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체 청소년원정대 2013.7.22~2013.8.02
<로체9기 대원 변유림 해외원정보고서>
2013.7.21 (일) D-1 해외원정, 나 이제 진짜 히말라야에 가나봐
오늘은 길고도 짧았던 6번의 국내훈련이 모두 막을 내리고 꿈에 그리던 해외원정 준비를 위해 공항근처 ‘왕산펜션’에 전 대원이 모이기로 했다. 원래는 아빠께서 왕산펜션까지 데려다주시기로 했었는데 회사일 때문에 못하셔서 나머지 엄마와 나 효림이는 형준이 오빠네 차를 타고 펜션까지 가게 되었다. (다시한번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펜션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반겨주는 건 소영이 언니였다. 우리 소영이 언니는 원주라는 꽤 먼 거리에서 오시면서도 항상 늦는 법이 없는 것 같다. 더군다나 늘 훈련에서 만나거나 헤어질 때 마다 누구보다 제일 반갑게 맞아주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걸보면 참 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암튼 잠깐 언니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을 사이 우리 혬니(혬니는 혜민이의 줄임말이다. 후에 ‘변팸’의 어원이 된다.)가 도착을 했다. 얼굴 못 본지 일주일 밖에 안 되었는데도 왜 이리 보고 싶던지.......훈련이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친해지고 이제는 친동생보다도 예뻐하고 아끼게 되었다.
아무튼 간에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해외원정을 앞두고 많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원정대에 지원하던 날 내게도 이런 날이 이리도 빨리 오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생에 가장 용감했던 17일’ 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저 “우와 정말 대단하다..멋있다.”라며 감탄할 줄만 알았지 후에 나도 저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조차 못했다. 히말라야라니 감히 그 어느 누구가 쉽게 그곳에 오리리라는 생각을 해보겠는가...그런데 내가, 바로 내일, 그 어마어마한 히말라야에 가게 된다니.... 마지막합숙을 하면서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오늘 밤은 잠을 자기는 다 틀린 것 같다. 물론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이제부터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예측불가한 일들이 내 가슴을 설레임과 기대감에 두근 거리게한다. 무엇보다 이 원정이 끝나고 나면 더 많이 자라있을 내 모습이 정말 기대가 된다.(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내모습을 이일지에 잘기록해 두고 싶다.)
히말라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간다~!!!
2013.7.22(월) D-day 세상의 유일한 기쁨은 새롭게 시작하는 것. -체사레 파베세-
원정을 가기에 앞서 해외원정 짐을 챙기느라 3시간 남짓 겨우 눈을 붙였다. 평소의 수면시간과 꽤 차이나게 모자란지라 몸이 으스러질듯 아파왔다. 일단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세우긴 했는데 아직 내 혼은 바닥에 '철썩' 붙어있는 그런 느낌이였다. 게다가 전날에 렌즈를 빼는 것까지 깜빡하고(하도 정신없는 통에..;;게다가 어차피 3시간밖에 못잘것이라는 생각으로..) '눈알'이 빠질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에휴 종합병원이 따로 없네" 이렇게 말을 내뱉고 별거아니라는듯 몸을 툭털고 일어나니 왜인지모르게 정신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에게는 훈련을 하면서 터득한 '쉽게 하기싫은 일 하기'비법이 있었기때문에 이제 3시간만 자고 일어나는 것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여기서 살짝 이야기하자면, 하기싫은 일 쉽게하는 방법은 바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일들은 주로 우리가 꼭해야햐는 일들중 하나인 경우다. 그렇기때문에 어차피 꼭 해야하는 일이라면 어찌됬든 하게될 일이라면 금방 후딱 해버리고 마는게 가장좋은 것같다. 특히 숙제라던가 일찍일어나기 같은 것들은 지금 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하게 될 일이니 생각을 바꿔서 빠른 결단을 내리는 것이좋다. 할까말까 고민하지말고 일단 해버리자는 대장님의 말씀에서 얻어온 깨달음이다.
아침제조를 하고 어느정도 잠에서 깨어나니 이젠 인천공한에 가야할 채비를 해야했다. 어제 새벽에 난리통(?)네 대충이라도 챙겨놓았던 짐을 단단히 동여매고 마무리를 짓고나니 이제는 짐갯수를 파악한뒤 미리 불러둔 콜밴에 실어야하는 일만 남았다.
천만다행으로(워낙에 덜렁거리는 성격이라..) 나는 장비수송팀이 아니였다, 그래서 내가 책임지고 챙겨야할 짐은 없었지만 일이 고된만큼 최대한 할수있는데까지 도움을 주고싶다. 아, 여기서 잠깐 내가 맡은 역할에대해 말해보자면 나는 봉사팀과 행정통역팀, 운행기록팀을 맡았다. 특히 이 셋중 봉사팀은 내가 팀장으로 속해있는데 의료봉사를 주로하고 선글라스 봉사를 할 예정이다. '봉사' 말만들어도 뿌듯한 두글자인 것같다. 봉사란 남을 돋는데 그에대한 대가성이 없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봉사를 함으로써 봉사하는 사람의 건강이 좋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듯이 봉사라는 것은 본디 하는 사람과 받는사람 모두가 행복할 수있는 WIN WIN 활동인 것이다, 또 봉사를 함으로써 오는 정신적인 만족감은 삶을 조금더 건강하게 살 수있도록 도움을 주는 윤활유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봉사팀의 팀장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만족스럽다.
특히 선글라스를 준비하면서(현지에서 나눠줄) 내가 느낀 행복은 받는 즐거움 보단 주는 즐거움에 대해 깨우치기에 충분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내것을 나눠줄 수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인것같다. 아무튼 우리는 어제 챙겨놓은 짐들을 모두 콜밴에다 실어두곤 로체원정대 전매특허 '짐반 사람반'신공을 펼쳐보였다. 이 신공이라하면 로체원정대원이라면 모두 한번쯤 겪었을 것이다. 마치 차표없는 승객처럼 화물칸에 실려 내가 짐인지 짐이 나인지 모를 기분을 로체원정대원이 아니라면 누가 느껴봤겠는가. 그래서였는지 콜밴을 타고 오는 내내 웃음이 베실베실 나왔다, 이 상황이 웃겨서.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콜벤운전기사님의 응원까지 받은채로 우리는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시간이 촉박한지라 짐을 부치고 탑승수속을 빨리 마쳐야했기때문에 잠시 앉아있을 시간조차 없었다.그렇게 정신없이 분주하던 찰나에 지원쌤께서 나와 소영이언니 완석이 오빠가 있는곳으로 오시더니" 자 이제 너희들에게 특별임무가 주어졌다. 가서 환전을 해올것!" 이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닌가 순간 나는 그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환전이라니...용돈기입장 한번안써보고 경제관념이라곤 그저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을줄 아는 내게 환전이라는 어마어마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로체원정대원이니까 무조건 부딪혀보는거다.!
그리하여 우리 셋은 머리를 맡대고 계산을 해가면서 겨우겨우 환전을 마칠 수있었다. 걱정은 일단 저지른 뒤에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뿜어져나온것은 우리는 꽤 좋은 팀이였다, 착착착 역할을 분담하여 차근차근 해보니 못할게 없었다. 로체원정대에 와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힘을 합친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였다. 조금 솔직해져보자면 나는 평소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관계가 나쁘다거나 그런것도 아니고 오히려 학급임원을 줄곧 맡아 할 정도로 꽤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데도 팀을 만들어 모둠활동을 한다거나 하는 것 보다는 개인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였다. 누구의 도움을 받는것도 그렇다고 대가없는 도움을 주는 일도 거의 하지 않았었다. 나는 개인적인 성향이 지극히도 강한 사람이였다, 그러나 이곳에 오면서 살아가는데 있어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고 도움을 주지 않을 수도 없단 것을 깊이 새기게 되었다. 하다못해 카고백을 옮기는 일만 해도 그렇다. 혼자들때는' 이걸 어떻게 들어''언제다 옮기나..' 하며 한숨만 푹푹쉬다가도 단한명이라도 거들어주면 번쩍번쩍 들리고 눈깜짝할새 일이 끝나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일때 무적 막강파워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세상은 혼자살수 없는 법. 그게 내가 깨달은 바이다. 카고하니까 생각난것이있는데 우리원정대에는 특별한 공식이 있다, 뭐냐구 카고수=사람수 라는 공식이다, 이공식은 지원쌤께서 알려주신것이데 말하자면 사람명수와 카고의 갯수와 같아야 한다는 말씀이신데 카고가 없어질때마다 사람도 그에따라 없어져야한다는 설명까지 친절하게(?)덭붙여주셨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신것 같으니 꼭 명심하고 있어야 겠다. 카고수=사람수
자꾸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는데 2번째로 가본 인천공항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해야겠다. 인천공항에 도착해보니 새삼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워졌다. 어쩜이리고 멋지고 넓게 지었을까 사실 이곳이 우리나라의 위상을 외국인들에게 가장먼저 피부로 직접느끼게 만들어 주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신경 썼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마치 우리엄마가 손님이 오시기전 현관청소를 공들여 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솔직히 인천공항에 들어서고 비행기안에 있기 전까지도 나는 전혀 내가 히말라야로 간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꿈을 꾸는 건가 하고 헷갈리기 까지 했다. 사실 나는 인도에 가고싶다며 어릴적부터 계획을 세우곤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도 빨리 가보게 될줄이야. 내가 했던 걔획은 친구와 함께 배낭여행으로 가는 것이였는데 일본, 유럽,미국,오스트레일리아, 중국,인도네시아, 아프리카,인도 대강 위의 순서 정도로 방문해 보고 싶었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평소 내가 자주 시청하는 TV프로그램중 하나인데 인도는 모든 여행의 정착지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한 걸 들은 적이 있다, 젊었을때는 각종 오지를 탐험하며 다니고 늙어서는 휴양을 목적으로 한 여행을 가는 것 그게 딱 나의 바램이다. 나는 로체원정대를 통해 내 수많은 꿈중의 일부를 실현하게 되었다.
Still....2013.7.22(월) Oh! welcome to the AIR INDIA~!!!
