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르카 (1898 - 1936 ) 그라나다 출신의 가르시아스 로르카는 시인, 화가, 평론가, 작곡가인 다양한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애석하게도 스페인내란시 프랑코 군부에 의하여 투옥되고 피살되었다. 그는 파야, 세고비아와 절친한 친구사이로 공동으로 음악극등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그의 걸작 스페인 고민요집에는 노래와 피아노를 위한 약13곡의 스페인 각지방의 잊혀져 버릴 뻔 한 곡들이 수록되었다. 이후 기타와 성악곡으로 편곡되어 스페인의 악보출판사 유니언뮤지컬사판과 일본젠다이 기타등에 발간되어 있다. 또한 이예페스와 소프라노 베르간자의 노래로 녹음되어 있기도 하다. (도이치 그라마폰) 그의 명시 칸데 온도( Poema del Cante Hondo )에 수록된 "기타아"라는 시를 여기에 소개한다. La Guitarra Empieza el llanto de la guitarra. Se rompen las copas de la madrugada. Empieza el llanto de la guitarra. Es inutil callarla. Es imposible callarla. Llora monotona como llora el agua, como llora el viento sobre la nevada. Es imposible callarla. Llora por cosas lejanas. Arena del Sur caliente que pide camelias blancas. Llora flecha sin blance, la tarde sin manana y el primer pajaro muerto sobre la rama. !Oh guitarra! Corazon malherido por cinco espadas. 애절한 기타의 소리는 새벽의 여명을 깨운다. 애절한 기타의 소리를 잠재우기는 소용없는 일 물소리같이 울고 눈위의 바람소리처럼 울고 있는 이 소리를 조용히 하기는 소용없는 일 남쪽의 더운 모래는 흰동백꽃을 그리워하게 한다. 내일 없는 오늘 오후처럼 과녁 없는 화살 같이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첫 번째 죽은 새와 같이 오! 기타아 (저자 번역) 곡해석 : Anda Jaleo ( 플라멩고 연주시 흥을 돋구는 추임새 ) , Los custro muleros ( 네마리의 노새들 ), Las tres Hojas ( 세장의 잎사귀 ) 등 해학적이고 민속적인 곡이다.
미구엘 요베트 (1878-1938) 조각가였던 그의 부친의 영향으로 유년시절을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1889년 만혼의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아 기타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 바르셀로나의 알레그레 음악원을 수학하고 그후 타레가의 제자가 되었다. 또한 카잘스, 푸홀, 비네스, 카사도르와 같이 유명한 음악인들과 친분 및 교류를 한다. 1900년도에 말라가 콘서트를 시작으로 스페인을 비롯, 파리, 런던 유럽 각 도시의 순회연주로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린다. 1910-12년에는 아르헨티나, 북미, 카리브해 중남미를 순회연주 하였다. 또한 아르헨티나에 약 3년간 거주하면서 마리아 루이자 아니도와 같은 제자를 양성하기도 한다. 그는 남미에 스페인 기타의 맥을 연결하였다. 그는 최초로 1926년 기타음반을 제작하였다. 이 당시 LP는 지금도 남아있다. (필자 소장) 그의 연주는 요즈음의 CD로 듣는 매끄러운 소리는 아니지만 타레가 악파의 계승자로 타레가의 음색을 듣는 듯 하다. 또한 루이자 아니도와의 이중주도 녹음되어 있다. (1926년 Parlophon Eletra, 스페인에서 녹음제작, 1982 El Maestro 미국 복사판제작) 그의 아름다운 편곡과 작곡 특히 고향인 카타로니아 지방(바르셀로나)의 민요집이 유명하고 약간의 연습곡과 연주곡을 남겼다. 1920년에는 마누엘 데 파야에게 의뢰, 파야의 유일한 기타작품, 드뷔시 찬가를 작곡하게 한다. 그러나 1938년 스페인 내란시 폭격으로 인하여 그의 나이 59세에 애석하게 사망하였다. 곡해석 : El testmant de Amelia ( 아멜리아의 유언 ), El Noi de la Mare ( 마리아의 아들 )등 우리의 귀에 익은 곡으로 이곳 카탈로니아는 스페인 통일 이전에 자신의 왕국이 있었고 독보적인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스페인의 예향으로 알베니즈, 몸푸, 아센시오, 카잘스등 많은 예술가의 고향으로 향기 높은 곳이다.
