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꽃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물 중 최고격인 연꽃은 그 아름다운 자태와 은은한 향기, 고아한 품격, 그리고 더러운 진흙속에서도 청정한 꽃을 피우는 ‘처염상정(處染常淨)’으로 인해 불교에서는 ‘보리심(菩提忄)’, ‘청정무구한 불성(佛性)’을 나타낸다. 즉 연꽃은 우리에게 탐진치 가득한 사바세계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청정한 불성을 꽃피울 수 있다는 상징이 되어준다. 인도 티벳지역을 비롯해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동양권에 고르게 자생하고 있는 연꽃은 옛날부터 생명의 창조, 번영의 상징으로 애호되었는데 그 이유는 연꽃 씨앗의 강한 생명력 때문이다. 실제로 천년 이상 땅에 묻혀있던 연꽃 씨앗을 근래에 발아시킨 예가 있을 정도로 연꽃의 생명력은 매우 강하다. 인도나 이집트 등에서는 연꽃을 국화(國花)로 삼아 소중히 여기고 있다. 부처님께 올리는 육법공양중 꽃공양에는 연꽃이 꼭 들어가며 부처님이 계신 법당의 단청은 물론 앉는 자리, 광배, 닫집, 문(門)에도 연꽃문양으로 장엄한다. 또한 극락세계를 연화세계라 하고 극락정토에 나는 것을 연화왕생이라 부른다. 부처님이 설법하고 나면 회상을 장엄하는 만다라화가 비처럼 흩뿌리는데 이 만다라화의 주축을 이루는 것이 연꽃이다. 또한 연꽃에는 정화능력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연못에 연꽃을 심으면 연못의 더러움이 연꽃의 양분으로 흡수돼 물을 맑게 정화시켜 준다고 한다.
■연화장세계
연꽃중에 함장(含藏)된 세계라는 뜻이다. 이 세계는 비로자나여래의 과거의 원(願)과 수행에 의해서 꾸며진 세계이고 십불(十佛)이 교화(敎化)를 베푸는 경계라고 한다. 또 <아미타경>에서 연꽃으로 장엄된 아미타여래의 세계로 극락정토를 의미한다. <화엄경>에서의 ‘연화장(蓮花藏)세계’도 부처님의 세계이며, 정토의 세계이다. 세계의 맨 밑에 풍륜(風輪)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香水海)가 있다. 이 향수해 속에 커다란 연꽃이 있는데, 이 연꽃속에 함장된 세계가 연화장 세계이다. <범망경>에서의 이 세계는 천엽(韆葉)의 대연화(大蓮華)로 부터 되고, 그 하나하나의 잎에 백억의 수미산(須彌山)과 사천하(四天下) 등이 있으며 비로자나불은 그 본원(本源)으로서 화태(華臺)의 위에 앉아 스스로의 몸을 변화시킨 천체(韆體)의 부처님으로 나투어 심지법문(忄地法門)을 설한다고 나와 있다.
■연등(燃燈)
우리나라에는 불교명절때 재(齋)를 올리고 연등을 밝히는 풍속이 있다. 등의 모양은 형형색색으로 여러가지다. 과실 모양, 연꽃 모양, 어류 모양, 동물 모양 등 그 종류가 많다. 등에는 ‘태평 만세’, ‘수복’ 등의 글을 쓰기도 하고, ‘기마 장군상’이나 ‘선인상’을 그리기도 한다. 그 중에서 연꽃 모양의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꽃이 진흙속에서 사바세계로 막 피어올라 불타의 진리를 밝혀주고 그 진리를 온 법계에 전해주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가장 많이 선호되고 있다. 또 불교행사때 매달려 있는 여러 빛깔의 연꽃등은 제철에 만개한 연꽃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인상을 준다
■연화대
불·보살이 앉아있는 곳은 큰 연꽃으로 만들었기에 화좌(華座), 연화좌(蓮華座), 연화대(蓮華臺)라고도 한다. 연꽃은 진흙에 나서도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는 덕이 있으므로 불·보살이 앉는 자리로 삼았다. 또한 부처님의 사리나 고승의 사리를 모신 탑이나 부도를 받드는 받침석도 연꽃모양으로 만들었다.
■염화시중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묵묵히 연꽃을 들어보이자 모두들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 하고 있는데 가섭존자만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그 뜻을 전해 받았다는 데서 유래된 말. ‘염화미소’라고도 불리는 이 말은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해 이심전심으로 전법하는 것을 지칭한다. 실질적인 선종의 시발점이 된 ‘염화미소’는 중국 송대 이후 무언의 전법을 전달하는 의미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연화문
연꽃은 빛과 생명, 불교의 대자대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조형화돼 사찰 건축이나 와당, 불상의 대좌나 광배, 불상 조각, 단청, 불화, 불구(佛具) 등 불교 미술의 주요 문양으로 다양하게 쓰여왔다. 대표적인 예로 조계사 법당의 연꽃문과 석담사 대웅전 연화문 수막새기와 등을 들 수 있다.또 연꽃과 함께 원앙을 등장시켜 남녀, 길상, 행복 등을 상징하기도 하며 물고기와 함께 그려지는 경우는 평생을 통하여 재물이 풍부하여 모자람이 없고 정신적 여유가 항상 유지 되기를 바라는 ‘연년유여(延秊有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탑
탑이란 ‘탑파(塔婆)’, 즉 범어의 ‘스투파(stupa)’ 또는 팔리어 ‘투우파(thupa)’의 음역에서 유래된 약칭으로, 사리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후 인도의 장례법에 따라 화장의 예를 갖춤으로써 사리를 얻게 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구조물을 쌓은 것이 바로 탑파, 즉 불탑이다. 이때 세운 8기의 탑을 ‘근본팔탑’이라 한다. 이후 사리를 봉안해 탑을 세우는 일이 일반에 유행함에 따라 수량이 한정된 진신사리만으로는 수요를 맞출 수 없어 진신사리가 아닌 법신사리(경전)사상이 생기게 되었다.
