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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보고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싶은 것만을 들을까?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이란 없으며, 오직 우리의 생각이 그것을 만드는 것이리라…<햄릿>
지난 1세기 동안 심리학자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거나 폭력적인 범죄의 희생자가 되는 것 같은 비극적인 사건은 피해 당사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부작용을 지속적으로 남긴다고 가정해왔다. 이 가정은 당연시되어 이런 사건을 겪고도 아무런 정서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슬픔 상실’이라는 병리적인 상태에 있다고 진단받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며 슬픔을 보이지 않는 것도 정상적인 것일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리학자들이 가정했던 것처럼 꽃과 같이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외상(trauma)을 경험하고 나서도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는 탄력적인 존재임이 밝혀졌다. 물론 부모나 배우자를 잃는 것은 슬픈 일이고 때로는 비극적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돌팔매질을 당해도 싸다. 그러나 실제 연구를 보면 유족들은 상당 기간 비통에 잠기지만, 그 중 극히 소수만이 만성우울증을 경험할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슬픔을 잘 견뎌낸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자아탄력성은 외상 경험 이후에 나타나는 아주 흔한 현상이다”라고 주장한다. 주요 외상 사건들을 겪고 살아 남은 사람들을 연구한 결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이후로도 매우 잘 지내며 상당수의 사람은 그런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이 강화되었다고 진술했다. 물론 이런 주장이 무슨 노래 가사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처럼 미심쩍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불행한 일을 경험한 후에도 사람들은 꽤 잘 살아간다는 점이다.
정말로 ‘탄력성resilience’이 우리의 기본 속성이라면, 위와 같은 통계에 그리 놀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그렇게 탄력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사람들의 탄력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에 굳이 놀랄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가 놀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델라처럼 오랜 기간의 감옥생활을 ‘대단한 경험’으로, 슈퍼맨의 주인공처럼 사지가 마비되는 것을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준 ‘특별한 기회’로 믿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우리는 왜 어떤 운동선수가 수년간의 혹독한 암 치료를 받고 나서 “나는 이 모습 그대로가 좋다”라고 말하거나, 영구적인 장애를 갖게 된 어떤 음악가가 “다시 산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똑 같은 상황이 벌어졌으면 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일까? 우리는 왜 전신마비에 걸린 이들이 다른 사람 못지않게 행복하다고 말할 때 그것을 믿지 못할까? 엄청난 사건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하는 이런 말들은 그런 일을 그저 상상만 해본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직접 경험해본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The claims made by people who have experienced events such as these seem frankly outlandish to those of us who are merely imagining those events-and yet, who are we to argue with the folks who’ve actually been there?
부정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은 아니다. 실직이나 이별을 겪게 되면 어떨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중요한 선거에서 떨어지거나 자신이 응원하는 운동 팀이 중요한 게임에서 패했을 때 또는 면접, 시험, 콘테스트에서 떨어졌을 때 어떻게 느낄지 사람들에게 예측해보라고 하면, 그들은 자신이 좋지 않은 기분을 얼마나 강렬하게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느낄지를 과대평가한다.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그 장애를 없애기 위해 기꺼이 지불하겠다는 비용보다는,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그런 장애들을 피하기 위해 지불하겠다는 비용이 훨씬 큰 법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행복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한 연구진은 “자신에게 만성질환과 장애가 있다고 상상하게 한 사람들보다 실제로 그런 질환과 장애가 있는 환자들이 자신의 삶을 더 만족스럽게 평가한다”라고 지적했다. 건강한 사람들이 ‘죽기보다 싫은’ 것이라고 말하는 질환에는 83가지가 있지만, 실제로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처럼 부정적인 사건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극심한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모호한 상태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If negative events don’t hit us as hard as we expect them to, then why do we expect them to? If heartbreaks and calamities can be blessings in disguise, then why are their disguises so convincing? The answer is that the human mind tends to exploit ambiguity
건초 더미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은 바늘 더미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일이다. 어떤 사물이 그와 비슷한 것들에 둘러 싸여 있을 때, 그 사물은 자연스럽게 그 속에 섞여 들어간다. 반면 그리 비슷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 끼어 있는 사물은 자연스럽게 눈에 뛴다. 우리는 자극 그 자체가 아니라 자극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반응한다. 사실 대부분의 자극은 모호하기 때문에 한 자극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그 모호함을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도구를 동원해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의미만을 보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다르면 맥락context · 빈도frequency · 최신성recency 이 그런 도구들 중 특히 중요하다. 쥐나 비둘기와 달리 우리는 의미에 반응하며, 맥락·빈도·최신성을 사용해 모호한 자극의 의미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 세 가지에 결코 뒤지지 않는 중요한 요인이 하나 더 존재한다. 사람·쥐·비둘기는 모두 욕망이나, 욕구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단지 세상을 수동적으로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정서적으로 개입해 때로는 어떤 모호한 자극의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 특정 의미를 보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스스로를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연구자들은 이 물음의 해답을 얻고자 몇몇 참가자에게 ‘재능 있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써보고 그 정의를 기준으로 삼아 스스로 얼마나 재능 있는 사람인지를 평가하도록 했다. 