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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주인이 되어라.
토머스 앨버 에디슨은 1847년, 당시 미국의 주목 받는 신도시였던 오하이오 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미시간 주의 포트휴런으로 이사를 갔다. 그것은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와 그랜드트렁크 웨스턴 철도로 이어져 있으며 다른 지역과도 호수를 통한 교역이 가능한, 왕성한 상업 활동이 막 피어 오르기 시작하던 중서부의 한 마을이었다.
소년취향의 성공담을 담은 1940년의 고전영화 두 편 <젊은 토머스 에디슨>과 <남자 에디슨>에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마법사’ 또는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같은 별명으로 불렸던 외로운 천재이자 사회 이단아로써의 에디슨이 묘사돼 있다.
그러나 당시 기대상황과 성장배경을 따져볼 때, 에디슨의 어린 시절은 전혀 별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상당히 호기심이 많았고, 그런 호기심 때문에 말썽을 일으킨 적도 적지 않았다. 19세기 중반의 미국은 그런 호기심 넘치는 남자아이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에 싫증을 느껴 아주 가끔씩만 수업을 들으러 다녔으며, 그나마 몇 달 지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고서는 그를 변함없이 신뢰하는 어머니에게 홈스쿨링을 받았다. 이조차 당시 미국 소년들에게는 비교적 흔한 경우였다. 많은 아이들이 겨우 초등학교만 몇 년 다니다가 십대가 되기도 전에 일터로 내몰리곤 했다. 자신이 받은 교육을 그대로 물려주고자 했던 교사 출신의 어머니를 가진 에디슨은 오히려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어린 시절에 얽힌 또 다른 유명한 일화는, 똑똑하고 야심찬 12세 소년 에디슨이 포트휴런과 디트로이트를 오가며 그랜드트렁크 열차 안에서 신문, 잡지, 사탕, 샌드위치 등 각종 상품을 승객들에게 판매하는 신문팔이 일을 한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남자 아이들이 신문팔이를 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물론 에디슨이 <디트로이트프리프레스>신문을 단순히 판매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지역 관심사에 관한 기사거리를 직접 작성하고, 편집했으며, 인쇄까지 했다. 놀라운가? 당연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독창적이었을까? 전혀 아니다. 에디슨의 신문은 당시 미국 전역에서 번지던, 주로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만들던 수많은 자체 지역신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다만 에디슨의 신문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디트로이트프리프레스>신문사 사무실에서 건진 조그만 프레스기를 이용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신문을 인쇄함으로써 흔한 형태의 지역신문 사업에 놀라운 변화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에디슨은 독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가지, 즉 실시간 취재에 근접한 생생함을 전달할 수 있었다. 또한 기자의 짐칸 한구석에서 신문을 찍어냄으로써 이 어린 사업가는 이동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그는 짐칸에 프레스기와 실험 탁자까지 가져다 놓았는데, 이 역시 다른 신문팔이 소년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에디슨에게 타고난 능력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소중한 시간의 한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매우 어린 나이에서부터 그는 매 순간 생산적인 작업을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에디슨이 창의적인 혁신가였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당시 또래들과 전혀 다른 면보다는 오히려 공통점이 더 많았다.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미국 전역을 떠들썩 하게 했던 교통수단의 대변혁인 철도의 급성장과 통신기술의 변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자기 기술을 발전시킨 촉매는 시민전쟁이었다. 당시에도 진행 중이던 시민전쟁은 사람 및 물자의 이동수단에 대한 니즈를 키우고, 뉴스를 비롯한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의 이동을 갈망하게 만들었다. 어린 에디슨은 철도와 뉴스 비즈니스를 통한 전신과 전신기사의 세상을 알게 되었고, 이런 기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곧바로 특유의 과학적 호기심과 맞물려 전기와 기술, 발명을 향해 진보했다. 1863년 전신기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에디슨은 테크놀로지 마인드를 가진 젊은이들 축에 끼게 되는데, 그들은 발명가는 아니라도 최소한 기존의 전기기계를 직접 만져 어떻게든 고쳐놓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상당수의 전신기사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장비의 이런 저런 특성들을 개선하고, 개인 성향에 맞게 개조하거나 조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쏟아 부었다.