탑의 원형을 보여주는 스투파로는 기원전 3세기에 이룩된 원분(圓墳)형태를 이루고 있는 인도 산치의 대탑이 유명하다.
한국의 탑은 세계 불교예술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그 기원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이르는 삼국 말기의 시기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탑은 그 소재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 등으로 나뉘며, 대체로 중국은 벽돌로써, 일본은 목재로써, 우리나라는 석재로 탑을 조성한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라 부르는 것도 현존하는 탑 거의 모두가 화강석을 재료로 한 석탑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탑의 발생과 그 계보의 변천과정은 목탑, 목탑의 양식을 본받은 전탑, 목탑과 전탑의 두 양식을 갖춘 석탑의 순서로 양식이 정립돼 왔다.
■목탑(木塔)
우리나라 초기 탑은 목조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말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목탑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은 물론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조까지 계속되었다. 목탑은 다른 건축과는 달리 수직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고도의 건축 기술이 없이는 건립이 불가능하다.
특히 다른 불탑들과는 달리 실내에 공간이 마련돼 예배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고구려의 목탑자리로는 평양 청암리 등 4곳이, 백제 때는 부여 금강사 절터 등 5곳이, 신라 때에는 동양 최대 규모였다는 황룡사 목탑 등 4곳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목탑으로는 조선후기에 건립된 법주사 팔상전(국보 55호)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전탑(塼塔)
<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전탑을 봉안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 전탑의 특징은 목탑이나 석탑과 형식은 동일하나 중국 전탑의 영향으로 옥개의 상하에 층단을 마련하고 감실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또 화강암을 재료로 혼용한 것은 중국의 전탑이 벽돌만으로 축조된 것과는 다른 점이다.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성행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우리나라에서 전탑은 매우 희귀해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안동 신세동 7층전탑(국보 16호)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226호), 송림사 5층전탑(보물 189호), 안동 조탑동 5층전탑(보물 57호),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 56호) 등 모두 5기에 지나지 않는다.
■모전석탑(糢塼石塔)
전탑의 형식을 모방한 석탑. 우리나라에서는 전탑보다 석탑이 더 많이 유행했다. 그러나 탑재(塔材)를 구하거나 조탑과정이 용이하지 않는 특수성으로 인해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형태는 석재를 벽돌처럼 작게 가공해 전탑 모양으로 쌓아올린 유형과 일반적인 석탑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면서 표면을 전탑처럼 가공해 축조한 유형으로 나뉜다.
첫번째 유형으로는 경주 분황사 석탑(국보 30호)를 비롯해 제천 장락리 7층석탑(보물 459호) 등 9기 정도가 있으며, 두번째 유형으로는 의성 탑리 5층석탑 등 7기가 남아있다.
■석탑(石塔)
목탑이나 전탑은 석탑의 완성을 위한 밑거름 역할을 했다고 할 정도로 석탑은 우리나라 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우리나라 석탑의 서장을 장식하는 것은 백제시대에 건립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국보 9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형양식의 완성은 신라시대에 이룩됐다. 한국의 석탑이 곧 신라 석탑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신라석탑으로 가장 앞선 작품은 선덕여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이다.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모전석탑으로 불리는 이 석탑은 신라석탑의 조형(祖型)으로 꼽힌다. 불국사 다보탑(국보 21호) 석가탑(국보 22호) 등 우리 민족의 예술적 천재성이 발휘된 빼어난 석탑이 건립된 것도 바로 이 때다.
특히 불국사 석가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으로 상하 비례나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우리나라 석탑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불천(佛天)의 신비가 탑을 중심으로 발현되고 있는 느낌까지 줄 정도로 신비롭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외에도 경주 감은사지 3층석탑(국보 112호) 고선사지 3층석탑(국보 38호) 갈항사 3층석탑(국보 99호) 등 수많은 명탑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데, 국보는 27점, 보물은 126점에 달한다.
■금동탑·청동탑·철탑
금동이나 청동, 철 등 금속제탑은 옥외에 설치해 예배하기보다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일반적인 탑이라기 보다는 장엄물에 가깝다. 또한 사리를 담은 사리장엄구도 작은 탑의 모양을 한 경우가 많다.
높이 1.55m로 작은 석탑과 같은 크기의 고려시대 작품인 금동대탑(국보 213호)
*부도
-스님사리나 유골 안치한 묘탑-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을 일컫는다. 부도는 다른 석조물과는 달리 부도에 따르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 부도의 주인공과 그의 생애 및 행적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문화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로 간주된다.
우리나라에서 부도라는 용어가 승려의 사리탑을 가리키는 실례는 신라 하대부터 보이고 있다. 627∼649년경에 원광법사의 부도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우리나라가 부도를 건립한 것은 7세기 중반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부도 건립은 법제문도들이 스승을 섬기는 극진한 마음에서 스승이 입적한 뒤 정성을 다해 세우는 것으로, 당나라에서 선종이 들어온 이후 9세기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부도는 각부의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문양으로 불교조각의 극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석조미술의 백미로 꼽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부도로는 신라 문성왕 6년(844년)에 건립된 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104호)이 꼽힌다. 이밖에 주요부도로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국보 59호)쌍봉사철감선사탑(국보 57호)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국보 102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국보 197호) 흥법사진공대사탑(보물 365호) 회암사지부도(보물 388호) 연곡사서부도(보물 154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