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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창영] 운형궁, 수직사,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 양관, 흥선대원군 | 2001-07-02 오후 11:04:47 |
운현궁 ‘궁’은 사람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주거를 담당하는 곳이고 ‘궐’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사무를 보고 일반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곳이다. 그래서 ‘궁궐’하면 궁과 궐이 합쳐저 일상적인 생활도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정사도 볼 수 있게 복합적으로 구성된 곳을 말한다. 그러니 운현궁은 ‘궁’이었을 뿐 ‘궁궐’은 아니다. 가장 넓었을 때의 운현궁의 규모는 지금의 일본문화원이 있는 곳부터 교동초등학교 운동장과 삼화기업 빌딩을 잇는 엄청난 넓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문으로 쓰이는 운현궁 솟을문의 문빗장이 바깥으로 있는것은 대원군을 연금하고 그가 자유롭게 출입하지 못하도록 문짝을 밖으로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라고하는 이도 있으나 실제로 고종이 살았던 집은 없어졌다. 고종이 열두 살까지 살던 집은 운현궁 뒤쪽에 있었는데 1966년에 헐어내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를 세웠다. 혹자는 안동별궁터가 고종의 잠저가 있던 곳이라고 하나, 운현궁 뒷마당에 있는 경송비와 그 뒷편-남연군과 은신군의 사당이 있던 곳에서 발견된 소나무 둥치는 이 부근이 고종의 잠저터였음을 추측케 해준다. 고종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 그 생부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면서 증축되어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대원군이 이곳에서 청군에 납치되기도 하였다. 원래는 궁궐에 필적할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며, 담에는 4문을 두고 그 안채에 이로당(二老堂), 노락당(老樂堂)을, 바깥채에 아재당(我在堂)과 노안당(老安堂)을, 그리고 영화루(迎和樓)라는 당호가 붙은 다락과 할아버지인 은신군(恩信君) 및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을 모신 사당을 두었다. 그리고 창덕궁에 계시는 임금과 가깝게 내왕할수 있도록 문을 두 개 만들었는데, 임금전용의 경근문(敬勤門)과 흥선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勤門)이 그것이다. 현재는 노안당・이로당・노락당만이 남아있다. 운현궁 안쪽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사건물 앞의 양옥집은 대원군의 손자인 영선군(永宣君)의 거처였으며, 일본군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다. 운현궁은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건물이며, 정원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최근에 일부가 복원되어 1996년 1월부터 일반인에 공개되고 있다. “관상감은 일명 서운관(書雲觀)이라고도 하는데, 고종의 잠저(潛邸)가 바로 서운관 자리다. 그래서 이곳을 운현궁이라고 부른다. 철종 초에 장안에는 ‘관상감터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동요가 떠돌았고, 또한 ‘운현궁에 왕기가 서려있다.’ 하는 이야기도 있더니 얼마 안되어 지금의 임금이 탄생하였다. 임금이 직위한 뒤에 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을 넓히고 새롭게 하였으며, 몇 리나 되는 담장에 네 군데 문을 내고 궁궐처럼 장엄하게 꾸몄다.” 이상은 ⌈매천야록⌋에 나오는 부분이다. 이 글에서 보듯이 운현궁터는 원래 관상감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언제 어떻게하여 대원군의 사저가 되었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실재 관상감은 지금보다 북쪽이었다.) 그러다가 복원 때 나온 자료에서 1864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전각의 상량문을 보면, 노안당과 노락당은 고종 원년인 1864년에, 이로당은 고종 6년 1869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건축 당시 전국 일류의 목수들이 대거 동원되었고, 사용된 목재들도 모두 압록강에서만 생산되는 홍송이었다고 전한다. 당시 지체 높은 사대부 집에서는 주로 울진의 춘양목을 썼다고 한다. 압록강의 홍송은 춘양목보다 재질면에서 한 품이 더 높은 나무로 목수들 사이에서 알려지고 있다.(조선 총독부건축 당시에 쓰인 나무가 홍송이다) 물론 기와와 전돌도 특별 제작한 것들이다. 운현궁 건물은 창덕궁의 낙선재・연경당과 함께 3대 사대부 민가로 손꼽히고 있다. 운현궁의 좌향은 남쪽이다. 