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ing Home
격세지감은 당사자인 가수뿐만 아니라 팬들도 몸으로 느낀다. 한때 팝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천하명장이라도 시간이 갈수록 알아주는 이는 점점 줄어들고 설 자리는 계속해서 좁아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결국 세월 앞에서는 다들 힘없는 존재로 돌아감을 실감하게 된다. 실력 있는 후배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와 긴장감은 몸에 절어있으며 세상은 변화무쌍하게 흘러가고 기다림의 온정을 베풀지 않아 야속하기만 하다. 그 흐름의 체감 속도가 너무나 빨랐던 탓인지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가 잠시 자리를 비운 지 2년밖에 안 된 지금, 그가 내미는 명함의 크기는 훨씬 더 작아진 것처럼 보인다.
코모도어스(The Commodores) 시절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Three times a lady', 'Sail on' 이후 본래 코모도어스와 라이오넬 리치의 음악적 색상은 뚜렷이 나뉘게 된다. 그가 작곡한 케니 로저스(Kenny Rogers)의 히트곡 'Lady',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와의 듀엣곡 'Endless love'를 통해 어덜트 컨템퍼러리 팝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라이오넬 리치의 이름을 각인시킨 'Hello'와 'Penny lover', 'Say you, say me'는 그가 갈 길을 확실히 증언하는 곡이었다.
장기간 휴면을 취하면서 많은 일을 겪은 라이오넬 리치는 조금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 욕심을 냈다거나 시류에 재빨리 반응했다는 표현이 더 정직할지도 모르겠다. 10년 만에 발표한 앨범 < Louder Than Words >(1996)부터는 당시의 커다란 흐름이었던 뉴 잭 스윙과 어반 계열의 경량화한 분위기를 조금씩 덧대어보기 시작했지만 성적은 86년까지의 화려한 시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볼품없었다. 하지만, 팝 차트 대부분의 칸을 가벼운 힙합과 알앤비가 점유하고 있는 요즘, 이전에 행했던 꾸밈은 다가올 날에 적응하는 것이기에 차라리 바람직한 결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라이오넬 리치는 다시 한 번 고민한다. '돌아갈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이제 그는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의 알앤비가 목적지인 배에 탔지만 어덜트 음악의 정박지에 미련 섞인 고개를 돌리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심리적으로 힘을 줄 수 있는 건 노련한 뱃사람이다. 엘에이 레이드(L.A. Reid) 선장을 중심으로 댈러스 오스틴(Dallas Austin), 저메인 듀프리(Jermaine Dupri), 와이클레프 장(Wyclef Jean), 라이오넬 리치의 여섯 번째 앨범 < Renaissance >(2001)에서도 참여한 바 있는 로드니 저킨스(Rodney Jerkins) 등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실력파 선원들을 대동했으니 (딱 잘라 말하면) 이제 맘 편하게 놓고 노래만 열심히 부르면 된다. 20년 전에 했던 음악에 정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걸 불러도 되고.
그렇다고 해서 < Coming Home >에 담겨있는 곡들을 어반 음악과 어덜트 컨템퍼러리로만 양분해놓은 것은 아니다.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경쾌한 삼바 리듬에 실어 노래하고('All around the world'), 사람들에게 서로의 치열한 경쟁에서 물러날 것을 권유하는 메시지를 레게 음악으로 나타내기도 하며('Stand down'), 업템포('Up all night')와 미드템포('I'm missing her', 'Sweet vacation')의 알앤비 넘버를 골고루 수용하면서 시원시원한 진행을 보이고 있다.
'Hello'의 차분한 분위기가 너무도 흡사한 발라드 'I love you'는 라이오넬 리치의 안정적인 감성을 가장 자연스럽게 풀어낸 노래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어덜트 컨템퍼러리 음악을 좋아하는 팬 심(心)을 놓치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방어로 볼 수 있으며, 아직까지는 그 자신도 과거의 음악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가장 큰 아쉬움은 최신 시호(時好)의 음악을 입고 나왔지만 과연 그것이 라이오넬 리치가 편히 소화해낼 수 있는 것이었는지, 또는 남들 이목에만 신경 쓴 채 유행을 뒤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첫 싱글 'I call it love'가 그렇다. 이 노래는 환갑을 바라보는 가수가 부르는 제2의 'So sick'에 불과하다. 기타와 키보드의 진행 패턴, 코러스 구성, 드럼의 양감마저도 똑같이 겹쳐지는 곡이다. 아니나 다를까 네-요(Ne-Yo)의 'So sick'을 만든 미켈 에릭슨(Mikkel S. Eriksen), 토르 에릭 허맨슨(Tor Erik Hermansen) 콤비가 함께 작곡과 프로그래밍을 맡았고 믹싱 기사까지 케빈 데이비스(Kevin Davis)로 동일하니 국화빵 같은 노래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조금은 기대에 어긋나는 요인들이 존재한대도 라이오넬 리치의 복귀작은 '다양한 느낌'의 '듣기 좋은 팝'을 전달하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박수를 받을 만하다. 자극적인 가사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나름 노장의 매력이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현재의 반응을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의 인기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 Coming Home >은 낙치부생(落齒復生)하기를 바라는 팬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답례가 될 것이다.
-수록곡-
1. I call it love
2. Sweet vacation
3. Why
4. What you are
5. Up all night
6. I'm coming home
7. All around the world
8. Out of my head
9. Reason to believe
10. Stand down
11. I love you
12. I apologize
2006/10 한동윤 (bionicsoul@naver.com )
-출처 iz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