이처럼 소년 에디슨이 지나온 시기는 기술 혁신과 더불어 만연해 있던 기술적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산업의 격변기였다. 특히 통신기술은 사람과 사람, 비즈니스와 비즈니스, 기자와 신문간의 즉각적인 소통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신기술을 갈망하던 전신회사들은 새로운 발명품이라면 얼마든지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4년 정도 순회 전신기술자로 뜨내기 생활을 하는 동안 에디슨은 자신이 고안한 기술적 혁신 덕에 동료 전신기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쌓았다. 이때 배운 실용적인 전기기술을 바탕으로 그는 1868년에 한 사업가의 후원으로 보스턴으로 옮겨가 발명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스턴은 미국의 금융센터 역할을 했으며, 유명 대학과 대학 도서관에는 다양한 기술자료들이 충실히 구비되어 있었다. 금융의 중심지이자 진보된 과학기술의 집결지라는 환경은 에디슨을 일생일대의 발명에 착수하도록 이끌기에 충분했다.
그가 처음으로 특허를 취득했던 전기식 투표기록기는 1868년에 발명되었다. 이 기계는 기술적인 면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마땅한 사장을 찾지 못해 상업적인 면에서는 실패작이라 할 수 있다. 에디슨은 신속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개표 상황을 기록하게 되면 사람들이 흡족해할 것이라 생각하고 각 지역 및 주, 연방 법률기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판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막상 기계를 선보이고 나니 입법자들이 빠르고 효율적인 개표를 싫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걸려 마지막 순간에 득표수가 뒤집히고 순위가 결정되는 호명투표라는 낡고 귀찮은 방법에 길들여져 있었다.
이 작은 실패를 통해 에디슨은 귀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수요가 있는지를 먼저 타진해 본 다음 발명에 착수했다. 에디슨으로서는 이 실패에서 얻은 교훈 하나로 평생의 성공을 산 셈이었다. 전기식 투표기록기로 단숨에 부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그 기계를 통해 얻은 경험으로 에디슨은 발명과 기술 혁신에 대한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1869년 뉴욕으로 건너가 웨스턴유니언 등의 기업들에 우선적으로 납품하는 전신장비 제조업자로서 첫 정식 사업을 벌이게 된다. 2년 후인 1871년, 그는 뉴저지 주 뉴어크 R&D 단지를 설립했다. 그가 첫번째 부인인 메리 스틸웰과 결혼한 것도 바로 이 해다.
이 즈음 전신 분야에서 에디슨이 거둔 성과는 적지 않았다. 하나의 라인을 통해 여러 메시지를 동시다발적으로 송수신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미국 전역의 전신 시스템 기능을 즉각적이고도 저렴한 방법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첫번째 4중 전신기는 1874년에 특허를 취득했는데, 에디슨은 이 장비와 다른 전신 발명품들을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당시 아직 시골이었던 뉴저지 주 멘로파크에 토지를 구입한 다음 그 유명한 R&D 단지를 구축하게 된다.
대도시의 떠들썩함과 산만함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멘로파크는 미국 상업의 중심지와 재정적-문화적 고리를 연결하기에 충분할 만큼 맨허튼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멘로파크에서 에디슨은 기술단지라 불릴 만한 첨단 산업 연구설비를 비로소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아마 세계 최초의 전문 R&D 기업일 것이다. 에디슨은 그것을 ‘발명 공장’이라 불렀으며, 뉴스거리에 굶주려 있던 언론에게 멘로파크는 경이로운 기술적 조화를 연이어 세상에 배출해 내는 현대판 마법사, 19세기 프로메테우스의 은신처로 단숨에 부각되었다.
축음기가 탄생한 1877년은 탄소 송화기가 발명된 해이기도 한데, 이 송화기는 벨이 발명한 전화기를 근대 사회에 필수적인 요소로 급부상시키고, 상업화가 가능한 안정성 있고 강력한 통신기기로 바꿔놓을 만한 발명품이었다. 뒤이어 1879년 에디슨은 성공적이고 내구성 있는 전기조명 시스템을 선보였다. 그는 단순히 백열전구만 만든 것이 아니라 전력을 발전하고, 공급하며, 조절하고, 계량하여,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일련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즉 에디슨은 전력설비라는, 문명을 영구히 변화시킨 새로운 산업을 구상하고 발명했던 것이다. 1882년까지 그는 남부 맨해튼의 전력화 작업을 계속했다.