또 다른 참가자에게는 첫 번째 집단이 써 놓았던 정의를 제시하면서 그 기준에 따라 스스로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를 추정하도록 했다. 흥미롭게도 ‘재능 있다’가 의미하는 바를 스스로 정의 내렸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더 재능 있다고 평가했다! 정의를 내렸던 참가자들은 ‘재능 있다’의 정의를 자기 맘대로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잘하는 영역에 집중해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의내린 것이었다. “내 생각에 재능 있다는 것은 뛰어난 미적 성취를 의미해. 내가 막 끝마친 이 그림과 같은 거지.” 혹은 “재능 있다는 것은 뭔가 뛰어난 것을 타고 났음을 의미하지. 예를 들면 다른 사람보다 말을 잘하거나 힘이 세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야. 한 번 볼래?”와 같이 정의내린 것이다. 그 정의에 따르면 그들은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재능 있다, 친절하다, 현명하다, 공정하다’ 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말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모호함을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는 것이 단어나 문장 혹은 도형의 모양을 해석하는 데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의 경험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경험은 본래 모호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호한 경험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는 것은 쉽고 간단하다. 실제로 많은 연구 결과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매우 자주, 그리고 곧잘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소비자들은 자동차를 평가할 때 자신이 구입한 물건은 구입하기 전보다 더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구직자들은 자신이 얻은 직업을 더 좋게 평가한다. 고등학생들은 자신이 입학한 대학을 더 좋게 평가한다. 경마 도박꾼들은 특정 말에 배팅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릴 때보다 배팅을 끝마친 후에 자신이 선택했던 말에 더 후한 점수를 준다. 유권자들은 투표장에 들어갈 때보다 투표를 마치고 나올 때 자신이 선택한 후보자를 더 좋게 평가한다. 자동차나 직장, 대학, 말, 그리고 국회의원은 모두 좋고 멋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자동차사, 대학 또한 내가 선택한 말, 내가 뽑은 국회의원이 되면 그 즉시 예전보다 더 좋고 굉장한 것들로 평가가 바뀐다. Consumers evaluate kitchen appliances more positively after they buy them, job seekers evaluate jobs more positively after they accept them and high school students evaluate colleges more positively after they get into them. Racetrack gamblers evaluate their horses more positively when they are leaving the betting window than when they are approaching it, and voters evaluate their candidates more positively when they are exiting the voting booth than when they are entering it. 이런 연구를 통해 우리는 어떤 것이 자기 것이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더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작하기
볼테르Voltaire 의 고전 소설 『캉디드Candide』에서 모든 학문에 박식한 팽글로스 Pangloss 박사는 자신이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 중 가장 최상의 상태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에는 그 나름의 방식이 존재한다. 그 모든 것은 특정한 목적을 지니고 창조되어 왔다. 그리고 그 목적은 여러 가지 가운데 반드시 최상의 목적이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코는 안경을 받쳐주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우리는 안경을 착용할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사람의 다리는 짧은 바지를 입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바지를 입는다. 돌은 성곽을 축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군주께서 그렇게 좋은 성을 가지시고, 그 성읍에 사는 높은 계급의 남작들은 가장 좋은 집을 차지하는 것이다. 돼지는 식용의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 년 내내 돼지고기를 먹는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럭저럭 잘 돌아간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발언이다. 모든 것은 최상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옳다.” 지금까지 소개한 모든 연구 결과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팽글로스 박사와 같다는 점을 보여준다. 생각해낼 수 있는 경험의 수보다는 같은 경험이라도 그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의 수가 더 많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많은 해석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것을 찾아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There are more ways to think about experience than there are experiences to think about, and human beings are unusually inventive when it comes to finding the best of all possible ways.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우리는 크게 웃으면서 치질의 신비로움이나 사돈의 꼴불견을 놓고 신께 감사드리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늘 우리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엄연히 현실과 이상 사이의 타협이다. 즉, 우리는 명백한 현실과 낙관적인 환상의 적절한 조합을 경험하고 있다. 실제와 착각 가운데 어느 하나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면 아마 너무 우울해져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싫어질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경험한다면 완전히 망상에 빠져 아침에 일어나면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는 누구나 장밋빛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고 있다. 그 색안경은 완전히 깜깜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하게 투명하지도 않다. 우리는 세상 속에 직접 뛰어들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색안경이 완전히 불투명이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장사를 하고 회사를 다니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등의 생존에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세상을 너무 선명하게만 볼 수도 없다. 우리가 지역 토론회에 참석하고(“내 의견에 다수가 동조하리라고 확신해!”) 국회의원 선거에 한 표를 던지며 (“내가 미는 후보가 틀림없이 당선될거야.”) 마을의 뒤치다꺼리를 참아내는(“이게 다 행복이지 뭐.”)등 우리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작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 없이도 살 수 없고, 착각 없이도 살 수 없다. We cannot do without reality and we cannot do without illusion.
