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독도문제입니다
서론 독도분쟁이 발생한 배경과 현황
독도는 지증왕 13년(1512년) 신라에 우산국(울릉도)이 편입 되면서부터 울릉도에 속해있는 독도는 신라의 땅이 되었음을 삼국사기에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으며 그 후 세종실록 지리지에 울진현 정동正東에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가 바다 가운데 있으며 두 섬은 가까워서 날이 맑으면 보인다는 기록이 있다, 독도의 옛 이름은 우산도, 삼봉도, 가산도, 가지도 등의 명칭으로 불렀다, 독도가 우리 땅임은 역사를 알면 누구라도 부정 할 수 없는 것이다,
*독도가 한국 땅이란 증거 들이 있는 한국자료는 다음과 같다.
1145년 삼국사기
1454년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왕조실록(태종실록 외)
1481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증보)
1696년 숙종실록
1697년 번례집요
1744년 춘관지
1809년 만기요람
1823년 해동탁사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
강원도관찰사서리 이명래 보고서
대한제국 내부대신의 지령문
의정부 참정대신의 지령문
대한매일신보(5.1)
황성신문(5.9)
황현의 오하기문
매천야록
1908년 한국 수산지 증보문헌비고
1952년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
*독도의 연표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 우산국 정벌 신라영토에 귀속시킴 (삼국사기)
930년
고려태조 13년 고려에 귀속
1401년
공도정책
1425년
우산도로 호칭
1454년
(단종 2년)에 왕성 된 세종실록 중 권148권에서 권 155까지의 8권 8책에 지리지로써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하는데 권 153강원도 울진현조에 그 부속도서 로써 우산도와 무릉도를 열거하고 이들의 개략적인 위치를 우산, 무릉2도 재현 정동해중 2도 相距不遠 風月淸明卽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기록은 독도와 울릉도의 관계를 뚜렷이 밝힌 세계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되며 세종 14 년(1432년)애 편찬된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머리에 밝히고 있다.
1469년
삼봉도로 호칭
1693년
자산도로호칭 동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근해에서 왜인발견퇴거 안용복이 은기를 거쳐 도일 덕천관백에게 출어금지서계 징구 울릉도 일본어민 퇴각
1697년
3년마다 정기적인 치안 확보
1881년
(고종18년) 울릉도 개척령 반포 (척민정책) 일본어민의 울릉도 근해 출어에 대한 일본정부에게 엄중항의
1900년
10월 27일 (대한제국 광무4년) 관보 제 716호의 칙령 제41호 울릉도, 즉도 석도(독도)를 울릉군수가 관할토록 함.
1905년
2월 22일 독도의 일본령 편입결의 도금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편입 발표
1905년
독도망루설치 해군통신기지로 이용 광무 10년 3월 5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 보고서 「매천야록」에 독도 관련기록
1910년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경삼남도 울도군으로 편제
1910년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1914년
경삼북도 울도군으로 편제
1946년
1월 29일 SCAPIN 제677호-연한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해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
1948년
6월 30일 미공군 폭격연습중 독도출어중인 어민 30명 희생 한국정부의 항의에따라 1953. 2,27자 미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 1951년 6월 독도 조난어민 위령비 건립
1952년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사 독도를 기점으로 평화선을 선포함
1953년
일본이 미국기를 게양, 조난어민 위령비 철거, 일본영유 표지 설치, 한국 어민 독도근해조업에 대한 항의.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일본에 항의각서 발송 그해 8월 5일 영토비 건립, 해양경비대 파견 협의
1953년
4월 27일 울릉도 주민(33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대장 : 홍순칠)
1954년
항로표지(등대)설치. 동년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6년
4월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인수결정
1956년
12월 30일 경비임무 인계인수 1966년 4월 12일 수비대장 홍순칠 공로훈장 수여
1980년
최종덕 독도 전입
1981년
헬리콥타 이착륙 시설
1986년
7월8일 동인의 사위 조준기(61. 3. 20 생) 주민등록 전입 (가족 3명) 6개월간 어로작업목적
1991년
11월 17일 김성도(56세) 외 가족 (1명) 전입(서도) 울릉경찰서 독도경비대 32명 근무 (동 도)
1993년
레이다 기지 설치
1996년
접안시설공사 착공
1997년
울릉읍 도동에 독도박물관 건립
*일본이 한국 땅 으로 인정하는 일본자료는 다음과 같다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증명하는 주요 일본측 자료】
1748년 조선경도일본대판서국해변선로지도 - "울릉도와 우
산도(독도)"를 조선영토로 나타내고 있음.
1785년 삼국총람도설(일본학자 임자평 발행지도, )
1870년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일본외교문서 수록)
- 일본내무성은 조선과의 국교확대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
하기 위하여 일본고위성 관리를 1869년 부산에 파견. 내탐결과를
보고하면서 "죽도(울릉도), 송도(독도)가 조선의 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1873년 조선전도(일본해군 발행지도) - 우산도 표기.
1875년 조선전도(일본육군 참모국 발행지도) - 송도(松島)로 표기.
1876년 조선동해안도(일본해군 수로부 발행지도) - 독도가 조
선동해안도에 표기되어 있다.
1877년 대일본도(일본육군 참모국 발행지도) - 일본전도 내에
독도가 없다.