Manuel de Falla (1876 - 1946) 마누엘 데 파야는 안달루시아지방의 항구도시 카디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로부터 최초의 음악교육을 받고 인근교회등지에서 활약하였으나 그후 마드리드에서 호세트라고로부터 피아노와 왕립음악원에 입학, 당시 교수이던 페드렐과의 만남으로 국민주의적음악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1904년 그의 단막오페라 짧은인생(La Vida Brave)으로 작곡아카데미상을 받으며 그의 음악실력을 인정받는다. 1907년경 파리로 유학, 듀카로부터 화성악, 관현악법등을 지도받고 이곳에서 알베니즈등과 교류한다. 또한 드뷔시, 라벨, 포레 등의 인상주의적 경향의 작곡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음악세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1차 세계대전으로 스페인에 돌아온 그는 사랑의 마술사, 삼각모자등의 발레음악 7개의 스페인노래등 그의 대표작을 작곡하였다. 1920년경 그라나다에 정착, 시인이자 음악가인 로르카와 세고비아, 안토니오 호세 등과 교류한다. 1936년 스페인내란으로 인해 많은 친구들등의 비극적인 최후를 본 그는 알젠틴으로 이주. 그곳에서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70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의 음악적특징은 페드렐의 영향이 현저하지만 알베니즈나 그라나도스와는 다른 형태의 스페인음악의 세계화에 기여하였다. 비록 안달루시아 출신의 작곡가이지만 원색적인 스페인 음악의 절제함은 파야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와 잘 여과된 인상주의적 표현으로 신국민악파적 양상과 러시아국민악파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특히 그의 작품은 푸홀등에 의하여 기타곡으로 편곡되었고 많은 연주자에 의하여 사랑받는 레파토리가 되었다. 곡해석 : 그의 유일한 기타작품인 드뷔시찬가( Homenaje pour le Tombeau de Claude Debussy)를 작곡한다. 이는 사인자 마사의 권유로 쓰여졌고 1922년 파리에서 에밀리오 푸홀에 의해 초연되었다.
S.L.Weiss ( 1686 - 1750 ) 바로크시대의 류트 연주작곡의 대가로서 그의 이름은 유럽 각국에 널리 알려졌다. 심지어는 바하보다도 그 당시엔 더 유명했다고 한다. 이에 자극받은 바하는 자기의 작품으로 류트조곡 BWV 995-1000 의 작품을 남겼고 류트를 연주할 수 없었던 바하는 류트하프시코드라는 거트줄을 사용하는 악기를 이용하여 류트의 음색을 즐겼다 한다. 그의 작품은 주로 필사본으로 유럽 각국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곡해석 : Suite L,infidele A minor # 25 은 모음곡 형식으로 바로크시대 전형적인 조곡의 형태이다. 대략 각 악장 사이에는 서로 대비를 주기 위하여 빠른 곡과 느린 곡, 밝은 곡과 어두운 곡등의 배열로 미학적인 균형을 유지한다. Entree 원곡은 오페라에서 주연배우나 중요한 사건의 주제음악으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곡의 성격과 주제를 암시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Courante 불란서에서 유래한 밝은 춤곡 Sarabande 스페인기원의 곡으로 장중한 느낌을 준다. Minuet 불란서 기원의 곡. Musette 독일 기원의 곡 Paysanne 영국기원의 곡 ( Green Sleeves 변주곡 ) 이중 미누에트, 뮤제트, 파이산느는 당시 유럽사회와 비엔나에 유행하던 터어키풍( 음악, 커피 )의 곡조로서 저음현의 콘트라스트와 터어키식 음악의 영향이 보인다. 후대에 모짜르트등에 의하여 터어키행진곡 K 331 등에 쓰여졌으나 L,infidele 이라는 뜻으로 모슬램 즉 모하메트를 신봉하는 아랍의 이교도들을 일컸는 말로 유럽사회에 쓰여졌다.
안토니오 호세 (1902 -1936 ) 스페인의 부르고에서 태어난 작곡가로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화가인 달리, 작곡가인 살라사, 음악학자 수비리아 , 로르카등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활동을 하였다. 1933년 경에는 사인자마사의 권유로 소나타, 어린시절의 이야기 (Romancillo infantil ) 등의 기타곡과 150곡에 이르는 각 분야의 음악을 자곡하였으나 프랑코 군부에 의해 체포, 피살 되었다. 그의 음악은 1980년도 경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되었고 쥴리안 브림에 의하여 1996년 EMI 레코드에 의해 그이 소나타등이 녹음되었다. 1925년 라벨에 의하면 "안토니오 호세는 차세대에 스페인의 위대한 작곡가가 될 것이다. " 라는 찬사를 받은 각광받던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은 인상주의적 현대음악경향의 어법으로 쓰여져 있다. 34 세의 짧은 생애에 더 많은 좋은 곡을 쓸 수 있었지만 비극적 최후를 마쳤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곡가중의 하나이다. 곡해석 : Allegro moderato 소나타 형식으로 두개의 주제가 리듬형의 멜로디를 억제함. Minueto 퍼즐게임 같은 느낌의 미뉴에트형식의 전개. Pavana triste 위의 전개를 발전시키는 슬픈 느낌의 파반느. Final con brio 토카타 론도 형식의 1악장 주제와의 대비