그것은 각각 나름대로의 목적을 수행하고 서로의 한계점을 보안해준다. 우리의 세상 경험은 이 두 가지 거친 경쟁자들의 슬기로운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팽글로스로 간주하기보다는 심리 면역체계를 가진 존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체 면역체계가 질병에 대항해 몸을 지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심리 면역체계도 불행에 대항해 우리의 마음을 보호한다고 보면 된다.
거절·상실·불운·실패 등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심리 면역체계는 우리를 방어하되 지나치게 방어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나는 너무 완벽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야”라고 지나친 방어를 해서는 안 된다. 그와 동시에 심리 면역체계는 우리를 충분히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낙오자야. 나 같은 사람이 살아서 뭘 한담.”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건강한 심리 면역체계는 우리가 당면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충분히 좋은 기분을 유지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때로는 불편감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번에는 정말 형편없게 일처리를 했군. 기분이 정말 찜찜해. 하지만 언제라도 기회는 다시 잡을 수 있으니 괜찮지 뭐.” 이런 자세를 지닐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즉, 우리는 보호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사물을 보는 최상의 관점을 찾아야 하며, 그 관점은 가능하면 현실에서 동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동시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대학생들은 기숙사의 룸메이트가 자신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방을 새로 배정받고 싶어한다. 반대로 그 룸메이트가 자신을 지나치게 좋게 생각한다고 느껴질 때도 다른 방을 배정받고 싶어 한다. 아무리 기분 좋은 것일지라도 지나치면 오히려 경계심이 생기는 것이다. 현실과 착각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긍정적인 관점을 지니고자 하지만 그 관점은 동시에 믿을 만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떤 관점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일까?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만을 수집하기
어떤 관점이 믿을 만한 경우에만 수용되고 또한 믿을 만한 관점은 오직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때로는 교통사고도 내고 부인을 실망시키기도 하며 제대로 된 투자에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능숙한 운전자, 성실한 가장, 성공적인 투자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사실을 조작한다. we cook the facts. 사실을 수집하고 해석하고 분석하는 데는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기법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서로 다른 기법들은 서로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들도 동일한 사안(예를 들면 지구 온난화, 황제 다이어트)에 대해 의견 차이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훌륭한 과학자들은 가장 적절한 기법에 따라 도출된 결론은 설사 그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래도 수용한다. 그러나 형편없는 과학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 결론을 도출해줄 것 같은 기법을 선택한다. 그런데 수십 년간 이루어진 심리학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자신의 모습과 경험에 관련된 사실들을 모으고 분석할 때 형편없는 과학자들이 취하는 것과 똑 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표본을 추출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과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든 박테리아와 소행성, 비둘기 또는 모든 사람을 관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연구 대상 전체 집단으로부터 일부 표본을 뽑아내 연구를 수행한다. 이 표본이 전체 모집단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모집단에 속한 모든 구성원이 골고루 잘 선정되어야 하는데 이는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만일 어떤 이슈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을 묻는 설문조사를 하면서, 딴나라당 지지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의 고위급 임원단에게만 전화를 걸어 설문조사를 한다면 이것은 하나마나한 조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한 연구에서 연구진이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들이 지능검사에서 아주 낮은 점수를 얻었다고 이야기해주고는, IQ 검사에 관한 신문기사 여러 개를 정독할 기회를 주었다. 그 결과, 참가자들은 IQ검사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기사보다는, 그 검사의 타당성을 의심하는 내용들로 구성된 기사들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 다른 연구에서 참가자들은 감독관으로부터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자 그들은 그 감독관을 비난하는 정보 보다 그의 유능함과 통찰력을 칭찬하는 정보를 더 관심 있게 읽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집함으로써 자신의 판단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한 것이다.