일본내무성 공문서(일본국립도서관 소장)
- 일본내무성은 1876년 일본 국토의 지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
마네현이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현에 포함할 것인지 말것인
지를 묻자,내무성은 5개월간 부속문서와 조선관련문서들을 검토한 후
'두 섬은 일본과 관계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사안이 중대하여
일본 최고기관인태정관에 문의하여, 태정관은 재차 '일본과 관계
없다'라는 최종결정을 내렸다.
1880년 동국여지전도 - 조선전도에 죽도(울릉도)와 松島(독도)를
표기
1882년 동판조선국전도(일본인 기무라 편찬, ) -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조선과 동일한 색채로 표기, 조선영토임을 표현.
1883년 환영수로지 제2권 조선국일반정세(일본수로국 발행) -
독도를 리앙코르암으로 설명하면서 조선영토로 설명.
1888년 집제20만분의1도(일본육군성 참모본부 발행지도) - 일본전
구기도로 독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1894년 조선수로지(일본해군 수로부 발행) - 독도를 '리앙꼬르'암
이라고 표기하면서 조선수로지에 기록(1894년, 1899년판)
1907년판에는 독도를 '죽도'라 표기하면서 조선수로지에 독도관련
사항을 기록.
1903년 한해통어지침(도쿄 흑룡회 출판부 발행) - 123쪽에 "강
원도에 속하는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30리에 있으며,맑은 날에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이 곳을 볼 수 있다며" 기록.
1904년 소학지리용 신지도(일본문부성) - 독도의 좌표를 표기
하고 竹島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표시하면서 독도가 한국령임을 나
타냄.
1910년 대일본분현지도첩 - 조선전도에 독도를 竹島로 표기하였
지만, 시마네현 전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음.
1927년 최근일본지도(일본 도쿄 삼성당 발행, 중등학교 지리교과서)
- 일본지도에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음.
1930년 일본지리대계(일본 개조사 발행, 백과사전)
- 138쪽 울릉도 사진과 함께 '울릉도 부속도서로서 관음도와 竹島(
독도), 그밖에 많은 암초들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기록하여 울릉도의
부속도서임을 증명함.
1933년 조선연안수로지(일본해군 수로부 발행) - 독도는 울릉
도의 부속도서로서 조선의 영토로 다루어짐.
1936년 출판지도구역일람표(일본 육지측량부 발행, ) - 조선
부분에 울릉도와 竹島(독도)를 표기
1937년 수산시험장보고 제5호, 조선동근해측심성적(조선총독부
발행)- 독도를 竹島로 표기하고, 조선의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라고
소개하여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나타냄.
1945년 조선연안-간역수로지(일본해군 수로부 발행) - 독도는 울
릉도의 부속도서로서 조선의 영토로 다루어짐.
1946년 지리일람도(일본내무성 발행지도) -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음 |
그르나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대한민국 인접 해양 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선포하고 10일 만에 일본이 평화선을 인정 못한다고 항의 함 으로 인해서 독도영토문제는 생기고 이승만대통령은 평화선을 넘어오는 일본어선을 잡아오게끔 하여 일본의 주장은 잠잠하였으나 우리정부의 대통령이 바뀌고 안일한 정책에 일본정부는 일본 땅 이란 주장을 더욱 많이 하게 되었다,
독도역사찾기 운동본부의 주장 전문.
1. 일본은 오래 전부터 독도를 자기영토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영유권자인 한국정부는 이런 해적 같은 요구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일본의 주장에 맞대응 하면 국제적인 분쟁지가 되어 한국에 불리해 진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미 50년 전부터 독도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분쟁지로 분류되어 왔다. 한국 정부가 인정하거나 말거나 분쟁지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멀쩡한 우리 영토를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세계를 향해 외치고 온갖 공작을 하는데 우리만 입다물고 손발 묶어 놓고 가만있으면 분쟁지가 안 된다는 주장은 강도가 칼 들고 협박하는데 나만 손으로 두 눈 가리고 안보면 강도는 없어진다는 주장과 꼭 같다.
세계에 약 29개 정도의 분쟁지가 있는데 독도는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분류되는 분쟁지에 속한다. 이는 이미 세계의 유명한 국제관계 책자에 다 실려있는 바이고 외교가의 상식에 속하는 사항이다.
2. 세계 여러 나라의 주요 지도에는 이미 다께시마가 일본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일본정부는 다께시마(독도)가 일본영토로 표기되도록 온갖 노력을 50년간 기울여 왔다. 덕분에 NASA지도 CIA지도는 물론이고 세계 대부분 국가의 지도에 독도는 다께시마 일본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는 한국에서 가까운 동아시아 지역의 지도에도 그렇게 실려있고 그 나라 국민들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다. 한국 외교당국자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구경만 해왔다.
그동안 잘못된 교과서를 고친다고 설치면서 국고만 축내왔는데 정작 우리 영토가 남의 땅으로 기록되는 것은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고 있었다. 이제 세계 사람들이 보기에 독도는 분명한 일본영토이다. 만약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주장한다면 아마 남의 나라 침략을 일삼고 땅을 빼앗는 해적 떼나 날강도로 취급 할 것이다. 온 세계가 나서서 한국을 규탄하고 침략자를 응징하자고 들 것이다. 이게 세계 사람들의 인식이다. 한국은 세계 여론으로부터 따돌림당하고 땅을 빼앗기게 생겼다. 이게 한국정부가 입다물고 있었던 결과이다.