신축당시 전통적인 주택풍수를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부근에 구릉(덕성여대 쪽)이 있었고, 도로도 나 있었기 때문에 대문은 하는 수 없이 현재의 위치인 서쪽에다 두었다. 당시만 해도 궁에 필적할 만큼 컸으나 운현궁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현재의 건물 일부는 그때의 것이며, 나머지 일부는 서울시가 대원군의 5대손인 이청씨로부터 사들여 보수한 것이다. 이 집은 원래 따로 붙은 이름이 없었으나, 새로 지으면서 운현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궁만이 궁이 아니라, 왕이 태어나거나 유년을 부낸 잠저도 궁이라 높여 부른다. 강화도에 있는 철종의 잠저도 용흥궁으로 높여 부르고 있다. 운현궁에 처음 들어서면 제법 넓은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시청에서 운영을 하며 궁궐에서 행하던 방식대로 결혼식을 하기도 하고, 갖가지 문화행사를 개최하기도하여 도심의 문화공간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들어서면서 오른편에는 운현궁의 하인들이 주로 생활하던 수직사가 있다. 운현궁 수직사 마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유물전시관에 있고, 오른쪽에는 수직사가 있다. 내부공간에는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이 자리잡고 있다. 후원 언덕배기에는 대원군의 손자인 영선군 이준용이 일제강점 후에 지었다는 서양식 건물이 서 있다.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하던 곳이다. 정면 8칸에 측면 2칸 집이다. 대원군집권 시기에야 힘을 행사하였을 테지만 대원군이 실각한 뒤에는 운현궁 청지기들의 숫자도 줄고 기세도 꺾였다. 뿐만 아니라 임오군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돌아온 후에는 오히려 궁에서 대원군을 감시하는 포졸을 이곳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후 운현궁은 몇차례나 도둑맞고 투석당하는 재앙을 치렀다. 심지어는 대원군이 묵고 있는 처소에 비수와 불 붙은 화약덩어리까지 날아들었다고 한다. 당시 주위 사람들은 명성왕후를 의심했다. 수직사를 지나 오른쪽 끝에 보이는 대문을 통해 노안당에 들어선다.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는 대원군이 말을 탈때 사용하였을 돌이 남아 있다. 노안당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이다. ‘노안’이라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서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에서 따온 말이다. 노인을 편하게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노안당이란 이름은 아들이 임금이 된 덕분에 좋은집에서 편안하게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해 하는 대원군의 입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일시적으로 거처하던 곳으로 어린 아들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하는 동안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등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고민하고 결정하던 곳이다. 노안당의 평면 구조는 一자형 집이지만, 동쪽 좌우에 누마루가 붙어 있어서 위에서 보면 丁자형 집이다. 누마루 아래는 벽돌로 막아서 광처럼 쓰고 있다. 대청은 본채 오른쪽에 있고, 온돌방은 가운데 있다. 노안당 당호는 추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노안당을 오른편에 두고 다시 대문을 지나면 노락당 안마당에 들어선다.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축물이다. ⌈노락당기⌋에 ‘노락당이 굉장히 높아서 하늘과의 거리가 한 자 다섯치밖에 안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집안의 크고 작은 경조사도 모두 이곳에서 치렀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국혼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삼간택이 끝난 후 왕비수업도 이곳에서 행해졌다. 국왕의 혼례였던 만큼 당시 창덕궁과 인현궁을 잇는 도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이다. 당시 대원군의 위새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네명의 대원군 중 흥선 대원군만이 살아서 대원군이 되었는데, 호칭을 대원위(大院位)라고 하였다. 노락당 역시 늙을 노(老)자가 들어간 당호다. 대원군은 당호에 노자를 즐겨썼다. 운현궁의 중심건물 당호에도 모두 老자가 들어가 있다. 우암 송시열이 유림사회에서 대로(大老)로 추앙받은 사실이 있어서 대원군도 스스로 ⌈我亦大老⌋라 했다고 한다. 노락당은 대원군이 숨을 거둔 곳이다. 광무 2년 2월 2일 겨울이었다. 나이가 일흔 일곱. 맏아들 재면이 노락당에서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대원군은 마지막 유언으로 ‘주상을 보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거동하지 않았다. 