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공군에서 제대하고 나니 아버님이 하시는 사업이 부도가나서 저의 온 가족의 처절할 정도의 어려운 시절이 옵니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살아왔기에 이 시련은 더욱더 견디기가 어려웠지요. 그래서 저는 집안을 도울 요량으로 우선 밤무대 가수로 활동 하게 됩니다.
우선 이종환씨 에게 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흔쾌히 자기 팀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 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별이 빛나는 밤에" 라는 프로 로 인기가 굉장했습니다. 공군으로 있을 때 콘테스트에 나간 인연으로 저는 이종환 사단에 합류를 하게 됩니다. 그때 그 사단에는 송창식, 김세환, 윤형주, 루비시스터즈, 서수남, 하청일, 홍민 등.. 그때 통 기타 가수들이 대거 포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늦게 합류했으므로 가장 적은 개런티를 받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명동에 금수강산 이라는 음악실 이 있었는데 이 곳 에서 라이브로 통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때는 제 본명인 유기성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이종환 씨 가 같이 무대에 서면 유기생 으로 발음을 하여 저를 당황 시키는 거 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시간을 내어 영등포에 있는 작명소로 가서 제 이름을 개명하기로 했습니다.
작명가 가 성은 그냥쓰기로 하자고해서 동의를 했죠.
그 다음 자는 이을 '승' 자 가 좋을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좋다고 했는데 그 다음자는 잘 안 나오 는 모양 이였어요. 열 몇 개를 써내려가고 또 위에서부터 복기를 하는데 그때 이 작명가 가 신고 있는 구멍 난 양말이 제 눈에 들어오는 거였어요. 지금은 그렇게 예민하게 생활하지는 않는데 그때는 굉장히 예민한 성격으로 깔끔을 떨던 때였지요.
그 사람의 발가락이 보이는 순간 제가 역겨워 손으로 탁자를 살짝 쳤는데 그만 이 사람이 올 타 불꽃 '엽' 이다. 라고 말 하는 것 이였어요. 저는 너무 불결해서 빨리 그 집을 나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그가 써 주는 한문을 받아들고 얼른 그 집을 나왔답니다.
그래서 저의 예명을 유승엽 으로 정하게 됩니다.
조금 어려운 한자 였는데 지금은 잘 쓰고 있습니다. 같은 한문을 쓰는 사람 중에 유명한 야구선수 이승엽도 저와 같답니다. 그 후에 예비군 훈련을 가면 항상 긴장했지요. 밤무대를 서니까 종종 제 본명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어요. 훈련 가서 제 이름을 호명할 때 대답 못하면 큰일이니까요. 그 후로 얼마간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개런티 가 적어 생활에 별 도움이 안됐습니다.
저는 기왕이면 본격적으로 가수가 되기로 하고 그때 당시 문화방송의 연출자이신 김정호씨 라고 지금 서울방송 밴드 마스터인 김정택 씨 의 형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음악 공부를 하였습니다. 아주 조용하신 분이셨는데 제가 가면 차분히 음악의 기초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주신 작곡을 가지고 그때 당시 골든 앨범 이라고 최고 인기가 있는 음반 제작자인 나현구 씨 에게 찾아 갔지요. 그때 이장희(사진) 의 “한잔 의 술” 로 인기가 꽤있었는데 저는 기왕이면 이 앨범에 내 노래가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찾아 갔지요.
나 사장 이란 분은 작곡가 나운영 씨 의 조카로 서울대 공대를 나온 분인데 전공과는 달리 음반제작을 하시던 분이였지요. 자란 환경이 음악 가족이라 그런지 초 견 에 악보를 보는 실력가 였지요. 저는 그때 김정호 선생님의 곡을 여러 곡 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그는 대충 보더니 별 볼일 없다는 표정 이였어요.
죽기 살기로 곡 을 받아 갔는데 반응이 시원치 않았던 거지요. 저는 오기가 났습니다. 거의 그 회사로 출근을 하다시피하며 그 들과 어울렸는데 항상 찬 밥 신세였지요. 아무도 거들 떠 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나가 청소도 해주고 녹음기사하고 친해지려 노력하니 불쌍히 보였던지 점심때 자장면 한 그릇을 주는 거 였어요. 그래서 간신히 점심은 때울 수 있었습니다.
한동안 제가 쓴 곡 을 가지고 보여주면 한번 쓱 보고 버리는 것 이였지요. 이때가 저의 작곡의 습작 기간이 였습니다. 써 가면 버리고 써 가면 버리고... 몇 개월을 나 사장과 씨름을 하는데 하루는 내가 써가지고 간 곡 중 에서 한곡을 뽑더니 그때 밴드마스터인 강근식 씨에게 주며 어이! 미스터 강 이곡 한번 편곡해 봐 라고 하는 것이 였습니다.
그때 멤버들이 나중에 우리나라 음악계를 이끌어가던 사람들이였는데 이호준(건반)-조용필 의 친구여/작곡자, 유영수(드럼), 조원익(베이스)등 실력파 들이였습니다. 지시를 받은 강근식(사진)씨가 악보를 보더니 같이 편곡 을 해보자는 것이 였어요.