아마 당신도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새 차를 뽑았을 때를 한 번 생각해보라. 당신이 에쿠우스 대신 렉서스 자동차를 구입하기로 결정한 다음부터, 아마도 잡지에 나온 렉서스 광고는 뚫어지게 쳐다보면서도 에쿠우스 광고는 대충 훑어보고 넘어갔을 것이다.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한 친구가 다가와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마도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차보다는 선택한 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배운다’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통상 배운다는 말은 어떤 지식을 균형적으로 얻고자 할 때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산 렉서스 광고만을 읽는 것은 이미 균형을 잃은 행동이다. 광고는 그 제품의 장점에 관한 정보만 담고 있지 단점에 대한 정보는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산 제품에 대한 광고만을 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당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결론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유리한 사실들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행위는 단지 잡지 광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에서 정보를 끄집어낼 때도 일어난다. Not only do we select favorable facts from magazines, we also select them from memory.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에게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인 사람보다 더 높은 봉급을 받고 더 많은 승진 기회를 누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제시했다(외향-성공집단). 또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정반대의 증거들을 제시했다(내향-성공집단). 그 후, 자신이 외향적인지 혹은 내향적인지를 판단해볼 수 있도록 과거의 구체적인 행동들을 회상해보라고 요구하였다. 그랬더니 외향-성공 집단은 자신이 낯선 이들에게 다가가 스스로를 소개했던 때를 기억했지만, 내향-성공 집단은 누군가 좋아하면서도 수줍음 때문에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던 때를 기억하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의 결정이 얼마나 현명한지, 우리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우리의 활기찬 성격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알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정보는 우리의 기억이나 잡지가 아니라 타인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지지해줄 정보에만 자신을 노출시키려는 경향성은 우리가 곁에 둘 사람들을 선택할 때 특히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친구나 연인을 닥치는 대로 고르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나를 좋아해줄 사람,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따라서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 조언이나 의견을 물어볼 때,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확신시켜 주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이 정말로 우리와 의견이 비슷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상처를 주기 싫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Our tendency to expose ourselves to information that supports our favored conclusions is especially powerful when it comes to choosing the company we keep. Nobody picks friends and lovers by random sampling. On the contrary, we spend countless hours and countless dollars carefully arranging our lives to ensure that we are surrounded by people who like us, and people who are like us. It isn’t surprising, then, that when we turn to the folks we know for advice and opinions, they tend to confirm our favored conclusions-either because they share them or because they don’t want to hurt our feelings by telling us otherwise. 심지어 주변 사람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을 것 같을 때,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하기도 한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교묘하게 자신이 얻고자 하는 답을 끌어내기 위해 유도질문을 한다고 한다. “당신이 사귀어 봤던 사람 가운데 내가 가장 좋은 연인이야?”라고 묻는 것은 위험하다. 그 질문에는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답이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랑 연애하면서 제일 좋은 게 뭐야?”라고 묻는 것은 정말 똑똑한 방법이다. 그 질문에서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 답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원하는 대답을 들으면, 자신이 남들로부터 유도해낸 그 답을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해줘”라고 요구하는 말이 그렇게 인기가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말해줄 만한 사람들을 미리 선택해놓고, 더불어 그들에게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도록 교묘하게 유도하고는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말을 하게 되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In short, we derive support for our preferred conclusions by listening to the words that we put in the mouths of people who have already been preselected for their willingness to say what we want to hear.