1시 40분쯤 우리는 드디어 복잡한 탑승수곡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티켓을 보니 우리가 탈 비행기의 이름은 AI317이였다. 비행기이름 밑으로 보이는 Air India 라는 글자가 꽤나 낯설게 느껴졌다.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나는 인도를 느낄수있었다. 강하지는 않지만 사람 자체에서 풍겨오는 타국의 향이 내 코를 자극해왔다. 역시 인도는 향신료의 천국이라고들 말하곤하던데 그말을 새삼 공감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인사를 하는 승무원의 모습은 오똑한 코와 짙은 눈썹 까무잡잡한 피부의 전형적인 인도인이였다. 평소 한국에서 외국인을 아예 못 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주 본것도 아니라 속으로 '신기하다' 라며 눈을 반짝이다가. 곧 그들이 아닌 내가 외국인이 된다는 사실에 오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내 좌석을 찾아 갔다. 그.런.데. 비행기의 내부가...대한항공의 수준을 기대한 것이 잘못이였을까, 대한항공은 우습고 KTX의 내부보다 못하다는 것이 내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불평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좌석과 좌석 간의 간격이 좁아 2시간은 커녕 1시간가다 다리에 쥐가 날것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도 두번째타는 비행기라 떨리는 건 여전했다. 나는 어릴때(지금도 어리지만..지금보다 더 어릴때) 비행기를 많이 탈 수있는 직업을 갖고싶었다. 그래서 내 어릴적 꿈은 스튜어디스였다. 지금은 중이염이 심해서 포기한 상태이지만, 어린마음에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은 꽤 멋져보였다. 돈을 주고 타는 비행기를 돈을 받고타다니....비행기타보는게 소원이였던 어릴적 나에게 이보다 멋진 꿈은 없었다. 어쨌든 두번째 타는 비행기에 발을 동동구르며 신이나있던 나는 금새 오랜 비행시간에 지쳐 시들어가고있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놀러가는 것이아니라 훈련을 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또 산을 올라야한다는 생각에 곧 마음이 착잡해졌다. 솔직히 마음이 제일 심란한 순간이였다. 이 심란한 마음을 잡으려 애써 책도읽어보고 수다도 떨어보고 잠을 청해보기도 했지만 불안함과 기대감이 섞여 나를 어지럽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결에 chicken of beef? 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잠결에 들린 외국어라도 밥먹으라는 소리는 기막히게 알아차리고는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드디어 기다리던 첫 기내식이 나왔다. 비행의 꽃 기내식이 아니던가! 게다가 처음타는 외국항공의 밥은 얼마나 맛있을까 잔뜩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은박지같은 호일에 덮여있는 도시락에선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이 훅 끼쳤다. 노란카레 사이로도 보이는 가느다랗고도 긴 쌀이 어색하기만 했다. 일단 한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 순간 쌀 알알이 돌아다니는 듯했다. 확실히 우리나라의 차지고 구수한 쌀과는 천지차이였다. 특유의 향도있고 찰기가 없으면서 불면 날아갈듯했다. 나는 해외원정을 오기전 인도의 식문화를 조사했었는데 흔히 베트남쌀이라고 불리우는 안남미는 동남아시아쪽에서 주식으로 쓰이는 쌀이다. 우리가 먹는 베트남쌀국수의 면의 주원료이기도하다. 쌀국수 면을 보면 찰기가 없어 뚝뚝 끊기는데 이 안남미로 만든 쌀밥은 베트남쌀국수의 10배정도 고슬고슬하다. 개인적으로 고두밥 보다는 차진밥을 좋아하는 나는 이 쌀과 친해지기 쉽지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났다. 그렇게 이국의 하늘에서 첫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나니 우리는 홍콩공항에 도착해있었다. 인도가 워낙 멀다보니 홍콩에서 경유를 하는 모양이였다. 쇼핑의 천국이라던 홍콩의 공항이라도 구경할 수 있을 까 했는데 공항은 커녕 기내 안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신세가 되버렸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서 평소에는 잘 읽지 않던 책을 꺼내들었다. 내가 가져온 책의 이름은 '꿈꾸는 다락방'이다. 이책은 내게 꿈꾸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책이다. 다른책은 몰라도 이책은 못해도 6번은 읽은것같다. 그래서인가 차례를 보지 않아도 원하는 목차를 한번에 펼 수있는 장기까까지 생겼다. 원래 하나에 꽂히면 질릴때까지 반복하는 이상한 버릇때문에 아마 이 책도 질릴때까지 혹은 내용이 외워질때까지 봐야될것같다. 아무튼 책을 읽으면서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동안 왔다갔다 분주하게 청소하시는 분들이 열심히 할일을 하시고 어느새 시간이 흘러 비행기는 이륙준비를 하고있었다. 구쿠쿠구구웅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비행기는 하늘로 올랐다. 닫아놓았던 창문을 열어서 어느새 어둑해진 밖을 보았다. 얼마안가서 또 다시 기내식이 나왔다. 이번에 나는 실패했던 치킨커리 대신에 램커리를 시켰다. 이번엔 마치 햄같은 양고기가 커리사이사이에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다행히도 아까 먹은 것 보다는 입에 맞는 편이였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인도식은 간이 조금 센 편인 것 같다. 짜내고 향신료덕에 매운감도 있고..먹다보니 디저트로 나온 것 중 하얀색의 크림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먹다보니 버터맛도나고 무염치즈 맛도 나는것이 달달하니 이게 뭘까 하고 너무 궁금해서 남자스튜어디스에게 물어보았다. Kheer라고 한다니 키르...라는 것은 끓인 쌀로 만드는 일종의 푸딩 같은 것이다. 버터나 설탕 우유등을 기본으로 각종 향신료나 견과류등 많은 응용요리가 나올 수있는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음식이라고 할 수있다. 그렇게 두번째 기내식까지 든든히 먹고 나니 벌써 기내의 불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한잠 자고 일어나면 우리는 곧 인도에 도착해있겠지 두근거리는 마음에 괜히 뒤척이다 곧 지원쌤과 연석쌤께서 얼른 자두지 않으면 후회 할 것이라 으름장을 두셔서 얼른 잠을 청했다.
-이어서..-드디어~마침내!!! 시간은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가서 우리의 비행기는 이륙한지 얼마됬다고 벌써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랜비행을 마치고 처음 바깥 공기를 쐰다는 사실에(그것도 그렇게나 기다렸던 인도에 내리는 첫발걸음이니까)마음이 들떳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열대의 답답하고 무거운 바람이 피부 위를 스쳐지나갔다. 아까 카레에서 느꼈던 인도 특유의 향도 느껴졌다. 문득 시계를 보니 8시 50분이였다. 인드라 간디공항은 생각보다 좋았다.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였다. 평소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못사는 나라 저개발국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항을 보기에는 정말 깜짝놀랄정도로 발전했다는 걸 알 수있었다. 아무튼 공항외관에 놀랄새도없이 바쁘게 우리를 숙소로 데려다줄 버스에 오르기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카트에다 카고를 잔뜩 실고선 버스를 향해 가니 정말 이제 시작임을 직감할 수있었다.
우리를 태우러 온 버스는 오-소리가 나오만큼 삐까 뻔쩍했다. 버스에 오르니 후덥지근한 외부의 공기와는 다르게 시원한 에어컨바람이 우리를 맞아줬다. 마치 인도 관광이라도 온듯 우리 대원들은 신이나서 수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참!
우리대원들을 공항에서 나올때 반갑게 맞아준 우리의 가이드의 이름은 Mr.삼부로 귀여운 얼굴의 소유자이다. 그는 버스에 함께 올라 대장님과 함께 앞좌석에 앉으셔서는 대원들이 숙소로 가는 동안 대략적인 인도 설명을 해주셨다, 그것도 영어로.사실 처음에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이것 역시도 편견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나름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던 나에게 그 가이드분의 영어설명은 한마디로 'shock'이였다.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던 영국이나 미국억양이 가득한 익숙했던 듣기 대신 인도와 영국의 짬뽕듣기는 정말 생소했다. 아무튼 우리 인도인가이드 분은 우리 대원들 버스를 타고 숙소까지 가는 동안 인드라 간디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해주셨다. 우리대원들은 설명을 들으면서 버스에몸을 맡긴채 인도의 밤을 뚫고 달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달려 도착한 곳은 델리 대학교였다. 델리라는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곳이 인도의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가는 국립대학인듯했다. 마치 서울대학교처럼말이다. 야심한 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경계가 삼엄했다. 우리의 버스는 삼엄한 경비도뚫고선 마침내 숙소로 가려고 했으나...버스가 무거운건지 도로상태가 나쁜건지는 몰라도 버스는 언덕길의 초입에서 바퀴가 제자리에서 헛돌기만 할 뿐 좀처럼 올라갈 생각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카고와 각종 짐을 들고선 언덕을 올라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건물의 팻말을 보니 IMF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IMF 97년 내가 태어나도 전에 일어났던 외환위기?!?!!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니 Indo Mountain Foundation 이라고 적혀저 있는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인도 산악협회이구나.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인도에있는 모든 산을 관리한다고한다. 그래서인가 이곳의 로비는 온통 히말라야와 관련된 모든것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처음 히말라야를 셰르파로서 등정한 분의 사진과 히말라야의 능선모형 등 여러가지가 전시되어있었다. 대장님과 탐사대장님, 서포터즈쌤들, 김닥터쌤까지 심각한 얼굴로 관리자로 보이는 듯한 분과 이야기 하실때쯔음 우리 대원들은 종석이 오빠의 지령에 맞추어 카고를 정열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로비구경을 하고있었다. 이야기가 다 끝나셨는지 서포터즈쌤들께서 대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오셔서 각종 전달사항을 전해주셨다. 그중에 우리가 가장 술렁였던 것은 우리가 잘 방이 2개인데 그곳에는 침대가 많고, 그래서 여자대원들을 한방에 다 재우고도 침대가 남으니 남자대원 몇명이 함께 여자대원들과 자야한다는 것이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남자대원들은 가기는 싫지만 누군간 꼭 가야만 한다니 눈치만 보고있는 모양이였다. 그러던 중 오빠들 중 한명이 "어린애들이 가야지"라며 거부할수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어린 중학생 남자대원들은 반박한번 못한채 가만히 있었고 나머지 남자대원들은 나만아니면되라는 식으로 안가면 안될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런 말을 꺼낸 대원을 충분히 이해할 수있다. 그 대원은 아마 여자대원을 배려하는 마음에 여자대원들이 덩치가 크고 나이도 많은 오빠들 보다는 어린동생들이 덜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에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일꺼다.(만약 그게 아니라 오로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유세를 부리려던거라면 정말 반성해야할 듯하다.)물론 우리 여자들도 솔직히 오빠보다 동생들이 편한건 사실이기도하고..그렇지만 분명히 중학생어린동생들도 자신의 의사가 있는데 그걸 존중해주지 못한것같아 정말 내가 다 미안해졌다. 조금만 오빠들이 동생들을 존중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이라는 막강한 힘으로 자꾸 누르려고 하다보니 어긋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우여곡절 끝에 누가 여자방에서 잘지에 대한 결정이 끝나고 모두 각자의 방으로 카고짐을 들고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방에 들어가니 자그마한 침대가 여러개 있고 조금 큰 화장실까지 있어 씻겠구나 하고 짐을 대충 풀었다(내일아침 새벽같이 또 떠나야함으로 대.충. 풀었다,)그냥 세면도구만 꺼내 씻을 준비를 하는데 하늘쌤과 지원쌤께서 내일 호텔에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냥 오늘은 대충씻고 얼른 자는게 좋을꺼라고 일러주셨다. 사실 대장님께서 주무실 준비를 하시는 순간 이미 벌써 씻으려는 생각은 버린지 오래라( 씻다보면 바스락거리고 시끄럽게 할것같아 포기했다.) 그냥 간단히 세수와 양치만 하고 잘 준비를 했다. 오늘도 내옆은 내 동생같은 혜민이다. 침대를 끌어다가 최대한 붙여놓구선 둘이서 꼭 붙어 잠이 들었다. 사실 난 되게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잠을 잘때 누가 옆에서 조금만 바스락거려도 쉽게 잠을 자지 못하고 깨서는 어둠속에서 두눈만 껌뻑거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로체원정대 훈련을 시작하고 부터는 머리가 땅에 닿기만하면 잘 수있는 경지까지 올랐다. 하긴 돌위에 침낭만 깔고 자다가 이슬맞고 깨어난 적도 있고 아무데서나 텐트치고 낙엽을 이불삼아 돌을 베게삼아 자다가 이런 침대에서 자니 호강도 이런 호강이 없다는 생각이든다. 내일의 숨가쁜 여정을 위해서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청했다.
2013.7월23일(화) 나에게 가까이.