말하자면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갈 방향을 정하는 그런 식이였지요. 그때 이 녹음실에서 최초로 사용한 악기가 무그 라는 건반 악기 였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전자 악기가 처음 들어와 그 소리를 연구하던 때였어요. 몇 시간 만에 그 전자악기로 만든 전주가 완성 되었지요. 아주 그럴듯한 반주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운드 가 나오는 것이 였습니다. 저는 시험 녹음을 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다음날 나와 보니 나 사장이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주 친절하게 상냥하게 대해 주는 것이 였어요. 저는 황송해서 어쩔 줄 을 몰랐구요. 나 사장이 녹음기사에게 말했습니다. 어이! 원 기사 이 노래 빨리 만들어봐...
매일 출근하여 자장면 한 그릇 먹고 집에 들어가던 저에게는 참으로 감지덕지한 순간 이였죠. 저는 열심히 노래를 했습니다. 이 길만이 살길 이였으므로...
드디어 골든 8집이 나왔는데 김세환 씨 가 대포를 쏘고 있는 사진이 타이틀로 나오는 음반 이였지요. 앞면 에 네 번째로 저의 곡이 들어갔습니다. 보고 또 봐도 신기할 따름 이였어요. 너무 기뻐 말로는 표현이 안됐습니다. 드디어 그 유명한 골든 집에 내 노래가 실렸구나 하는 생각에 말입니다.
저는 이 음반을 들고 이 방송 저 방송을 기웃거렸습니다. 하지만 방송의 벽은 높았지요. 겨우 한곡 취입 한 걸로 어떻게 가수가되려고 하 느냐 는 게 방송국 사람들의 평 이였어요. 기쁨도 잠시 뿐 또 절망의 시간이 계속 되였습니다.
기라성 같은 스타들 속에서 자장면 얻어먹는 것도 이제 눈치가 보였습니다. 저는 저 스스로 가수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집은 더욱더 상황이 안 좋아 이제는 거처할 집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동생 이 소유한 안양에 위치한 조그만 집으로 옮겼지요. 전화도 없이 그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던 시절 이였습니다. 여동생이 연대를 졸업하고 선생으로 재직하며 벌어오는 돈으로 한동안 우리 식구들이 연명을 했습니다.
저 는 무엇을 할까 고민을 했는데 도저히 답이 않나오는 것 이였어요. 무엇을 해본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성격이 활달해서 사람들을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을 자세히 보는 것이 유일한 일이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 가 쓴 글들이 신문에 나와 있는 거예요. 누워서 보다가 벌떡 앉아 자세 히 보니 “슬픈 노래는 싫어요” 의 가사 전문이 나와 있는 거 였지요.
자세히 보니 영화 "너 또한 별이 되어" 라는 영화인데 이장호(사진)감독이 연출을 한 영화였죠. 그 옆에 보니 작곡에는 강근식, 노래에는 김세환, 이렇게 나와 있는 거였지요. 지금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고소하고 난리였겠지만 그때는 별일도 아닐 때였죠.
그래서 회사로 달려가 보니 저에게 전화 가 없어 연락을 취할 길이 없어 그랬다는 대답 이였어요. 하긴 말도 안 되는 변명 이였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지요. 그러나 이것도 속담 속에 '세옹'의 말처럼 되었습니다. 이장호 감독이 이 노래를 택했으므로 제가 작곡가로 데뷔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나 사장 이라는 분은 생김은 호탕하게 생겼는데 어찌나 구두쇠인지 저는 이 분에게 단돈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술은 가끔 사 주었지만요. 그래도 미워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인연으로 저의 음악세계가 시작 되었으니까요. 이 노래를 나현구 씨 가 선택을 하므로서 이장호 감독이 음악을 사용했고 이장호 감독이 선택을 했으므로 제 처를 만나 결혼을 할 수 있었고 이 노래를 지금 KBS 국장인 이응진 씨가 좋아했으므로 좋은 드라마에 작곡을 할 수 있는 인연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 노래로 하여금 저의 대중가요 음악 생활이 시작 됩니다. 혹독한 습작 시간을 거쳤기에 시시한 작곡은 할 생각도 없었지요. 그러나 많은 제 주변의 기자나 음악 관계자들이 저에게 충고를 하였습니다. 가수를 그만두고 전문적인 작곡가 가 되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충고를 신중하게 검토하기 시작 했습니다.
가수의 인기는 비누 같아서 새 비누 일 때는 거품이 잘 나지 만 곧 비누가 닳아 없어지면 흔적도 없는 것이 인기라는 것을 잘 알기에...
저는 이 일을 계기로 작곡가로 나서기로 제 인생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가수를 그만해라” 라고 저 자신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첫댓글 새로운 탈바꿈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히트곡은 나오는게 아닌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련과 각고의 노력끝에 나오는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제일 어려운 직업은 가수 입니다.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그리고 자기 컨디션을 똑같이 유지한다는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요즈음 가수들은 너무 수명이 짧은 것같아요. 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너무 경쟁이 심하다 보니까..
삶이 평탄하지 만은 않았군요. 많은 시련을 극복하시고 당당히 이자리에 있기까지의 과정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집요함. 두둑한 배짱 인내와 끈기 같은 것들......
음악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감동입니다. 끊임없는 도전 정신과 창의력, 존경합니다.
존경을 드립니다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