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아버지 강영우 박사를 위해 안과 의사 된 아들 강진석 박사 미국 워싱턴 안과의사협회장에 선출되다

“안락하게 사는 삶에는 관심 없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리더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
강진석(미국명 폴 강) 박사의 성공을 논하기 전에 먼저 언급해야 할 사람이 있다. 그의 아버지인 강영우 박사다. 지난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내기도 한 강영우 박사의 ‘어려움을 극복한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1944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난 강영우 박사가 실명을 한 것은 중학교 시절 사고에 의해서였다. 불행은 연이어 찾아왔다. 이후 충격을 받은 모친은 뇌졸중으로, 가장으로 생계를 위해 일하던 누나는 과로사로 세상을 떠나고 그만 홀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영우 박사는 모진 어려움을 극복하는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피츠버그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1976년 한국 최초로 시각장애인 박사가 되었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주류사회에서 인정받는 명사가 된 강영우 박사에 이어 최근 눈에 띄는 것은 아들들의 활약상이다. 둘째 아들인 강진영 변호사는 지난 2009년 1월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부자가 대를 이어 각기 다른 정당 출신의 대통령에 의해 백악관에 입성하는 진기록으로,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인 강진석 박사가 워싱턴 안과의사협회 회장이 됨으로써 이들 부자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가족의 모델로 손꼽히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올해 초 회장에 취임한 강진석 박사의 나이가 불과 서른여섯 살이라는 것. 이제까지 안과의사협회 회장은 보통 50∼60대 의사들이 맡아오던 자리였기에 그의 취임은 관행을 깬 최초의 사례가 됐다.
#미국 주류사회에 떠오르는 글로벌 리더
“한국인 2세로 미국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한국인을 넘어 글로벌 리더로서 안과의사협회를 이끌어간다는 생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섬김의 자세로 회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협동심을 유도해나갈 생각입니다.”
안과의사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지 2개월 남짓, 강진석 박사의 각오는 남다른 면모가 느껴졌다. 그가 취임한 워싱턴 안과의사협회는 워싱턴과 북버지니아, 메릴랜드 지역 안과 의사들의 모임. 수많은 안과 의사들 중 젊은 나이의 그가 회장으로 취임할 수 있었던 것은 능력과 인격을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보이며 가정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강진석 박사는 조지타운 의대 조교수는 물론 안과 교수들이 합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종합병원 ‘Eye Doctors of Washington’의 공동 원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미(美)안과학회와 환자들에 의해 ‘Top Doctor’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명실공히 미국 안과계의 별이 된 것이다.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한 그는 인디애나대학 의대를 거쳐 듀크대 병원에서 근무를 하며 20대를 보냈다. 당시 전공인 각막과 굴절, 백내장 수술에서 두각을 보이며 실력을 쌓아온 그는 30대 초반에 이미 최고의 안과 의사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강진석 박사가 안과 의사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은 놀랍게도 네 살 무렵이었다.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역시 아버지 강영우 박사였다.
“아버지가 앞을 보지 못하신다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눈뜬 아버지를 가지고 싶다고 기도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 저를 보신 아버지가 ‘안과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의 눈을 고쳐주는 게 어떻겠니’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나 최고의 안과 의사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의학의 한계로 인해 아버지의 눈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눈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걸어온 길이었기에 좌절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의과전문대학을 다니며 전문의 과정을 거치면서 아버지의 눈은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됐죠. 그래서 저는 망막 전문의의 길을 포기하고 각막 전문 안과 의사가 되기로 진로를 정했어요. 아버지의 경우처럼 망막질환은 사실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드물어 안과 의사들 사이에서는 농담 삼아 망막을 전공하면 ‘막막하다’라고도 해요. 대신 각막이식수술은 더 발전만 한다면 아버지와 같은 환자들에게 바로 시력을 찾아줄 수 있어요. 제가 각막 분야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죠.”
이처럼 강진석 박사가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타인을 섬기는 봉사의 마음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어렵게 미국으로 와 공부를 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탓에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조차도 아버지는 아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가난했어요. 친구들의 부모님은 거의 의사와 변호사였죠. 저와 동생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우리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시며 도전의식을 갖도록 하셨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어요.”
지난 2008년 2월 피츠버그대학교 졸업식은 이들 부자에게 뭉클한 감격을 안겨주었다. 졸업식과 함께 이어진 ‘올해의 동문상’ 수상식에 수상자인 아버지 강영우 박사를 아들인 강진석 박사가 의학박사 가운을 입고 안내한 것. 미국 언론은 부자의 이야기와 함께 그들이 꿈을 이룬 과정을 자세히 소개했다.
#영재로 거듭나게 한 아버지의 교육
강진석 박사는 아버지 강영우 박사가 피츠버그대학에서 석사학위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태어났다. 교육전문가로서 강영우 박사는 어린 아들을 키우는 와중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보통 교육과는 다른 영재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시행착오도 없진 않았다.