삐삡삡삐빕빕삐 알람소리에 깨어나니 4시30이였다. 이제는 일찍일어나는게 익숙해져서 자기전 내일 몇시에 일어나야지 생각하고 잠에들면 그즈음 벌써 뇌는 반쯤깨어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마치 몸이 미리알고 준비를 하는 느낌이랄까? 일어나자마자 정신차릴 새도 없이 우리원정대의 꽃 아침체조를 하러 뛰쳐나갔다. 몽롱했던 정신이 새벽공기를 맞고 살아나고 있었다 대원들의 얼굴을 보니 3시간 밖에 못잔터라 피곤이 얼굴에 몰려 다들 누군지 못알아보게 팅팅 불어잇었다. 잘잤냐고 문안인사를 하면서도 서로 얼굴을 보고 웃으려다 되려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조용해졌다. 보니까 밤사이에 모기에 물려 고생한 대원들도 있는 것 같았다. 왜인지모르게 나만 모기밴드덕택에 무사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체조를 하고 마당을 한바퀴돌고 난뒤 드디어 우리대원들과 인도에서의 첫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다. 오늘의 메뉴는 빵과 쨈과 계란후라이였다. 주방에서 인도아저씨의 손맛으로 완성된 아침식사는 엄마가 해준 밥보다는 아니지만 맛있었다. 꼭두새벽부터 지구반대편에서 온 손님을 위해 준비하셧을 아저씨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맛있게 먹었다. 특히 아침에 마시는 밀크티는 정말 최고인것같다. 인도의 밀크티는 맛이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조금 다른데 그이유는 바로 인도의 마법의 가루 마살라에 있다. 인도는 밀크티에도 마살라를 넣어먹어서 밀크티에서 생강차같은 화한 맛과 계피의 향을 약간 느낄 수있다. 이 맛에 중독되어 한국에 가면 잊지못하게 될까 걱정된다. 대원들과 옹기종기 모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오늘의 일정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했다. 방에서 카고를 옮기고 이제우리는 국내선을 타기위해 다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야한다. 마지막으로 IMF건물 앞에서 우리 대원들과 사진을 찍었다. 건물현관에 일렬로 정렬해놓은 카고를 버스에 싣고선 우리모두 버스에 올라탔다. 밤에 볼때는 몰랐는데 인도의 아침의 모습은 분주하면서도 평온했다. 도시같은 지루한 복잡함이 아니라 복잡함속에서 평온한 그런 모습이였다. 버스에 올라탄지 얼마나 지났는지 우리는 인도델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짐을 다시 한번 공항내부로 옮기기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사실 아까 부터 나는 투덜투덜거리고 잇었다. 왜냐하면 이 국내선이라서 기내에 들고갈수있는 짐의 무게가 15kg으로 우리는 카고에서 본부짐을 꺼내 각자의 배낭에다 넣었다. 그때문에 내가방은 집이라도 짊어진듯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무겁다 어깨가 빠질것같다고하면서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그말은 들은 인하언니가 자신의 가방이 가볍다면서 흔쾌히 자신에게 조금나누어 달라고 했다. 내가 그래도 되요? 라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묻자 언니는 너무도 흔쾌히 yes를 외쳤다. 나는 언니도 힘들텐데 나를 위해 기꺼이 예스를 외치는 언니가 너무 고마워서 말만으로도 힘이됬다. 그래서 나난 웃으면서 언니에게 언니말만 들어도 짐이 가벼워졌어요 라며고 말하자 언니는 내짐의 3/1을 빼앗아들고는 씩씩하게 앞으로 갔다. 자신만이 아닌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가 너무나 멋져보여서 나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시한번 되뇌였다. 또 탑승수속을 기다리면서 서있는동안 내가 힘들어하자 완석이오빠가 짐을 조금 나누어 들자고 먼저 청해줘서 정말 기분이좋았다. 물론 민폐인것같아 정중하게 거절했지만..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것같다. 말한마디로 처냥빛을 갚을 만큼 말한마디가 큰 힘이되고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공항에 들어서자 큰 규모에 입이 떡벌어졌다. 규모에 놀랄새도 없이 우리는 최대한 빨리 수속을 마치고 짐을 붙여서 비행기에 올라야하기때문에 서둘렀다. 지루한 탑송수속을 하다가 현복이오빠아버님이시자 우리의 탐사대장님께서 미인대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인도의 여성들이 미인대회에서 우승을 한다는 말씀이셨는데 동양미와 서양미의 조화가 있어서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살이 찌는 경우가 많다고 덛붙이셨다. 또 터번을 쓰고 그속에 머리카락을 숨기는 힌두교도 싱크교도등 여러 인도에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우리가 오늘 탈 비행기는 레로 향하는 비행기이다. 이곳 델리에서 레까지 비행기로 한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제주도 정도 되는 거리인것같다. 아까 탐사대장님께서 말씀해주신 인도의 여성에대해 생각해보니 긴속눈썹과 까만눈동장 오똑한 콧날 구릿빛피부 이상적인 여성상 아닌가? 이제 인도에 가면 예쁜 인도 언니들을 많이 볼수 있는건가? 인도에 도착하면 제일먼저 탐사대장님의 말씀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싶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라다크레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라다크로 향하는 비행기안 밖을 내다보니 숨을 쉬지 못할정도록 아름답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정말"Breathtaking"이라는말이 머릿속을 수만번 스쳐지나간다. 마치누가 깎아 놓은듯 울뚝불뚝솟아있는 저 산맥은 정말 말로는 다 못할 그런 광경이였다. 이제 곧 내가 저속에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듯하게 설레여왓다. 사실 고산병에대해 많이 걱정을 했었는데 진짜 이 절경을 보니 고산병따위가 무섭지 않아졌다. 경치에 노예가되어 한없이 바라보다가 금방 비행기는 라닥크 레에 도착해있었다. 9시48분.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조금씩 고산증세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조금씩 머리가 아파오고 약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공항은 사막위에 덩그러니 있었다. 태양은 뜨겁고 허허벌판위에 공항이 있어 약간은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그래도 흔하지 않은 풍경에 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나 그곳이 군사지역이라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빌린 밴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그 공항지역 자체가 3500m정도 되는 곳이라서 미약한 고산증세가 시작되고있었다. 그래서 인지 소영이 언니가 코피를 쏟았고 나는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인근에 다다르니 주변의 여러호텔들이 눈에 띄엿다. 우리호텔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두근두근 기대가 됬다, 차의 창문넘어로 보이는 우리들의 숙소는 빨간창틀과 하얀벽이 푸르른잔디와 어우러져 여유로움을 뿜어냈다. 날씨가 좋아서일까 정말 그림속의 한장면 같았다. 우리는 짐을 대충 풀어두고 잔디앞 테라스에 나와 솔솔바람부는 나무그늘 아래서 블랙밀크티한잔과 다과회를 여유롭게 즐겼다. 이 블랙밀크티는 한국에 돌아가면 정말 그리울것같다. 나는 평소에도 한국에서 버블티를 자주 마시는 편이다. 내가 주로 마시는 버블티는 블랙밀크티에 타피오카펄을 넣은 홍차이다. 이곳에서 마시는 마살라를 넣은 밀크티가 정말정말 한국에가면그리워질것같다 마치 군대에서 먹던 초코파이처럼....그렇게 여유를 즐기면서 사진도 찍고 탐사대장님께 인도의 삼색깃발에대해 설명을 들었다, 이도의 국기에는 만다링이 들어있는데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져있다. 이것은 마하트마간디의 요구로 넣어진것이라고한다. 또 우리가 산에 가면 조르테나라는 긴 빨랫줄 같은 끈에 스카프를 묵어둔 것같은 것이있는데 그것은 불경을 적어둔 일종의 소원성취를 위한 매개체라고 말씀해주셨다. 특히 티벳의 조장과 풍장에대해서도 설명해주셨는데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도끼로 잘게부수어 하루빨리 독수리가 그들의 영홍을 가져가 주길 비는 것이라고한다. 솔직히 한국인의 관점으로서 이 풍습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러 관점을 가지고 오픈 마인드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문화의 차이를 느낄수있을 것이다. 1:08 우리는 인도에서의 첫식사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 숙소근처의 티벳식당에서 첫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인도의 향신료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마치 한국음식을 먹는 느낌이 들어 입에 잘 맞았다. 에휴 고상병만 아니엿더라면 괜찮았을텐데 슬슬 입질이 오는 고산병때문에 밥맛도 없고 체기가 있는듯 힘들었다. 배가 고픈데도 한입만 먹으면 토할 것 같아 정말 죽을 맛이였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외면해야하니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는것같다. 밥을 먹고나니 든생각이지만 고산병만 아니라면 해외원정은 정말 호사중에 호사다 국내훈련처럼 우리가 밥을 해먹는 것도아니고 식당에서 서빙해주는 밥을 먹고 설겆이도 안해도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일단 매우친절하고 맛있는 음식에 감히 별점을 매겨보자면 별이 5개이다. 식당에서도 소영이언니의 코피가 멈추지를 않아서 정말 걱정했다, 소영이 언니 본인도 이렇게 코피가 많이 나는 적이 처음이라며 당황스러워했다, 기압차이 때문에 소영이언니의 가녀린 몸이 놀랐나보다. 에휴 우리 언니 어쩌나..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가서 잠시 쉬었다. 그리고는 우리는 팀을 두팀으로 나누어서 우리가 올라가서 먹을 양식을 살 팀과 사원탐사를 갈 팀으로 나뉘어졌다. 나는 사원탐사팀이였다. 언니들과 혜민이와 나는 사원에서 인도의 진면목을 볼수있었다. 우리 나라와 인도는 멀리 떨어져있지만 무언가 비슷한 점이 많은것같다. 특히 불교라는 그런 종교를 믿고 그 기원이 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건축물이나 사원등 어디서 본듯한 탑등이 많은 것이 뭔가 정겹게 느껴졌다. 우리는 사원을 구경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내려갔다. 내려온뒤 숙소에서 쉬고 대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떠드는 사이 고산병은 서서히 우리 대원들에게 스며들고있었다. 너무나 들떠서 일까 까불고 다니는 바람에 고산병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앉아있기도 서있기도 힘든상태가 되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희한하게 고산병은 토할듯 안토할듯 체한것같기도 하고 그렇게 아프다. 그런데 몸이 아파오니 점점 만사가 다 귀찮고 짜증나기시작했다. 그래서 인가 이런 대장님의 말씀이 내가 힘들더라도 남에게 화내지 않고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배려라는 것 내가 편할때하는 배려는 누구나 할 수 있는것이니까 고산병은 나만 오는게 아니라 다람사람도 오는 것이니까 모두 다 아픈데 어떤사람은 밝게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사람은 죽을 상으로 표현하는사람이있다 이둘의 차이는 무얼까? 물론 둘중한나가 훨씬 아파서 그런것일 수도 있지만 의지력차이는 사실 역시 무시할 수 없을 듯 하다. 도전과 시련,지혜 인내 노력 이 과정을 통해 극복을 하다보면 자신이 자라있음을 느낄수가있다. 절제와 양보를 통해 자신의 내실을 쌓도록 훈련을 통해 이루어가야겠다. 그래도 아까 비행기안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감탄할때까지는 이 고산병이라는게 이렇게 힘든것인지 알지도 못했다. 근데 정말 딱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띵한 느낌이 내가 히말라야에 한걸음 더 가까워졌음을 실감했다. 저녁은 숙소 근처에서 먹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인도의 거리를 나섰다. 5분도 안되서 우리는 인도식당에 도착했다, 나는 고산병이 심해져서 밥을 먹는 둥마는 둥했다. 대원들이 하나둘씩 고산병때문에 점점 파김치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특히 믿었던 맏이 종석이 오빠가 거의 쓰러지다 싶이 하고 다른 대원들도 상태가 그리좋지는 못했다. 박사님께서는 고산병에 대한 팁을 많이 주셨지만 그걸 실천하려고 해도 너무 상태가 안좋아서 그냥 멘붕상태라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비실비실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벌써 어둑어둑해졌고 우리는 느깜베를 하고 잠들 준비를 했다. 느깜베에서 종석이 오빠가 아플때 주변에 떠드는게 신경이쓰였는지 그것에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오빠한테 미안했다. 더 배려해주지 못한것이...오늘은 조금 후회가 드는 날이였다. 고산병의 초입에서 꼼짝없이 두손두발다들고 완벽한 패배선언을 한 것 같아 내 자신에게 화가나기도 했다. 자만하지말고 겸손함을 가지고 여유롭게 내가 정한 목표를 위해서 조용하게 달팽이처럼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잊지말아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나는 다시한번 내일을 꿈꾸면서 잠들었다.
