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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발상지 기행문
2009년 6월 18일 목요일 (흐린후 오후 늦게 비)
새벽에 일어났다.
설레임으로 밤을 보내고 아직 동이 트지 않는 이른 새벽이다.
간밤을 걱정과 설레임으로 잠을 설쳤다. 최근에 북한의 국경 지역에서 일어난 미국 여기자들의 납치사건과 북한에서 핵실험을 한 이유로 북한에게 정치적, 경제적인 제재를 하기로 유엔에서 결정한 것 또한 우리나라와 최근에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에, 혹시 국경지역을 여행하는데, 불상사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을 올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가슴 벅찬 설레임으로 간밤을 거의 뜬 눈으로 새웠다. 아침을 서둘러 먹는둥 마는둥 먹고 공항버스에 몸과 가방을 실었다. 버스는 아름다운 한강을 따라 올림픽대로와 김포공항을 거쳐서 인천 영종도 공항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비행기가 하늘을 삼킬 듯한 괭음을 내며 힘차게 이륙하였다.
서해 바다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여 비행하였으며, 드디어 대련에 도착하였다. 시간은 13시 20분, 대련이 우리나라 보다 한시간 늦은 것을 감안하면 인천 공항에서 13시에 출발하였으니 한시간 20분 밖에 걸리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웃이다.
공항의 출입국 심사는 매우 엄격하였다. 특히 요즈음 신종 인플루엔자 때문에 중국 공안이 직접 비행기에 올라 와서 승객 한분 한분에게 온도 첵크를 하였고 의심스러운 사람은 정밀검사를 하느라,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한시간 이상을 검사가 종료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출입국 심사대에서 의심나는 사람은 별도로 다시 불려가서 정밀검사를 하였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매우 긴장하며 출입국 심사를 받았다. 공항 분위기에서 부터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모두 입국하여 여행사 측에서 마련한 버스를 타고 대련시를 관광하기 시작하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것 같은 흐린 날씨에 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어온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사박오일 동안 우리를 안내할 현지 조선족 동포 여성이 자기 소개와 함께 인사를 한다. 연변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매우 아름답고 친절한 여성이었다.
“대련은 인구가 이백만정도이고, 삼면이 바다이며, 공업과 항구 도시로써 요동반도의 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중국을 닭이라고 한다면 대련은 닭의 턱에 있는 벼슬에 해당됩니다.” 안내원의 유창한 안내방송을 들으며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낯설은 도시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입국수속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대련 시내관광은 모두 축소하고, 러시아식 건물이 많이 보존되어 있고 잡화상들이 관광객을 호객하는 러시아 거리만을 관광하고 서둘러 단동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우리는 대단(대련→단동)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잔뜩 흐린 날씨, 끝없이 전개되는 구릉지의 옥수수밭들 그리고 평화롭게 보이는 농촌 마을들이 스쳐 지나간다. 농촌의 집들은 회색과 빨간색 기와집들이 섞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풍요로운 집 모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빈곤한 농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중국 농촌이 점점 변모해 가는 느낌과 희망이 존재하는 모습으로 나의 마음에 다가왔다. 저 끝없는 초록빛 구릉지, 가끔씩 언덕이 보일 뿐 높은 산은 보이지 않았다. 차가 달릴 때마다, 드넓은 벌판을 농토로 소유하고 있는 중국이 부러울 뿐이다. 가도 가도 끝없이 옥수수를 심어 재배하고 있었고 가끔 벼와 잡곡들도 보였으나 옥수수밭이 대부분이었다. 약 4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드디어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국경도시 단동에 도착하였다. 어느덧 어스름이 밀려 오는 것을 보니 하루가 가나보다. 초여름 흐린날의 석양에 꿈에도 그리던 압록강을 나는 처음 만나고 있었다. 