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자기의 시조 - 조선 도공 이삼평

임진왜란 정유재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이 전쟁을 일본 역사에서는 흔히 ‘도자기 전쟁’이라고 말한다. 선진문물의 약탈을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도공만이 아니었다. 금공(金工) 석공(石工) 목공(木工)은 물론 세공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17세기 초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한국만 갖고 있었다. 조선 백자에 군침을 흘리고 있던 일본은 이를 직접 만들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들이 경쟁적으로 도공들을 잡아갔다. 그러나 백자는 당시 조선에서는 흔하게 사용했던 투박하고 소박한 도자기였다.
임진왜란 때 끌려가 일본에서 백자의 세계를 연 이삼평. 그는 아리타(有田)에서 백자의 원료가 되는 흙을 발견하였다. 이를 사용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를 빚었기에 그는 지금도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도공들은 영주들의 극진한 지원 아래 마음껏 예술성을 살릴 수 있었다.
기술을 천시하던 당시 조선에서 천민 대접을 받으며 자기가 만든 작품에 이름도 새기지 못하였던 조선 도공들은 자신 명의로 된 도자기를 빚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을 시켰다. 조선 도공들은 큐우슈우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자신의 혼을 담은 백자, 청자를 만들면서 일본의 도자기 수준을 높였다.
지금도 아리타 마을에 가면 그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 앞에는 영광스럽게도 도예의 조상으로 추앙하는 도조(陶祖)라는 말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이삼평기념비로 오르는 언덕길에는 무궁화가 피어 있다. 4백년 전의 조선인 이삼평을 기리며 꽃마저 그의 조국의꽃 무궁화를 심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산 정상에 거대하게 '도조 이삼평 기념비'를 세우고 또한 신사(神社)까지 만들어 이삼평을 추앙하고 있다

1594년 혹은 1596년께 일본에 끌려간 그는 1616년 아리타의 이즈미산(泉山)에서 자기를 굽기에 알맞은 백자광을 발견하여 시라카와텐구(白川天狗) 계곡 부근에 가마를 짓고 정착했다. 그의 휘하에는 조선도공 155명이 있었다. 그들은 아리타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이삼평에 의해 표면이 거친 도기가 감촉이 매끈한 자기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일본 도자기에 있어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삼평에 대한 아리타 사람들의 존경심은 각별하여 그를 도조(陶祖)로 우러르는 것도 모자라 신격화하여 모실 정도다. 아리타의 도산(陶山)신사는 천황·다이묘와 나란히 이삼평을 모시고 그를 추앙하고 있다.신사 뒤편의 산 정상에는 '도조 이삼평비'라고 새겨진 큰 기념비가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 석비 뒷면에 이삼평을 '대은인'이라고 적고 있다. 석비 건립시기는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17년. 당시 조선 멸시 분위기를 감안해 보면 아리타 사람들이 얼마나 이삼평을 우러르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난 1990년 이삼평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충남 공주 계룡산국립공원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에는 '보은과 감사의 뜻을 다하고 국제친선과 문화교류의 상징'으로서 건립했다고 취지를 새겼다.
이삼평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왔으나 일본에서 찬란한 도자기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는 일본 호적을 갖고 일본 도공으로서 죽어갔고 그의 자손은 지금 14대까지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