1884년 메리 에디슨이 돌연 사망한 지 2년 만에 에디슨은 두번째 부인인 미나 밀러와 결혼했다. 그리고 1년 후 뉴저지 주 웨스트 오렌지에 전보다 큰 R&D 및 제조공장 단지를 구축했다. 1888년 그는 그곳에서 축음기의 기능을 현저히 향상시켜 축음기를 엄청난 영향과 수익성을 가져오는 상업용 제품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한다. 1889년에는 에디슨제너럴일렉트릭을 설립하고 1892년 초기 영화촬영 장치인 키네토그래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2년 뒤 키네토그래프를 활동사진 영사기와 결합해 키네토스코프를 만들었고, 그 해 말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상업용 활동사진을 상영하는 최초의 시설인 ‘팔러’를 세웠다.
지금까지 되짚어본 주요 발명품에는 1931년 에디슨이 사망할 때까지 취득한 1,093개의 특허권들 줄 부수적인 발명품과 기술 혁신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처럼 놀라운 발명과 혁신의 일대기에는 기술적·상업적 실패도 물론 담겨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실패를 꼽으라 하면 단연 광석분리기일 것이다. 그는 1880년대 철광석의 가격이 오른 데 착안하여 전자기 분해 방식을 이용해 값싼 저급 광산에서 철을 추출해 내는 과정을 개발하고자 10여 년간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 전기 자동차에 들어가는 안정적이고 실용적인 용량의 축전지를 개발하려고 했던 에디슨의 노력과 1908년 헨리 포드가 모델T의 대량생산에 성공하면서 휘발유를 이용한 내연식 자동차가 시장을 주도해 나가자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에디슨은 그만의 방식으로 이 두 가지 곤경을 모두 헤쳐나갔다. 그는 광석 분리기, 특히 중장비에 투자했던 자본의 대부분을 포틀랜드 시멘트를 제조하는 첨단 공장으로 투자 전환했다. 또한 축전지 시장이 붕괴되자 철도 신호 동력에서부터 전기선이 들어가지 않던 가정과 기업에 대한 전기 공급에 이르기까지, 향상된 축전기를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 혁신을 이루어냈다.
에디슨은 한 번도 발명을 멈춘 적이 없다. 생이 끝나갈 무렵 그는 당시 붐이 있던 자동차 산업에 쓰일 고무를 생산하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골든로드라는 식물에서 고무를 대량생산하는 과정을 연구하기도 했다. 실용적 기술 혁신의 대상으로 그가 관심을 보인 것들은 전구에서부터 포틀랜드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방대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그의 발명품은 아직까지 특허권이 부여되지도 않았고 구체적인 기구로 구상된 적도 없다. 그 발명품은 바로 ‘발명 공장’을 창조하고 운영했던 에디슨의 아이디어, 바로 그 자체다. 일정한 틀을 갖춘, 믿을 만한 능률적인 체계 속에서도 창조적인 상상력을 고무시키고 자유를 부여하는 데 목적을 둔 그만의 방식과 실행방법들 말이다. 산업의 R&D와 창의력을 불러일으키는 핵심 축인 상상과 발명은 그 전까지 천재의 영역으로 생각돼 왔다. 하지만 에디슨은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영감에 지배되지 않았다. 오히려 상상력을 발현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영감의 주인이 되었다. 그는 발명을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놓음으로써,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내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개발하고, 제작해 시장에 출시할 수 있게 했다.
어디서든 기회를 찾아라.
