도와 사실적 묘사로 무엇보다 현장감을 바탕으로 개인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팔리지 않는 기괴한 표현의 작품 제작으로 생활은 궁핍하고 그림 의뢰가 줄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기아에 시달리는 스페인 민중들을 보고 고야는 어떤 다른 것보다 이러한 동판화에 매달렸다. 결제적 궁핍 때문에 질이 나쁜 종이와 제작기로 작업하고, 앞뒷면을 사용하여 하나의 동판으로 두 개의 에칭을 만들기도 했다. 나쁜 니스 찌꺼기는 산의 부식을 방해하고 거칠게 나타났으며 그 자체가 근대적 성격의 새로운 표현으로 주목받게 된다. 고야의 판화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명하게 잘 보여준 것이다.
고통스런 전쟁이 1814년에 끝나고, 고야는 투우와 같은 스페인 풍속 연속물을 제작하였다. 물로 stodghkf의 어려움 때문에 팔기위한 소재로 투우를 선택하였으나 잘 팔리지는 않았다. 그의 투우는 아쿠아틴트기법의 에칭과 후기에는 새롭게 소개된 석판화로 만들어지는데 역시 거칠고 재성적인 작가의 성격이 너무 강조되어있다. 고야는 <투우>를 제작하기 위해 영국 인쇄기를 수입하여 소와 싸우는 투우사의 몸짓등 섬세한 묘사의 복제가 가능하도록 노력한다. 그는 인물의 정확한 관찰을 통해 석판에 크로키와 같은 속도감으로 실감나게 투우사와 소의 대결을 그린다. 행위의 사실성과 함게 <투우> 연작에서 고야는 일본 목판화만큼 커다란 여백과 명암이 없는 평면적 표현을 찾기도하였다.
<전쟁의 참화>와 이후 제작된 <투우>를 비롯하여 고야의 판화중 가자 특색있는 작품으로는 <거인>을 예로든다. 동판화인 <거인>은 젊었을때 로마에서 스케치한 청동 조각으로 상처입은 고대 그리이스 투사를 모사한 것이다. 그는 동판 전면을 아쿠아틴트로 검게 표현하고, 다음에는 마치 메조틴트처럼 하이라이트를 긁어 명암을 나타내었다. 거인은 몽상적이며 공포에 떠는 아프리카인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울하고 명상적인 고야의 거인을 보면 그는 일찍부터 괴물과 같은 ‘근대(modern)'을 거부하는 경고문처럼 보인다.
이단에 대한 재판은 78세의 고야를 프랑스 남부 보르도로 망명하게 하며, 4년후인 1828년 이국에서 사망한다. 인상주의처럼 밝은 색채와 작은 터치로 그린 <보르도의 우유파는 소녀>는 이곳에서 그린 고야의 마지막 유화작품이다. 이당시 그는 새로운 기법인 석판화를 알게되면서 <투우>를 소재로 한 4개의 석판화를 제작한다. 그는 캔버스처럼 이젤 위에 놀을 올려놓고 회색 바탕에 짙은 색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고 밝은 부분은 긁어내기도했다.
말년에 고야는 귀가 완전히 먹고 눈도 거의 보이지 않아 확대경을 사용했다고 하나, 거의 눈을 감고 감각적으로 화면을 메꾸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사랑스런 손자에게 재산을 남겨주려고 판화를 제작했다는 고야의 인간적인 면을 보며, 동시에 최초의 위대한 석판화를 반견하게된다. 그것은 최초로 회화만큼 풍부한 질감과 선의 자연스런 움직임, 그리고 흑과 백의 자유로운 혼합을 반견한다. 히에로니므스 보슈의 작품에서 발견하였던 환상과 자유로움을 뒤러와 렘브란트를 거쳐 19세기에 비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판화가로서 뒤러는 현실과 이상적 세계를 완벽하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뒤러는 이미 존재하던 세계를 예술적으로 만들었지만, 고야는 불행속에서도 밝아오는 세기의 변화까지 모색하고 창조하여 새로운 시대의 장을 펼쳐 보여준 화가이며 판화가 이었다. 특히 고야의 판화는 근대 유럽 미술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그의 작품은 19세기 초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클로아를 비롯하여 쿠르베와 도미에 등 리얼리즘 석판화가들에 의해 복사되어 근대미술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게된다.