나의 첫인상은 압록강 하구의 강폭이 기대보다는 너무 좁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기대한 탓일까 아니면 북한이 우리땅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일까 단동과 신의주 사이가 매우 가깝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4일후 다시 와서 압록강을 바라볼 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가슴이 뭉클하고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왜 우리는 서로 분단되어 이렇게 멀리 돌아와서 우리땅을 가지도 못하고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먼 옛날 이곳 내가 서 있는 곳도 우리 땅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압록강을 응시하며 북한을 바라보았다. 아! 우리 조국, 우리나라, 북한, 우리가 처한 현실에 매우 가슴 아프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린다. 내 마음 속에서도 마침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피곤한 나그네는 하룻밤 쉬어 갈 호텔에 도착하였다. 삼성급 호텔이라 하지만 시설은 좋지 않았고 곰팡이 냄새가 베어 난다.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보니, 고요한 국경도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전기불만이 외롭게 느껴진다.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비 가끔 흐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5시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낯설은 도시, 건물들을 촉촉이 적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시는 매우 한가하게 보였고 이따금 우산을 들고 바삐 걸어가는 시민들이 눈에 들어온다. 호텔에서 주는 쨈바른 토스토 두 조각, 삶은 계란 두 개, 콩나물 무침에 흰 쌀밥 약간, 그리고 옥수수죽 한 공기로 아침 식사를 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요리가 나왔지만 입맛에 맞지 않았고, 향신료 냄새로 먹기가 매우 역겨웠다. 고추장을 별도로 준비해 갔지만 꺼내지 않았다. 그럭저럭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중국에는 가짜 음식물이 많다고 매스컴에서 떠들어 대기 때문에 선입견에 시달려 더욱 식사 하기가 어려웠지만 몇가지는 입맛에 맞아서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어느덧 우리가 탄 버스는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 가고 있었다. 풍부한 수량에 힘차게 흐르는 압록강은 아름다웠고 초록빛 강뚝과 어우러져 한편의 그림과 같았다. 차창 밖에 빗줄기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강변을 따라 세워진 초라한 북한의 아파트를 보면서, 또다시 나의 가슴은 아려오기 시작하였다. 삼층 정도 되어 보이는 오래되고 획일적인 모습의 농촌주택들이 강가로 죽 늘어서 있는 모습, 가난의 흔적이 물씬 풍기고 있었고, 그 속에서 굶주리며 살고 있을 동포들을 생각해보니, 가슴이 아프다. 중국쪽에는 압록강 뚝을 건설하여 치수를 하였으나 북한쪽은 뚝을 쌓은 곳이 한 곳도 없단다. 그리고 압록강 건너 3층 짜리 아파트는 북한이 중국쪽에 자랑하기 위해 건설하였으며 그 당시에는 중국인들이 매우 부러워 하였단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중국쪽은 현대식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고 북한의 아파트는 변화가 없어 낡고 초라하기 그지 없어 보였다.
“저기 보이는 섬이 위화도입니다. 그리고 압록강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백여개 있는데 한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의 섬입니다. 그리고 압록강은 공동 이용 구간입니다.” 하는 안내원의 설명이 새롭다. 아! 위화도 이성계와 최영 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하러 위화도까지 왔다가 이성계는 회군을 하여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역사적인 곳,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어버이의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최영 장군은 끝내 조선을 개국하는데 반대하다가 참형으로 돌아가신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의 기개가 느껴지는 곳을 강 건너에서 바라본다. 중국에서 바라본 위화도는 한줄기 초록빛 선으로만 보일 뿐 크기나 모형은 알 수가 없었다.
압록강을 따라 넓은 대지를 달려 가다가, 평원 위에 멀리 산이 보이고 그 위에 장성이 보인다. 이 곳이 바로 호산장성이다.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곳이다. 잠시 머물러 성벽에 올라 보니 바람이 세다. 이곳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고구려의 영혼이 바람되어 부는듯 세찬 바람소리를 내며 불어온다.
어느새 압록강과 평원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산길을 오르고 모퉁이를 돌아 달리던 버스는 비포장 도로를 덜커덩 거리며, 심하게 흔들고, 기어서 간다. 비가 내리니 더욱 속도를 내지 못하고 개울을 건널 때마다 바퀴가 물속에 잠기기도 하는 듯 운전사의 긴장한 모습이 뚜렷하다. 이러다 차라도 고장이 나면 모든 여행 일정이 어려워 질 텐데 하고 은근히 걱정된다.