발명 초기에 에디슨은 설계나 제조방법 측면에서 생산비용을 줄일 수 있는 개선방안을 모색하고 개별 제품들의 연간 매출액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여 잠재성 있는 새로운 시장을 찾곤 했다. 그러나 곧 시야를 넓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시장에 대해서도 주시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친구나 사업 관계자, 심지어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온 편지도 허투루 보는 적이 없었고, 그런 내용들을 토대로 발명에 착수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말에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들과 새롭게 채워져야 할 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는 남미에서 신혼여행을 하는 도중에 목화 수확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착안했고, 목화 농장 주인인 제임스 리처드슨으로부터 발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어디서든 기회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집요한 관찰로 이어졌다. 그는 거의 집착적이라 할 만큼 지독한 관찰자였다. 그는 타고난 성향을 이용해 관찰한 모든 것에 대한 세부사항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글로 묘사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기록하는, 의도적이면서 의식적인 연습을 했다. 이런 그의 습관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기가 있다. 1885년 7월 12일 에디슨은 일기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주근깨는 철분에 함유된 염분에 의한 것으로, 태양이 산화작용을 억제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일정 시간 동안 강력한 자성을 적용시킨 후에 적당한 화학 요법을 쓴다면 이런 진흙 구멍들을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대 최고의 발명가가 관찰한 대상으로 주근깨는 분명 의외다. 그는 주근깨를 관찰하면서 자유연상법을 이용해 가능한 해법을 떠오르는 대로 적어놓았다. 하지만 자유연상도 새로운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주근깨가 피부 속 철분의 성분에 대한 태양의 작용으로 생긴다는 가설이 떠오르자마자 그는 이런 자연스럽고 무작위적인 관찰을 가능한 유용한, 즉 실용적이고 수익성 있는 용도에 대한 힌트와 함께 엮어놓았다. 어떤 작업을 하는 데 철 성분의 물질이 있다면 아마도 자석과 ‘적당한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같은 원리를 적용해 주근깨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추론했다.
에디슨은 세상을 수동적으로 보지 않고 능동적으로 보는 습관을 들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고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자신이 현실을 어떻게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을지 살피는 과정이었다. 전기처럼 주근깨도 환경적인 요소라면 에디슨은 전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만큼 주근깨에도 관여하고자 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주근깨 제거의 수익성이 검증된다면 미용 분야의 또 다른 발명품이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세상 어디든 기회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몸과 마음 중 완전히 채워 질 수 있는 것은 위장뿐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따라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통념은 난센스에 불과하며, 세상은 영원히 새로운 창조를 원한다고 믿었다. 그런 에디슨에게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인 관찰과 상상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었다. 에디슨은 뉴저지 주 뉴아크에 첫 연구소를 설립했을 때 가장 오랜 기간 비서이자 협력자로 일하게 되는 찰스 매첼러와 함께 앉아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산에 대한 목록이 아니라 앞으로 그들이 만들어갈 것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거기에는 발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사람이 막 설립한 기업을 지원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시장성 모두를 갖춘 제품들에 대한 목록이 포함돼 있었다. 창조적 상상력의 목록을 만듦으로써 발명가로서의 인생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제품이 무한히 소비될 수 있다는 에디슨의 신념을 어찌 보면 상상력의 힘을 과시하는 수사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장법은 창의상과 실행에 유용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그의 과장법은 창의성과 실행할 수 있는 목록에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만들어 낼 수 있고, 만들어냄으로써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목록 말이다. 그 안에는 가장 크면서도 웬만해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반영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욕구를 기반으로 성공한 창조적 인재들만이 자신의 성과에 대한 권리를 얻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에 답이 있다.
에디슨은 문제 상황을 상당히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문제를 반겼던 이유는 문제 자체에 해결책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란 그에게는 충족되지 않은 요구 사항을 반영하여 해결책을 만들어내라고 종용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에디슨이 축전지의 성능을 개선하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미 판매되고 있는 축전지의 문제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문제점은 많았다. 기존의 축전지는 품질과 안정성 면에서 모두 형편없었다. 초기 축전지들은 몇 번만 재충전을 거듭하면 더 이상 충전이 되지 않는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축전지 안에는 납 전극이 들어 있었는데 그 무게가 상당해서 전기 자동차의 동력으로 이용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에디슨 시대에는 자동차에 휘발유보다 축전지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무거운 축전지를 탑재하려면 전기 자동차의 차체를 휘발유 자동차보다 훨씬 견고하게 만들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따라서 전기 자동차는 휘발유 자동차보다 유지비뿐 아니라 초기 구입비도 월등히 높았다.