b) 낭만주의 판화
판화를 제작하고자 하였던 화가들도 사실 기술적 어려움과 자연스런 선묘의 효과를 덛을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석판화의 등장은 드로잉 효과를 100%그대로 나타내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다른 판화 방법과 달리 석판화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직접 그린다. 즉 석판화는 드로잉 그대로를 나타내기 대문데 다른 종류의 판화보다 작가의 솜씨와 의도를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런 성격을 인식하고 19세기 이후 프랑스 화가들은 삶과 사회적인 사건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석판화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방법으로 작업한 화가로 낭만주의 미술의 거장 제리코(G'ericault, 1791-1824)가 있다. 짧은 생애 속에서도 그는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유화작품 <메듀스호의 뗏목>과 같은 걸작과 석판화를 남겼다. 제리코는 이 석판화로 영국인들을 매혹시킨 최초의 프랑스 예술가였다. 1811년의 영국인과 흑인이 복싱경기를 하고있는 익명의 영국 에칭은 제리코가 그린 <복서>(1818)라는 석판화에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권투를 하고있는 두 인물의 묘사는 인체의 강한 힘을 현대적으로 재현시킨 것이다. 석판에 그려진 복서들은 고대적인 강인한 신과 같은 모습이다. 구경꾼들은 중세의 분위기에서 보듯 비스듬이 위치하고 주인공은 영웅과 같이 강조되고 있다. 제리코나 고야 등은 권투선수나 투우사들을 찬양하여 대중적인 공감을 얻는다.
2년동안의 런던 생활에서 제리코는 말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된다. 말의 동작과 주변을 실감나게 표현한 그의 작품은 현실의 낭만적 분위기를 강조한 것이다. 그는 당시 극적인 사건과 삶의 평범한 장면들을 그리는데 석판 전면을 가득 채우는 작업방법을 선택했다. 체리코의 판화는 어둡고, 반항적 내용들로 잘팔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33세로 죽었을 때까지 80여점에 달하는 석판화를 제작하였으나 유럽 석판화작업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제리코가 시작한 낭만주의 화풍을 완성시킨 화가는 들라크로와(Delacroix, 1798-1863)이다. 그는 역사적 사건과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낭만주의 회화를 이끌어나간다. 자유, 평등, 박애정신의 프랑스 혁명과 같은 성격의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또한 그는 티치아노와 틴토레토, 동시대의 고야작품에 나오는 영웅적이고, 환상적 모습을 석판화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다. 20대 중반에 그려진 드로잉은 색이 엷고, 건조한 느낌이었는데, 고야의 에칭과 투우사 석판화를 보고 성숙한 음영처리를 하게된다. 프랑스에서는 화가들에 의한 것판화들로 호화스러운 책을 출판하였는데, 당시 들라크로와는 괴테의 <파우스트>삽화를 그렸다. 괴테는 이것을 보고 “들라크로와의 거칠고 힘차며 날렵한 스케치는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고 했다.
또한 들라크로와는 쉑스피어의 희곡을 판화로 제작한다. 대표작으로 <햄릿>을 주인공으로한 석판화가 있다. 이것은 모두 16개 석판화로 되었는데 원문에 의한 출판용은 아니다. 들라크로와는 낭만주의 극인 햄릿을 가장 적합한 주제로 생각하여 연구하고 그려나갔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들라크로와의 햄릿판화와 같은 낭만주의 화풍을 보여주었던 샤세리오(Theodore Chasseriau)의 오델로 판화가 만들어져 연극의 종주국인 영국보다 훨씬 성곡적인 판화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들라크로와의 묘사는 사력을 다해 싸우는 동물 표현처럼 개념적이거나 언어적이 아닌 즉각적이고 시각적 효과가 대단히 높다. 때로 그의 낭만적 성격이 풍부한 작품들을 바로크나 전성기 르네상스에서 승앙된 힘에서 나온다고도 해석한다. 지속적으로 그는 고야의 <카프리쵸스> 판화집에 대한 주제와 기술적 연구로 아쿠아틴트 기법을 익히고 드라마틱한 음영의 분할과 처리를 덛게 된다. 그 결과 들라크로와는 석판에서도 동판의 아쿠아틴트 효과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낭만주의 판화를 제작하였다.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은 독일의 환상적 풍경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독인에서는 과거의 향수을 불러일으키는 판화들이 제작된다. 1800년 이후 독일의 판화제작은 우름(Ulm)과 아우스부르그(Augsburg), 뉘렘베르그(Nuremberg)에서 바바리아 수도인 뮌헨과 프러시아의 수도 베를린으로 옮겨졌다.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밑에 억눌렸던 19세기 초 독일은 다시 중세와 바로크적 표현성에 심취하는 낭만주의 물결을 수용하고 뛰어난 풍경화가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를 탄생시켰다. 그는 뒷모습의 인간과 삭막한 풍경, 북극해의 빙산 곡에 파선된 선박 등 소외된 인간과 풍경을 그린다. 이러한 주제로 독일인들은 목판화를 만들어 낭만주의 미술을 화려하게 등장시킨다.