또한 우리는 보고 싶어 하는 것들만 보기 위해 선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존재이다. 어떤 연구에서 실험 참가자들에게 사회적 민감성을 재는 검사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검사 후에 그들이 대부분의 문항에서 틀리게 답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다음 참가자들에게 그들보다 잘했거나 혹은 잘못했던 다른 학생들의 검사 결과를 훑어볼 기회를 주었더니, 그들은 그들보다 더 잘한 사람의 검사는 무시해버리고 그들보다 더 못한 사람들의 검사 결과를 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 C의 점수도 D와 비교하면 그리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보다 더 좋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정보만 구하는 경향성은 일의 중요성이 큰 경우에 더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암과 같이 생명을 위협하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심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이 사실은 왜 암 환자들의 96퍼센트가 자신이 다른 암 환자보다 더 건강하다고 믿는지를 설명해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보다 형편없는 사람들을 찾을 수 없다면, 어쩌면 우리는 밖에 나가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은 어떤 테스트에 참여한 후, 그들의 친구가 똑 같은 검사를 치를 때 도움이 되거나 혹은 방해가 되는 힌트들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이 경우 그 테스트가 단순히 일종의 게임이라고 했을 때는 참가자들이 도움이 되는 힌트를 주었지만, 그 테스트가 지적 능력을 측정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말해주었을 때는 도리어 친구에게 방해가 되는 힌트를 제공하였다. 사람들은 친구가 자신보다 뒤처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친구가 실패하도록 친절하게 도와주기까지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연구다. 일단 우리가 그들의 수행을 성공적으로 방해하고 그들이 실패했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그들은 우리의 완전한 비교 대상이 된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우리의 뇌는 눈이 보는 것을 믿기로 일종의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눈은 뇌가 원하는 것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The brain and the eye may have a contractual relationship in which the brain has agreed to believe what the eye sees, but in return the eye has agreed to look for what the brain wants.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에 딴지걸기
우리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택하거나 그런 정보를 줄 사람들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 대해 긍정적이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견해를 얻는다. 축구경기나 정치토론을 당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과 함께 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견해에 상반되는 사실이 제시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그것을 외면해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관점에서 달리 해석해버리는지 경험해봤을 것이다. 이 모든 예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때로는 달갑지 않은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순간들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권투선수가 팔꿈치로 가격 했다거나 우리 당의 후보가 공중파 방송에 나와 공금횡령 사실을 자백한 경우, 그런 것은 무시해버리거나 잊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사실fact’이라는 단어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반박의 근거가 없는 현상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실’이란 정해놓은 어떤 기준에 부합하는 증거가 있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 증거 기준을 충분히 높게 잡는다면,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증명이 어렵다. 반면 증거 기준을 충분히 낮게 잡는다면 모든 것이 사실로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중적인 잣대가 바로 우리가 하는 행위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에 부합하는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을 판단할 때 우리는 불공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우리가 원하는 결론과 반대되는 사실을 접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더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더욱 꼼꼼히 분석한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증거를 요구한다. And yet, this is just the sort of uneven treatment most of us give to facts that confirm and disconfirm our favored conclusions. When facts challenge our favored conclusion, we scrutinize them more carefully and subject them to more rigorous analysis. We also require a lot more of them.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사람을 ‘지적이다’라고 의심 없이 결론내리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정보가 필요한가? 고등학교 성적이면 충분하겠는가? 아니면 IQ검사 점수? 그 사람의 학창 시절 교사나 현재 직장 상사의 평가도 필요할까?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에게 어떤 한 사람의 지적 능력을 평가하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사람이 정말로 지적인지 아닌지 확실히 결론내리기 전에 꽤 많은 양의 증거들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이 평가할 그 사람이 재미있고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일 때보다는, 마음에 안 들고 꼴도 보기 싫을 때 훨씬 더 많은 증거를 요구했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똑똑하다고 믿고 싶다면(맘에 들기 때문에) 추천서 한 장으로도 족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똑똑하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을 때는(맘에 들지 않기 때문에) 성적표, 각종 자격증, 그 밖에 산더미 같은 증빙 자료를 요구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내리게 해주는 정보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결론을 내리게 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훨씬 엄격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Not surprisingly, disfavored conclusions have a much tougher time meeting this more rigorous standard of proof.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사실을 접하면 그것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잘 기억하며, 그 사실의 진위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도 관대하게 적용한다. 다만 이런 속임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현실 왜곡은 우리의 경험이 본질적으로 모호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지각이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을 믿기 위해 뇌는 눈이 보는 것을 수용한다. 동시에 우리의 현실 지각을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눈은 뇌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찾아낸다. 우리를 섬기는 뇌와 눈의 이런 음모로 우리는 엄연한 현실과 낙관적인 자기 착각의 지렛대 사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Distorted views of reality are made possible by the fact that experiences are ambiguous-that is, they can be credibly viewed in many ways, some of which are more positive than others. To ensure that our views are credible, our brain accepts what our eye sees. To ensure that our views are positive, our eye looks for what our brain wants. The conspiracy between these two servants allows us to live at the fulcrum of stark reality and comforting illusion.