3. 독도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나빠져 왔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 고유의 영토였고 2차대전이 끝나면서 연합국이 한국 영토로 인정해 돌려준 땅이다. 일본이 한국전쟁이라는 기회를 이용해 불법으로 탈취를 시도했지만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독도의용수비대가 지켜낸 땅이다.
그런데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될 전후에 김종필이 일본측에 독도폭파안을 제기하는 등 독도를 소중한 영토가 아니라 내 다 버려야 할 방해물로 다루기 시작했다. 오히려 일본이 말려 독도는 무사했다. 그 후로도 일본은 빼앗아 간 독도를 다시 내어놓으라는 주장을 한국 외교당국자와 국제사회에 매년 공식적으로 줄기차게 제기해왔다.
그러나 한국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국제법적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은 자기 영토에 대한 권리주장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는 행위를 해 온 셈이다. 이후 독도에 대한 무관심만 이어지다가 1996년 일본이 독도를 일본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점으로 삼는다는 하시모토 선언이후 독도는 잠시 국민의 관심 속에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잊혀진 일이 되고 말았다.
1999년 1월 한일어업협정을 통하여 독도는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관리해야 하는 상태로 바뀌었다. 2차대전 이후 독도는 확고한 한국 영토였지만 점점 나빠지다가 이제는 공동영유상태로 바뀐 것이다. 조금만 시간이 더 가면 독도는 일본 영토로 바뀔 것이다. 모두가 가만있는 것이 좋다는 논리가 빚어낸 결과이다.
4. 문제회피는 국민들의 의식에서 독도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영토를 지키는 데는 군사력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이다. 국민들이 잊어버린 영토는 아무리 군사력이 강해도 지켜낼 수가 없다. 독도를 늘 국민들의 관심 속에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독도를 찾는 지름길이다.
국민들의 결집된 힘이 움직이지 않으면 영토는 지켜낼 수가 없다. 국가관계를 어떻게 잔재주로 해결할 수 있는가. 많은 국민과 더불어 그 힘을 합쳐서 해결하자면 정면으로 문제를 풀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기기묘묘한 수가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은 국민을 속이기 위한 잔수에 불과하다. 속지 말자. 정치인과 관료들의 거짓말에. 그리고 한국인을 가장한 친일세력의 농간을. 요즈음 교묘한 억지 주장이 많다. 결국은 독도에 아무 일 없다는 허위사실을 유포시켜 우리 국민의 마음을 해이하게 만든 뒤에 독도를 차지하려는 일본세력의 앞잡이들이 벌이는 수작을 경계하자. 그들은 허울은 우리민족이지만 마음은 일본에 있는 사람들이다.
독도역사찾기운동본부
현황
지금 현제 독도는 국제여론으로 본다면 독도를 아는 대다수의 외국인들은 일본 땅으로 인식
하고 있다. (홍콩경제신문설문조사. 아시아권에 경제인들이 65% 정도가 일본 땅으로 인식 )
1998년도 영국 타임즈 지도에는 독도를 다케 시마로 표기
1999년도 미태평양 사령부 지도와 미 C I A 지도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
그 외 대다수 외국 지도는 일본 땅으로 표기하고 있음
2002년 이후에 반크 회원들의 활동으로 세계지도에 독도와 다케 시마 병기해서 표시한 지도가 많다.
반크는 계속 독도를 홍보 하지만 각국 싸이트는 들어주지 않고 있다.
독도주변의 수역
대마도와 한국 중간은 해양경계선이 있으나 독도와 일본 오키도 중간은 경계선이 없고 울릉도와 오키도 중간이 독도를 포함해서 중간수역(일본 은 공동수역)이 되었다. 독도에서 12해리는 일본이 들어오지 못하지만 그 외 수역은 일본어선이 조업 량 초과 전이면 우리정부에 신고를 하면 조업을 할 수 있다. 우리정부는 울릉도와 오키도 중간을 경계선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일본은 독도와 울릉도 중간을 경계선으로 하자는 주장을 했다. 그르다가 일본이 공도수역을 제안 하는 것을 우리정부가 받아준 것이다
지도설명:중간에 실선은 독도와 오키도 중간을 표시 한 것이며 점선은 울릉도와 오키도 줄간을 표시 한 것이다. 독도와 오키도 중간을 경계선으로 한다면 독도영유권을 다 찾는 것이다,
어느분은 독도를 빼앗기고 잇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르나 필자의 생각은 우리국민들이 독도문제를 정확히 알아야 심각함을 알고 독도를 지키기 위한 동지들이 많이 생길 것을 생각하고 지도 설명을 더 하려고 한다,
우리정부가 독도와 오키도 중간을 경계로 할 수 있는 것을 독도를 중간수역에 포함 했다면
영유권 손상이 있다고 생각지 않겠지만 우리 정부가 일본에 밀려서 독도를 중간 수역에 포함 하게 되었다 는 것이다. 울릉도와 오키도 중간으로도 경계로 못한 정부가 지금 어업협상을 파기 하면 어업 량이 줄어들어서 우리가 손해를 보기 때문에 파기를 못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정부는 어업협상을 파기하고 재협상 하여야 한다. 아니면 정부는 국민에게 솔직하게 국력의 차이로 못 한다고 한다면 국민들이 일본을 규탄하고 할 것이다.
본론
1 일본이 자기 땅 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의견
독도는 원래부터 일본 땅이었다.
