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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을 묻는 자에게
요즘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서양에까지도 널리 보급이 되고 붐이 일어나서 너도 나도 참선을 하려고 하고 또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선은 두 가지 경향이 있는데 하나는 살 활자 글귀구자, 활구참선(活句參禪)이고, 또 하나는 죽을 사자 글귀구자, 사구참선(死句參禪)입니다.
사구참선은 무엇이냐?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은 그것은 죽은 사선(死禪), 의리선(義理禪), 잡선입니다. 역대 조사스님들은 활구참선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활구참선이란! 선(禪)의 자리를 몰라 참구(參究)한다고 해서 참선(參禪)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식으로부터 공안(公案)하나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활구참선은 당장 처음 시작할 때부터 막히고, 뒤를 돌아봐도 콱 막혔고, 왼쪽 오른쪽을 둘러봐도 콱 막혀서 한걸음 나아 갈라야 나아 갈수 없는 상태로 지어가되 한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는 길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공부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해서 차츰차츰 해감에 따라서 무엇인가 얻어진 바가 있어야만 되지만, 이 참선 공부는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에 다 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만큼 공부에 빨리 힘을 얻게 되는 것이고 미련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그 만큼 늦어지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을 하려면 그동안에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불교에 관한 것이건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의 말씀까지도 전부다 방하착(方下着) 놓아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못 바보가 되어서 하라는 대로만 그대로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활구선과 사구선, 외도선(外道禪)은 자기가 만듭니다. 여러분 ! 지금부터 깨달음이 무엇인지 맛이라도 조금 보십시오!!
“늘 상 살아가며 무슨 일을 하면서도 오직 ‘어째서 개가 불성이 없다고 했을 고?’ 왜 ‘무(無)’라 했을 고? 하고 이렇게 화두만 들으십시오. 오나가나 의심하고 의심하여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뜻 길이 없어져서 아무 재미도 없고 마음이 답답할 때 바로 그 사람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대목입니다.
즉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였더니 조주스님은 “무(無)”라고 대답하셨으니 이 한 마디는 우리 선종(禪宗)의 한 관문(關門)이며, 온갖 못된 지견과 그릇된 알음알이를 꺽어 버리는 연장이며, 또한 모든 부처님의 면목이요, 조사님들의 골수입니다.
옛 어른이 송하시기를 “조주의 치킨 칼 서릿발 번쩍 이네. 무어라 물을 테냐 몸뚱이를 두 동강 내리라!” 이 말씀은 조사관문(祖師關門)을 통과 해야만 불조(佛祖)의 말뜻을 알아 본 다는 것입니다.
선(禪)이란 모든 번뇌가 쉬어 일체의 미세망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최상승선(最上乘禪)은 일체관념이 붙지 않는 절대적인 그 자리를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격외선(格外禪), 또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선(禪)이란 생사가 없는 경지를 터득한 용(用)을 말합니다. 상대성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절대성인 그 자리에서 나오는 용심(用心)이 바로 선입니다.
화두학자(話頭學者)는 생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화두만 바로 들면 절대로 귀신 이 들여다 볼 수가 없습니다. 또, 화두학자는 염라국의 업경대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화두공부는 하지 않고 기도 다 염불이다 하면서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을 경책하실 때 역대조사(큰스님, 선지식)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지금 고작 귀신 눈에 띄는 공부를 하고 있느냐?” 공부 축에도 못 든다는 아주 따끔한 경책입니다.
옛 어른들이 이르시기를 “선방에 가려거든「서장(書狀)」이나 보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화두학자가 걸리기 쉬운 병통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점검해 놓은 책으로 화두공부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서장」자체를 잘못 해석하고 있어서 읽으나 마나한 책이 되었습니다. “화두만 바로 할 일이지 왜 깨달았다는 생각을 붙여서 시꺼먼 귀신 굴에 처박히느냐?”, “너의 답은 체(體)에 치우친 것이다”. “너의 답은 용(用)에 치우친 것이다.” "깨달음이 아니니 다시 공부해라.” 이렇게 화두학자들이 병통에 걸린 것을 대혜 스님이 편지로 거래하며 바로 잡아준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서장(書狀)」입니다.
화두학자 여러분!