우리의 심리적 면역체계가 사용하는 이런 속임수를 ‘책략’이나 ‘전술’이라 부르는데 이런 말들은 ‘사전계획’, ‘심사숙고’ 등의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속임수를 사용하는 약삭빠른 음모자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할 때 대개는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그럴 듯한 이유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을 조작할 때, 그것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다. 일부러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시도한다면(‘망했지만 여기에도 분명 뭔가 좋은 점이 있을 거야. 그 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의자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겠어.’), 이는 자기 파괴의 씨앗이 될 것이다.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에게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의 <봄의 제전Rite of Spring>을 들려주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그냥 음악을 들으라고 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의식적으로 행복감을 느끼려고 노력하면서 음악을 들으라고 요구했다. 간주곡이 끝날 때쯤 실제 행복감을 측정하자, 행복감을 느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이 단순히 음악만을 들었던 사람들보다 더 부정적인 정서를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만일 우리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자신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연구 결과를 보면,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주의가 산만해지면 (이 경우는 <봄의 제전>을 듣는 것),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둘째, 사실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일부러 조작하는 것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치사하다고 느낀다.
예를 들어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신랑을 버렸다고 하자. 신랑은 차라리 그렇게 갈라서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 때 그 결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그 사람은 절대로 나랑 맞는 사람이 아니었잖아. 그렇지 않아요, 엄마?”). 그러나 이 방법이 효과적이려면 그런 사실들이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 것이라고 믿어야만 한다. 사실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자신이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더해 치사한 자기기만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처지가 된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그것이 정직하게 얻어진 결론이라고 믿어질 때만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을 조작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하고, 그 결과를 즐길 때는 의식적으로 한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사실을 요리해내는 것의 이점은 그것이 잘 먹혀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인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게 된다. We accomplish this by unconsciously cooking the facts and then consciously consuming them. The benefit of all this unconscious cookery is that it works; but the cost is that it makes us strangers to ourselves.
심리적 면역체계를 작동시키는 요인들
어떤 방어체계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위협에도 반응해야 하지만, 동시에 현실성이 있으려면 어떤 역치 수준critical threshold 을 초과하는 위협에만 반응해야 한다.
강도 Intensity 요인
우리의 감정이 몹시 상하면, 심리적 면역체계는 사실을 조작하고 비난의 대상을 바꾸는 방법 등을 동원해 우리로 하여금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약간 슬프거나 질투 나거나 화가 나거나 좌절하는 모든 상황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결혼 실패와 실직은 우리의 심리적 방어체계를 발동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우리의 행복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는 일이다. 그러나 부러진 연필, 구멍 난 양말, 또는 느린 엘리베이터 등은 방어체계를 작동시키지 않는다. 연필이 부러진 것은 짜증나는 일이 될 수는 있지만 심리적 안녕에는 그다지 중대한 위협을 가하지 않으므로 심리적 방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아주 나쁜 경험을 하고 나서는 긍정적인 관점을 지닐 수 있어도, 조금 나쁜 경험을 하고 나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당신의 남편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용서했으면서도, 문짝을 움푹 파이게 해놓거나 집안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양말을 벗어놓으면 화가 났던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동일한 역설을 경험한 것이다. 극도의 고통은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심리적 면역체계를 작동 시키지만, 경미한 고통은 그렇지 않다는 다소 반직관적인 사실이 우리가 미래의 우리 감정을 예측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한다. 요약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심리적 방어체계가 경미한 고통보다는 강한 고통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강도가 서로 다른 불행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이 각각에 대해 어떤 감정적 반응을 보일지 잘못된 예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불가피성 요인
