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과 재로 이루어진 길에서 속도에 길들여지다 (9구간)
1. 일자 : 2013. 7. 27
(토)
2.
장소 : 백암봉-빼재
3.
행로 및 시간
[무주리조트 -> 설천봉(10:53) -> 향적봉(11:08) -> 백암봉(11:46) -> (귀봉) -> (중식 12:30-50) -> 횡경재(13:06, 1350m) -> 헬기장(13:32) -> 못봉/지봉(13:37, 1302m, 1343m, 빼재 6.1km) ->
달암재(14:10) -> 대봉(14:37,
1263m, 빼재 3.5km) -> 갈미봉(15:09,
1211m) -> 빼봉(15:49, 1039m) -> 빼재(16:13) 11.1km (2.4km)]
<
9구간 산행을 준비하며 >
2주 만에 다시 대간
능선에 선다. 덕유능선 최고의 전망대이자 지난 산행에서 고난의 정점이었던 백암봉이 오늘의 들머리다. 봉우리와 고개의 이름이 빼재를 제외하고는 낯설다. 이곳 저곳에서
정보를 구해보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 제대로 나를 낯선 환경에 노출시키겠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기대감이
커진다.
고도표를 들여다 보며 가야 할 길을
그려본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도라를 타고 올라와 향적봉을 거쳐 백암봉까지는 1시간, 이후 넘어야 할 큰 봉우리가 귀봉, 지봉, 대봉, 갈미봉, 빼봉 5곳이다. 일단
백암봉-귀봉까지 2시간, 귀봉-갈미봉까지 2시간, 갈미봉-빼재 1시간 30분으로
큰 줄기를 잡는다. 지도상으로는 월령재에서 대봉 길의 비고가 가장 커 고비가 될 듯하다. 빼봉을 지나고도 작은 봉우리 3개가 있어 끝까지 긴장을 해야 한다. 산행시간은 6시간 30분, 휴식을 포함하면 7시간, 더욱이
한여름, 한낮 산행임을 감안하면 만만치 않은 산행이 될 것이다.
< 희망사항 >
직장인의 로망, 여름 휴가다. 일년에 단 한차례, 토/일까지
포함하면 9일간의 휴식이다. 옛 직장동료가 그랬다. ‘다른 때는 몰라도 여름휴가만은 오롯이 나를 위해 시간을 써야 한다’고
확 당기는 말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한 병가와 휴가 이외에는 이렇게 장기간 쉼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없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쉼을 통한 재정비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그 첫 계획이 대간 종주 참여다. 남들이 알면
‘한여름에 산이라니 뭐 저런 인간이 있어’라고 하겠지만 난
이 짓이 좋다.
주어진 일을 마치고도 뒤에 시간
여유가 있다는 사실은 마음을 한 없이 푸근하게 한다. 즐거운 여행을 한다는 마음으로 산행 준비를 한다. 오늘 대간 코스는 ‘봉’만
있고 ‘산’은 없는 그다지 풍광도 훌륭하지 않은 그야말로
걷는 행위에 의미를 두어야 할 길이다. 봉우리 5개를 내려섰다
올랐다 반복하면 결국 해발 900미터 빼재에 닿을 것이다. 순수산행에
의미를 두고 싶다.
(여기까지는 등산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무주 가는 길에 >
후덥지근한
새벽을 뚫고 교대에 도착해 버스에 오른다. 휴가철이라 교통체증을 염려했으나 고속도로는 소통원활이다. 오랜만에 책을 펴 든다. 유홍준 선생의 신작, 일본편 나의문화유산답사기이다. 선생의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호소력 짙은 글 솜씨가 버스로 책을 가져오게 했다.
일본 청동기 시대 야요이 문화를 연 한반도로부터의
도래인(渡來人) 이야기가 재미나게 그러나 묵직하게 전해진다. 신라와의 경쟁에서 밀린 원삼국의 패자들이 쫓겨 바다를 건너고, 벼
수경재배와 청동기 문물을 바탕으로 점차 일본 규슈 지방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실감나게 전개된다. 이
도래인들에 의해 일본의 고대 문명은 비로소 서광이 비추게 되었다 한다. 사람의 이동에 따른 문화의 전파의
대표적 예라 하겠다. 그러나 도래인이 발전시킨 것은 일본문화이지 한국문화가 아니라는 선생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생각해 보지 못한 주장이다. 막연히 일본의
고대문명은 한국에서 건너갔기에 우리의 것이라 간주했는데 말이다. 한일간에는 아직도 많은 불신의 벽이
존재하며 이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사료와 유물 중심의 객관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한다.
모처럼 집중하며 책을 읽은 까닭에 피곤이 몰려든다. 잠시 숙면을 취했다. 무주에 도착할 무렵에는 몸이 개운해진다.
< 설천봉에서 백암봉 >
예상보다 이른 시간인 10시 50분 설천봉에 도착했다. 날씨가 참 좋다. 볕은 쨍쨍한데 고지라 그런지 기온은 서늘하다. 스키 활강장 밑으로
펼쳐지는 확 트인 풍광이 근사하다. 인파에 섞여 향적봉으로 향한다. 바라보는
하늘에는 옅은 푸른 기운이 가득하다. 멀리 산들의 파노라마가 목격된다.
장관이다.
<
향적봉에서 >