2013.07.24(수)히말라야, 너를 보여줘봐.
아침에 일어나 눈을뜨니 몸이 히말라야를 간다는 것을 알고있는 것 처럼 몸이 들떠있었다. 몸이 붕붕뜨는듯 그렇게나 기다려왔던 순간이 코앞에 있다는 사실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스톡캉크리( 해발 6100m)이다. 숫자를 들으니 정말 어마어마하지만 결국에는 내가그 자리에서 웃게 될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의심치않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출발선에 섰다. 간단하게 인도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밀크티 한잔을 마시니 온몸에 에너지가 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하룻밤자고 나니 고산병이 이제 이정도 고도는 아무것도아니라는듯 나아지고 있었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니..하긴 그 수만년의 시간동안 인간은 수만가지의 다양한 기후에서 적응하기위해 얼마나 힘겨운 사투를 벌여왔을까 싶다. 아무튼 우리는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서 우리는 각자 개인 카고에서 불필요한 책, 운동화 치약 등 을 정리하고 본부짐을 정리해야했다. 각자 짐을 들고 대장님방에 있는 카고에 하나씩 넣고 정리하고 정신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있었다. 모두 함께하면 좋았겠지만 하는 사람만 한다는게 늘 문제였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하면 다른사람도 그 모습을 보고 같이 함께해줄 것이라는 걸 믿기때문에 나는 열심히 내 할일을 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거해 저거해 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직접보여주는 게 가장 빠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강함은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하듯이 겸손과 실천 속에서 리더십이 피어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걸 실천하는게 어려운걸까???아무튼 각자 자기 할일을 맡아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데, 오빠들이 상태가 안좋은듯해보였다. 아마 어제 식량준비를 하면서 이것저것 일을 많이해서 그런듯 싶다. 우리 원정대의 기둥인 오빠들이 비실비실하니 걱정을 안할 수없었다. 나라도 열심히해서 오빠들의 짐을 덜어줘야 겠다는 생각을했다. 어찌어찌 짐을 다싸고 나니 우리는 차를 타고 스톡빌리지로 향했다.스톡빌리지는 이름에서 알수있듯이 스톡캉그리의 밑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차를 타고가면서 바깥구경도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가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스톡빌리지에 도착해있었다. 아, 정말 딱 차에서 내린 순간 입이 떠억 벌어지면서 눈이 다 맑아지는 듯 탁트인 절경에 감탄에 또 감탄 할 수 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멋진 풍경은 처음이였다. 하늘은 마치 손을 대면 촤륵하고 쏟아질 것 같은 그런 바다같이 파랗고 그곳에서 눈을 조금만 내리면 우뚝 솟아있는 눈덮인 산들은 달력에서나 보던 한장의 그림같았다. 내가 그림속에 들어있는 기분. 나도 따라 한장의 그림이 되는 것같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우리는 차에서 카고를 내리고 옮기고 베이스캠프에 우리의 텐트를 치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잘 안해 보았던 텐트치기를 내손으로 직접 대원들과 힘을 모아 함께 텐트를 치니 마치 내가 내손으로 집을 지은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허기가 져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정말 라면은 어딜가나 맛있는것같다. 다만 우리의 셰프님들이 라면은 처음이신지라 서투른 솜씨에 팅팅 불었지만 그래도 맛있고 맛있는게 라면이다. 어떻게 끓여도 라면은 라면이니까..라면이 소화되기도 전에 우리는 4000m로 가벼운 트레킹을 나섰다. 하핳..가벼운 트래킹..4000m라는 숫자가 마치 4000t 쯤은 되는듯 어깨를 짓눌렀다. 오른지 조금밖에 안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온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산지대라서 그런지 한걸음한걸음이 힘들지만 이런 풍경을 보면 가슴이 뻥뚫리고 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하지만 힘든건 사실이였기에 오를때만큼은 무념무상으로 목표를 정해두고 저기까지는 올라간다는 생각으로 이악물고 올랐다. 다른 몇몇대원들은 고산병의 여파로 아래에서 숨을 고르며 쉬고 있었다. 솔직히 고산병에는 장사없는것같다. 평소체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오는 것이라서 국내훈련에서 에이스자리를 앞다투었던 오빠들도 힘에 부쳐하고 있으니 말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쯔음 대장님과 선발대가 멈춰섰다. 아휴 드디어 쉬는 구나 하구 숨을 고르고 있을때 주변 대원들은 간식도 먹고 물도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간식과 물 먹는 것 조차 힘들어서 그저 앉아서 숨만 쉬고있었다. 얇디얇은 스틱에 그저 내몸을 맞긴채 한걸음한걸음이 모래주머니를 찬 것 처럼 무겁고 힘들었다. 내가 힘들어하니까 혜민이가 걱정하면서 옆에서 보조를 맞추어 걸어주었다. 혜민이가 얼마나 마음이 깊은지 내가 언니이지만 혜민이에게 의지가 많이된다. 그렇게 아등바등 400m 오늘의 트래킹 코스를(후덜덜) 마치고 정상에 올랐다. 오르는 내내 줄레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인도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힘겹게 산을 올라가는 사람과 뿌듯한 마음으로 내려가는 산악인간의 동지애 같은 것이랄까?(ㅋㅋㅋㅋㅋㅋ) 바로 내가 서있는 여기 이곳이 오늘 나의 목표였다. 고소적응을 위해서 우리는 한시간정도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조금만 위로 올라왔을 뿐인데 기온도 차이가 많이 나고 바람도 엄청 불어서 눈을 뜰 수 조차 없었다. 나는 한시간동안 바람을 맞으면서 나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을 했다. 지금 내게 오는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뭐든 할 수있을 것같았다.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다보면 언젠가 나는 정상에서 웃고있겠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하산을 시작했다. 나는 트래킹 후에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저녀기 되어서 식량지원팀은 맛있는 부대찌개를 준비해주었지만 나는 고산증세때문에 국물과 햄조각 몇개밖에 먺을 수없었다. 임신한 여자처럼 음식 내음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음식을 앞에두고 이러니 고역도 이런 고역이없다. 저녁을 먹고나니 감수성이 충만해져서는 별도 보고 히말라야 언저리의 밤하늘을 구경하면서 대원들과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여자대원들끼리 이제는 서로 가족같은 끈끈한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들때 서로 의지할 수있는 것은 대원들 밖에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니까 가끔 의견충돌도 생기고 하지만 이제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 더큰 동지애를 느낀다.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이미 한배를 탄 사람들이니까...텐트안에 누워서 방금까지 쏟아질듯 떠있던 밤하늘의 별을 그리면서 잠에 들었다.
2013.07.25 (목)-4400의 위엄, 그 대단함에 대해서
오늘 우리는 4400m를 목표로 했다. 우리의 가이드 루소를 따라서 계곡을 천천히 건너면 된다고 한다. 목표지점인 마노카로까지는 최대4시간, 최소 2시간정도 걸릴 예정이라니 오늘 일정은 그리 힘든 일정은 아닐 것이라 예상된다. 우리는 텐트를 철거하고 다시 짐을 챙겨 올라갈 채비를 마쳤다. 사실 고산지대에서는 한걸음한걸음이 정말 힘들다는 사실을 꼭 알려주고싶다. 그 가느다란 스틱에 몸을 의지에 숨을 헐떡거리다보면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정말 죽을 만큼 힘이든다. 몇걸음 가다가 쉬고 다시 또 몇걸음 가다가 쉬다. 결국에는 주저 앉고 만다. 몸상태가 좋은 대원들이 로체 화이팅!이라고 외칠때마다 이를 악물고 오기가 생겨서는 올라가다가 결국에는 한계에 다다라서 다시 쉬고 또 오르고 또 오르고 징그럽도록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다시 오르막길 산을 오르다보면 산과 인생이 참 닮아있다는 것을 느끼게된다. 소름돋을정도록 말이다. 고진감래 라는 말처래 쓴것이 다하면 단것이 온다고 오르막길끝에는 내리막길이 있고 내리막길 끝에는 오르막길이 있으니 말이다. 또 산을 오를때 오르막길은 내려갈때는 내리막길이니 조삼모사와도 비슷한 이치이다. 고산병때문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의 상태가 된 나는 이미 정신력으로 버텨야했다. 주변그 누구도 도와줄 수없는 오로지 나와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이생각으로 버텼다. 지금 내가 포기하면 앞으로의 나도 없다는 사실 말이다. 점점 오를 수록 햇볕은 내리쬐었고, 대원들과 나는 더욱더 지쳐가고 있었다. 사실 정말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항상 늘 주변에서 나를 독려해주는 대원들덕분에 지금까지 잘 버텨온것같다. 솔직히 모두다 죽을만큼 힘들지만 그걸 이겨내는자만이 맛볼 수있는 열매는 달디다니까 오로지 그것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오르는 것일테지..결국에는 오르게될테니까 최대한 그 고통을 짧게 하려면 지금당장 실천하는게 한걸음이라도 옮기고 보는 것이 상책이였다. 오르고 올라 4007m에서 다시 4시간 정도를 더올라가니 겨우 베이스캠프도 아닌 그저 캠프에 도착했다. 정말 재미있는것은 우리가 바로 최장기록을 세웠다는 것. 하 정말 뿌듯하넼ㅋㅋㅋ.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곳까지 오는데 4시간 이상 걸린 역사가 없는데 우리원정대가 바로 그 주인공이 되었다. 장장8시간이나 걸려 겨우 도착했다니. 결국 어찌 되었든 간에 4400에 도착했지만말이다.점점 고산지대가 뚜렸해지고 심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련쯤은 별거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아 툭털고 일어나면 된다.그걸 잘 알고있는 나이니만 그래도 몸이 힘들어지니 계속 짜증이나고 만사가 다귀찮아진다. 얼굴이 붓고 머리가 아프고 토하고 따 이게 그 책에서 읽어보았던 고산병의 증세였다, 내가 16년이라는 삶을 살면서 고산병이라는 먼나라 별나라 이야기 같은 병에 걸려보게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찌 생각해보면 이것또한 삶에 있어서 값진 경험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는 고산병? 내가 이런걸 또 언제 겪어보겠어 지금 이순간을 감사히 여기자라는 마음가짐으로 한번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않음을 깨달아야겠다. 그렇게 겨우겨우 도착하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대원들이 수고했다며 나를 반겨주었다. 드디어 해냈다. 이런게 바로 인간승리아니겠는가..천막으로 만들어진 주방으로 가서 생강차를 얻어먹고 나니 아 이제야 살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8시간의 고된산행을 마치고 먹는 저녁식사는 정말 꿀맛이여야하겠지만 나는 밥 숟가락을 들 힘조차나지를 않았다 그저 눕고싶고 쉬고싶었다. 그래서 밥숟가락만 보면서 밥알을 세고있었다. 그러자 대장님께서는 밥을 조금이라도 먹어야 고산병이 나아진다고 말씀하셨고 정말 눈딱 감고 한숟가락을 꿀떡 삼켰다. 모두 긴 산행동안 너무들 지쳐서 최대한 빨리 잠에 들기위해 노력했다. 오빠들이 힘든와중에도 수통에 따뜻한 물을 채워 대원들을 챙기는 모습에 감동했다. 모두들 너무 힘든하루였기에 문안인사를 하고 잠자리에 청했다. 내일은 나의 고산병이 조금이라도 더욱 나아지기를 빌면서...