지금 동북 지방에는 도로 정비 사업이 한창이다. 다리를 새로 만들고 도로를 넓히고, 포장을 하고 새로운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있으며 2년 후에 도로정비 사업이 끝난단다. 그때까지는 불편하게 여행할 수 밖에 없단다. 모든 것이 공사 위주로 하기 때문에 차가 달릴 수 있는 우회도로는 대충 만들어 불편하기 짝이 없다. 바로 중국이 사회주의임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제 우리는 고구려의 제2차 수도인 국내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지금은 집안이라고 하는 도시입니다.” 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떠 일어 났다. 이곳이 우리 조상들이 고구려를 세우고 수도로 정하여 약 450여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돌 하나 풀 한포기 흙 한줌이 모두 고구려인 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 궁내성(집안), 지금은 성은 보이지 않고 현대적인 건물로 도시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우리는 오늘 특식으로 점심을 먹기 위하여 묘향산이라는 음식점에 도착하였다. 바로 북한에서 경영하는 음식점이다. 된장국, 김치, 평양식 냉면등 하루만에 먹어본 한식은 꿀 맛이었다. 예쁜 아가씨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니 한층 맛이 있고 기분이 좋다. 점심이 끝나자 마자 예쁜 아가씨들이 간단한 공연을 하였다. “반갑습니다, 고향의 봄, 푸른 하늘 은하수, 찔레꽃, 홍도야 우지마라”등 남한의 가요를 아주 아름답고 훌륭하게 부르는 노래 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움이 묻어 있었고, 나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만들었다. 흐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팁을 주려고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안내자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여기에도 여행 안내자와의 먹이 사슬이 얽혀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가씨들은 어딘지 모르게 삶에 지친 모습이 숨겨져 있는듯 느껴져서 다시 한번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인민의 천국이라는 북한이 굶주림과 싸우는 비극의 공화국인 것을 모르는 인민들이 매우 가엽고 또한 묘향산의 예쁜 아가씨들도 우리와 한 형제인데 갸날프고 날씬한 몸매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고 애처롭다. 그들과 간단한 기념 사진을 찍고 다음 관광에 나섰다.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 싸여 분지를 이루는 곳에 국내성(지금은 성이 없음)을 쌓았다면, 시골 마을을 지나서 어느 산비탈 양지쪽에는 고구려인들의 무덤이 수없이 모여 있었다. 크고 작은 무덤이 12,000개가 이곳 집안에 흩어져 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울 뿐이다. 돌을 쌓아 올린 무덤과, 돌을 계단형으로 쌓아 올린 무덤 그리고 흙을 쌓아 올린 무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고구려의 무덤들을 지나서 산쪽으로 더 들어가면 자연석으로 쌓은 성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궁내성의 외성인 환도산성이다. 국내성이 평지에 있었다면, 환도산성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뒤에는 험한 산을 두르고 앞쪽에 성을 쌓아서 지키기 쉽도록한 성이다. 전시에는 적을 막기 위한 곳으로, 평시에는 귀족들의 별장으로 사용하였다는 환도산성은 고구려인들의 지혜가 느껴지는 곳이다.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려고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담가도 보고, 맑은 공기 속에서 고구려인들의 냄새를 맡으려고 심호홉도 해본다. 여기 이 흙 한줌이 풀 한포기가 얼마나 소중한가? 천오백년전 이곳에서 살고 있었던 우리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훌륭한 유산을 물려 주려고 얼마나 노력하였는지를 엿볼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 수 많은 무덤들이 오늘날 까지 보존되어 있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다.