화두만 부지런히 하면 자연히 그 뜻이 불거지므로 깨치기를 기다리지 말고 순수하게 또렷또렷하게 화두만 지어가면 됩니다. 화두를 할 때는 깨닫겠다는 생각이 앞서면 안 됩니다. 그 생각도 망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만 됩니다. 경계가 나더라도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지 말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에 항상 의단(疑斷)이 놓쳐지지 않는 것을 안으로 비춰보면 됩니다. 그런 살림이 없으면서 견성(見性)을 했다고 하는 것은 도깨비굴에 들어앉은 것입니다. 그것은 선이 아니라 사기(詐欺)라고 합니다.
참선자 여러분!
대혜 스님은「서장(書狀)」에서 묵조사선(黙照死禪)을 치신 것이지 조동종(曹洞宗) 정맥(正脈) 묵조선을 치신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묵조선(黙照禪)은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이나 같아서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화두가 참(眞實)으로 타파(打破)가 되면 그것이 진묵조(眞黙照)입니다. 그 뜻을 바르게 간파하는 것이 화두입니다.
「서장(書狀)」에 나타난 원래의 내용은 이와 같은데 요즘은「서장」을 뒤집어 해석해서 묵조선 다르고 간화선 다르다고 사견(私見)을 붙입니다. 묵조 사선은 죽은 선입니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구선(一句禪)은 “상대성(相對性)”관이 아니라 “절대성(絶對性)”관(觀)즉, 활구(活句) 입니다.
참선학자 여러분 !
요즘 돈오돈수만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의 양문(兩門)에서 보면 ‘불도를 옳게 닦는 길은 먼저 깨치고 나서 차츰차츰 오래 닦아야 한다. 깨치지 않고서는 바르게 닦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오(頓悟)가 시작이요 점수(漸修)가 끝이 되는 것으로 돈오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확철대오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점수 곧, 보림(保任)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돈오돈수만 강조하는 자는 확철대오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이는 대번에 크게 깨쳐서 한 뜀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을 ‘몰록 깨침’곧 돈오(頓悟)라고 하는데 이치는 비록 단박에 깨쳤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익혀 온 버릇 곧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는 일시에 완전히 끊어 현실의 사물 처리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래오래 닦아 나아가야한다. 그러므로 결국은 누구나 점수(漸修)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깨치지 않고는 옳게 닦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조사스님들은 닦는 것보다 깨치는 것을 중요하게 말하는 바이다. “먼저 깨친 후 곧 철저한 보림(保任)을 해야 한다.”라고 명시 되어 있습니다.
참선학자 여러분!
먼저 밝은 이치를 요달해서 깨닫는 것을 ‘청청법신 비로자나불’을 친견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오(頓悟)즉 견성(見性)입니다. 그 다음에는 ‘원만보신 노사나불’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점수(漸修)즉 보림(保任)입니다. 보림을 다해 마쳐 능력을 다 갖춘 것을 “성불(成佛)”이라합니다. 이때부터 도인도자는 길 도(道)자가 아니라 여러분을 성불의 세계로 이끈다고 이끌 도(導)자를 씁니다. 확철대오 하신 명안종사 즉 도인(導人)들은 막 잡아 쓰면 바로 법(法)입니다. 이것을 선문(禪門)에서는“여래선 가운데서 조사선을 쓴다”라고 합니다. 즉, 일구(一句)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이변(理辨)과 사변(事辨)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 한 분이고 역대조사는 돈오보림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쉬운 말 방편적인 말로 표현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합니다.
역대 조사는 부처님과 같이 그렇게 천 백억 화신(化身)을 나 툴 수가 없습니다. 가섭존자로부터 육조 혜능대사 까지 33명이라 해서 삽삼조사(卅三祖師)라 합니다. 삽삼조사까지는 18변신을 하고 엄청난 신통력을 보이셨으나 부처님과 같이 엄청난 위력은 보이지 못 했습니다
그것이 역대 조사가 부처님보다 많이 모자란 점입니다. 그것을 보충하는 단계를 선가(禪家)에서는 보림(保任)이라고 합니다. 보림은 격외의 말 조사문중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보조스님은 교가(敎家)의 말 즉 보다 이해하기 쉬운 방편의 말로 표현하여 점수(漸修)라고 하였습니다.
보조스님의 점수는 증오점수(證悟漸修)와 해오점수(解悟漸修), 두 가지로 나뉩니다. 증오점수라는 것은 증오 보림이라는 뜻입니다. 견성후의 보림이라는 말을 할 때는 이것은 격(格)이 매우 다릅니다. “닦는다는 생각이 없는 닦음”이기 때문입니다.