2013.07.26(금) 알로! 밀크띠? 밀크띠!?
지잊지직 텐트지퍼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 가이드들의 밀크티를 배달하러 온다. 알로? 밀크띠?밀크띠?라고 물으며 따뜻한 밀크티한잔과 함께 아침을 시작할 수있게 도와주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정신을 차려보니 밤새 비가 내린 모양이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텐트가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대장님께서는 그와중에도 밤새 텐트를 다니시며 대원들의 상태를 체크하셨다고 한다. 정말 감사하고 또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정신을 차리고 나와 아침체조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다 보니 문득 연석쌤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연석쌤 마저 고산병으로 몸져누우신것이였다. 어제 우리 대원들을 위해서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시다가 그러신것같아 괜히 죄송해졌다.오늘 우리들은 고소적응을 위해 해발 4900정도까지 다녀올 계획이다. 오늘은 대원들이나 서포터즈쌤들이나 고소병때문에 무리하지 않는 계획을 세우신듯 했다. 체조를 마치고 식량팀이 아침을 준비할동안 나와 몇몇대원들은 신호 깃발을 만들기에 여념이없었다. 신호들을 만들고 아이디어를 내면서 종석이 오빠의 도움을 많이받았다. 아침도 먹는 둥마는둥하고 고산병때문에 병든닭처럼 비리비리하다 어제처럼 다시 산행길에 올랐다. 이제는 하도 산을 오르고 오르니 별로 감흥이 없어진다. 고소때문에 주변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점점 컨디션이 나빠지고 있다는게 눈에보일정도로 안색도 안좋아지고 산소포화도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대장님이 늘 강조하신 주변현상에대한 메모는 꿈도 못꾸고 있다. 돌이켜보면 국내훈련에섣 조금만 더 자세하게 메모해둘걸 이라면서 후회하곤 하다못해 해외원정까지 와서 조그만더 라는 후회는 하고싶지 않앗다. 그래서 이번에 산을 오를 때는 많은 기록들을 남기겠다고 다짐또 다짐했는데 결국 나는 제자리걸음이다. 게다가 가장 속상한 것은 다른대원들이 열심히 자신과 고군분투하는 동안 나는 내려와버렸으니 마음은 늘 정상에있는데 몸이 그걸 안따라주니 정말 절망적이다..사실 내려오면 나스스로를 얼마나 꾸짖었는지 모른다. 지원쌤께서 중간에 유림아 내려갈래? 라고 물어오셨을때 생각보다 몸이 앞서 네 내려가도 되요? 라고 여쭈었다. 그때 쪼금만 더 참아 볼께요 라고 말하지 못한 내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찌됬든 나는 내려왔고 다음을 기약할수 밖에 없다.결국 4900까지는 못가고 결국 중간에 스투파에서 내려오는 대원들과 함께 같이 내려왔다. 천천히 내려오면서 나는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라면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것은 내 욕심이였고 내가 서있는곳이 정상이라면서 스스로를 위로시키고 합리화를 시켜보았다..먼저내려와서 대원들을 기다리면서 밀린 메모도하고 누워서 음악도 들으면서 간만에 엄청난 여유를 되찾았다. 대원들이 모두다 내려오고 난뒤 미리 준비해둔 레몬티를 마셨다 대원들과 함께마시는 차가 그 어떤 차보다 달다. 먹는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이곳에 와서 음식을 제대로 삼켜본지도 오래된것같아. 그래서인지 평소엔 기를쓰고 해도 안되던 다이어트가 절로 된다.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는 말들이 심심치않게 들려온다. 기분이 좋기도 하면서도 몸이 힘들어서 주위의 것들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 배가 너무고픈데도 삼키질 못하는 고문...잘먹어야 낫는다는데 그래도 뭘 먹을수가 없다. 주변사람들은 맛잇게 식사하는데 나만 못먹고 엎드려 있으니 죽을 맛이다. 내일 또 다시 산을 타야하는데 자꾸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는 것같아 속상하다. 나에게도 내옆의 사람에게도 미안하다 정말로..오늘은 정말 반성할 것이 많은 하루 였던것 같다.
2013.07.27(토)-안녕?...안녕.히말라야
오늘 아침도 포터분들의 아침인사와 밀크티 밀크티 소리에 잠을 깼다. 일어난 시각은 5시였지만 출발시각은 한시간 정도 뒤였다. 아침에 체조를 하고 보니 주변 대원들의 상태가 매우 안 좋아 졌다는 것을 한눈에 느낄 수있었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5000m였다. 원래 초반에 대장님과 서포터즈 쌤들께서는 4400m정도에서 두팀으로 나뉘어 반정도는 내려가고 반정도만 정상까지 올라간다고 하셨었는데 오늘 그 일정이 바뀌어서 모두다 그러니까 대원들 전체가 정상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솔직히 그 말을 듣자 마자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앞섰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쓰러지기 일부직전인 대원들 뿐인데 과연 우리가 해낼 수있을 까라는 생각이 수만번도 더 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목표가 있었기에 이런생각들로 멈춰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아침을 먹자마자 더이상 지체할수 없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얼마나 걸었을까 점점 고산증세가 심해져서 먹은 것도 없는데 헛구역질이 나오곤했다. 걷고 또 걷고 다시 또 걷고 끝없이 걸으면서 이제는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늘 한 점 없는 사막같은 황량한 무지를 걸으려니 정말 죽을 듯이 힘들었다. 숨이 차오르고 머리가 아프고 내게 남은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에 오기전 가졋던 포부와 의지들이 산산이 조각나서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수도 없었다. 그저 작고 가느다란 스틱하나에 몸을 맏긴채 그저 기계적으로 산을 오르는 내 자신이 보였다. 솔직하게 내자신이 한심스러워지워면서 내가 로체원정대를 통해 많은 걸 얻기를 바라시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그려졌다.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이것또한 곧 지나가게 되리라는 것을 맘속깊이 새기면서 다시 내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렇게 뙤약볕에서 한참동안의 사투끝에 나는 비로소 4800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제 고지가 눈앞이라는 말이 딱 생각났다. 그렇게 반년이라는 짧지않은 기간동안 오로지 한 목표를 위해 달려왔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났다. 힘을 내서 가니 위쪽에서 선두그룹이 쉬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전체휴식 시간이였다. 잠깐 휴식이 였지만 고된 산행 뒤여서 인지 몰라도 정말로 꿀맛같았다. 산을 오르면서 알게된 값진 사실이 하나 있다면 고된 인내속에서 가장큰 행복이 피어나는 법 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후미를 기다리면서 쉬다가 후미가 도착하자 나와 선두는 출발하고 후미는 조금더 쉬다가 따라 붙기로 했다. 그렇게 걸은지 두시간쯤 지났을까 또다시 오르고 오른뒤 내앞에 나타난 길은 보기만 해도 힘빠지게 하는 엄청난 오르막길이 이였다. 순간 어디서 힘이 나왔는지 마지막 젓먹던 힘까지 쥐어짜내어서 성큼성큼 오르막길를 쉬지않고 올랐다. 무언가 내가 이걸 꼭 넘어야 할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라는 산에서보면 이 정도 오르막길은 우습지도 않을텐데 지금 내눈앞에 있는 이 길이 앞으로 내앞에 닥칠 숱한 시련들을 이겨내기 위한 준비운동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그렇게 힘을 내서 오르막길을 올랐더니 어느새 내가 서있는 곳이 5,010m 이였다. 대장님께서는 지금의 목표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선발대와 함께 5,500m지점 까 지 올라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끊임없이 오르고 오르다 보니 어느새 혜민이와 나는 선발대 쪽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장님을 따라 5,500m 로 향했다. 대장님께서는 내가 고산병증세를 심하게 보이자 무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걱정을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일단 할 수있는데까지는 해보고싶었다. 이미 나는 목표를 이뤘고 지금 포기한데도 문제될것이 없지만, 내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곧 쓰러질듯 머리가 아파왔지만 숨이 넘어갈 듯 차올랐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대장님을 따라 올라갔다. 오로지 내자신과의 싸움이였다. 이제 나에게 정상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없었다. 그저 나는 내자신을 뛰어넘고싶었다.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선 내가 어떤 사람인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결국 해발 5200m에 섰고 '성공은 인내하는 자의 것'이라는 내가 한국에서 만들어왔던 플랜카드를 들고 해냈다는 기쁨에 해맑은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사진을 찍었다. 물론 5500m까지 가지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정말 내 자신을 다쏟아부었으니까, 수없는 한계에 부딪혔지만. 비로소 나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계라는 것은 내가 정해놓은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나는 이것밖에 못할꺼야라는 생각으로 이게 최선일꺼야 라는 생각으로..하지만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봤고 나의 무궁무진함을 믿게 되었다. 그렇게 5200m에서 나자신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면서 5500m까지 가는 대원들에게 존경스러움을 표현하고 응원을 해주면서 나는 장장 6개월이라는 짧지않은 시간동안 준비해왔던 히말라야등정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벌써 내가 히말라야의 5000m에서 미소를지으며 사진을 찍었다니 카메라에 찍힌 내 모습이 너무나도 뿌듯하고 이게 꿈인가 싶어 두눈만 끔뻑거렸다.