환도산성을 나와 약 10분쯤 달리니, 바로 돌로 만든 피라미드, 고구려의 20대 왕이신 장수왕의 무덤이다. 1500년전에 만들었던 그대로 이며 한번도 손보지 않았다고 한다. 1500년전에 이렇게 정교하고 과학적으로 만들었다니 고구려인들의 기술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기술이 있었기에 동북아의 강국으로서 고구려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장수왕의 무덤 앞에서 오늘의 현실을 돌이켜 보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광활한 영토를 지키지 못하고, 한반도로 쫓겨와 그것도 모자라 반토막으로 분단되어 서로 대치하고 있는 현실, 한쪽은 통치자의 세습을 위한 독재로 인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고, 다른 한쪽은 위정자들의 사리사욕으로 국론이 통일 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서로 자신만이 옳다고 싸우는 모습들, 이 무덤 속에 계시는 장수왕께서 이런 현실을 보시고 우리들에게 뭐라고 하실까? 참으로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 하시고 지하에서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막걸리라도 한잔 부어 놓고 큰절이라도 올려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잠시 그쳤던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장군총을 내려왔다.
고구려 19대 광개토 대왕 비석을 보았다. 평소에 광개토 대왕 비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와서 보니 정말 놀라울 뿐이다. 비석의 크기에서 놀라고, 이 큰 비석에다 정교하게 1700여자에 이르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다. 고구려의 건국에 관한 내용과 광개토 대왕이 넓힌 영토며, 업적 그리고 대왕릉의 위치등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이 비석은 일본이 명치시대에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려는 치밀한 계획 하에서 일본 군인을 우리나라와 중국에 비밀리에 파견하여 각 나라의 지형등을 조사하게 하는데 그중 중국으로 파견된 사코오 중위에 의해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몇자의 글씨를 변조한다. 바로 고대에 일본인이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다스렸다고 내용을 변조하였다. 참으로 일본인들의 야욕과 치밀함에 놀라울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장수왕이 자신의 아버지이신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에다가 일본인이 남쪽을 다스렸다고 기록할 이유가 없다.
아! 위대하신 광개토대왕님 속히 우리나라가 통일되도록 도와주소서. 대왕님의 영토를 지키지 못하고 분단되어 서로를 죽이려고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조국이 참담할 따름입니다. 하고 대왕님께 마음 속으로 빌었다. 비가 더욱 세차게 내린다. 오늘의 현실을 대왕님께서 보시고 슬퍼서 눈물을 뿌리시나 보다. 비를 맞으며 대왕님의 무덤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왕님의 무덤은 비석에서 약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장군총 보다는 정교하지 않지만 돌로 쌓아서 만들었으며, 묘 위쪽에다 방을 만들어 그 속에 관을 넣었다. 천 오백년이 흐른 지금은 관도 대왕님의 시신도 모두 사라져 없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텅빈 석실만이 관광객을 쓸쓸히 맞고 있었다. 천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 대왕님의 영화가 천세만세에 이어지지 못함을 슬퍼하는듯 빗줄기가 더욱 세차다. 서둘러 대왕님과 이별을 하고 버스에 올랐다..
또다시 버스는 시골 길을 터덜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버스 속에서 무엇인가 광개토대왕능이 주는 여운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니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여운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나의 몸 속에 광개토대왕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가 보다.
우리는 백두산을 가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 통화라는 도시로 향하였다. 얼마쯤 갔을까? 길가에 시골집이 있는 곳에서 잠시 쉬어 급한 것을 해결하였다. 여자들은 시골집 아저씨에게 부탁하여 시골집 화장실을 사용하였고, 남자들은 야외화장실을 사용하였다. 시골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매우 순박하였으며 매우 친절하고 겸손하였다. “깨끗하지는 않지만 사용하셔도 좋다”는 말 한마디에 중국 농부들의 순박함과 친절함이 절로 느껴진다.
내리던 비도 그치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2009년 6월20일 토요일(흐림고 맑음)
오늘은 백두산 관광의 날, 몹시 흐려서 오늘 천지를 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오늘 저희 일행이 백두산을 무사이 다녀올 수 있게 해 주시고 천지를 반드시 바라 볼 수 있도록 맑은 날씨를 저희에게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서둘러 준비를 하였다. 안내원이 지시한대로 겨울 바지에다 긴팔의 등산복을 입고 겨울 자켓은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물과 약간의 과자류를 준비하여 배낭에 넣었다. 물론 사진기와 배터리도 점검하여 여유분을 준비하였다.