그러나 독일은 낭만주의보다 고전적 화풍의 사실주의로 판화를 이끌어간다. 이때 제작된 이들의 판화는 과거에 대한 향수나 정치적 미래를 형상화시킨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1세의 이미지가 중심이 된 것처럼, 비스 마르크스 치하에서의 독일은 민족주의를 규합하기 위한 상징으로 프레드릭 대왕의 역사를 400개의 컷으로 만들도록 한다. 이러한 정치적 사건으로 독일판화는 드로잉의 원형 그대로 조각하는 훈련을 중요시 하였으며 정확한 인쇄를 발명하였다. 책에 삽화를 넣는 과정에서 조각사들은 사진처럼 인물들을 정확하게 그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의 철저한 사실주의는 프랑스의 완강한 전통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영국 삽화가들에게는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6-2. 사실주의 판화의 사진
a) 도미에 (1808-1879)
19세기 근대미술에 있어서 판화의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높은 예술적 경지로 이끌어 올린 화가는 도미에(Honore-Victorin Daumier)이다. 그는 나폴레옹시대의 전쟁속에서 남불 마르세이유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도미에의 부친은 시와 역사적 비극을 쓰는 희곡작가로 문학적 삶을 찾아 가족 전체가 파리로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파리에서 그의 부친은 곧이어 워털루 전투로 나가게 되며, 어린 도미에는 파리 시내 하수구 청소원을 비롯하여 그의 생애에 자주 모델로 등장하는 소매상인들과 변화사의 심부름꾼이 되어 밥벌이를 하였다.
불우한 어린시절부터 도미에는 그림을 그렸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석판화를 위한 드로잉과 조각술에 대한 지도를 받기도 한다. 그후 도미에는 본격적으로 생활을 위해 석판화 프레스기로 싸구려 프린트를 만들어 판매하고자 하였다. 점차 그의 석판화가 팔리기 시작하자 집안 형편을 나아졌는데, 당시 그는 11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이때 그가 만든 석판화들은 당시의 대중적인 판화들을 모방한 무미건조한 것들이다. 그는 점차 미켈란젤로와 루브르의 고대 로마인들 조각에서 합리적인 구조와 형태를 공부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간다. 많은 위대한 화가들이 그랬듯이 그의 진정한 스승은 스스로의 노력과 과거의 거장들이었다.
24세에 도미에는 프랑스에서 영국 정치, 사회를 1년 반동안이나 소개했던 주간지 “풍자”(La Caricature)에 최초로 삽화 100점을 수록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만들어진 신문, 잡지의 삽화들은 거의 석판화이다. “풍자”지에서는 정치, 사회의 강한 비판적 의식을 가진 편집자 필립퐁(Philipon)의 글과 함께 날카로운 그림들에 의해 잘 알려진 최초의 체계적이고 공격적인 석판화였다. 이곳을 사람들은 루이- 필립왕과 편집인 필립퐁의 전쟁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도미에의 최초의 실질적인 임무는 필립퐁이 조롱거리로 만들어낸 기사들을 석판화로 만화처럼 옮기는 것이다. 루이 필립왕을 먹는 서양배(pear) 형태로 얼굴을 풍자하여 시민들의 웃음거리로 올린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물론 그 결과 도미에는 6개월간 감옥생활을 하였으며, 신문으 폐간당한다. 그러나 도미에는 그치지않고 다른 잡지와 신문에 수없이 많은 삽화를 그려내보낸다. 또한 풍자 판화가로 도미에는 사무실에서 그림을 그리기보다 공격 대상자를 직접 방문하여 연구하였고, 굉장한 기억력으로 집에서 그가 루브르에서 관찰했던 조각처럼 그들의 형상을 모형화하였다. 전행애동안 그는 진흙으로 작게 모형화해서 조각으로 남겼다.