과중한 무게와 유지비라는 문제점에 더해 축전지는 충전할 때마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배터리 전해질을 자주 보충해 넣어야 하는 데다 황산 성분의 전해질은 위험물질 중 하나였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본질적인 문제들에 압도되어 충전지 사업을 포기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디슨은 이것을 오히려 명백한 기회로 보았다.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더 나은 축전지를 만들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에 불과했다. 문제점 리스트를 만들어가면서 그는 축전지의 무게에 비례해 용량을 늘리고, 가능하면 관리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야 하며, 재충전을 거듭해도 성능이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하고, 급속 충전이 가능해야 하며 황산 같은 위험물질에 노출되는 일 없이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아도 되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디슨이 가진 것은 앞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상세 내역들, 바로 기술 혁신뿐이었다. 이렇게 방향을 정하고 초점을 맞추면서 그는 새로운 발명을 해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축전지를 개량해 나갔지만 문제는 여전히 있었다. 1904년에 에디슨은 새롭게 개발된 축전지의 일부 전지들에서 충전용량이 상실되는 예상치 못한 문제를 발견했다. 언뜻 보기엔 자연적으로 용량이 줄어드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에디슨은 일단 문제의 원인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축전지들은 이미 생산중이었기 때문에, 그는 생산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했다. 불량 축전지들이 시장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결함을 알면서도 시장에 물건을 판매하는 것은 좋지 않은 비즈니스라고 그는 믿었다. 그는 연구소 내의 두 방을 오가며 18명의 연구원들과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문제의 원인이 발견되어 수정될 때까지 이 특별 팀은 밤낮으로 일했다.
만약 개발 초기 단계에서 문제점을 발견했다면 에디슨은 당분간 그 문제에서 벗어나 또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시간을 번 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문제를 마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축전지를 판매하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집중적으로 일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문제를 회피한 적이 없었다. 설령 다른 프로젝트를 거치고 오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결함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에게 문제상황은 비즈니스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오히려 결함을 유용하게 이용하거나 결함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다시 그 결함에 의해 보완되도록 하는 것이야 말로 전형적인 에디슨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1880년대와 1890년대 후반에 저급 광산에서 전자기적 방법으로 철을 추출하는 실용적인 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 헛된 노력을 쏟아 붓는 동안 에디슨은 여러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지만, 대부분 새로운 창의력을 동원해 해결하는 데 성공한다. 그 중에는 먼지가 많은 환경에서 분쇄 기계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유지하는 문제도 있었다. 에디슨은 주의를 기울여 문제를 연구한 후, 방대한 규모의 광석을 분쇄하는 기계에서 먼지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결로에 도달했다. 엄청난 양의 먼지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이 발명가는 문제에 다른 식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제점을 없애는 대신, 결함이 자신의 의도대로 작용하게 만듦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특별하게 제작된 기름 컵을 고안하여 기름을 채우고 기계가 작동하는 동안 기름에 먼지가 엉키게 하여 컵의 윗부분에 두터운 반죽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이 반죽은 자연스럽게 봉합제가 되어 기름이 없어지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기계 안에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4개의 메시지가 단일 선을 통해 동시에 전송되도록 하는 4중 전신 시스템이 만들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에디슨은(4중 전신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해 필수적인 프로세스인) 반복적으로 전류를 역류시키는 과정에서 중요한 순간에 릴레이가 자성을 잃어 신호가 엉키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실험 후 자성의 손실을 막을 방법을 찾지 못한 에디슨은 스스로 ‘벌레덫’이라고 부르던 차선책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중요한 순간에 릴레이의 자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대신, 자성이 떨어진 릴레이가 또 다른 릴레이에 힘을 가하여 원해 릴레이가 닫지 못했던 회로를 닫게 함으로써 자성의 손실을 보완했다. 결함(한 릴레이상에서의 자성손실)이 다른 릴레이를 자극하게 함으로써 실패를 만회한 것이다.
문제에서 기회를 보는 것은 세상을 보는 그의 기본 자세였다. 이는 자신의 발명품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고안한 설계의 어디가 문제인지 기계 제작공과 숍맨들이 시제품을 만들어낼 때까지는 에디슨도 판단을 삼가는 편이었다. 그러다 숍맨들이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면 그 순간부터 맹렬히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같은 맥락에서 에디슨은 이미 시장에서 출시되어 팔리고 있는 제품에 대한 문제점도 보듬어 안았다. 그는 고객 불만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분석했고 그것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갔다. 기본상품을 개선한 이런 개량품들도 특허 취득이 가능했기 때문에 에디슨은 세계에서 미국 특허권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기존 기기의 부족한 기능과 문제점들은 개선되어야 할 사항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처방전과 같은 것이다. 미결 과제야말로 기회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문제에서 답을 찾는 혁신활동은 가능성만큼이나 한계 또한 작지 않다. 혁신을 넘어 창조로 이어지는 과정 중간에서 적당히 타협하거나 멈출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에디슨에게도 그런 사례가 있다.