노락당 당호는 신관호가 직접 썼다. 신관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변경의 지휘관을 역임하고 헌종 15년(1849) 금위영 대장이 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임금의 신변 아전을 책임지는 경호실장의 직책이다. 신관호는 고종 1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형조판서에 파격적으로 기용되었다. 그는 무기 제작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 수뢰포라고 하는 신식 무기를 개발하여 한강변 노량진에서 고종이 참관한 가운데 시범 발사에 성공하기도 했다. 무인이지만 글씨 또한 당대의 명필이었다. 그는 대원군이 자기를 기용해 준 데 대한 보답으로 ‘노락당’ 현판을 썼다. 무신 출신이라 글씨가 힘차고 무게가 실려 있다. 노락당 현판을 신관호에게 쓰게 하여 만든 사유는 아무래도 당시 대원군의 군사정책을 엿볼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곳 ⌈노락당기⌋는 김벽학이 짓고 박규수가 직접 썼다. 노락당을 지나면 운현궁의 안채인 이로당을 만난다. 이로당 이로당의 당호는 추사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두명의 늙은이를 뜻하는 당호는 보는이로 하여금 웃음짓게 한다. 지금은 찻집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여느 한옥의 안채와 같이 □ 모양으로 안쪽부분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이로당의 오른편에 뒤편으로 갈수 있는 조그마한 문이 위치해 있다. 문위쪽에 장식된 문양들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적 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단순하지 않은 문양이 제법 보기좋다. 운현궁 뒤쪽에는 약간 굴곡이 진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주위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고종이 즉위하고 나서 넓은 정원을 조성하여 궁궐같이 꾸몄지만, 그 이전에는 평범한 들판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덕성여대 부지 내에 있는 백색 르네상스풍의 웅장한 양관 뒤쪽으로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의 사당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숲과 소나무들이 많았다. 노안당 뒤쪽으로 조그마한 언덕이 있고 그 앞에 축대가 쌓여 있다. 그 숲속에서 새까맣게 타다가 남은 나무등걸 하나가 나왔다. 약 2m정도되는 나무등걸을 검증한 결과 소나무가 불 타다 남은 것이었다. 고종은 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간 후에도 동네 어린이들과 함께 기어오르고 연줄이 걸려 애를 태우던 정든 소나무가 그리워 ‘정이품송’이라는 관작을 내리고 금관자를 달아 주었다. 후손들은 대부송이라 칭하면서 고종황제가 어린 시절 아끼고 놀던 경사스러웠던 소나무라는 뜻으로 ‘경송비’라는 비석을 세웠다. 다시 이로당을 나와 마당쪽으로 나오다보면 조그마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운현궁의 실물 모형에서부터 복원과정에서 나온 몇가지 유물들, 그리고 당시 생활을 가늠해볼 수 있는 사진들을 볼수 있다. 양관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운현궁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운현초등학교 현판이 있는 문을 들어서야 한다. 양관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은 지금 덕성여대 소유가 된 양관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송정(松亭)에 살았다. 이 부근에는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의 사당이 있었던 자리여서 운현궁에서는 가장 신성시하던 곳이었다. 그런 터전에 일인들은 이른바 개화에 따른 양관을 지어 운현궁을 굽어보게 하였다. 마치 창경궁에 박물관이란 양관을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지은 횡포에 버금간다고 할 만하다. 양관은 일인 건축가에 의하여 건축된 건물이다. 한일 합방 이후로 대한제국의 중요 인사들은 귀족으로 봉작하고 이른바 은급금을 하사하였는데 왕족과 귀족 중에서는 그 돈으로 한참 유행하기 시작한 양관을 짓든가 개량식 한옥이라는 유형의 집을 짓기도 하였다. 새로운 시대의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한제국은 고종의 윤허를 받고 덕수궁에 정관헌이나 석조전 혹은 중명전 같은 근대식의 건축물을 지었던 경험이 있으므로 양관이 들어선다고 해서 누가 발벗고 나서서 새삼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고종이 만세 후의 일이고 대원군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시기에 조영되었으므로 일인들이 이준용을 위해 지어준 양관이 육사당 등의 건물이 있는 터전을 차지하고 마는 사태가 자행되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흥선 대원군 대원군 하면 누구나 이하응을 떠올리지만, 대원군이란 왕의 아버지를 뜻하는 일반적인 부름말이다. 