도미에의 가장 대표적인 판화로 <트랭스노냉가의 학살>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것은 정부군에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가난한 가족의 모습으로 달빛속에 비친 시신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실제로 집단 학살을 목한 것처럼 극적인 구성을 나타낸다. 그는 이 끔찍한 장면을 그리기 위해 3개월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을 보고 시인인 보들레르는 “26세에 도미에는 이미 모든 것을 능가할 걸작을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필리퐁은 꺾이지않고 또다시 사회풍자가 정치에 영향력을 미치는 일간지 “르 샤리바리”(Le Charivari)를 제작한다. 새로운 정기 간행물 “르 샤리바리”는 오늘날 신문처럼 매일 발간되며 한 장의 종이르 네 번 접어 4페이지로 만들어 제작되었다. 인쇄가 1,2,4페이지에 이루어지고 3페이지에는 전면 석판화로 된 삽화가 나타난다. 영국에서는 “펀치”(punch)라고 제목을 붙인 이 신문은 사회풍자와 독특하게 정치 풍자로 1세기 이상 존속하였다. “르 샤리바리”지에 도미에는 거의 10년 동안 풍자적 삽화들을 개제하였으며 1000여점에 달하는 석판화를 남기게 된다. 이것이 21권의 소책자로 정리되어 1840년대 출간하는데 주제별로 보면 200여점이 편호사와 고위 공직자로 비판적 인물들이고 나머지는 가난한 거민들과 중류계급을 풍자한 인간들이 대부분이다.
도미에의 스승은 루브르에 있는 루벤스 작품으로 초기 그는 바로크적 경향을 띄게 된다.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다시 언론 및 출판을 억압하자 도미에는 돈키호테같은 풍자적 소설의 인물을 그리기도 하고 수채화 석판화로 계속하여 사기꾼이나 가짜배우, 그리고 초점 잃은 눈을 가진 청중과 소란한 법정, 기차나 극장에서의 졸고있는 인간들을 사실과 거짓이 혼합된 것처럼 극화되어 그린다. 이러한 서민들의 모습은 당시 패션을 비웃고있었으나 시대에 뒤떨어지고, 세련되지 못하다고하여 52세가 되던 해 도미에는 “르 샤르바리”에서 해고당한다.
그후 도미에는 3년동안 슬럼에서 은거하며, 싼 가격에 그의 그림과 수채와 작품을 팔러 다니고, 그것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수채화를 석판화보다 대중들에게 어필하게 그리고 감각적이도록 의도하였다. 1863년 12월 “르 샤리바리”지는 도미에를 다시 복귀시켰지만, 여전히 싼 월급에 가난과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60세쯤, 도미에는 시력을 읽어가면서도 상상력을 가지고 날카로운 내적세계를 나타낸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으리거나 프랑스 황제의 멸망을 고전적으로 그리면서 말년을 보낸다. 검열관들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는 태풍속의 휴지조각들 움직임처럼 빠른 속도로 석판화를 그렸다. 그의 석판화는 인간의 참모습이며 희망적인 프랑스 정치의 열망으로 기록된다. 그는 유화보다 돌과 더욱 친숙하여 끊임없이 일주일에 한두번 파리인들을 즐겁게 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맹렬하고 거침없는 비판과 카페, 극장, 가게, 버스, 철도등 친숙한 장면들을 돌위에 새기듯 힘있게 열심히 그렸다. 총 4000여점에 달하는 그의 선판화제작은 아마 당시 전 화가들의 석판화 제작 수를 합친 것보다 많을 것이다. 한 때 상류계습의 반항아이며 익살꾼이라고만 생각하였던 도미에는 이제 당당한 예술가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그는 독창적 판화가이며 동시에 정이 많이 가는 몇몇 위대한 예술가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b) 사진과 판화
판화와 같은 손작업은 종이의 발명만큼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나 사진은 화학과 광학의 발달과 관련된 것으로 19세기 중반에서야 나타난다. 1839년 1월 혹스 탈보트(Fox Talbot)는 런던에서 현상작용인 네가티브와 포지티브(negative-positive)과정을 발표하였고, 8월 프랑스인 다게르(Daguerre)는 파리에서 다게르 타입(daguerreo type,은판 사진법)을 발표하여 사진의 역사가 시작된다. 다게르가 만든 은판에 찍는 사진 발명은 사물을 매우 정확하게, 그야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탈보트는 종이의 네가티브 현상만을 발명하여 사진기를 만들었던 다게르보다 명성이 높지는 않았으나 판화와 같은 기법으로 동등한 이미지의 복제를 인화하는 사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1850년 이후 모든 역사적 인물의 모습은 한 화가가 그리는 초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진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다. 마케라가 초상화를 아주 없애지는 않았지만, 화가들로부터 사실성의 재현이란 역할을 빼앗아 감으로 예술가들을 가난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진은 또한 사용하게 됨에 따라 가장 손쉬운 스케치로써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드가는 다게르 타입의 사진을 보고 초상화의 기초작업을 하였고, 도미에는 출판업자에게 자신의 판화 배경에 건축배경이 있는 사진을 응용하도록하였다.