이윽고 버스는 백두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통화를 출발하여 산길을 달리고 강변을 지나서 백산시를 통과하였다. 이곳 백산시는 석탄을 생산하는 탄광촌이었다. 주위의 산비탈에서 탄광이 보였다. 그리고 도시 밑 지하에서 석탄을 캐내어 지하가 텅 비어 있으며, 도시가 붕괴될까 우려되어 도시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중이란다. 백산시를 지나 차는 산을 오르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면서 유월의 푸르른 산길을 계속 달린다. 저멀리 산등성이에 시설물들이 자주 보인다. 바로 장뇌 인삼을 재배하는 시설이란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인삼이 유명하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많은 인삼과 장뇌삼을 재배하고 있고, 농촌의 소득증대 사업으로 정부에서 장려하고 있으며, 생산량의 대부분을 정부에서 매입해 준다고 자세히 설명해 준다. 농촌 근대화를 위해 이미 중국의 농촌에 새마을 운동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진시황, 불노초, 백두산 그리고 새마을 운동이 교차하여 나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어느덧 차는 고원지대에 접어들었다. 왕복 이차선 도로 양 옆으로 자작나무들이 빽빽이 자라서 원시림을 이루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 숲 가운데에 한줄기 왕복 이차선 도로를 달리는 상쾌함... 어느새 혼란스러운 나의 생각은 사라지고 감탄으로 변하였다. 나무의 굵기로 보아 그리 굵지는 않았지만 끝없는 자작나무 원시림은 초록빛을 마음껏 발산하며 우리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을 보면서 나는 문득 닥터 지바고의 영화가 떠 올랐다. 의사 지바고의 고달픈 삶과, 라라와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명화 속에서, 바람에 흩어져 날리는 자작 나뭇잎 그리고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Somewhere my love” 이 너무나 감동적이었고, 때 뭇지 않는 여기 이 자작 나무 원시림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격변기에 한 의사의 삶을 그린 영화가 나의 뇌리에 떠올랐나 보다. 마치 이 숲속 어디에선가 “Somewhere my love” 음악이 흘러 나올 듯 바람결에 자작나무의 잎들이 흔들린다.
점점 백두산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느끼며 천지를 맞을 마음으로 설레여, 몇 시간씩 달리는 지루함도 잃어버렸다. 정오쯤 되어서 자작나무 숲 가운데에 있는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 건물에는 장백산이라고 씌여 있었다. 조그만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마치고, 백두산 입구를 통과하여 약 5분정도 자작나무 숲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백두산 관광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버스를 탔다. 이곳에서 백두산 아래 정류소까지는 약 한시간이 소요 된다.
또다시 자작나무 숲길을 달린다. 자작나무, 낙엽송, 전나무, 죽은 고목들이 어우러진 원시림을 따라서 차는 달린다. 한참을 가다 차창으로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산이 보인다. 바로 백두산이다. 그렇게 나는 백두산과 첫 만남을 하였다. 멀리서 숲 사이로 보인 회색 바위산 그리고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웅대한 자태만 보여줄뿐,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는 보여주기 싫은듯 수줍은 듯 구름 속에 얼굴을 숨기었다. 순간 나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아아 오늘 천지는 나에게 허락하지 않겠구나, 하는 아쉬움의 탄성이다.
어느덧 차는 산 모퉁이를 돌고 자작나무 숲을 지나 키작은 고산나무들이 있는 곳을 달린다. 그리고 나의 눈 앞에 끝없이 광활한 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아! 이 높은 곳에 펼쳐진 푸른 초원은 마치 어느 목장에 온듯, 어느 잘 꾸며진 골프장에 온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자세히 보니 푸른초원 위에는 키작은 야생화들이 아름답게 그리고 소박하게 피어있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초록색을 칠한 도화지에 점점이 노란색을 찍은 듯이... 정말 아름다운 산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초록색 정원을 지나 백두산 정류장에 도착하여 바라본 산은 회색 바위산이며 그 끝은 구름이 덮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본 광경은 저 멀리 푸른 숲, 자작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어우러진 원시림이 까마득하고 가깝게는 광활하게 펼쳐진 푸르른 야생화 초원이다 그리고 위로는 회색의 바위산, 검은 구름산이 나의 눈앞에 전개된 광경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천지를 향하여 발을 옮겼다. 여기서부터 천지까지는 돌계단으로 되어있는데 총 1,236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고 안내원이 알려준다. 설례는 마음으로 한계단 한계단 발을 옮겼다.