조선왕조에는 후사 없이 세상을 뜬 왕들이 여러 명 있다. 이때는 방계왕손 가운데에서 새 왕을 추대하는데 선조, 인조, 철종 그리고 고종등이 양자로 들어가 왕위에 오른 인물들이다. 대원군은 이들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대원군은 모두 네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 이하응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가 죽은 후에 대원군이 되었다. 이하응의 본래 핏줄은 광해군을 쫓아내고 임금에 오른 인조에 이어져 있다. 인조에게는 아들이 여섯 있었다. 맏이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이고, 둘째는 형과 함께 인질로 갔다가 후에 돌아와 효종이 된 봉림대군이며, 셋째가 두 형과 함께 인질로 잡혀갔다가 일찍 돌아온 인평대군이다. 인평대군은 왕족답지 않게 시・서・화에 조예가 깊은 예인(藝人)이었다.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은 바로 그 인평대군 6대손이다. 이하응이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난초와 글씨에 뛰어난 것도 알고 보면 그 핏줄이 인평대군에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흥선대원군의 난을 석파난이라한다. 그의 호가 石破이기 때문이다. 석파라는 호에서 그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하응이 대원군에 오르고 그 아들과 손자가 왕이 된 것은 바로 그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신군에게로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에게는 정조 말고도 숙빈 임씨 몸에 은언군(25대 철종의 할아버지)과 은신군 두 아들이 있었다. 은언군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으나, 은신군은 자식없이 죽었다. 은신군은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들였다. 그래서 남연군은 영조의 증손자가 되고 대원군은 영조의 고손자가 되는 것이다. 대원군 이하응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들에 비해서 영특하고 재기가 넘쳤지만, 열두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열일곱에 아버지 남연군까지 잃고 사고무친(四顧無親)으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25세에 경릉 수릉관으로 밭 50결과 농토를 관리하는 거외노비 여섯을 상으로 하사받았다. 이로써 그는 가정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고 보이는데 흥선은 충훈부의 충의 민치구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과 두 딸을 슬하에 두었고, 작은마누라에게서도 1남1녀를 보았다. 이 중의 둘째 아들인 명복이 희(熙-명복)가 임금님이 되니 고종이다. 그러다 나이 스물일곱에 종친부의 유사당상에 오르면서 왕족으로서 기지개를 편다. 종친부란 국왕의 계보・친족・종묘제사에서부터 국왕과 왕비의 의복까지 관리하는 측근 관청이다. 물론 종친부 관리들은 왕의 계보에 가까운 친족 4, 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왕이 따로 있었기에 대대로 실권은 크게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찍이 대권에 야망을 품은 이하응이 종친부에 들어가면서 실세로 떠오른다. 그때의 이름은 흥선군. 그 무렵 제25대 철종은 부인을 8명이나 두었지만 딸 영예옹주만을 남기고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다. 당시의 상황은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왕권이 가장 하락해 있던 시기였다. 왕실과 종친부까지도 안동김씨 통제와 위협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법도에 따라 후대 왕을 결정하는 옥새는 일단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대비에게 넘어가 있었다. 조대비는 자기 친정인 풍양조씨 집안이 안동김씨들에게 밀려난 것을 항상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식대에 왕이 난다는 풍수의 말을 듣고 충남 예산에 있는 가야산의 절을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한 것을 보면 흥선군 이하응은 일찍부터 집권야욕을 품었음에 분명하다. 당시 종친부에서 촉망받던 경평군(대원군의 사촌)이 안동김씨들의 눈에 거슬려서 귀양당하고 족보에서 쫓겨나는 꼴을 직접 목격했던 흥선군으로서 몸조심을 위해 상갓집 개처럼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은 대원군이 권력을 얻는 방식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긴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내용은『운현궁의 봄』에 등장한다). 