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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19장 36절, 사무엘하 11장 3~4절, 마태복음 26장 14~16절, 로마서 6장
롯의 두 딸이 드디어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창세기 19장 36절, 새번역>
다윗은 신하를 보내서,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 보게 하였다. 다녀온 신하가,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로서,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데려왔다. 밧세바가 다윗에게로 오니, 다윗은 그 여인과 정을 통하였다. (그 여인은 마침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 다음에 밧세바는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사무엘하 11장 3~4절, 새번역>
그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사람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태복음 26장 14~16절, 새번역>
창세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정말 이런 기록까지 성경에 등장하는구나!'하고 놀라는 구절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 바로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과 두 딸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그 곳에 있었다면 그 유혹에 넘어갔을 것이 확실했기에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인간이 가진 질투의 무서움을 알기에 이것도 이해해 보려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내린 후 술에 취한 모습도 측은한 마음으로 이해가 갔습니다. 바벨 탑을 지은 인간들의 심리에는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복 누이이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요청으로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된 것도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라 입장에서는 자신이 자녀를 낳지 못하니 첩을 통해서라도 가문을 이어갈 자녀가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고, 공감도 되지 않으며,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가 바로 '롯과 두 딸의 이야기'입니다. 이건 실수가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고, 하지 말았어야 할 일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창세기 19장의 이 이야기를 끝으로 '롯'이라는 인물은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롯과 두 딸이 행한 일이 하나님 앞에서 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입니다.
'롯과 두 딸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한 가지 결심을 해야 합니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행동 때문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너무도 쉽게 '실수'란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죄'라는 녀석이 우리를 그렇게 유혹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죄를 지어봄으로 인해서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죄도 지어봐야 잘 못된 줄 아는 거라는 헛소리에 넘어가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으려고 계속 죄를 지어야 하겠습니까? <로마서 6장 1절, 개역개정>
죄를 짓고 난 후에 경험하게 된 하나님의 은혜가, 평소에 느끼는 은혜보다 더 깊고 넓었다고 해서, 더 많이 죄를 짓고 더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더 죄에 둔감해 지는 것입니다. 그저 의도적으로 죄를 짓기 위한 핑계에 불과합니다.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다윗왕은 자신에게 충성하고 있는 부하 우리야의 아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사람을 시켜 그 여인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양심의 가책 없이 그 여인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다윗왕의 이 행동은 결코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서도 자신의 욕구를 위해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다윗은 신하를 보내서,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 보게 하였다. 다녀온 신하가,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로서,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데려왔다. 밧세바가 다윗에게로 오니, 다윗은 그 여인과 정을 통하였다. (그 여인은 마침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 다음에 밧세바는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사무엘하 11장 3~4절, 새번역>
하나님이 이런 행동을 한 다윗을 보시며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상전의 왕궁을 너에게 넘겨 주고, 네 상전의 아내들도 네 품에 안겨 주었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나라도 너에게 맡겼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무엇이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어찌하여 나 주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하였다. 너는 이렇게 나를 무시하여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다가 네 아내로 삼았으므로, 이제부터는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사무엘하 12장 8~10절, 새번역>
그토록 사랑하던 다윗이 딱 한 번 실수한 거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 너무하다고 생각이 드신다면 '착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까지 감싸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의도적으로 행했습니다. 이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죄'였습니다.
3년이나 바로 옆에서 지켜 봐온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분이 어떻게 자신들을 사랑했는지, 그 분이 보여주신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 그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였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돈'과 '예수님' 사이에서 계속해서 망설이던 가룟유다는 '한 여인의 옥합 사건'으로 말미암아 참고 있던 욕심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너무도 화가 난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사람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태복음 26장 12~16절, 새번역>
겨우 은화 30개에 예수님을 팔아 넘길 생각을 가진 가룟유다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라도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습니다. 더더욱 제자가 스승을 팔아 넘기다니! 어떻게 이 일을 실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이 행동을 하기도 전에 이미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마태복음 26장 24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실수 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죄악인줄도 모르고 행하는 수많은 '실수'를 반복하는 죄인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알고도, 의도적으로, 계획하여 행하는 일까지도 '실수'라는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모르고 실수했다면 얼마든지 용서를 구할 수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알고도, 의도적으로, 계획하여 행하는 일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원하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믿음으로 서고 싶으시다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Coram Deo'의 삶을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결코 하지 않아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을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할 수 있는 일들에 더욱 집중하여, '하라'와 '가라'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은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로마서 6장'을 함께 나누길 소망합니다. 천천히 이 로마서 6장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혹여라도 우리 안에 잘 못 자리잡고 있는 생각이 있다면 과감히 버리고, 말씀 위에 서게 되는 시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여러분! 하지 말았어야 하는 행동에 '실수'라는 핑계를 대지 맙시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침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로마서 6장 1~23절, 새번역>
https://www.youtube.com/watch?v=nL8jIi_bJBc
https://www.youtube.com/watch?v=-3l9REHXcks&list=PLVbVhDrpd5BfwFUzCYS-5-pZLF5BQ5gKF&index=16
https://www.youtube.com/watch?v=WhNFWe-H_6I
https://www.youtube.com/watch?v=sdRfNdTIK90
https://www.youtube.com/watch?v=lW7GFnLmq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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