1887년 벨이 만든 축음기의 일종인 그래포 폰의 시연을 보던 에디슨은 벨이 몇 가지 문제점을 해결해 음질을 깨끗하게 재생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레코드 실린더를 코팅했던 ‘지랍’이라 불리는 소프트 왁스 때문에 새로운 문제점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지랍으로 코팅한 레코드는 처음에는 깨끗하게 재생되지만 레코드 표면이 금방 무뎌져버리는 바람에 반복 재생할수록 음질이 점점 나빠졌다. 더욱이 소프트 왁스 때문에 재생 바늘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분제까지 생겼다.
에디슨은 이 문제점을 혁신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는 지랍을 사용할 때만큼의 음질을 유지하면서도 내구성은 훨씬 뛰어난 레코드 재료를 찾는데 열중했다. 여러 차례 실험을 통해 합성수지와 파라핀을 섞으면 민감하면서도 내구성이 강한 레코드 표면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는 연구소 직원들에게 여러 가지 물질과 배율을 조정해 가면서 테스트를 하도록 지시했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연구원들에게 화학 연구에 몰두하게 한 후에도 에디슨 자신은 ‘바늘이 레코드 표면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전기적으로 증폭하게 만들어 홈이 파인 레코드 표면을 자극하게 하는’ 전혀 색다른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건 시대를 뛰어넘는 놀라운 아이디어였다. 당시 전자식 기술(테이프 레코더 기술)이 없었을 뿐, 에디슨은 사실상 기계식 레코딩 기술과 전자식 레코딩 기술을 접목시킨 전축의 자석식 픽업이나 재생 헤드의 일종을 생각해 낸 것이다. 에디슨의 이 참신한 아이디어는 막대한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집중적으로 연구만 되었어도 전자식 픽업은 당시 만들어졌던 그 어떤 것보다 더 민감하고 정확하게 녹음하고 재생하는 핵심 발명품이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바늘이 직접적으로 레코드와 접촉하지 않기 때문에 레코드가 닳을 확률은 ‘0’이 되고, 그렇다면 레코드는 사실상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에디슨은 이 아이디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다. 연구원들이 소프트 왁스 문제를 화학적으로 해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찾아낸 해결책만으로도 충분히 시장성이 있었기 때문에 에디슨은 새로운 발명을 시도하지 않았다.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품질 개선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획기적인 상품을 개발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목표에 도달하는 다양한 길을 가보라.
오늘날의 R&D는 대부분 주요 기업들의 자금으로 운영되며, 학계에서 훈련된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에 의해 진행되고, 하향식 방법을 통해 혁신과 개발이라는 비즈니스에 접근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학문적 원리와 이론에 대해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론과 원리를 실제로 적용해 볼 만한 일을 찾게 한다는 것이다. 일단 잠재적인 용처를 발견하게 되면 연구자들이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일을 담당한다. 잘만 이루어진다면 이 방법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거함으로써 상당한 시간을 절약해준다. 하향식 방법을 적용하면 원하는 새로운 기기의 모습에 근접한 조기 시제품을 보다 빠른 시간 내에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하향식 방법을 이용한 적이 거의 없었다. 대신 그는 주로 상향식 방법을 택해 아이디어를 먼저 고안하고, 현실화하는 방법을 연구한 다음 시제품을 만들어 자신이 정의한 문제에 대한 만족스런 해답을 찾을 때까지 관찰하고 조작하고 변형해 나갔다.
하향식과 상향식 접근법 중 어떤 방법이 더 나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당면 과제의 특성과 개인적 창조 습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효율성을 중시해 하향식 방법만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는데, 발명과 혁신을 가속화하려면 최소한 하향식과 상향식 방법을 절충한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상향식 방법의 가장 큰 장점은 지식이 아닌 니즈가 프로세스의 중심축이 된다는 점이다. 상향식 방법은 현재 부족한 것, 개선이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효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또한 목표를 달성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새로운 니즈가 발견될 수도 있다. 이는 또 다른 혁신과 변화를 부르는 동력이 된다.
실제로 에디슨에게 창의력은 상상을 통해 영감을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행했던 상향식 방법은 주로 시행착오로 묘사되곤 한다. 전구의 필라멘트 소재로 적합한 물질을 찾고 있을 때, 그는 필라멘트로 만들어질 만한 물질들의 샘플이란 샘플은 모두 모아 테스트하고 관찰한 후 수천 건의 실험 결과를 기록했다. 고되고 지루하지만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는 과정이었다. 효과가 있는 것은 있는 것이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었다. 에디슨은 가능성이 보이는 물질을 발견해 실험하는 중에도 그것보다 더 좋은 효과를 보일 만한 물질을 끊임없이 찾았다.