그가 25세 때 조정으로부터 전 50결과 노비 6구를 받았다는 기록도 그렇거니와 철종 004 03/07/10(무오) / 부교리 김영수가 상소하여 환첩을 단속할 것・종친의 기거를 제한할 것 등을 청하다 부교리 김영수(金永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잡(閑雜)한 무리가 유음(幽陰)함을 의탁하고, 엄시의 무리가 안팎으로 주무(綢繆)하여 무엄(無嚴)한 일을 제멋대로 헤아려 지극히 공정한 정사를 문란(紊亂)시키니, 일이 놀랍고 한탄스러움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기거 동작(起居動作)하는 사이에 명령하여 지휘(指揮)하는 자는 환첩(宦妾)이고, 남몰래 임금의 뜻을 영합(迎合)하는 자도 환첩이니, 이제부터 이런 무리를 제어(制馭)하여 국법(國法)을 어기지 못하게 한 뒤에야 바야흐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또 종신(宗臣)의 승후(承候)와 같은 것은 스스로 정례(定例)가 있습니다. 비록 고(故)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는 순고(純考)에게 지절(至切)한 의친(懿親)이 되었으나, 시절(時節)의 경하(慶賀) 외에는 무상 출입(無常出入)을 하지 않았는데, 요즈음 한둘의 종신(宗臣)이 일차(日次)마다 문득 기거(起居)를 일삼고 있으니, 곧 또한 어디에 근거하여서 그러한 것입니까? 전자에는 남연군(南延君)이 감히 하지 못하던 바이며, 후자에는 흥인군(興仁君)・흥선군(興宣君)이 하지 못했던 것인데, 한둘의 종신은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환첩(宦妾)은 한결같이 우리 조종의 법으로 단속하여 제어하고, 종친(宗親)의 기거(起居)는 한결같이 남연군・흥인군・흥선군을 본받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두 환첩의 일은 비록 생각 밖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과궁(寡躬)을 돌아보건대 부끄러움이 많다. 가까운 종신(宗臣)과 궁첩(宮妾)에 대한 말은 매우 절실하여 지극히 가상하게 여기니, 내가 마땅히 면려하고 경계할 것을 약속한다. 가까운 종신은 나아감과 머무름에 상법(常法)을 두고, 궁첩의 간알(干謁)은 행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모두 과오가 적게 할 것을 기약하겠다. 무릇 언책(言責)이 있는 자는 각각 생각을 다 진술함으로써 임금의 과실을 보필한다면 이것도 또한 일언(一言)의 도움이다.” 하였다. 물론 『철종실록』이 고종때 편찬되었으므로 대원군에 대해 좋은 평가가 나올수도 있다. 하지만 대원군의 관직생활을 보면 순조 43년 興宣副正에 봉해지고 이후 몇차례 加資를 통한 헌종 9년(1843)에 封君되고, 헌종 12년(1846)에 정일품에 이르렀다. 이후 헌종 13년 冬至使에 임명되었으나 使行을 하지는 못하였다. 사옹원, 전의감, 사포서, 전설사, 조지서 등의 提調를 맡았으나 이것은 모두 종실에게 녹봉을 나누어 주기위한 의례적인 閒職들이었다. 정작 철종대 흥선군이 주로 활동했던 직책은 종친부의 유사당상(이조때 종친부, 충훈부, 비변사와 기로소에서 실지 일을 담당한 우두머리 벼슬아치를 이르는 말. 해당 관청의 당상관들 가운데서 시킴)이었다. 흥선군은 헌종 13년 2월 종친부 유사당상에 임명된 이후 철종연간의 대부분 시기에 그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때 흥선군은 종친부의 권한확대를 위한 일들을 추진한다. 『종친부등록』에 선파인(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이)의 역을 면제해주는 일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350여권에 이르는『선원속보』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종실에서 큰 역할을 하므로 철종이 죽은 후 왕이 계승 서열상 남연군의 손자로서 흥인군의 아들 이재긍(李載兢:당시 7살)이 아닌 자신의 아들 이재황(李載晃:아명은 명복 12세)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 된 주요한 배경이었다. 이후 또하나 주목되는 부분은 대왕대비가 대원군의 탈것을 八人輿가 아닌 轎子로 할 것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다. 교자는 대신이 타는 것으로 대군이 타는 輿보다는 격이 낮은 것이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대원군이 겸손해서라지만 실제로는 조관인 대신의 예우가 필요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원군은 왕족으로서 받을 수 있는 교육은 다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놀라운 것은 그는 집권하자마자 두 권의 책을 썼다는 것이다. [양전편고]와 [강요집목]이라는 책인데, 전자는 문무관리를 어떻게 뽑고 버리는 관리의 임면과 과거에 필요한 절차와 방법등을 편집하여 만든 책이고, 후자는 중국의 [자치통감]과 [속강목]을 줄여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대원군 스스로가 책을 썼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것으로 대원군은 상당한 정도의 지식이 쌓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이시기 권력교체의 계기는 흥선군이 대원군에 봉작된 것에서 찾아지지만 그러한 권력교체는 새로운 정치세력에 의한 권력의 이양도 아니었고 대원군 개인에게 공식적인 정부관료의 직위를 주는 방식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권력의 교체는 공식적인 방식이 아니라 권력가들 사이에서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추측될 수있는 것이다. 