해오점수는 이치로는 깨달았는데 “증득”을 못하였으므로 점차로 수행을 하여 증득해야 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돈오돈수 만 강조하는 사람은“서장”에 치우 쳤다라고 합니다. 즉, 두 눈이 밝지 못한 애꾸눈 이라합니다 또 이런 사람은 조사선(祖師禪)의 차별지(差別知)인 말후구(末後句)의 낙처(落處)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여래선(如來禪)은 평등지(平等知)가 되고 조사선(祖師禪)은 차별지(差別知)가 됩니다. 일구(一句)조사선에는 체(體)와 용(用)이 있고, 이구(二句) 여래선에도 체와 용이 있습니다. 조사선은 최초구(最初句)와 말후구(末後句)를 나타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역대 조사스님들께서 화두 학자를 제접(提接)할 때 ‘용머리인가 뱀 꼬리인가’를 선가귀감에 있는 빈주구(賓主句)로 가려냅니다. 이게 임제종의 법로(눈)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애꾸눈을 다룰 때
“너는 여래선은 봤다 마는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
“너는 여래선 경지는 된다마는 조사선 경지는 꿈에도 모른다”
응용하는 면에서 학자를 이렇게 다루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또 여래선은 얕고 조사선은 깊은 줄 압니다. 그러나「금강경」에 “공(空)도리”가 따로 있고「법화경」에 “실상(實相)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여래선 다르고 조사선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금강경 오가해(五家解)”를 볼 때만, 또 줄여서 “삼가해(三家解)”를 볼 때만 여래선과 조사선이 둘이 아니라고 보며 다른데 가서는 전부 여래선 따로 조사선을 따로 봅니다. 다만 조사선은 직설(直說)이고, 여래선은 방편설(方便設)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둘이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어느 하나가 경지가 낮은 것도 아닙니다. 즉 확철(大圓覺)하게 깨친이는 평등지에서 차별지를 씁니다. 이렇게 밝은 가르침을 주신 분은 부처님과 역대조사스님 선지식님 뿐입니다.
참선자 및 불자 여러분!
이글을 보시고 이제 깨달음이 무엇인지 맛을 조금이라도 보셨습니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므로 방일(放逸)하지마라.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정각(正覺)에 이르렀다. 무량한 선(禪)을 낳는 것도 방일하지 않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
육바라밀(六波羅蜜)은 대승보살의 실천적 생활 윤리로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 가지 바라밀을 말합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미혹된 미신(迷信)에서 벗어나 외도(外道)와 삿된 신통(神通)의 경계에 속지 않고 자신의 본심(本心)을 찾게 되어 성불(成佛)합니다.
바라밀은 범어인데 그 뜻을 풀이하면「도피안(到彼岸)」이라고도 합니다.「피안(彼岸)」에 도달 했다는 것입니다. 생사번뇌의 “차안(此安)”에서 “해탈열반(解脫涅槃)”의 저 세계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선문(禪門)에서 육바라밀은 결국 추번뇌(麤煩惱), 세번뇌(細煩惱)가 끊어진 절대순수경지를 뜻합니다. 육바라밀은 조도품(助道品)을 도와줍니다. 뼈에 사무치게 진실 하고 간절하게 공부를 하시면 성불(成佛) 하는 데는 승속(僧俗)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선원 을 바라밀 선원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독경을 할 때면 언제나 먼저 외우게 되어 있는 개경게(開經偈)의 첫머리에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진리를 바로 드러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가는 법이 없는 참으로 미묘한 이 가르침은 백천만겁을 살아도 한번 만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서 보고 듣게 되었으니 부디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진실한 뜻을 깨닫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여래진실의(如來眞實意)를 깨닫고 진실도(眞實道)에 들 수 있습니다.
참선학자 및 불자 여러분 !
선문(禪門)의 도(道)는 두두(頭頭)가 비로(毘盧)요, 물물(物物)이 화장(華藏)입니다. “이~뭣꼬” ‘무(無)’ 화두 안에 이 모든 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불교의 근본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삼법인(三法印)이 모두 이 알 수 없는 의심 덩어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타파(打破)해야만 그 뜻에 계합(契合)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실천하는 착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활”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더라.
능허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