일본은 1618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오오다니와 무라카와 두 가문에게 울릉도 연해에서 조업해도 좋다는 도해면허를 허가하였으며, 그로부터 약 80년 동안 울릉도 주변 어장에서 경제적 이익의 독점을 근거로 원래부터 독도는 일본 땅이었다고 주장한다.
일본 각의와 내무성의 검토를 거친 후에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라 부르고 일본영토에 편입시키게 된다.
1905년에 국제 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였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독도를 국제 법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는데 한국경찰이 독도를 점령하고 있는 것은 '독도강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세계이차대전 전후 처리과정에서 독도는 한국에 반환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울릉도 제주도 거문도를 기록 했으니 독도는 반환 되지 않았다. 최 외측 섬을 기록 했다는 주장)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① 15,16C 독도에 대한 지식과 이용도 일본이 많다.
반면 한국은 거의 없다.
② 17C 이후 독도의 실효지배
돗토리현 요나고 시립 산잉역사관
▷ 17C부터 독도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자료전시
▷ 1618년 죽도 도해면허 사찰 사본
③ 1905년 시마네현 고시(告示)로 법적으로 먼저 영토편입
나카가이 요오사부로(어업가)
▷ 1904년 독도어로 독점권신청
ㆍ막부가 독도를 무인도로 간주.ㆍ
→죽도(독도)편입을위한 시마네현고시 제40호(1905.2.22) 편입
④ 2차대전후 미국과의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이 독도를 공식적으로 편입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독도가 일본영토로 인정
◎ 시볼드 의견서(1949,대일강화조약5차)
- 독도는 일본에 속한 것으로 확정 -
'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명백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독도를 한국연안의 섬으로 볼 수 없다.'
ㆍ시볼드 (일본외교고문) →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미국에 제출.
◎ 대일 강화조약 6차초안(1949)
'일본의 영토는 ~ 독도를 포함하며 ~ .'
'The territory of Jap! an ~ including takeshima(Lian Court Rocks)'
이때부터 독도가 일본영토포함
- 일본은 일본외교고문인 시볼드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독도가 일본땅 이라고 설득.
당시 시볼드는 독도에 레이더를 설치하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 라는 의견서 첨부.
미국은 이 자료를 토대로 독도를 일본 것으로 해야 미국에서 레이더 설치시 편리 할 것이라고 판단.
◎ 미 외교 문서집(1951.7.19)
'독도와 관해서… 무인도인 이 암초는 우리정보에 의하면 한국의 영토로 간주된적 없으며
1905년 이래로 일본 시마네현 오키지청의 관할하에 있다.'
→ 이것이 일본이 독도영유권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
일본의 준비.
1945년 독도등기. 공시지가 매김. / 한국 68.3월 등기. 해양수산부 관할.
시마네현 오키군 고카촌 다케시마 국유 무번지.
1953.6.27 - 일본 해상 보안부 독도상륙. → 실효적 지배 근거마련.
1954.5.2 - 11명으로 구성된 어선이 순시선의 보호아래 독도로 어로활동.
미역2천관/전복/소라/100관 채취.
→ 이후 독도에 경비대 주둔.
오키섬↔독도 157km
고카촌 (독도반환준비), 반? ?주민대회.
오키섬 주변의 연안지역 어업 소득저하. → 독도집착
2 일본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반박
한국 측은 독도는 그 옛날부터 한국 땅인데 이 것을 가진 어민들로 하여금 독도(울릉도) 지역지역 에 출어하게 했다 일본 측 자료는 언급하고 있는 데, 여기서 도해면허는 외국 무역을 공인하는 증명서이므로 일본이 독도를 외국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으며, 만일 국내에서의 항해라면 굳이 '도해면허'를 허락 받을 이유가 없음을 얘기 하고 있다.
일본이 합법적으로 독도영토를 편입 했다는 부분에 대한 반박은 아래와 같다.
이 시기에 일본은 당시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독도에 러시아 군함 활동을 정찰하기 위본의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업사업가가 일본 정부에 독도에서의 강치 등 어로의 독점권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얻기 위해 일본정부가 교섭해줄 것을 고려하고 있는 도중, 독도를 정찰기지로 이용하려는 일본 해군성의 요구에 의해 결국 독도영토를 일본에 편입하게 한 것은
무효이다.
1904년 8월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부서에 일본인 재정고문과 외국인 외교고문관을 두게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일본에 의해 강제된 한·일 협정서가 체결 되었다. 이로서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기에 이르렀다.
1905년 시마네현 고시(告示)로 법적으로 먼저 영토편입 할 이때는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에 항의를 할 힘이 없서서 항의를 못 했다.
우리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10월 칙령으로 대한제국 영토로 발표한 것을 5년 후에 일본이 편입은 무효이다.
일본은 세계이차대전 전후 처리과정에서 독도는 한국에 반환 되었다 독도는 울릉도의 보속도서이다, (최 외측 섬만 기록 되었다면 제주도 남쪽 마라도는 일본 땅인가?)
3.독도문제의 우리정부의 안일한 대처
이승만대통령 과 박정희 대통령은 독도정책은 잘 하셨다고 생각 하지만
전두환 정부시절에는 국민들이 독도수호차원에서 하는 운동도 막고 있는 정부를 보자,
독도의용수비대장(홍순칠)이 독도문제를 거론하며 다닌다고 남산에 끌려가서 협박을 받았다는 뉴스를 하나 아래에 올려본다.