그렇게 나는 산행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먼저온 대원들이 점심준비에 한창이였다. 대장님께서도 저녁준비를 열심히 하고 계셨다. 나와 나머지 대원들은 카코를 텐트안으로 들여놓고 분주히움직였다. 드디어 저녁시간 찾아왔다. 나는 고소가 더욱심해져서 메스꺼워 또 저녁식사를 한젓가락 먹는것이 힘들었다. 꼭 체한사람처럼 얼굴빛도 안좋고 내내 아파서 나는 산에 올라와서 매일매일 산소를 마셨다. 아마 우리가 지고 산소의 절반가량은 내가 다 마신듯하다. 오죽하면 닥터쌤께서 유림이는 산소를 마셔서 피부좋아지겠다고 농담을 하실 정도였다. 간단한 점심을 마치고 (나는 한젓가락밖에 못먹었지만) 숙박야영팀이 짜준 각자의 텐트에서 들어가 잠깐의 꿀맛같은 낮잠타임을 가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자고 나고 나니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해져있었다. 식량지원팀이 또 정신없이 저녁준비를 하고있었다. 집에있는 엄마가 생각났다. 집나온지 일주일이 다되가니 집밥이 너무 그리웠다. 다이어트한답시고 맨날 밥을 굶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돌을 날라서 의자와 식탁을 만들고 밥먹을 준비가 한창이였다. 맛있게 밥을 먹고 오늘하루 일과를 끝낸 기쁨에 젖어있을 때쯔음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대장님께서는 너무 화가나셔선 결국 물을 엎고 화를 내셨다. 솔직히 우리가 헤이해진것은 사실이다. 이제 목표를 이루고나니 대원들이 약간씩 마음의 기강이 빠져나가는 모양이였다. 대장님께서는 우리기수가 점수를 매기면49점 밖에 안될것이라고 하시면서 이기적이고 좀팽이같다고 하셨다. 우리는 대장님의 말씀을 듣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수없었다. 한마디한마디 틀린 말씀이 없으셨고 정말 우리의 모습이 한심스러워보였다. 배려와 양보라며 말로 만 지껄이고, 결국엔 이기적이게 자신의 배만채우고 자신들만 따뜻하기에 바빴다. 이곳에 오면서 내 자신을 변화시켜보겠다며 그렇게 다짐을 하고 또했는데 결국 나는 제자리걸음 인것만 같았다. 말씀을 들으면서 자꾸 눈물이 쏟아질것같았다. 자존심에 차마 눈물을 떨구지못하고 내 대신 별은 쏟아지고 있다. 대장님께서 화나신채로 들어가시고 서포터즈 쌤들께서 쓴소리를 하셨다. 정말 부끄럽게 느껴졌다. 죄송스럽기도 하면서 내게 화가났다. 몸이 안좋다는 이유로 나는 내 자신에게 합리화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럴꺼면 이곳에 왜온건지 후회스럽기도하다. 하지만 발전을 위해서는 이런말을 듣고 좌절해 있을 수는 없었다. 모두 살이되고 피가될말씀이라 믿고 반성하고 다음부턴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쏟아지는 별을 보며 속상한 마음을 씻어내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혼이난뒤 우리는 텐트안으로 들어가 느감배를 위해 준비를 하고 앉았다. 오늘은 각자 별을 본 느낌이나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오늘은 정말 뿌듯하면서도 후회와 반성 같은 여러 감정들이 많이 드는 날이였다. 특히 우리 대원들 모두 한걸음 한걸음 서로 응원하면서 같은 목표를 향해 올라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뿌듯했다. 밤하늘의 별은 한국에 돌아가서 절대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오늘 밤은 히말라야의 마지막 밤인 만큼 눈에 많은 별을 담고 잠들어야겠다. 나의 희말라야 안녕.
2013.07.28(일) 후회없길. 우리가 이룬 만큼 이루지 못한 것도 자랑스럽습니다.-스티브잡스.
아침에 일어나니 오늘 내려간다는 생각 덕분인지 유난히 기분이 상쾌했다, 여전히 고소병때문에 깨질듯한
머리이긴했지만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또 고소를 느껴보겠는가 싶어서 참을 만 햇다. 아침으로는 간단하게 희고 묽은 죽을 몇 숟가락 뜨고서는 베이스캠프에서 떠나 우리의 진짜 목표였던 스톡캉그리까지 갈 예정이였다. 아침에 일단 산책격으로 5010m 정도 까지 설렁설렁 올라갔다왔다. 나는 고소가 점점심해지는 바람에 중간에 다시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다른 대원들은 위에 까지 올라갔다오는 동안 나는 산소를 마시고 거의 기절해있었다.아침까지는 컨디션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산행을 시작하니까 속도 너무 안좋고 곧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고소병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 나머지 대원들이 아침산행을 마치고 온듯 했다. 거친숨을 몰아쉬는 대원들을 보니 나만 쉬고 있었던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잘다녀왔냐며 인사를 해주었다. 우리는 내려와서 2번째 아침을 먹었다. 아무래도 아까의 죽은 에피타이저인듯 했다. 오늘 일정이 길어서일까 두번째 먹는 아침을 맛있게 먹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나는 아픈머리를 싸매고 누워있었다. 아침을 다먹고 우리는 두팀으로 나뉘어졌다. 하산할 팀과 골렙캉그리5900m까지 갈 팀(원래는 스톡캉그리6100m갈 예정이였는데 대원들상태가 너무나 안좋아서 계획이 바뀌었다.) 우리 대원들 중 15명이 골렙캉그리 까지 갈 수있었다. 나는 고소가 점점심해져서 하산조가 되었다. 다른 대원들과 함께 모두다 골렘캉그리 까지 올라가지는 못햇지만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하산길에 올랐다. 이번에도 내 옆에는 착한 혜민이가 옆에 있다. 갑자기 생각이났는데 헤민이가 내게 작은 선물과 편지를 주었다. 친구도 생일같은 특별한 날에나 주는 편지를 우리 혜민이 한테 받아 기뻣다,혜민이는 마음씀씀이가 너무예쁘다 그래서 인지 자꾸 정이 간다. 특히 힘들때나 몸이 아플때 슬며시 와선 "언니 괜찮아?"라며 물을때 힘이된다. 반면에 나는 혜민이가 힘들때 제대로 다독여준 적이 없지 않나 싶다. 갑작스레 너무 미안해진다. 그참에 집에 가면 혜민이의 편지에 답장을 해줘야겠다, 글구 혜민이가 서울로놀러오면 VVIP대접을 해주기로 했으니 언제함 날짜 정해서 놀러오라고 얘기해줘야겠다. 그렇게 나와 혜민이는 하산길에 올랐다. 사실우리는 어제 올랐던 5200m점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하산하라는 대장님의 말씀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래서인지 다른 하산조와도 멀어지고 정상까지 가는 조와도 멀어졌다. 그래서 인지 5200m까지 올라온 뒤로 다시 내려와보니 베이스캠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다. 뭐지 이러다가 자칫하면 우리 국제미아가 되는 건가? 베이스캠프에는 혜민이와 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더 내려가야 하는건가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건가 헷갈려서 어쩔줄을 몰랐다. 어쩔 수없이 나는 일단 내려가야 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앞에 하산조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여자 둘이서 히말라야를 누비고 다닌다니...ㅋㅋㅋ우리는 그렇게 어제 올라왔던 길을 끝없이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확실히 올라올때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뭔가 즐거웠고 고산병도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100m만 고도를 내려도 고산병증세가 없어진다는 박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렇게 엠피쓰리로 노래도 들어가면서 혜민이와 이런저런 수다도 떨고 오랜만에 여유로움을 느끼면서 즐거운 하산길이였다. 워 낙 많이 올라온지라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앞의 하산조가 안 보여서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고 내려가다보니 어제 따라 올라오던 계곡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볕이 뜨거워지니 위의 빙하가 녹고있는 모양이였다. 어제의 올라왔을 때 봤던 돌의 모양이라던지 그런 지형을 익혀가면서 감으로 계속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내려갔을가 앞쪽의 탐사대장님과 하늘쌤 찬희오빠 등 몸이 아파 계속 고생하던 하산조가 보였다.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최대한 빠르게 다가가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나 찾았던 하늘쌤과 하산조가 여기에 있다니..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머지 뒤의 하산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민섭이와 형준이오빠 혁준이오빠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이제 우리는 모두 밑의 베이스캠프에 가서 대원들의 잠잘자리를 만들어주는게 우리들의 임무였다. 그래서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산에 오르느라 힘들었을 자랑스런 대원들이 내려오면 차도 끓여주고 텐트도 쳐주고 침낭도 깔아주는게 우리의 임무이기 때문에 희희낙락하면서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하산조는 열심히 발걸음을 재촉했다.그렇게 계곡을 따라 한참 내려가니 드디어 베이스캠프가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열심히 텐트를 치고 저녁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없다. 나와 혜민이는 텐트텐트 마다 돌아다니면서 침낭도 깔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식량지원팀을 도와서 라면준비도 하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되서 정상으로 올라다녀왔던 대원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어서 나와 혜민이는 대원들이 마실 물을 들고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자장밥과 라면이었다, 오늘먹었던 라면이 내가 태어나서 먹어보았던 라면중에 가장 맛있는 라면이였더것같다. 정말 다시는 잊지 못할 맛이였다. 게다가 원정에 와서 제대로 먹은 첫식사다 보니 정말 맛있고 좋았다. 그렇게 밥을 다먹구선 지원서를 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돌아와서 보니 정말 오그라드는 건 어쩔 수없었다. 고산병때문에 힘들어 했엇던 내 모습과 지원서에서 내 그렸던 모습이 겹쳐지면서 나를 돌아보게되었다. 지원서에서 내가 느꼈었던 설레임과 알수없는 곳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져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지원서를보면서 반성과 앞으로의 모든것들에 대한 다짐들을 하는 동안 밖에서는 대원들이 쏟아질듯한 별빛아래에서 히말라야의 마지막 밤을 추억하며 노래를 부르고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대원들과 보냈던 모든 시간들이 정말로 그리워질것 같다.