산아래에서 위로 불어오는 바람, 싸늘함과 훈훈함이 섞여 있는 봄바람이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추운지도 모르고 한발 한발 오르면서 오늘 나에게 이 산행을 허락해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숨이차다. 가끔씩 쌓여 있는 눈을 밟으며 오르기도하고, 눈이 녹아 물들이 합쳐지고 가파른 민둥산을 급하게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오른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오니, 어느덧 구름은 모두 거치고 한눈에 천지가 들어왔다.
그것은 진한 쪽빛이었다. 하늘과 맞닿은 높은 곳에 푸르다 못해 진한 남빛의 맑은 호수, 아니 깎아 지른 회색 빛 절벽으로 그릇을 빚어 쪽빛 수정을 흘리지 않게 담아 놓은듯 고요하고 아름다웠으며, 너무나 커서 인간이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조주만이 담을 수 있는 하늘의 호수였다. 호수를 바라보는 나에게는 너무나 큰 감격이었다. 진한 남빛 호수에 내 인생의 모든 역정이 비춰지는 거울인듯, 나의 몸과 마음이 숨김없이 비춰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겸손한 마음으로 천지를 바라보며, 나의 인생 육십년을 살며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빌고, 나의 가족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자주 찾아 올 수 있도록 우리나라가 하루 속히 통일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너무나 감격하여 추운지도 모르고 한동안 천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왼쪽이 두 번째로 높은 백운봉, 오른쪽 봉우리가 제일 높은 장군봉(2,744m)이며 북한 영토이다. 장군봉 사이로 구름이 스쳐 가린다. 너무나도 고귀한 자태를 속인들에게 보이기 싫은가보다. 주위에는 많은 중국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도, 기도하기도, 감탄하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내가 서있는 바로 옆에 제5호 경계비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한동안 북한 땅에 서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세운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국경을 표시한 경계비 같은데 한쪽에는 조선이라고 새겨져 있고 반대에는 중국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천지를 바라보는 이곳은 해발 2,471m 이며 더 이상 오를 수 없어 아쉽다. 또한 천지까지 내려가서 천지 물을 만지지 못해서 매우 아쉽다. 사실 천지물을 받으려고 병 두개를 준비해왔으나, 천지물은 받지 못하고 천지에서 약 100m쯤 내려와 솟는 물을 한병 받아왔다. 아직도 여기저기 눈들이 쌓여있고 눈녹은 물들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작별을 하려하니 너무나 아쉽다.
문득 남이 장군이 지은 시 한수가 떠오르며, 조상들이 국토를 지키는 기개가 느껴진다.
白頭山石 磨刀盡 頭滿江水 飮馬無
男兒二十 未平國 後世誰稱 大丈夫
백두산의 돌을 칼로갈아 먼지로 만들고
두만강의 물을 말에 먹여 없애 버리고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남이장군은 이곳 북쪽 국경을 지키면서 남아의 기개를 한껏 표현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이 시 한수가 차마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줄이야... 나와 뜻이 다른 사람을 서로 감싸고 포용하는 자세는 사라지고,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헐뜯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는 것 같아 씁쓸하다. 부디 우리 민족이 서로 뜻을 합쳐서 하나가 되도록 백두산이여 천지여 굽어 살피소서. 그리고 남이장군의 기개를 느낄 수 있는 북파쪽으로 꼭 다시 한번 찾아 오겠습니다. 천지여 안녕히.... 천지와 작별을 고하고 백두산을 내려왔다.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줄곳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들 그 어디에선가 단군께서 나라를 열어 오늘에 이르렀을 텐데 그곳이 어디일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바로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우리민족이 시작한 성스러운 곳이라는 것을, 영원히 우리 마음 속의 고향임을, 그리고 나의 가슴 속에 백두산의 혼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산을 내려오면서 이상하게 형성된 바위와 협곡 그리고 땅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등 많은 것을 보면서 내려왔다. 그리고 서파 입구에서 다시 통화로 차는 달리고 있었다.