이러한 자세는 지식만큼이나 무지를 중시 여기는 에디슨의 경험주의적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지식은 주어진 프로젝트나 실험에 대한 진행할 방향을 제시해 주어 실험가로 하여금 가능성 있는 방법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무지는 잘 알지 못하는 실험가에게 가능한 모든 방법을 타진해 보게 함으로써 마음과 눈을 열게 만든다. 그렇게 하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세심한 관찰과 기록 덕분에 에디슨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물질의 물리적·화학적 성질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에디슨은 필라멘트로 이용할 만한 물질로 탄화 처리한 면사를 테스트했는데, 이때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그는 탄소 송화기를 개발하는 과정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앞선 프로젝트의 시행착오가 결과적으로 다른 발명에 들이는 시간을 줄여준 것이다.
무지는 토머스 에디슨과 가장 관련이 깊은 철저한 관찰, 시행착오를 통한 순수한 경험주의를 수반하는 것이다. 상향식 방법을 적용하려면 기본적으로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표 지향적인 마인드로 변화와 혁신을 대해야 한다. 목표하는 바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지식부터 시작해 핵심 문제로 좁혀나가야 효율성을 기할 수 있다. 주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에디슨이 가장 먼저 하는 단계 역시 해당 분야의 방대한 기존 데이터들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수많은 재료들을 시행착오라는 창의적 과정을 통해 걸러내는 과정을 거쳤다. 이때 자신은 물론 점점 늘어나는 직원들의 경험과 전문성을 반영해 상향식 방법의 단점을 보완해 나갔다. 처음에 들인 시간과 노력은 다른 문제에 다른 재료를 적용할 때 보상받을 수 있다. 이 방법은 또한 고도로 집중화된 결과를 덕기 위해 최대한 많은 재료들을 테스트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혁신과 개선 또는 향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모든 가능성을 타진하라.
에디슨은 원리를 설명한 이론보다는 실용적이고 창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물질의 성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럼으로써 한 불질에서 추출할 수 있는 효용을 최대한 끌어내고 이를 다양한 발명에 적용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는 앞서 언급했듯이 필라멘트를 실험한 결과를 탄소 송화기 가설에 적용한 것이다.
압축된 탄소가 다양한 전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에디슨은 수화기의 전송 성능과 민감도를 현저하게 증가시킨 탄소 송화기를 발명했다. 탄소 송화기는 그 후 100여 년간 독점적 위치를 점할 정도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송화기를 성공적으로 발명하고 상품화한 후에도 그는 자신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압축 탄소의 성질을 지속적으로 검토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에디슨은 압축 탄소의 성질을 지속적으로 검토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에디슨은 탄소 버튼이 정상적인 온도에서는 음성 전송을 확대하지만, 온도가 올라가면 음성을 부정확하게 전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실용적이고 수익성 있는 물질의 용도를 찾던 그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이런 발견이 아무 쓸모도 없어 보였다. 소리를 부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무슨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탄소 버튼의 이런 성질을 메모해 따로 정리해 놓았다. 그 후 1877년 미국의 천문학자 새뮤얼 피어폰트 랭글리로부터 다가올 개기일식을 맞아 태양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의 양을 잴 수 있는 고도로 민감한 온도계를 고안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에디슨은 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탄소 버튼에 생각이 미쳤고, 결국 미압계의 핵심요소로 반영했다. 축음기의 뿔처럼 생긴 깔때기가 달린 소형 기기인 미압계는 특별히 제작된 매우 질긴 경질 고무조각에 열을 모으도록 설계되었다. 에디슨은 기온이 올라가면 경질 고무의 특성상 고무가 팽창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경질 고무에 모아진 열이 증가할수록 단단한 고무가 그 아래 놓인 탄소버튼을 압박해 열을 가하게 된다. 온도가 올라가면 탄소버튼은 크기가 변할 때마다 함께 변하는 저항력의 전기적 특성 때문에 압박에 저항해 미세하게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저항력의 변화가 검류계에 기록됨으로써 탄소 버튼에 도달하는 열의 양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개방한 미압계는 화씨 0.000006도의 기온 변화도 기록할 만큼 정밀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발명이었다.