덕유의 정수리에 올라선다. 평원의 성하(盛夏)는 원추리를 위한 무대이다. 푸른 초원 사이에서 노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산과 구름의 바다로 이어진 그윽한 풍경을 바라보다, 길게
이어진 목책 길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중봉으로 향한다. 중봉대피소의 지붕이 이국적이다. 대피소에서 한가한 여름 오전 한때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행락객을 지나자, 주목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눈을 뒤집어 쓴 모습에 익숙해져
그런지 조금은 낯설었지만 풍성한 잎이 주는 매력에 빠져든다. 주목은 허연 속살을 드러낸 고사목이나 이렇게
푸르름을 자랑하는 생목이나 과히 고산의 제왕목임에 틀림없다.
< 덕유 정상에서의 풍경 >


중봉 위에 선다. 멀리 저수지 뒤편으로 무주의 들녘이 눈에 들어온다. 제법 너른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택리지에 묘사된 무주 땅의 풍요로움은 허언이 아니었다.
<
중봉에서의 풍경 1 >


중봉을 지나 백암봉을 향한다. 지난 산행 최고의 고난 길이
오늘은 걷는 즐거움과 눈 맛을 동시에 만끽시켜준다. 자연은 늘 그대로 인대 내가 처해 있는 환경에 따른
천차만별로 내게 다가온다. 데크가 길게 나 있는 길을 걸으며 지난 육십령-백암봉 대간 길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
< 중봉에서의 풍경 2
>


11시 46분 백암봉에 섰다. 예상보다 이른 행보다. 사진을 찍느라 몇 번 멈추어 섰더니 일행들은 이미 다 도착해 있었다. 백암봉은
봉우리의 위세는 없는 작은 언덕이지만 이곳에서 대간 길이 나뉜다. 28일행들이 카메라 앞에 모인다. 산거북님이 못 왔으니 찍새가 마땅치 않다. 우왕좌왕하며 사진을 찍고
목을 축인다. 한 시간여의 발 놀림에 몸이 산에 잘 적응되었다. 넘실거리는
대간 능선을 따라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무리 지어 가는 동기들의 팔팔한 기상을 느끼며, 만약 훗날 동기모임이 만들어지면 이름은 288(28산악회 8기 백두대간 종주의 줄임말)이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
백암봉에서 288멤버들 >

< 백암봉에서 지봉 >
백암봉 하산 길은 예상대로 순했다. 짧은 비탈을 내려서자
평지 능선 길이 길게 이어진다. 곳곳에 야생화가 지천이다. 대세는
비비추이고 초롱꽃과 꽃향유, 원추리, 나리꽃도 보인다. 풍요로운 꽃 밭을 보는 기분이다.
< 덕유산의 여름 야생화 >




지도에 표시가 있던 상아덤과 귀봉은
그 존재도 모른 체 지나쳐 버렸다. 오래된 지도와 현재의 길은 일치되지 않는다. 길가 이정표도 백암봉과 횡쟁재 간의 거리만을 알려주고 있다. 불확실함이
커지면 불안해하는 습성이 있다. 여러 번 현 위치를 파악해 보지만 여의치 않다. 다행히 시원하고 평탄한 숲이 나와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빙
둘러 앉아 먹는 식사는 한 끼를 때운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잠시의 쉼이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1시를 조금 지나 횡경재를 지난다. 송계사로 가는 길이 나뉜다. 백암봉을 송계삼거리라 하고 이리 인적 드문 곳에 등산로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송계사는 꽤 큰 절인가 보다. 주변에 나리꽃이 탐스럽다.
< 돌아 본 덕유능선
>