물론 정부는 일본과의 여러 가지 외교 문제가 있기에 국익에 도움을 생각해서 일본의 눈치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만 영토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영토를 우선 하자는 뜻에서
정부를 비판한다.
------------아래--------------------------------
독도수비대 故 홍순칠 대장의 미망인 박영희 씨 -
- 본지 단독인터뷰서 밝혀 -
- 『정보부의 모진 고문으로 팔이 부러지는 등 후유증, 말로 다 못해』 -
『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 일이예요』
『건장한 청년 3~4명이 집에 들이닥쳐 남편(홍순칠대장)을 데리고 갔는데,그곳이 「남산」 이었어요.』
『그곳(남산)에서 모진 고문과 함께 「독도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말라」고 협박했어요.』
1953년부터 1956까지 독도수비대장을 맡아 숱한 기록을 남긴 故 홍순칠 대장의 미망인
박영희 씨(68)는 남편의 독도수호와 관련된 갖은 고초를 이같이 밝혔다.
박씨가 남편 홍대장이 끌려간 「남산」이라고 전한 곳은 전두환 정권 당시의 서슬 퍼렇던 정 부보를 말하는 것이다.
박 여사는 <독도신문>과의 단독인터뷰에서 『그 당시 남산에 끌려가 심한고문을 당해 팔이 부러 지는 등의 후유증으로 인해 85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면서『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수호하는데 정보부가 독도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여사는『독도문제를 놓고 무엇인가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갖고 있다』면서『일본인들의 간교한 독도침탈기도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왜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독도수비대장을 지낸 남편으로 인해 평생을 긴장과 고초를 겪으면서 살아온 박씨는 「독도」라고 하면 지긋 지긋하다고 말하면서도 또한 독도 없이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박 여사에게는 독도가 생의 전부였을 정도로 애착과 함께 고초의 세월 이었다.
경북 안동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안동대학 사범대를 나온 박씨는 열아홉 살 되던 당시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우연히 홍 대장을 만났다.
꽃다운 나이에 부모님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홍대장과 결혼한 박 여사는 신혼 초부터 독도수호대원들의 뒷바라지가 전부였다.
『시집을 갔는데 신혼의 단꿈은 사라지고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남편의 뒷바라지로 인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한달에 한 두 번 도 채 못 되었으니까요』
경북 울릉도에서 태어난 홍 대장은 6.25 전쟁이 막 끝날 무렵부터 독도가 일본 인 들로부터 수차례 침략을 받고 있을 때 독도를 수비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도수비대를 결성한 것.
일본의 독도침략에 의해 독도가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에서 순수 민간인으로서 독도수비대를 결성한 장본인이다.
당시 일본은 6.25전쟁이 끝날 무렵을 틈타 독도를 침략, 영토를 빼앗으려는 기도를 해 올 때였다.
홍 대장 은 카빈 소총과 박격포 M1소총 등을 무장 한 채 일본의 독도침략과 정면으로 맞써 싸운 의용수비대였다.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도 큰 나무로 대포발사대를 만들어 천막으로 덮어 놓으면 일본인들이 쌍안경으로 독도를 살피다가 큰 대포가 보이니까 침략을 해오지 못했다는 겁니다.』
신혼의 단꿈도 사라진 채 독도수비대 뒷바라지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남편으로 부터 긴장된 독도수호 활동을 직접 듣고 나면 어느새 독도수비대의 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고 박 여사 는 전한다.
남편이 독도수비대장을 맡아 활동을 하면서 56년 7월 께 경찰에 인계를 할때 까지 3년6개월 동안의 짧고도 긴 세월은 끝이 났다.
그러나 갖은 고생과 함께 고초의 세월은 그 이후부터였다.
『남편의 뒤를 수시로 감시하고 취직 은 커녕 자유로운 활동조차 하지 못했어요.』
『아이들을 기르기 조차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일 거수 일 투족을 감시당하는 일에 진절머리가 났어요.』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울릉도 선착장 입구에서 국수장수까지 직접 나설 수 밖 에 없었다고 한다.
『땅 한 평 남짓한 곳에 허름한 판자로 국수집을 만들었어요.』
『당국에서 허가를 내주지도 않아 찾아가서 사정한 끝에 「묵시적 허가」를 받아 가까스로 국수집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독도를 지키려는 남편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가족에게 까지 이렇게 고통을 줄 수가 있는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남편 홍대장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로부터 7~8년 흐른 뒤인 93,4년께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홍대장의 장녀가 YS문민정부에 탄원서를 냈다.
아버지 홍대장 에 대한 독도수호와 관련된 파란만장한 고난의 세월을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 것.
당시의 정부가 독도수호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와 함께 홍대장 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긴 세월이 지난 뒤 남편 홍대장의 명예는 회복되었어도 독도수비대장의 아내로서의 기나긴 고초의 세월은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현재 경기도 구리시 에서 딸이 얻어준 작은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박씨는 남편이 생존해 있을 때 는 5급상이군인 이라는 혜택을 받았지만,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가족이라도 보훈대상자가 계속 될 수 있는 제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박씨는 그러면서『독도는 분명한 우리의 영토 인데,우리의 영토를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하는데도 일부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라고 말했다.<경기 구리시 현지/김두수.사진/노상화기자>
-------아래 끝----------------------------------------
우리국민들은 이렇게 독도수호를 위하여 노력을 하는데 정부는 안일하다.