에디슨은 음파의 변화와 온도의 변화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따라서 음파의 변화를 전송하는 탄소 버튼의 성질을 전혀 다른 영역, 즉 온도 변화를 전달하는 데 적용할 수 있겠다고 유추했다.
이처럼 에디슨은 대상에 내재한 고유의 특성 및 잠재성을 완전하게 이해함으로써 한 가지 발명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영역에서도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보라. 당신은 그 대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온전히 이해한다면 대상의 새로운 용도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용성을 놓치지 마라.
에디슨의 생전에도, 그리고 그가 생을 마친 후에도 비평가들과 논평자들은 토머스 에디슨이 과연 과학자였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곤 했다. 이 점에 대해 에디슨 자신은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 발명가다.” 그 차이점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학자는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바쁘게 일하고, 그들의 관심분야는 전적으로 비실용적이지만, 발명가라는 직업은 본래 실용적인 것이다.”
에디슨은 과학자와 발명가는 생각 자체가 너무 달라서 둘이 공존하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에디슨은 이 두 가지 관점이 한 사람 안에서 양립하기 어렵다고 믿었다. 그는 과학자이기보다는 차라리 사업가였다. 그에게 실용성은 창의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것이 실용적인 결과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나는 즉시 연구를 중단한다. 이론을 좇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과학자라면 그런 경우에도 연구를 계속하면서, 순수 이론을 추구한다는 데 만족할 것이다.”
발명가이자 사업가로서 그는 무슨 사업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곧 창조와 혁신의 사업이었다.
창조 자체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과 상상력, 또는 우연한 행운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업으로서의 창조는 그보다 훨씬 더 규칙적이고 안정적이며, 예측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에디슨은 평생 실험 및 창조에 안정성을 부여하려 애썼다. 우선 합리적 추론이든 즉흥적 영감이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실험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수익을 가져올지 확신할 수 없는 연구와 실험을 위한 공간도 마련해야 했다. 멘로파크와 웨스트오렌지에 있던 그의 연구소가 바로 이러한 역할을 했다. 그곳에서 수많은 상상력이 시장에 선을 보였다.
발명가이자 사업가로서 에디슨은 이론적 추구에 시종일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상상력의 산물들은 실용적 수익만을 안겨줬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현실감각을 갖추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던 그의 노력은 수많은 발명품을 낳는 데 그치지 않고 학문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에디슨 효과(금속이나 반도체를 높은 온도로 가열하면 내부에 있는 전자의 열운동이 활발해져 큰 에너지를 얻고 표면으로부터 공간으로 튀어나오는 현상으로, 1884년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는 발명가로서 헌신한 그에게 주어진 역설적 보상이었다.
적당한 노력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에디슨이 스스로에 대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정 프로젝트에 대해 수천 건의 실험을 진행하고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에디슨의 연구원 한 명이 환멸을 느끼고 낙심했던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에디슨은 불만이 가득 찬 그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배운 게 왜 없단 말인가.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않았나.”
에디슨이 관심을 가진 것은 실험 결과 그 자체였다. 결과가 성공적이어서 즉시 이용할 수 있거나 수익성을 보이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실험 결과는 단지 결과일 뿐이었다. 에디슨은 실패를 효과는 보이지 않았지만 성공만큼 가치 있는 정보를 얻게 되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믿었다. 물론 다음과 같은 조건이 달려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아이디어와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 붓는다면,’
이는 실패를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어떤 실험을 통해 우연히 유용한 제품을 만들어내면 당연히 수익성 있는 성공 사례로 남는다. 과학기술의 역사는 이런 행복한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계획성 없이 아무렇게나 대충 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 실패요인이 취약한 실험 기술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디어나 원리나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오직 ‘가장 좋은 아이디어와 최대한의 노력’을 거쳐 실패로 이어질 경우에만 실패의 원인을 파악하여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A 방법이 효과가 없다’라고 명확하게 선언하는 것은 연구 과정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실험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실패했다’는 것은 아무런 발전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진지하게 고안되고 세심하게 실행된 모든 실험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진정한 실패한 절대적인 몰입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것이었다. 대충 세운 가설, 적당한 노력이 낳은 실패는 새로운 것을 추진할 동력조차 생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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