F.Chopin (1810 - 1849 ) 곡해석 : Nocturn (야상곡 )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귀에 익숙한 곡이며 약 20여곡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녹터언의 형식은 아일랜드 작곡가 죤 필드 (1782-1837 )에 의해 시작되었고 쇼팽에게 영향을 주었다. 쇼팽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는 짧은 인생과 여류문인 죠르주쌍드와의 사랑과 애국적인 작품등 많은 이야기꺼리를 지니고 있다. 쇼팽이 기타음악에 준 영향으로는, 타레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후대에 파라과이의 전설적 기타리스트 작곡가 망고레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그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란시스코 타레가 (1852-1909) 그는 카스테용의 비야레알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마누엘 곤잘레스에게 피아노와 기타의 기초적 연주법을 배웠다. 그후 아르카스의 연주에 감명을 받아 그는 위대한 기타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의 스승인 아르카스와의 관계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군복무 후 마드리드 음악원에서 피아노, 화성악 등을 공부하고 그 곳의 교수로 재직한다. 그의 초기 데뷔시절 음악회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연주회 레파토리 중 절반은 피아노 음악, 절반은 기타음악의 연주회였는데 연주회 도중 타레가가 관중에게 피아노와 기타음악 중 어느 것을 듣고 싶으냐고 물어 보았는데 대다수의 관중이 피아노보다는 그의 기타연주를 듣고 싶어하여 연주회전체가 기타연주로 바뀌었다. 그후 유럽 순회연주와 제자양성을 통해 그의 음악적 견해를 널리 알렸다. 그중 타레가의 업적을 보면 첫째, 기타 발받침(Food Stool) 사용은 연주를 용이하게 하고 왼손의 움직임을 더욱 자유롭게 하였다. 두 번째, 스승인 아르카스의 예와 같이 토레스와 공동으로 기타제작을 하여 기타음량의 증가와 음색을 개발하고 현대기타의 표준인 650mm를 줄길이(현장)를 표준화하였다. 토레스의 기타제작은 두 번의 시기를 갖는데 1850-69년 초창기 시절, 경제적 이유로 아르카스와의 동업을 포기하였다. 두 번째 제작시기는 1889-92년 타레가와의 교류로 인한 기타 발전이 있었다. 세 번째, 기타 편곡 및 작곡. 기존의 베토벤, 쇼팡, 슈만, 바그너 등의 작품과 스페인의 알베니스, 그라나도스의 작품의 기타곡 편곡과 타레가 자신의 주옥같은 명곡들로 기타 레파토리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네 번째, 기타 주법의 다각적 분석으로 운법 연구 특히 왼손 주법은 개방현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바이올린이나 첼로연주자들이 연주하는 방식처럼 기타특유의 음색을 분석, 발견하였다. 또한 오른손의 연주시 손가락이 줄에 약간 비스듬한 각도로 연주하는 방법은 더욱 좋은 음질을 얻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아포얀도 주법으로 줄을 탄현할 때 마치 투명한 소리가 하프연주자의 소리처럼 들리는 주법등은 그의 스승 아르카스의 빠른 스케일 연주시 쓰는 피카도 주법의 개발 결과이다. 또한 타레가는 손톱을 전혀 쓰지 않는 연주법을 고수하였으나 이는 현대에 있어서는 쓰여지지 않는 주법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를 바이올린의 사라사테, 피아노의 루빈스타인과 견주어 그의 위치를 평가하고 있다. 다섯 번째, 음악원 시절 이곳에서 푸홀, 요베트, 포르테아, 오브레곤 등의 제자를 양성, 타레가 악파를 형성하여 근대 기타 음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곡해석 : 베니스의 카니발 원곡의 제목은 Variaciones Sobre el de Paganini Carnaval de Venecia 즉 파가니니주제에 의한 베니스의 카니발 변주곡 다소 긴 느낌의 제목이지만 주제와 8개의 변주와 마지막 코오다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이 변주에서 연주자의 기량을 엿볼수 있지 않을까.
G. Regondi ( 1822 - 1877 ) 이태리 제노아 출신의 기타리스트 , 작곡가로서 일설에 의하면 그의 의붓아버지로부터 영리를 목적으로 어린 시절 혹독하게 음악적인 훈련을 받은 덕분에 7세때 벌써 불란서 파리에 데뷰하여 신동 파가니니의 재등장이라는 비평가들의 찬사와 놀라움을 받았던 천재 소년 음악가이다. 그후 유럽 각국의 순회연주와 특히 영국의 시드니 프라톤이라는 여류 천재소녀 음악가와의 이중주 공연등 영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더우기 그는 콘체르티나 ( 소형 버튼식 아코디온 )의 귀재로서 기타와 함께 연주 및 작품을 남겼다. 그는 자기 작품 뿐만 아니라 아구아도, 소르 등 다른 선인들의 작품도 함께 연주하였다 한다. 곡해석 : 그의 작품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오늘 연주하는 Reveri ( 야상곡 ) 은 작품의 진수로 알려져 있다. 음악학자들의 노력으로 더 많은 곡들이 발굴중이다. 그중 특히 10개의 연습곡집이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