1953년 4월 20일 홍순칠 등 33명이 독도 의용 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에 무단 상륙한 일본인을 물리쳤고, 1956년까지 독도를 수비한 후 경찰에 인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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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덕
1965. 3 울릉도 주민으로 도동 어촌계 1종
공동 어장 수산물 채취를 위해 독도에 들어가 거주하면서 어로 활동
1968. 5 시설물 건립 착수
1981.10 독도를 주소지로 주민 등록 등재
1987. 9 사망
1980 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오자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 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울릉읍 도동 산 67 번지 서도 벼랑어귀에 주민등록을 옮긴
최종덕 씨의 독도사랑정신은 독도를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는 수중창고를 마련하고 전복 수정 법, 특수어망을 개발하여 서도 중간 분지에 물골이라 는 샘물을 발굴하는 등 초인적 노력을 쏟으며 살다 1987년 생을 마쳤다.
· 조준기
최 종덕 씨의 사위로 울릉도 주민이었던 조준기 씨는 장인의 뜻을 이어 지난 86년 7월 독 도로 전입해 수산물 채취권을 이어 받았다.
조준기 씨는 92년에 강원도 동해시 로 이주하여 독도노래방을 경영하고 있다.
· 김성도
현재의 거주자
1991.11 주민 등록 전입 | 현 독도주민이신 김성도 씨가 부인 김신열 씨와 독도에 살고 있었는데 97년 11월까지 이용하든 선가장 을(독도주민의 배를 보관 하는 곳) 정부는 철거 했다,
독도는 방파제가 없어서 배를 물에 뛰어 놓으면 파도에 배가 파손되기에 섬위에 보관을 해야 하는데 선가장 을 철거 한 것은 독도주민을 좇아낸 것이 아니고 무인인가, 독도주민을 좇아내고는 독도는 사람이 살수 없는 바위덩어리라서 배타적 경제 수역을 갖일 수 없다는 것이다.
독도는 우리 땅'노래만 해도 그렇다. 독도 상식의 국민적 홍보라는 면에서 크게 공헌한 이 노래는 80년대 초쯤 슬거머니 일본에 눈치를 의식한 당국에 의해서 방송가에서 금지곡이 되었다.
그 즈음 한국 산악회 소속의 한 산악회가 울릉도 청년들과 함께 독도에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려고 했다. 이 뜻 있는 작업 또한 외무부로부터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유는 일본을 자극한다'는 것 이였다. 거듭 뜻을 관철하려 하자 외무부가 마지못해 내린 최후 통보의 내용은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수면 위에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굳이 원한다면 해저 암봉 에 설치하라." 우리 땅 독도에 태극기를 꽂는 일이 왜 일본을 자극하는 행위가 될까. 그것은 제3공화국 이래 굴욕적인 대일 외교를 펼쳐 온 정치권이 독도 문제를 바둑의 '패'와 같이 정치적 흥정 물 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
김영삼 정부에는 독도에 선착장을 만들고 잘 하는가 싶었는데 일본이 65년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재협상을 맺자고 할 당시에 독도를 베타적 경제 수역 기점으로 하지 않고 울릉도를 배타적 경제수역 기점으로 선포한 누를 범 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1월에 신 한.일 어업협정을 독도와 일본 오키도 사이를 경계선으로 하지 못하고 독도를 공동수역(우리정부는 중간수역) 안에 독도를 넎는 누를 범 했다.
2003년 아오모리 동계 올림픽에는 북한이 갖여 온 한반도기(2003.2.2.일간스포츠기사일부)
당시 선수단의 수장 격 이던 이연택 대한체육회장은 “독도 부분을 지워야 한다”고 주장 했지만 급박하게 진행된 의견 조율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지난 해 부산 아시안게임 동시 입장 때도 북한은 독도가 표시된 한반도기를 준비했으나 한ㆍ일 관계 때문에 교체한 선례가 있다. (기사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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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치밀한 계획 아래 독도를 빼앗기 위하여 노력 하지만 우리정부는 어떠한가?
* 2002년도 정부제출 예산안
-(독도박물관 예산 2001년 1억5천만원
-( 위 2002년2억5천만원.아래의것 보다 너무나 적은돈어찌 연구를 하겠나요
- (해양수산부) 독도관련지원 3억7천5백만원
- (해양수산부) 해양엑스포 유치지원 49억7천9백만원
- (해양수산부) 장보고 재조명 평가지원 21억7천2백만원
- (외교통상부) 한일미래지향적 교류사업 1억6천4백만원
- (외교통상부) 한일합동공연지원사업 10억원
- (외교통상부) 한일민간외교단체지원 4억3천1백만원
- (외교통상부) 오페라 춘향전 일본,중군 순회공연 5억5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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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현정부는 과거에 잘못된 신 한.일 어업협정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현 외교통상부 반기문장관이나 현 해양수산부 오거돈장관등은 어업에 대하여 우리가 이익이라고 하면서 재협상을 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우리 역대 정부의 안일한 대처에 대해서 정리를 한다면 과거에는 일본의 차관 급 이나 시장 급들이 다케 시마 는 일본 땅이라고 언론에 주장하는 것을 소수 국민이
하는 말에 신경 쓸 것 없다고 무시를 하면 된다고 말 했고 2000년9월19일 일본의 모리요시로 총리는 일본 정부 입장이라면서 KBS 와 단독 인터부 에서 다케 시마 는 일본 땅 이라고
강변을 한 것을 KBS 는 방송에서 삭제했고 그 말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항의 한마디도 없었으며 김대중 대통령 일본이 무슨 말을 하든지 우리 땅이면 되지 않느냐. 는 것이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내 아내를 내 아내라고 할 필요가 있느냐 라며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다케 시마 는 일본 땅이라고 한 말에 대해서도 항의를 하지 않았다.