< 꽃과 나비 >

제법 긴 비탈을 오른다. 식었던 땀이 솟는다. 지봉으로 향하는 길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여 오른 곳은 헬기장, 지봉은 눈 앞에 보이는 봉우리다.
헬기장에서의 풍경이 시원하다. 무엇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볼 수 있어 좋았다.
산에서는 눈에 보이면 금방 간다. 지봉 혹은 못봉이라고도 하는 봉우리는 헬기장에서 5분 거리였다. 작은 돌비석이 서 있다. 백암봉에서 4.9km를 왔고, 빼재까지는 6.1km가 남았다 한다. 여전히 예상보다 이른 행보다. 일행이 모여 전열을 정비한다.
< 지봉에서 빼재 >
이번 코스는 봉과 재의 이름이 혼란스럽다. 지봉/못봉, 달암재/월령재, 빼재/신풍령 등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말과 한자를 혼용해서 쓴 것인데, 실제 산에서는 그나마 표시도 잘 되어 있지 않다. 못봉에서 달암재
길도 별 특징이 없다. 오전에 살랑살랑 불던 바람도 자취를 감추고 습하고 더운 기운이 산 전체에 감돈다. 힘에 겹다.
달암재를 지날 무렵 산소리님이 여기서부터
대봉까지가 오늘의 고비라 경고한다. 비고가 150미터인데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에서는 힘든 길이라 말한다. 올려다 보는 눈에 거대한 산봉우리 하나가 서 있다. 천천히 고도를 높인다. 의외로 갈만하다. 길이 완만하다. 모두 잘 걷는다.
지금 같은 속도로 걷는다면 4시 반 이전에 빼봉에 닿을 수 있다. 고도계를 살핀다. 비고는 200미터가
조금 넘는다. 2시 40분 무렵 대봉에 도착했다.
돌아 보는 눈에 설천봉에서 시작된
덕유능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설천봉의 팔각정이 랜드마크 역할을 해 준다. 산이 유유히 흐른다는 말이 실감난다.
길가 숲에 온갖 야생화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동자꽃, 꽃향유, 원추리가 어우러진 모습은 최고 수준으로 만개한 여름 야생화 꽃밭이다. 지친
심신이 꽃들에게서 잠시 위로를 받는다.
< 여름 야생화가 벌이는 잔치 >

갈미봉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를 가자면 또 오르내림을 반복해야 한다. 28일행들은 흡사 걷는
기계마냥 잘도 걷는다. 오늘 새로 온 유박사란 분만 제외하고는 걷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산행 후 사진을 공유하는 공간에서 유박사님은 ‘3-4시간 걷는
산행만 하다가 대간 길을 도전했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체력 보강을 하고 대간 산행에 임하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소위 대간 속도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내 스스로도 오늘은 걷는 속도가 빨라도 부담이 없다. 지난
여섯 번의 대간 산행이 나도 모르게 걸음에 살을 붙이고 있나 보다. 이런 것을 두고 실력이 늘어나 하나!
< 대봉에서 >

< 빼재 표지석 >

< 에필로그 >
폐 주유소와 문을 닫은 휴게소로 말미암아 광장이 더욱 넓게만 느껴지는 빼재는 288멤버를 위한 훌륭한 식당으로 변했다. 지난 번 결석했던 다리 총무가
두부김치를 푸짐하게 준비해 왔다. 너른 광장에 둘러 앉아 막걸리 한 사발에 지나온 길을 안주 삼아 이야기
꽃을 피운다. 누구는 생각보다 힘든 코스라 하고 누구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한다.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그간의 대간 구간 중 오늘이 가장 널널했다. 곤도라를
타고 1600미터에서 시작한 등산이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오늘의
이 기분이 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더욱 산행에 매진해야겠다. 산은 없고 봉과 재로
이루어진 코스에서 걷는 재미를 느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