“진석이는 타고난 영재였어요. 그러나 학업 성취와 표준화 검사 학력이 중상에 머물러 있어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영재로 판별되지 못했죠. 아내와 저는 진석이를 영재로 길러보겠다는 생각으로 기회만 있으면 학교에서 배울 것들을 먼저 가르쳤어요. 결국 그로 인해 진석이는 학교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배우게 되면서 지적 흥분을 느끼지 못했던 거죠. 게다가 거듭되는 실패로 자신감까지 잃어 심력에 손상을 입었고요. 일방적으로 지력 편중 교육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심력을 길러주는 올바른 태도와 가치관에 관한 교육을 시작했어요. 결과는 1년 만에 성공이었죠.”(강영우 박사)
아들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시키기 위해 강영우 박사가 사용한 방법은 자신의 생일에 어떠한 위인들이 태어났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강진석 박사의 생일이 4월 23일인 것에 착안해 대문호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동질감을 갖게 하는 식이었다. 그러한 교육을 통해 강진석 박사는 자신이 특별한 사명과 목적을 갖고 태어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모든 과정을 기억하고 있기에 안과의사협회 회장에 오른 지금, 새삼스레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은 남다르다.
“당시에는 아버지에게 ‘제가 아빠의 아들이라서 머리가 좋은 학생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저는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아요. 이제는 저를 그만 내버려두세요’라고 반항(?)을 하기도 했어요. 반발심이라기보다 저 스스로 영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자신감도 결여돼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 아버지는 제가 틀리고 당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셨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저와 동생에게 인생의 분명한 비전과 목표를 심어주고 계세요. 언제나 어려움이 있을 때면 격려해주시면서 멘토와 코치가 되어주시죠. 아버지는 제게 가장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아들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각별한 신경을 썼다. 아버지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가 ‘친구의 중요성’이다. 같은 영재학급 내에서도 주일에 성당이나 교회에 가는 친구, 결손가정의 자녀가(???) 아닌 친구를 중심으로 아카데믹팀을 구성해 직접 코치를 맡으며 수학경연대회 등에 출전시켜 좋은 성적을 얻게 하기도 했다. 특히 강진석 박사의 경우 뒤늦게 영재학급에 참여했음에도 개인전에서 인디애나주 전체 2등을 해 연방 상원의원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를 통해 그는 아버지의 의도대로 확실하게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아버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 또한 강진석 박사의 인생에 많은 힘이 됐다. 성장과정을 통해 아버지의 어려움을 익히 잘 알고 있던 그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낙천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었고, 이는 학생들의 기본적인 실력 외에도 자유와 평등에 대한 편견 없는 시각과 인격을 요구하는 하버드대학 입학 기준에 부합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강진석 박사가 썼던 에세이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읽어주신 이야기’는 하버드 입학사정관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육안이 없이도 볼 수 있는 세계를 보여주신 맹인 아버지를 가지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두 눈을 뜬 내가 두 눈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안내자가 아니라 맹인 아버지가 정안자인 내 인생을 안내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로 인해 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도전하며 편견과 차별이 없는 사회 건설에 기여할 의욕을 갖게 되었으며, 누구나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삶의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 강진석 박사의 에세이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읽어주신 이야기’ 中
무난히 하버드대학에 입학한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보조 공학기구를 연구 개발은 물론 판매까지 하는 회사를 창립하여 경영기술을 습득하는 한편,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 대한 봉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 전 1년 동안 모교인 필립스 아카데미 엑시터에서 입학사정관으로 근무를 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과정에서 경험한 대인관계 능력과 리더십은 서른여섯의 젊은 그가 많은 의사들의 리더인 안과협회 회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그의 인생에서 지금은 큰 밑그림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족 속에서 얻는 또 다른 행복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강진석 박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가족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두 딸 예진(Ava)과 수진(Clara), 지난해 태어난 아들 진구(Jack)에게 또 다른 멘토가 되는 날을 꿈꾸는 그는 행복한 젊은 가장이기도 하다. 막내아들의 ‘진구’라는 이름이 특히 눈에 띈다.
“아버지께서 손자의 이름을 전지 강씨의 돌림자를 써서 ‘구’자로 지어주셨어요(웃음). 아이들을 키우면서 저 역시도 부모님이 해주신 것처럼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어린 자녀들이기에 할아버지와 자신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다는 그. 그러나 최근에는 할아버지 강영우 박사가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임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주고,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예진이는 그런 면에서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귀여운 큰딸이다.
이렇듯 아들이 장성해 자신의 가정을 이뤄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 강영우 박사의 마음은 여간 흐뭇하지 않다. 특히 며느리 에이미 강 씨에 대한 사랑은 더욱 남다르다. “아들만 키우다가 며느리들을 맞게 되면서 삶이 더욱 즐거워졌다”는 아버지. 사이좋은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서 강진석 박사는 또 다른 행복을 느끼고 있다.
“아내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은 ‘아빠’입니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을 때는 ‘하이 대디’라고 하죠. 부모님 역시 그런 아내를 친딸처럼 대하시고요. 매달 하루는 온 가족이 다 모이는데, 그때 아버지는 동생 내외와 제 아내, 아이들에게 그달 잘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고 상을 주세요. 아내와 저는 의학전문대학원 시절 동료로 만나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결혼을 했습니다. 저는 안과 전문의가 됐고 아내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됐죠. 제겐 친구이자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강진석 박사의 삶을 통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동서양을 막론한 진리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말속에는 새로운 도전의식이 자라고 있다. 오랜 옛날 한국을 떠나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한 아버지의 삶을 아는 아들로서, 미국에서 태어나 성공한 한국인 2세로서 그의 도전은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고 있다.
“저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안락하게 의사생활을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의사는 연구에 치중하고 또 어떤 의사는 돈벌이에 급급하지만 제 목표는 다릅니다. 의학적으로 성공한 안과 의사에 그치지 않고 미국과 국제사회를 변화시키는 리더로서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