이제 화가들은 전세대 사람들이 에칭과 석판화로 유화를 위한 밑그림을 작업했던 것처럼, 대작을 위해 사진을 실헙하였다. 1843년 영국의 다비드 힐(David Hill)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300여명 성직자 예식을 그릴 때, 탈보트의 새로운 사진술을 이용하여 역사적인 사건을 리얼하게 표현하였다. 사진사와 함께 그는 성직자들이 각자의 교구로 흩어지기 전에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얼굴과 동작들을 사진으로 찍어 그림을 그리는데 참고로 하였던 것이다. 사진은 인물의 전신을 표현하는데 3분의 시간만 빌리면 되었으며, 순간적인 동작을 정확하게 포착하였다. 이에 사진은 점점 더 매력적이 되었으며, 또한 전쟁이나 신기한 풍물들을 카메라가 그대로 기록하고 실감나게 보여주어 판화의 역할을 점점더 미약하게 하였다. 다만 정성스런 인그레빙판화나 석판와 등은 그 독특한 감각과 예술성으로 기념품이나 출판물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통적인 동판 조각사들은 그런대로 원시적 사진보다 인쇄등에 많이 활용되고있었다. 책이나 고급 인쇄물에서 은판 사진법은 인그레빙이나 에칭처럼 명확하고 선명하게 나타낼 수는 없었다. 일반 사람들 역시 전문가들에 의한 붓과 끌의 자국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 판화는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다. 판화는 단순한 인쇄술의 한부분으로 사진술처럼 복제와 시각적 효과를 잘 나타내는 기술적인 문제에만 매달리게 된다.
판화의 대량생산은 커다란 판에 활자와 함께 값싸게 프린트 할 튼튼한 철판이 만들어지면서 부터이다. 1885년 필라델피아의 이브스(F.E.Ives)는 작은 점들이 수없이 파진 강판을 발명하였다. 그 후 매우 정확한 프레스와 부드러운 종이 개잘의 무제가 해결되면서 강판을 이용한 판화는 그야말로 대량생산에 의해 더욱 값싸고, 질도 좋은 세밀하고 정확한 인쇄물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것들은 수공으로 만든 인그레빙에 대치되나 예술적인 면보다 그야말로 인쇄의 효과만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판롸가들은 단순한 기술자, 그것도 낙후된 기법의 수공예와 같은 기술자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사진과 인쇄술의 발달로 판화 공방의 직인들은 영세성을 면치 못하며,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었던 해부학이나 생물학을 위한 일자리도 빼앗겨 점점 더 그들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6-4. 인상주의 판화가들
a) 마네(1832-1883)
인상주의란 19세기 후반인 1960년 이후 프랑스에서 발전했던 회화의한 유파 이름이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느낀 자연의 인상을 가장 순수하고 단순하게 묘사하는 회화적 체계”를 말하며 이들은 자연 광선인 빛에 의해 변화하는 사물의 색채를 과학적, 감각적으로 찾아내었다. 그리고 인상주의 미술가는 일반적으로 전통적 표현의 구애없이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느낀 이상에 따라서 대상을 올바르게 재현하려 하는 화가들이다. 인상주의는 회화에서 시작되고 회화에만국한된 느낌을 주는 미술운동으로 판화에 있어서 인상주의 운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인상주의 거장 중에 나름대로 판화 기법을 개발하거나 응용하여 자신의 개성적 표현을 넓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 인상주의 선두 주자로 인정을 받았던 마네(Manet)는 1860년경부터 에칭과 석판화를 제작했다. 특히 그의 스페인 여행은 벨라스케스 그림과 고야의 아쿠아틴트 판화를 보고 깊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마네의 판화는 자신의 회화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마음에 드는 자신의 그림을 에칭으로 다시 제작하여 축소한 회화의 느낌을 갖게 하였다. 마치 작품을 사진 찍듯이 정확하게 복사하는 방법으로 판화까지 4장 이상의 판을 되풀이하면서 만들어 색채가 배제된 화면구성을 탐구하였다.