일본 시마네 현 이 독도(다케 시마 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은 좋지 않음)의 날을 정하고 우리국민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장기를 태우며 항의 하자 정부는 영토문제는 다른 문제보다 상위개념이라고 하면서 독도의 입도를 조금 쉽게 하였지만 인원(70명이상)이 많으면 독도입도 허용을 안 하는 것은 안일한 대처이다.
결론
1.독도가 우리 땅 임을 강력하게 대처해야 하는 정부
위에서 말 한 것과 같이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 땅 임은 독도에 대하여
자세히 아시는 분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르나 우리정부의 대처는 점수로 친다면 0점이라고 본다. 우리 땅임을 국제사회에 알려서 일본이 남의 땅을 뺏으려한다는 것을 알려야 함에도 정부의 자세는 일본의 주장을 무시 한다는 정도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국제 법 학자님들은 독도문제를 분쟁으로 보시는 많은 것 같다,
그르나 우리정부의 입장은 분쟁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분들은 분쟁이 있고 부터 는
실 효적지배를 강화 해도 필요 없다는 말을 하지만 실 효적 지배를 하고 필요가 없을지라도 우선 우리가 독도 이용을 많이 하고 주민이 사는 것이 손해는 볼 것이 없으니 주민이 살도록 해야 한다.
영토문제가 상위개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다른 국제 관계로 인해서 영토를 포기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력이 약한 필리핀도 중국과 분쟁인 섬에 중국이 건축물을 세운 것을 부셔버리지 않았는가? 독도의 영해12해리만 갖이고 배타적 경제 수역을 공동으로 한 것은 독도를 좀 빼앗긴 으로 생각한다,
내 집을 자기 집이라고 우기는 자는 내 마당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내집을 지키는 일에 도움이 된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은 독도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한다. 독도가 우리정부가 말 하는 대로 중간수역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독도주변 배타적 경제수역에 조업을 하려면 일본에게 신고를 하고 조업을 해야 하고 일본도 독도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조업을 우리정부에 신고를 하고 조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의 날을 정하고 독도의 날 행사를 하고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는 점점 늘어 날것이며 몇 년 후에는 자기네 땅에 상륙한다고 할 것에 대비해서 우리정부는 독도영해를 침범하는 일본인을 그 자리에서 돌려보낸다는 법도 만들어 놓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정부가 일본의 주장을 무시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대로 하면서 무시해야 할 것이다.
독도에 군인을 상주 시키면 일본과 분쟁이 일어나서 안 된다고 하는 말 자체도 독도를 빼앗긴 것이다. 우리 땅에 우리 군인을 상주시키는데 분쟁이 왠 말이냐? 답답해서 하는 말이다.
필자는 독도에 군인을 상주 시키라고 주장은 안한다. 그르나 군을 상주 시키는 것을 반대도 안한다, 정부가 실 효적 지배를 강화하라고 주장한다. 아래 내용이다.
청 원 서
아래 서명인은 아래사항을 대통령과 국회의장께 청원 합니다,
1. 독도박물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하여 독도연구비 투자를 많이 하십시오.
2. 우리 땅 독도의 자유로운 입도 보장과 독도의 주거자유를 보장해 주십시오
3. 독도의 관광지개발을 통하여 관광수입과 함께 국 내.외에 홍보 해 주십시오.
4.독도를 지킨 독도의용수비대를 국가 최고유공자로모시고 독도수비의 공을 기려주십시오.
5.잘못 맺어진 신 한.일 어업협정을 파기하여 배타적 경제수역의 주권을 회복하여주십시오.
위의 서명이유는 아래의 것이다
| 1. 독도박물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하여 독도연구비 투자를 많이 하십시오.
1.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쳐부수기 위하여 일본이 주장하는 자료보다 우리 땅이라는 자료가 월등히 우수해야 하기에 정부의 제정으로 독도 박물관이 주관하여 연구를 확실히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 우리 땅 독도의 자유로운 입도 보장과 독도의 주거자유를 보장해 주십시오,
2.우리경찰이 독도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실 효적 지배는 되지만 실 효적 지배를 더욱 강화 하기 위하여 우리국민들이 독도에 갈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는 법을 폐지하여 자유롭게 다니며 독도에 살고 싶은 분들은 독도에 살도록 하는 것이 더욱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하기 좋은 것입니다. 독도가 관광지가 되고 돈이 벌린다면 서로 들어가서 살려고 할 것이다.
3. 독도의 관광지개발을 통하여 관광수입과 함께 국 내.외에 홍보 해 주십시오.
3.독도를 관광지로 만들어(환경파괴 최소화. 개발 계흭 있음)독도관광객에게 독도주민이 장사를(회와 소주 등 기념품) 해서 독도주민이 생계를 해결하고 독도에서 우리 화폐가 통용 되는 것 을 외국관광객에게 보여주고 당신들 나라 에 가서 독도는 한국의 관광 지 라고 알려서 지도에는 일본 땅 으로 표시 되는 것은 지도가 잘못 되었다. 고 소문이 나도록 해야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알 것입니다,
4.독도를 지킨 독도의용수비대를 국가 최고유공자로모시고 독도수비의 공을 기려주십시오.