2009년 6월 21일 일요일(맑음)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 통화를 출발하여 환인이라는 도시로 향하였다.
재를 넘고 들을 지나 얼마를 달려오니 환인이라는 조그만 시골 마을에 도착하였다. 저멀리 산세가 험하고 우뚝 쏫은 산이 봉우리가 칼에 베인양 평평하게 보인다. “저기 보이는 평평한 산 봉우리가 고구려의 초대 수도인 졸본성입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오녀산 산성이라 불리며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어 보존하고 있습니다. 잠간 차를 세울테니 사진을 찍으십시오.” 하고 안내원이 설명을 한다. 차에서 내려서 기념사진 몇장을 찍었다.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이 부여의 대세 태자와 후계다툼 끝에 쫓겨서 부여를 탈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앞에는 큰 강으로 가로 막혀 있고 뒤에는 대세태자의 부하들이 잡으러 오는 급박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주몽은 업드려 합장배례하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물고기들이 나타나 다리를 놓아주어 무사이 강을 건너서 이곳 비류수가 흐르는 근처에 성을 쌓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바로 이곳 졸본성이다. 졸본성 해발 약 800m의 높은 산꼭대기에 평평한 곳이 있어, 이곳에 성를 쌓고 궁궐을 만들고 고구려를 세웠던 곳이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동안 올라 가니, 돌로 쌓은 성곽이 보인다. 바로 이 성문이 있는 곳만 지키면 사방은 가파른 절벽이라 적이 쳐들어 올 수가 없는 천험한 요새이다. 성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물이 있었다. 지금은 그곳을 소 천지라 부른다.
천 오백년이 흐른 지금은 고구려의 수도로서의 위용과 부귀 영화도 모두 사라지고 잡초가 욱어진 궁궐터와 집터만이 쓸쓸히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성루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멀리 비류수가 보인다. 저기 보이는 어느 곳엔가 주몽이 건너 왔으며, 이곳에서 역사를 이루고 자손들을 기르고 땅을 지키면서 나라를 세우는 고달프고 힘든 삶의 여정들이 이제는 우리들에게 전설처럼 들려 오고 있다. 바로 이곳이 우리의 발상지이며, 우리의 시작이었던 곳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다시금 나의 가슴은 아리기 시작하였다. 서문 입구에는 조그마한 포장마차 비슷한 매점이 있었고,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덥기도 하고 다리도 아파서 의자에 앉아서 쉬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린 가슴을 달래보았으나 답답함만 깊어갈 뿐이었다.
환인 졸본성을 내려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단동으로 되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의 여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늘 단동에 도착하여 압록강 유람선을 타고 약 한시간 동안 유람하는 것으로 모든 우리의 일정은 끝이난다. 오후 5시쯤 단동에 도착하였다. 압록강 하구 선착장에서 우리는 유람선을 탔다. 압록강은 어느새 나와 친숙해져 있었다. 강폭도 약 2키로는 넘어 보이며 수량도 풍부하였다. 그러나 물색은 흙빛이었다. 배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갑판에는 상인들이 잡화물을 파느라 분주하다. 드디어 고동소리와 함께 유람선은 출발하였다.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압록강에는 단동과 신의주를 잇는 다리가 있다. 육중한 철골로 만든 다리 하나는 단동과 신의주를 이어서 사람과 물자가 가끔씩 오가고 있단다. 때 마침 버스 한 대가 단동쪽으로 왔다가 얼마후 다시 신의주로 돌아 갔다. 그러나 거의 왕래가 없으며 하루에 몇 번 오가는 정도로 쓸쓸하게 보였다. 마치 영화 세트장의 전시용 처럼 배우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다리만 있을 뿐 사람도 자동차도 없었다. 그 다리와 나란히 하나가 더 있는데 북한쪽에서 끊겨있어 교각만 흉물스럽게 서있을 뿐이다. 중국쪽으로는 강 중간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관광객들이 걸어서 끊긴 지점까지 갔다가 되돌아 올 수 있게 개방되어있다고 한다. 유람선은 교각 사이를 지나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뱃머리를 돌려 북한쪽과 가깝게 남쪽 하구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갑판에서 북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가에는 많은 나무를 심어서 도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잘 지어진 건물이 있을 뿐이고, 적막이 감돌 뿐이었다. 그리고 강가에는 초소가 일정한 간격으로 많이 세워져 있었고 초소를 지키는 북한 군인들이 보이고 자전거를 타는 군인도 보였다. 하구쪽으로 더 내려오니 북한 군인들 이십여명이 자루를 어깨에 메고 차에다 싣는 모습이 들어온다.