대원군의 역사적 등장은 그 평가에서 늘 양비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흥선 대원군은 우리 역사에 공과를 두루 남겼다. 국가재정을 낭비하고 국론분열의 온상이 되어 온 서원을 철폐한 일,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비변사를 없애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둔 일(왕권의 강화), 백성의 짐이 되었던 무명잡세를 폐지한 일, 어느 붕당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두루 쓴 일, 진상제도를 없애고 사회악습을 개선한 일, 『육조조례』와 『대전회통』을 간행한 일 등은 거의 긍정적인 개혁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대로 경복궁을 중수하여 국가재정을 어렵게 한 일, 천주교 박해로 양민을 죽여 외국과의 전쟁을 자초한 일(평가가 엇갈릴수 있음),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쇄국정책 등은 감점요인이다. 고종 10년에 정계에서 밀려난 대원군은 양주 직곡으로 은퇴하여 운현궁을 떠났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 뒤에도 정계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았으며,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대원군이 사태수습의 책임을 맡게 되어 운현궁에 다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청국의 개입으로 정세는 역전되어 대원군은 청국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대원군은 고종 22년(1885)에 다시 운현궁으로 돌아왔으나 이때는 민비의 정치적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며 대원군은 운현궁 안에서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후 을미사변 때에도 대원군이 일본군들에 업혀 경복궁으로 들어갔으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대원군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만다. 광무 2년(1898) 봄에 대원군과 민씨가 연달아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고종은 이곳에 예장청을 설치하고 궁안에 대원군의 사우(祠宇)를 건립하였다. 대원군의 장례는 1898년 음력 윤3월 26일 장례원 주관으로 치러졌다. 장례비로는 고종이 내탕금 6만 5,000원을 내려보냈다. 그는 생전에 손수 마련해 놓은 공덕리 아소당 옆 가족묘지에 부대부인과 나란히 묻혔다. 지금의 마포구 동도중학교 운동장 자리가 대원군의 묘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이장하여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가족묘지에 맏아들 재면과 장손 준용, 증손 우 등이 함께 묻혀있다. 이 아소정 건물은 나중에 뜯겨져 지금의 봉원사 건물로 쓰이고 있다. 봉원사 대웅전 오른편건물로 추사의 현판으로 그 건물이 아소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원군의 사후에는 흥친왕의 아들인 이준이 승계하였고 1917년에는 의친왕의 2남인 이우가 승계하였다. 장녀는 판서 조경호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규장각 대교 조정구에게 시집갔다. 운현궁 경내였던 덕성여대 정문 뒤쪽으로 우물이 있었는데 백락동 우물이라고 하였다. 그 우물 옆에 대원군의 소실이 살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서 백락동 마님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그녀가 기거하던 집이 남아있다. 흥선대원군과 견제와 알력으로 일생을 보낸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의 증손녀딸이 쇄국주의자 대원군의 증손자 며느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우의 양아버지 이준용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대 박영효는 내무대신이었는데, 그는 이 사건을 가혹하게 처리하여 사약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처럼 사약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가 그 아들에게 자기 증손녀 딸을 출가시킨 것 또한 의문이다. 이런 사연을 가진 박찬주 여사는 기울어가는 운현궁을 마지막으로 버틴 왕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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