2013.07.29 (월) Om.Shanty shanty옴! 샨티샨티~!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평평한 부지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은 우리는 밤새 계곡물흐르는 소리를 자장가삼아 추운 바람을 베게 삼아 잠을 청해야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추워서 침낭속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오늘이 드디어 문명으로 다시 돌아가는 역사적인 날이라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재빠르게 일어났다. 고도를 꽤 낮춰서인지 몰라도 일어나는 것이 한결 가벼웠다. 머리도 덜아프고 숨쉬는 것이 한결 편하니까 만사가 행복한 기분이였다. 그런데 사람이란게 참으로 간사해서 앉으면 눕고싶고 누우면 자고싶은게 사람이라 고산병의 증세에서 벗어나자마자 먹고싶고 하고싶은게 잔뜩 생겼다. 속으로 이런 나자신을 보면서 '이제 좀 살만하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아침체조를 하고 아침을 먹고 텐트를 정리하고 나니 정말 이제 내려가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산위에서는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저 빨리 내려가서 이 고산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내려가려니 히말라야의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가 아쉽게만 느껴졌다. 히말라야의 정취를 한창 느끼고 있을 때즈음..대원들의 애타는 마음을 어찌 아신 건지는 몰라도 대장님께서 옆의 상점에서 탄산음료를 사서마셔도 좋다고 허락을 해주셨다. 그 말씀을 듣자마자 나를 포함한 대원들은 거의 날아가다싶이해서 산속의 조그만 구멍가게에 줄이 길게 늘어진 진풍경을 벌였다. 사실 이 가게는 거의 쓰러질듯한 슬레이트 지붕을 가진 아주 작은 구멍가게 였다. 그래도 몇일을 문명에서 떨어져서 지낸 우리에게 정말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원시부족이 문명사회에 눈을 뜨는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탄산음료를 손에 받아든 순간의 행복감을 정말 잊을 수가 없었다. 탄산음료 하나에도 이렇게 행복함을 느낄 수있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16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는 내가 신기하고 놀라웠다. 늘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그렇지 않게 되면서 느끼는 불편함이나 어색함도 내가 히말라야에 오지않았더라면 느껴볼수있었을까? 솔직히 나는 그동안 내가 갖은 것 보단 갖지 못한 것을 바라봐오면서 늘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곤했었다. 만족이라는것이 밑빠진 독 하고도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절대 채워질 수없는 것이라는 잊고 살았던 것같았다. 하지만 히말라야에 와서 나는 진정한 만족이 무엇이고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기가 노력 끝에 얻은 행복과 인내끝에 얻은 행복보다 값진 것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인가 한국에서는 잘 먹지도 않던 탄산음료는 정말 가뭄에 단비같은 존재였다. 늘 내앞에 주어진 것에 감사할 수있는 사람이 될 수있기를 탄산음료를 마시면서 빌어본다. 그렇게 우리는 탄산음료와 함께 하산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하산길에 올랐다. 분명히 가방에 무게는 비슷할 터인데 왜이로 가볍게 느껴지는지 내려간다는 생각에 벌써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올라올때와는 다르게 길도 어느정도 익숙하고 목적도 확실하니 비교적 발걸음이 가벼워 올라올때는 보지못했던 히말라야의 절경을 제대로 느낄 수있었다. 꽤나 여유가 생겨서 사진도 마구 찍고 수다도 떨면서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보니 얼마나 내려왔을까 대장님께서 멈춰서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뒷쪽에 혜민이와 함께 오던 나는 앞의 상황을 알지못해 어리둥절해져서 앞쪽으로 다가가보니 앞쪽의 선두 대원들이 계곡을 건너있었다. 대장님께서는 나머지 대원들도 건너오라고 손짓으로 사인을 해오셨다. 그렇게 앞의 대원들이 건너가고 내 바로앞에 있던 민섭이가 센 물살 탓에 순간적으로 퐁당 빠졌다가 바지가 다젖은채로 겨우 건넜다. 워낙에 물살이 세고 빠지는 건 순간이라서 나는 겁에 질렸다. 내가 수영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물살이라면 아마 박태환이 온대도 빠져죽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떨려오면서 차가운 물과 센 물살을 가르면서 건너기위해 심호흡을 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순수한 공포의 결정체를 느껴본적은 처음이였다. 마치 곧 죽을 것같은 공포가 엄습해왔다. 정말 목가까이에서 곧 못하겠다는 말이 쏟아져 나올것같았다. 바위에 부딪혀서 하얗게 부서지는 물살은 마치 날 비웃는것같았다. 건너볼테면 건너보라는 듯이. 공포는 서서히 엄습해오고 순간적인 상황이였지만 나는 내 자신의 내면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앞의 대원들은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어 라는 생각이들면서 평화를 찾기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내 종아리 부근으로 쏟아지는 물살이 애리도록 내 살을 쳐냈다.아까만해도 바위에서 하얗게 부서지던 물살은 터억하고 물살을 가르는 내 다리에서 부서지고있었다. 빙하가 녹은물이라그런지 물의 온도는 참으로 차가웠다. 신발사이로 물이 헤집고 들어오고 물살에 나는 버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럴수록 물을 똑바로 보면서 한발 한발 내딪었다. 그렇게 물과 내다리에만 집중하면서 건너오고 나니 어느새 나는 육지에 도착해있었다. 내 자신을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포를 이겨내고 나니 이제 앞으로 뭐든 해낼 수있을 것같은 자신감이 들면서 별거아니네 라는 생각이들었다. 그렇게 성취감에 배시시 웃고는 길을 재촉해서 떠났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면서 대원들과 쉬고 있는데 점점 태양이 뜨거워져서인지 계곡물이 불어나고 있는게 한눈에 보였다. 이대로 지체되면 불어난 계곡물때문에 위험해질수도 있는 상황이라 우리는 쉬는것을 멈추고 빠르게 하산을 했다. 그렇게 정말 쉬지도 않고 빠르게 빠르게 내려가다 우리앞에 엄청불어난 계곡을 마주하게 되었다. 선두에 있던 오빠들에게 대장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오빠들의 표정을 보니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스쳐지나가는 게 보였다. 궁금해진 나와 뒤의 대원들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대장님께서는 여자대원들은 거기 그자리에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밑으로 내려오지 말라고 하셨다. 순간 우리들은 걸음을 멈추고선 남자대원들이 뭘하는 건가 하고 바라보았다. 승우오빠와 재혁이오빠, 찬희오빠가 갑자기 계곡물 속으로 뛰어들더니 돌을 분주하게 옮겼다. 우리 여자대원들은 약간 벙쪄서 이게 무슨...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와 나머지 대원들은 이게 무슨일인가 싶어서 계곡쪽으로 내려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물살이 꽤나 세고 또 그래서인지 오빠들의 옷은 거의 흠뻑 젖어있었다. 대장님께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오빠들이 물에 뛰어들어서 미친듯이 돌을 쌓는 모습을 보니 뭔지는 몰라도 나도 꼭 도움이 되고싶었기때문이다. 열심히 돌을 옮기고있는 대원원들에게 가까이다가가니 그 모습은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다. 모두 하나같이 옷은 흠뻣젖어선 대차게 흐르는 물줄기를 막기위해 필사적이였다.나도 곧 그 무리들중하나가 되어서는 따라서 돌을 옮기고 또 옮기고 옮겼다. 마침내 우리는 돌로 길을 만들어낸 강을 볼수있었다. 처음에 만들때는 영문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완성을 하고 나니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어낸것같아서 자랑스럽기도 했다. 바지고 티셔츠고 물로 흠뻑젖어서 축축해진 서로를 보면서 우리는 웃음을 지었다. 다수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땀을 흘린 뒤 느낄 수있었던 그 동료애는 말로 형용할 수없을 만큼 대단한 것 같다.
우리가 히말라야의 물길을 바꾸었다고.믿기지 않지만 돌을 옮겨 물을 바꾼 덕택에 다행스럽게도 박사님 하늘쌤 지원쌤께서는 발이 젖지 않고 강을 건너실수있었다. 우리가 물길을 바꾸어놓고 다리를 놓은덕에 앞으로 그곳을 지나가게될 사람들은 편하게 건널수 있을거란 생각이 드니 신기하기도 하고 내 입꼬리엔 만족스러움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내가 아닌 나의 다른사람을 위한 배려. 이게 바로 길을 만드는 사람의 자세 아닐가? 문득 언젠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정호승작가의 봄길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그렇게 강을 건너고 걷고 걸어서 우리는 우리가 출발했었던 스톡캉그리에 도착해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니 마치 10년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뻥뚤린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고된산행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것들이 파노라마처럼 내앞을 스쳐지나가면서 매순간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라다크의 레에 있는 Hill Town HOTEL에 도착했다. 우오 예상보다 너무 예쁘게 생긴 호텔이여서 감사했다. 하얀벽에 신비해 보이는 정원까지 마치 여행을 온듯한 기분이 들게해서 몸도 마음도 마구 들떴다. 게다가 몇일동안 씻지도 못하고 냄새나는 상태에서 벗어날수있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흘릴뻔했다. 호텔안으로 들어오니 커다란 침대와 쾌적한 시설에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드디어 나는 씻을 수있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직행하니 따뜻한 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감지덕지였다. 물을 틀고 물을 맞고 있다 물의 색깔을 보고 순간 나는 얼굴이 하얘졌다. 나는 다름아닌 흙탕물을 맞고 있었나보다. 아무리 인도가 우리나라보다 조금 덜 개발되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수도시설도 제대로 안되어있고 나는 혀를 끌끌차면서 물로 부터 조금 멀어지고선 실망감을 안고 물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런데..물은 투명하고도 투명해보였다. 내눈이 이상한가 싶어 손에 조금 받아서 다시 들여다 보았지만 아무리 쳐다봐도 투명한 물에 불과했다. 나는 아 이제 좀 불순물이 빠졌나 싶어서 다시 씻으려고 물을 맞으니 또 흙탕물이 나오고있었다. 나는 에잇 진짜 놀리는 것도 아니고 증말..다시 보니 맑은 물이고..잠깐...가만보니 나오는 물은 투명한데 내몸을 지나면서 흙탕물이 되어갔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웃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안씻었더라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좀 아니다 싶으면서 거울을 보니 정말 내얼굴은 초췌그자체였다. 시커멓께 타서는 머리도 모자에 눌려서 꼴이 말이 아니였다. 그렇게 벗어나서 개운하게 씻고나오니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고산병에서 벗어나서 맛있는 인도식을 즐겼다. 배까지 채우고나서 우리는 인도 시장 쇼핑에 나섰다. 쌍둥이 언니들과 혜민이와 나는 열심히 쇼핑을 하러다녔다. 모두 하나하나가 새로워서 신기함에 눈을 반짝 반짝 거렸다. 예쁜 원피스도 있고 각종 기념품들이 가득했다. 돌아다니고 돌아다니다 보니까 갑자기 귀에서 익숙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마치 한국말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휙뒤를 돌아보니..정말 한국사람이였다, 타국에서 내나라 사람과 말을 듣는다는게 얼마나 낯설면서도 친숙한지 마치 우리가족같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 대학생 언니가 먼저 한국분이세요? 라고 물어오자 우리는 기다렸다느듯이 네. 하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가 반가워서 어디서왔는지 어디를 가는지 그렇게 10년지기 오랜 친구처럼 수다를 떨어댔다. 원래 그 분들은 일행이 아니라 인도에서 만난 분들이라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이 멋져보이고 부러워서 정말 나도 꼭 대학생때 아르바이트를 열심히해서 배낭여행을 가겠노라 다짐또 다짐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인도를 만끽하고 호텔로 돌아오니 몸이 나른해졌다. 그래도 산에 내려온 첫날 이니 만큼 그 기쁨을 만끽해야했기에 우리는 여자들끼리 방에 모여 밤새도록 수다를 떨다가 쓰러져 잠에 들었다. 내일또 만날 인도를 기대하면서...
오늘은 단언컨대 태어나서 가장 장시간동안 차를 탄 날 인것같다. 정말 끝도없이 차를 타고 또 타고 또 탔다. 얼마나 많이 탔는지 차멀미 정도가 아니라 차기절 이라고 해야 옳을 듯 했다.달리는 차안에서 멋진 인도의 풍경들을 보고 또 보았다. 오늘은 라다크에서 카길로 가는 일정이였는데.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차안에서의 시가은 좀 지루했다, 그런데 지루하다 보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났다. 그냥 이런 저런 갈등의 원인과 그런 잘못들 이런게 생각이 나면서 그때 내가 왜그랬지? 그사람은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지 이런 생각이 막 들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기절하다싶이 잠을 자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식당근처에 도착해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밥을 사먹을 줄 알았다.우리가 만들어먹는 것이라 해서 조금 당황햇다. 그래도 나는 식량팀보다는 아니였을 것이다. 밥을 손수 해야하는 식량팀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그렇게 식량팀이 뭘하는 지도 모르고 밖에서 기다리던 우리는 다급한 식량지원팀의 요청에 정신없이 부엌으로 들어가니 정말 그 속은 가관이였다. 국수를 삶는건지 대걸레를 삶는건지 막 엉켜서는 국수의 모양도 아닌 덩어리들이 널브러져있었다. 오빠들은 여자대원들에게 국수를 삶아보적이 있냐고 물었는데 사실나는 한번도 없다. 솔직히 그때 나는 한국에서 국수를 삶아보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국수를 삶아봤다면 그 주방이 그렇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내 잘못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 그 순간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고 있는데 대장님께서 들어오셔서는 화를 내시진 않았지만 꾹참고 계신게 보였다, 죄송스런 마음에 열심히 해보려고 했지만 해본적이 없으니 정말 답답해 돌 지경이였다. 오랜시간끝에 식사가 완성되긴 되었지만, 국수는 국수의 모양이 아니라 떡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한다고 햇는데 이렇게 되니 속이 상했다. 그런데 더욱 속상한것은 몇몇 대원들의 투정어린 말들이 엿다. 물론 이해는 한다. 주방의사정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그런 말이 나올법도 했다, 하지만 직접 두눈으로 보았다면 입을 다물고 감사하면서 먹었을것이다. 나는 투털거리는 대원들을 보면서 정말 반찬투정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햇다. 나는 정말 대장님께 죄송해햐면서 거의 눈물이 나올것같은 정도로 이악물고 빨리 하려고 노력했는데 어쩌네 저쩌네 평가를 하고 있는 대원들을 보니 너무 야속했다, 나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배고플 대원들을 생각해서 만들었는데 반응이 이러니 속이 상할 수밖에.한국에 돌아가서 꿀꿀이 죽을 엄마께서 만들어 주신다고 해도 꼭 불평없이 먹을 테다.다짐또 다짐을 한다.