아! 압록강아 말해다오, 바로 나의 눈 앞에 시간이 멈추어 버린 공화국이 지상 천국인가를? 그속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의 고통을 너는 아는지를? 그리고 언제 그 고통에서 해방 될 수 있는지를? 가슴이 답답하다. 이러한 조국의 현실이 슬퍼진다. 뱃머리는 부두를 향하여 압록강을 다시 거슬러 올라 가고 있었다. 단동쪽은 많은 현대식 건물들이 아름답게 세워져 있고 전깃불도 화려하다. 그러나 불빛이 없는 신의주쪽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시원한 강바람을 쏘이며 확트인 압록강을 유람하였으나 나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지고, 답답해진다. 강가에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하였고 북한의 모습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우리는 모든 여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 왔다.
오랜 시간 자동차와 유람선에 시달려 피곤한 몸으로 호텔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나에게는 광개토대왕능이, 백두산 천지가, 그리고 졸본성이, 북한의 모습이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주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며 깊은 한숨만이 나온다. 무엇 때문일까? 왜 일까? 분단된 조국의 현실일까? 이곳은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땅인데 지금은 빼앗긴 땅이 되어 버린 것 때문인가? 아니다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숙명적으로 고구려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며, 분단되어 힘없는 민족으로 현실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도 이 현실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도 기꺼이 자기 희생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지금 통일하면 통일 비용이 어떻고, 사회 혼란이 어떻고 하는 사치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런 생각은 버려야겠다. 하루 속히 어렵더라도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 후손들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는 마음 가짐으로 가다듬어야 겠다. 우리 모두가 하루 속히 통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합치고 지혜를 모아야 하겠다. 그것은 이곳에서 시작한 조상들의 위대한 유산들이 우리에게 통일을 요구하고 있고 또한 그들의 피가 우리 몸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끝.
(후기)
4박5일의 짧은 일정으로 고구려의 유적지와 배두산을 수박 겉 핱기로 보고온 제가 감히 일기 형식으로 여행기를 쓰다니, 참으로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짧은 기간 보고 느낀점이 너무나 나의 주위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있어서 졸필을 들었습니다. 아직은 표현력이나 구성이 많이 서투르지만 나의 느낌을 솔직히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끝까지 졸필 읽어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기회가 되시면 꼭 한번 가 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6월 30일 김진철 올림
첫댓글 지점장님 여행 기행문을 쓰셔도 좋을것 같아요 ~~~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_^
대련으로 들어가 백두산 서파코스로 다녀오신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코스로 다녀 왔습니다...상고사는 조금 안다지만 역사의식에 투철하지 못한 저같은 사람도 당연히 가슴이 뜨거워지고 울분이 치밀어 내내 침울해 하다 왔습니다.
북파쪽으로 다시한번 가봐야겠구요. 특히 가실분들은 계절을 잘골라 날씨기후 복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천지 올랐을때 비를 만나 봉우리는 물론 천지물빛도 보지 못하고 왔습니다...어이그! 복도 지지리...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