4.독도를 지킨 울릉도 민간인 독도의용수비대가 지키지 않았다면 일본경찰이 독도에 주둔 했을 것입니다, 독도를 우리가 실 효적지배를 못하고 일본이 실 효적지배 한다면 지금 우리가 돌려 달라는 말을 해도 일본은 개소리로 들을 것입니다, 전범들에게 참배하는 일본총리를 보십시요, 중국과 우리가 하지 말라고 하여도 개소리로 들고 계속 하는 것 아닙니까? 독도의용수비대가 지켰기 때문에 독도를 우리가 실 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고유공자로 모셔야 합니다,
5.잘못 맺어진 신 한.일 어업협정을 파기하여 배타적 경제수역의 주권을 회복하여주십시오
5,한국은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하고 대마도와 한국 중간을 해양경계선으로 했습니다, 우리는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을 못 받고 독도가 중간수역에(일본은 공동수역) 들어갔습니다, 우리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빼앗긴 것입니다, 독도주권을 좀 많이 빼앗긴 것입니다, 우리정부는 어업협정 기한 3년이 지났으나 그대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우리국민들이 강력히 주장을 해야 합니다, 이상이 서명이유이며 다수국민이 요구를 해야 정부는 해결을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본적을 독도로 이전한 독도 이상훈 019-842-9174
2.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는 국민들의 사상변화
우리의 역사는 임진왜란직전에 이율곡 선생님이 십만 양병 설을 무시한 조선 정부는 얼마나 실정하였는가?
선조임금님은 백성을 위하여 싸우기는커녕 살겠다고 의주까지 피란을 하지 않았는가?
그르나 백성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과 싸우고 스님들은 승병을 조직하여 왜군과 싸운 역사를 생각하자, 정치인이 나라를 망쳐도 백성이 일으켜 세운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생각해보자. 매국노들이 우리의 고귀한 영토를 일본에 넘겨준 후에 주권을 찾겠다고 기미년 만세운동과 독도투사들이 가족의 생계도 생각지 않으시고 오로지 독립운동만 하시지 않았는가?
나라를 일본에 넘겨준 놈들이 있는데 우리가 뭘 하려고 독도운동을 해 했다면 우리가 지금 우리말을 할 수가 없고 우리는 일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부터 군사독재정권과 싸운 우리 국민(야당과 학생운동)들의 노력으로 우리가 좀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그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군사독제는 그대로 존재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전두환 정권 때에 독도문제를 필자가 들고 나왔다면 필자도 남산에 끌려가 협박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국민들이 나라 땅을 지키겠다고 운동을 한다면 그 이상의 애국이 있겠는가?
과거의 학생들은 독재에 항쟁하는 운동을 많이 했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졸업 후에 취직 걱정
등 가정의 형편 등으로 운동권 학생이 적다고 필자는 본다,
그르나 독도가 일본 땅이 된다면 우리의 힘은 더욱 약해지고 일본의 힘은 더욱 비대 해 질것이며 우리의 자원은 점점 줄어들면서 일자리는 더욱 적어 질것이다.
나라가 망하면 우리(내가)가 망한다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 국가가 없다면 백성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일본과 축구를 한다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열광을 하면서 응원을 한다. 영토문제와
스포츠 문제는 비교를 할 수 없는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이 독도문제에 있어서는 방심을 하고 있는 처지이다.
독도연구재단을 만들자는 분들도 있는데 독도연구재단이 생기면 또 하나의 기관이 생긴다.
반대는 안하지만 독도박물관이 독도연구를 연구원을 두고 연구원을 외국에 파견도 하면서 연구를 계속해서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으로 국립박물관으로 승격 하자는 것이다.
필자는 2000년도 9월에 독도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2000년에 독도로 본적을 이전하고
그해 말부터 독도를 지키는 길은 실 효적 지배를 강화 화는 것으로 생각하고 서명운동을 한다.
필자의 독도관광지 개발 계흭
필자의 독도관광지개발 계흭 은 독도의 회손 을 최 소 화 해서 개발을 해보자는 것이다.
첫 번째 안
1.동도와 서도 사이에 관광유람선 폐선을 남북으로 정박한다.(밑창을 튼튼히 하여 수심이
얕으니 끌어 올린다.) 선박 내 에는 사람이 생활 하는 모든 시설이 되어 있다.)
2.선박에서 동도 서도 사이에 줄다리를 설치한다.
3.서도에 독도주민들의 집을 축대를 만들어서 짓는다.(10평으로 10가구)
4.동도에 올라가는 길이 있으니 내려오는 길을 철 사다리를 놓는다. (정원213명이 타는 삼봉호
의 승선인원이 전부 하선 할 때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별도로 있어야 됨)
5.서도는 생태계 보전을 위하여 서도 쪽 민가 뒤로는 통제를 한다.
두 번째 안
1.동도서도 사이에 파일을 박고 그 위에 얼금얼금한 철판으로 바닥을 깐다.(밑으로 햇볕이
내려가면 수중 생태계 변화가 적을 것)동도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다리 설치. 서도민가로도
연결.
2.첫 번째 2안은 필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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