우리는 경험을 바꿀 기회가 없는 경우에만 그 경험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꿀 방법을 찾게 된다. 우리의 운명이 피할 수 없을 때, 도망칠 수 없을 때 그리고 취소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려고 한다. 피하거나 도망치거나 뒤바꿀 수 없는 상황은 심리적 면역체계를 발동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Inescapable, inevitable, and irrevocable circumstances trigger the psychological immune system, but, as with the intensity of suffering, people do not always recognize that this will happen. 한 연구에서 사진 수업에 등록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수행하였다.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은 연구진에게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사람과 사물들의 사진 12장을 찍어 제출했다. 이때, 교사는 개인교습 시간에 학생들에게 그들이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잘 나온 사진 두 장을 골라 인화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사진이 인화된 후, 교사는 학생들에게 사진 두 장 가운데 하나를 가져갈 수 있고, 나머지 하나는 실습 기록용으로 보관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이 때 몇몇 학생에게는 일단 그들이 가져갈 사진 한 장을 고르면 나중에 절대 바꿀 수 없다고 말했고, 나머지 학생에게는 나중에 사진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며 그 기간 동안에 기꺼이 사진을 바꿔주겠다고 했다. 학생들은 각각 사진 한 장을 골라 집으로 가져갔다. 며칠 후, 그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져간 사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평가했다. 그 결과, 사진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학생들은 그럴 기회가 없었던 학생들보다 자신의 사진을 덜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학생들을 모집해 이런 두 가지 경우에 그들이라면 본인이 가져간 사진을 얼마나 좋아할 것 같은지 예상해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흥미롭게도 이들은 교환기회가 있든 없든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 예상했다. 이 연구에서 분명한 점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심리적 방어를 일으켜 우리가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지만, 정작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예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심리적 면역체계를 발동시키는 (그래서 우리의 행복과 만족을 증진시키는) 요인들을 예상하지 못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한 예로, 새로운 집단을 모집해 자신이 선택한 사진을 나중에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대부분 실제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즉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조건을 선택했다.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사람들이 자유의 제약보다는 더 많은 자유를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선택을 내린 후에 그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위협당할 때, 우리는 그 자유를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 장사꾼들은 ‘한정판매’, ‘오늘 밤에 꼭 주문하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사용해 우리의 자유를 일부러 위협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매보다는 다소 비싸더라도 교환이나 환불의 기회가 있는 백화점을 선호한다. 나아가 미래에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상황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값을 더 지불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소형차를 며칠 시운전하고 나면 그 차를 소유하는 것의 장단점에 대한 정보를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시운전 후에 반환할 수 있는 옵션을 돈을 좀더 주고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결정을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에는 유익과 더불어 그 대가도 있다. 소형차를 사서 교환할 수 있는 옵션이 없는 경우, 소비자는 그 차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만들어낸다(“와! 이거 정말 제트 전투기 같은 느낌이군”). 그러나 환불조항이 포함된 계약을 맺은 구매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이 차 정말 좁네. 그냥 환불하는 것이 낫겠군.”). 이미 차를 소유한 차 주인은 그 차의 장점만 보고 결점은 지나쳐 버리는 조작 수법을 통해 큰 만족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라도 환불할 가능성이 있는 구매자, 그래서 아직 심리적 방어체계가 발동하지 않은 사람은 새로 산 차를 더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 차를 계속 소유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단점에 특별히 더 주의를 둘 수밖에 없다. 자유에 유익과 대가가 모두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둘은 같은 정도로 명백하지 않다. 우리는 자유가 제공해주는 유익은 쉽게 상상하지만, 자유 때문에 오히려 훼손될 수 있는 즐거움은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렇다. 우리의 눈과 뇌는 서로 음모를 꾸몄으며 모든 음모가 그렇듯 우리가 알지 못하도록 의식세계 저 편에서 서로 협약을 꾸몄다. 그 결과 우리는 현재의 우리 모습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에도 우리가 우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음모를 꾸밀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못한다. The eye and the brain are conspirators, and like most conspiracies, theirs is negotiated behind closed doors, in the back room, outside of our awareness. Because we do not realize that we have generated a positive view of our current experience, we do not realize that we will do so again in the future. 이런 무지로 인해 우리는 미래의 고난으로 경험할 고통의 강도와 지속 기간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는 우리의 눈과 뇌가 벌이는 작업에 역행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은 것inaction 보다는 행동하는 것action 에 대해, 단순히 약간 짜증나는 경험보다는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해, 그리고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보다는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심리적 면역체계를 발동시켜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예측 당시에는 이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하기보다는 행동하지 않기를, 큰 고통보다는 약간의 짜증을 그리고 빠져나올 수 없는 구속보다는 자유를 선택한다. And yet, we rarely choose action over inactions, pain over annoyance, and commitment over 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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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문헌 : Stumbling on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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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욕망과 그 욕망이 실현될 가능성을 혼동한 것이다…. 아르투르 쇼펜아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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