출판사를 위한 마네의 석판화 제작은 회화 못지 않는 비판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단순한 흑백의 명암처리와 거의 입체감이 없는 평면적 인물과 사물들의 단순한 표현은 추상화에 가깝게 느껴진다. 출판업자의 요구로 만들었던 미국 소설가 에드가 알렌포우의 시집 <갈가마귀> 삽화는 마네의 독창적 석판화로 인정받게 되나 상업적으로는 완전히 실패한다. 이후 마네는 거의 판화 작업에서 손을 떼고 회화에만 몰두하게 된다.
마네와 같은 경향의 인상주의 화풍으로 판화를 제작한 이탈리아 화가 지오바니 파토리(Giovanni Fattori)가 있다. 그 역시 화가로 잘 알려졌으나 1880년대부터 시작한 에칭은 1908년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많은 판화 작품을 남긴다. 피렌체에서 활동한 파토리는 로코코 화가 티에플로와 같은 밝은 분위기 작품을 제작하는데 무엇보다 그는 터어키의 황량한 사막과 바위, 먼지와 뜨거운 8월의 태양 등을 에칭으로 만들었다. 그는 값싼 아연판을 이용하였는데 이는 파손이 잘 안되어서 다행스럽게도 마네의 것과 같이 죽은 뒤에도 프린트 할 수 있게 손상되지 않고 남아있다.
b) 드가 (1834-1917)
드가(Degas)는 아카데미즘으로부터 명확한 형태와 선명한 색조를 배우고, 일본 목판화들로부터는 지옷토나 라파엘의 입체적 표현과 전혀 다른 평면적 효과를 배운다. 또한 신고전주의자인 앵그르에게서 선의 왜곡에 대한 조절을 연구하고 도미에로부터는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그리는 소재를 배운다. 거리의 평범한 인물과 다리미질을 하는 여인이나 하품을 하는 사람들의 순간적 포즈에서도 그는 활기를 찾아 내었다. 드가는 뒤러와 피카소 못지 않게 다양한 표현매체를 모색하였다. 지성과 열성으로 그는 회화, 파스텔화, 조각과 사진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드로잉과 판화제작을 탐색했다.
사진에 있어서 아마추어 단계를 넘어선 드가는 판화처럼 찍히는 현광기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복합노출(multiple exposure)의 판유리 작업으로 사징르 제작한 최초의 사진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사진들이 남아 있지 않아 상상에 맡길 뿐이다. 드가의 판화들도 희귀하여, 20여점의 동판화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그의 변화과정을 추측하게 된다. 고야의 판화는 대부분 에칭과 혼합된 아쿠아틴트 기법으로 제작된 동판화이다. 그의 화면 구성이나 사물들의 단순한 묘사들은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아 유화작품보다 더 평면성을 강조한 느낌이다.
또한 드가는 드로잉처럼 한 장만 그려지는 모노타잎 판화를 만든 최초의 화가라고 볼 수 있다. 187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이르기까지 그는 동판에서 생기는 우연한 효과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한판만 찍어내는 모노타잎에 몰두하였다. 대부분 미완성의 ‘얼룩’ 모노타잎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드가의 회색톤 작품은 이러한 모노타잎과 연관성이 많다. 그가 즐겨 사용하던 단색조와 정밀한 선들이 서로 용해되고 있다. 드가는 자신의 모노타잎 테크닉을 <대사(Ambassadeur)>라는 나이트클럽을 그린 석판화에도 실험하였다. 여기서 드가는 고야가 말년에 단색조의 석판화 <투우>를 그렸던 것처럼 회색과 하이라이트만으로 전체를 묘사하였다.