우리는 우여곡절끝에 점심을 먹고 다시 차에 올라서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산을 넘고 넘고 또넘어서 결국 저녁이 다되어서 어둑어둑해져서야 카길 숙소 에도착했다. 가로등같은 것도 없어서 주위는 매우 어두웠다. 내려서 보니 인도인들은 우리들을 굉장히 경계하는 모습이였다.아님 내 마음이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내일 이른 기상시간에 얼른 씻고 잠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피곤함을 배게 삼아 잠이 들었는데...시간은 분면 새벽인데 바깥은 정말 요란햇다 심지어는 노랫소리도 들려왔다. 가는 날이장날이라고 오늘이 종교행사였다니..그렇게 우리는 종교 음악을 들으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 3시 쯔음 일어나 대충 옷을 입고 짐을 챙겨 우리는 차에 실고는 또 다시 차에 올라탔다. 어제 하도 오래 차를 타서 이제는 차를 타는 것에 신물이 날 지경이였다. 그래도 걸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감사하면서 별 불평없이 차에 올라탔다. 나는 창가자리에 앉아 혜민이와 같은 차이기만을 빌면서 가는데 어느새 내 옆을 보니 하늘이 오빠가 앉아있었다. 사실 나는 하늘이 오빠하고는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라 어색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가도 생각해보았지만 곧 그건 너무 오바라는 생각에 그냥 잠자코 앉아있다가 곧 어제밤에 얼마 잠을 자지 못햇기에 잠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알카에다 출현지역이라서 경계가 삼엄하다보니 검문소도 많고 군대차량도 많았다. 그렇게 어색함이 유지되다가 오빠가 말을 걸어왔다, 하늘이 오빠는 여동생이 잇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참 자상한것같다 동생을 얼마나 잘챙기는지 혜민이를 챙길때보면 오히려 성준이 보다 더 챙기는 것 같다. 처음에는 오빠가 로체원정대에 애정이 없는것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마치 너네들은 뭐냐?라는 듯한 눈빛에 저 오빠와 친해지기는 어렵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곧 그것은 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늘이 오빠를 다시 보게 되었다, 솔직히 오빠들중에서 이렇게 동생들을 잘 챙기는 건 하늘이 오빠밖에 없다는 걸 오빠한테 진짜 고맙고 고맙다.
그렇게 우리는 차를타고 가면서 이야기도하고 서로 기대서 잠도 자고 진짜 오빠동생처럼 친해졋다, 나는 차를 타고 간다고 투덜댔는데 이렇게 오빠하고 친해질 줄이야. 오히려 차를 타고 가는 것에 감사해야할것같다. 그렇게 하늘이 오빠와 친해지는 사이 벌써 우리는 썬샤인 호텔에 도착해있었다. 밑에는 식당이고 위는 호텔인 곳이였는데 겉으로는 허름해보였지만 내부는 아늑하고 고풍스러웠다. 우리는 습관처럼 카고를 옮기고 정리하고 나서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아주 인도 가정식 느낌이 물신 풍기는 식단이였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 이 독특한 향신료들에 익숙해지려면 내공을 더 쌓아야햐 하는 걸까?..ㅋ 그렇게 점심을 먹고 우리는 숙소 근처 강에서 배를 타러 갔다. 강에는 수상 민박이 운치있게 설치되어있엇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인도를 오게 된다면 하루쯤은 이 수상가옥에서 묵어보고싶다. 그렇게 수상가옥들을 구영하고 우리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문화교류 연습에 열을 올렸다. 이제 당장 내일이 문화교류날이라서 우리는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비록 서툴더라도 제대로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때문이였다. 나와 우리 사물놀이 팀은 정신없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약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좋게 마무리하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나니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 돌아왔다 오늘의 저녁은 우리 숙소 밑에 있던 베지테리안 식당이였다, 나는 도사라는 것을 시켰는데 생각보다 너무너무 맛있었다 마치 치즈감자밀가루 전 같은 맛이엿다.배고픈 마음에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씻은뒤 내일을 기대하면서 잠에 들었다.
2013.08.01(목) 새로운 인연,인도와의 이별.
아침에 일어나니 정말 오늘이 비행기를 타고 델리에 가는 날이라는 사실에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하면서 즐길수 있을때 충분히 인도를 즐기기 위해 노력했다. 공항으로 가 델리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정말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솔직히 곧 있음 문화교류를 하기 위해 무대에 서야한다는 불안감과 기대감 떨리는 마음에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오는 내내 장단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손으로도 쳐보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연습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나를 짓누르고 또 짓눌렀다.그렇게 우리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도착한 곳은 퀸스메리스쿨이라는 여학교였다, 사실 인도학교가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 커봤자 얼마나 크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을 또 해버렸다. 그런데 이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있는 엄청난 규모의 사립학교였다. 학생수가 많아도 너무너무 많아서 그걸본 나는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오고있었다. 그럼에도 이 퀸스메리학교 여학생들은 지구반대편에서 온 손님들이 신기한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강당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공연을 시작햇다. 첫 순서는 우리 였다. 나는 너무 떨려서 손까지 떨었다. 그렇게 떨렸는데 우리가 첫 순서였다. 역시 연습이 부족했는지 내가 원했던 만큼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우리가 전세계적인 아이돌가수 만큼이라도 된마냥 호응이 엄청났다. 그렇게 성왕리에 공연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 공항으로 가려는데 지원쌤과 연석쌤께서 그 여학생들사이에서 둘러싸여서 나오지를 못하셨다 자세히보니 싸인을 해달라는 여학생들사이에서 나오지를 못하고 계신걸보니 정말 웃음이 막 나왔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나서는 우리는 마지막 쇼핑을 위해 시장으로 향했다. 우리 여자들은 지원쌤과 함께 다녔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그렇게 인도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산을 오르는 내내 가장 맛있었던 홍차를 사기위해 카페로 들어갔다. 우와 우리나라의 카페정도는 아니였지만 꽤 신식 인테리어에 시원한 에어컨까지 나왔다. 그렇게 잠깐의 쇼핑을 마치고 우리는 정말 끝을 달리고 있었다. 정말 얼마 않있으면 한국에 갈 수있다는 생각에 두근두근 가슴이 떨려왔다. 이제 곧 우리가 헤어진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고동락해온 대원들과 헤어진다니 믿기지도 않고 한국을 간다는 생각에 신이나기도하고 엄마 아빠 동생이 보고싶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인도에서의 마지막밤을 보내고 아쉬운기억을 마음깊이 고이고이 접어 두었다.
비행기에 올라 잠을 자고 일어나니 정말 이제 진짜 한국을 간다니 신이 났다. 너무 들뜬 마음에 노래가 절로나올것같았다. 들뜬맘에 대원들하고 수다도 떨어보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대원들은 한국가면 뭐할 지와 뭘 제일 먹고 싶은지에 대해 떠드느라 바빴다. 그렇게 지구반대편에서의 엄청난 도전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우리는 한국땅을 밟을 수있었다. 그리웠던 인천공항 내가 한국에 도착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미칠 것같았다. 집이 좋은 줄 몰랐는데 이세상에서 집보다 좋은게 또 있을까? 그렇게 입국심사를 마치고 문을 향해 한발자국 한발자국 걸어가니 희미하게 엄마 아빠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눈 앞이 흐려지면서 막 눈물이 나올것같았다. 엄마는 오랜만에 본 딸이 반가운지 마구 우셨다. 창피하기도 하고 그리웠기도 하고 그러니 나도 막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우리는 이산상봉에 버금가는 가족상봉을 마치고 원정대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 대원들 너무나 고생해준 대원들이 보고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잊지못할 추억을 내게 남겨준 로체원정대에게 감사한다.
처음 내가 로체원정대에 지원하기 위해 자기소개서와 지원서를 작성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너무 떨리기도하고 두근대기도하는 마음을 움켜잡고 첫 훈련을 가던 날까지 정말 엊그제 일 처럼 생생하다. 해외원정을 준비하던 국내훈련동안 다짐했던 모든것들이 실제로 원정을 다녀온뒤 돌아보니 만족스러운것보다는 아쉬운 것이 더많은 것 같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나자신을 이겨내는 법을 배웠으며 그를 통해 나는 정말 값진 것을 얻어냈다. 특히 눈에 보일 정도로 성적이 올랐고 꿈에대한 생각을 더욱더 많이 하게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로체원정대는 나에게 꿈을 심어준 곳이면서 나의 꿈을 더욱더 키워준 곳이라고 할 수있다.
나는 로체원정대를 통해서 나는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값진 경험을 통해서 조금더 자랐고 더 성숙해졌다. 내가 로체원정대라는 곳을 만나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도와주신 부모님뿐만아니라 대장님,탐사대장님,닥터쌤,서포터즈쌤들,간사님까지 모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분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훈련해왔던 내 동료, 대원들에게 고맙고 함께여서 서 참 다행이였다고 이야기해주고싶다. 우리가 함께가 아니였다면 어찌 이러한 일을 해낼 수있었을까?..비록 원정 중간중간 약간의 분열과 의견충돌이 있었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단합하기도 하는 일련의 과정이였기에 그저 좋은 추억들과 함께 웃었던 기억들만 간직하려한다. 내가 이번 원정을 통해 깨달은 세가지는 겸손, 겸손,겸손. 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겸손, 자기의 방식이 맞다고 우기지 않고 남의 이야기도 들어주는 겸손, 자신이 가진것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 사실 나는 그동안 내가 잘났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몰라줄까봐 내가 잘났다는 것을 보여주기위한 삶을 살아왔던것같다. 하지만 정말 잘난사람이라면 굳이 티를 내지 않고도 그사람의 그릇이 들어난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달으면서..오히려 잘난척을하면서 잘남을 드러내려고만 한다면 반대로 그사람의 빈곳이 보인다는 것을..이건 자신감의 개념과는 조금 다른 것같다. 자신감이 아닌 우월감같은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로체원정대를 하면서 나는 정말 행복했고 지금 나는 그 추억들을 이렇게 글로적어 고이고이 기억할 것이다. 이제 해외원정이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로체원정대 9기대원 변유림이고 영원히 그럴것이다. 로체원정대의 정신을 잃지않고 살아간다면 분명 어느순간 나는 정상의 자리에 올라가게 될것이라 감히 예상해 본다. 이 모든것들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면서 이글을 마친다. 열정 도전 용기 로체 화이팅!-9기대원 변유림-
첫댓글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게으름을 피우면서 미루고미루다가,...로체정신이 그새 헤이해졌나봐요,
정신바짝차리고 최대한빨리 하루하루 정리해서 채워나가겠습니다.
다시한번죄송합니다,ㅠ
유림아 2편은 언제올려줄꺼니? 기다릴께 ~엄마가~
유림아 늦었지만 그래두 엄마는 실망보다는 꼭 해야 될일을 미루면 더 힘들어 진다는걸 울유림이가 스스로 느꼈음 좋켔당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12.08 14:53
글 마무리 덜 된듯...(아빠가)
완성된 글을 보고 싶다 아빠는...분발하시요..변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