드가의 유일한 제자인 메어리 카싸트(Mary Cassatt)는 대표적 인상주의 판화가라고 말할 수 있다. 역시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하여 아쉬운 점은 있으나 일본 판화의 영향과 드가의 칭찬속에 독특한 채색 석판화를 만든 판화가이다. 보수적인 가족으로부터 일찍 벗어난 미국의 필라델피아 태생인 카싸트씨는 프랑스에서 소녀시절의 반을 보내고, 21세때는 파리에 영원히 정착하였다. 회화에 대한 기초 훈련을 마스터한 후 그녀는 인상주의 화풍에 빠져든다. 그것이 33세때였으며 드가의 영향이 대단히 크다.
카싸트는 드가와 함께 일본 판화를 연구하고 여성적 부드러운 선묘의 개성적 판화작품을 만든다. 그의 석판화에 나타난 소재들은 화장하는 여인들과 옷장이나 책상, 티테이블, 아기들의 유모차 등 친숙한 것들로 부드럽고 우아한 표현성이 돋보인다. 카싸트는 채색 석판화를 즐겨 만들었으며 에칭인 드라이포인트 등 동판화도 제작한다. 이러한 실험적 자세로 그녀를 새로운 비젼을 발견한 예술가로 세기말에 매우 주목받았던 여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드가의 그늘에서 벗어난 그녀의 오리지날리티는 회화보다 판화에서 살아났으며 석판화는 그녀의 통찰력을 가장 잘 나타낸 독특한 매체였다.
c) 뚜르즈 로트랙 (1864-1901)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나 수묵화가들 가운데는 관료적 귀족 출신들이 많았던 것에 반해 유럽의 상류계층 사람들은 글쓰기나 그림 그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가운데 19세기 후반 귀족 출신으로 뚜르즈 로트렉(Toulouse-Lautrec)은 인상주의 시대 화가로 독창적 화풍을 보여준 작가이다. 그러나 그도 아마 10세 때에 말을 타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그의 사촌들과 사냥과 무도회에 참석하느라고 다른 귀족들처럼 미술품 수집에만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가정해 본다.
로트렉은 부상당해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면서 귀족사회에서 뛰쳐나와 파리의 매춘부와 댄서들 속에 몸을 내던졌다. 그들 속에서도 로트렉은 작은 키와 절룩거리는 걸음은 놀림감이 되었고, 조롱으로 고통받아 움츠러들기만 하였다. 그러나 삶에 대한 그의 열정은 36세가 되었을 때, 예술로 타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그림을 바탕으로 파리에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사귀면서 새로운 미술운동에 관심을 갖고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재능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드가의 무희 그림과 일본 판화들을 보고 흉내를 내면서 간략한 묘사력을 배운다. 크로키처럼 빠른 시간안에 그려지는 로트렉의 인물들은 캐리커쳐와 비슷하지만, 순수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주목받을 만한 인상적 작품들이였다.
한편 그는 색채 석판화(color lithography)를 배우면서 전문적으로 판화를 제작한다. 색체 석판화는 모노크롬이 아닌 다색으로 무엇보다 간략한 필선과 선명한 색면의 평면적 효과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다.
로트렉은 26세 때에 포스터를 위해 그이 최초의 석판화를 그렸다. 그는 유화보다 석판화와 특히 포스터로 나타낸 인쇄물을 더 좋아하였다. 그의 다색 석판화와 포스터는 여전히 명작과 같이 오늘날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노란색과 주황색과 검은색의 대비가 선명한 로트렉의 포스터가 판화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다색 석판화는 어떤 판화의 기법보다 회화에 가까운 표현방법이다. 로트렉은 여기에 해묵과 리토 크레용을 사용하여 그의 소재가 되었던 <물랭루주>술집 정경과 인물들이 잘 표현되었다. 로트렉이 관례적 판화기법에서 벗어난 것은 독립된 장르의 예술로 새로운 판화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며 근대에 있어서 판화에 이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작가는 19세기 말 후기 인상주의 대표적 화가인 고갱으로 그의 원시적 성격의 목판화이다. 이들은 단순한 판화기술을 개발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시대의 요구에 충족시키는 적응력과 예술적 가치로 판화의 세계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였다.
-서양판화사 [르네상스부터 19세기 근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