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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4강 -3(2009.08.03)
13-7 실다운 법은 아무 것도 없다 問(문), 如何是眞正見解(여하시진정견해)오 師云(사운), 儞但一切入凡入聖(이단일체입범입성)하며 入染入淨(입염입정)하며 入諸佛國土(입제불국토)하며 入彌勒樓閣(입미륵누각)하며 入毘盧遮那法界(입비로자나법계)하야 處處皆現國土(처처개현국토)하야 成住壞空(성주괴공)하나니라 佛出于世(불출우세)하야 轉大法輪(전대법륜)하고 却入涅槃(각입열반)하되 不見有去來相貌(불견유거래상모)하야 求其生死(구기생사)하나 了不可得(요불가득)이니라 便入無生法界(변입무생법계)하야 處處游履國土(처처유리국토)하야 入華藏世界(입화장세계)하야 盡見諸法空相(진견제법공상)하야 皆無實法(개무실법)이니라 唯有聽法無依道人(유유청법무의도인)이 是諸佛之母(시제불지모)라 所以佛從無依生(소이불종무의생)이요 若悟無依(약오무의)하면 佛亦無得(불역무득)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是眞正見解(시진정견해)니라
실다운 법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랬습니다. 어떤 이가 묻기를, 如何是眞正見解(여하시진정견해)오. 진정견해. 아마 임제록에서 제일 빈도수가 높은 낱말이 진정견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진정견해.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견해가 우선이죠. 참되고 바른 견해. 견해가 잘못되면은 괜히 그 소양인을 갖다가 태양인이라 그러고 (허허허) 태양인을 갖다가 소음인이라고 그러고. 그래 놓으면은 차라리 그렇게 되면은 모르는 것만 같지 못하죠. 견해가 참 제일 중요합니다. 師云(사운), 儞但一切入凡入聖(이단일체입범입성), 그대가 그대들은 다만 일체, 이런 저런 여러 곳, 일체의 범부에 들어가고 성인에 들어가. 범부 하면 범부에 껌뻑 넘어가고 범부에 관심이 빠지고, 그런 말입니다. 또 성인에 빠지고. 마치 선재동자가 구도행각할 때 여기 저기 온갖 오십 삼 선지식에게 쫓아다니면서 헤매듯이 우리는 그렇게 선지식 찾아 헤매는 게 아니라 만나는 경계마다 그만 빠지는 거죠. 染(염)에 들어가고 淨(정)에 들어가고 諸佛國土(제불국토)에 들어가고 彌勒樓閣(미륵누각)에도 들어가며. 미륵누각 같은 것은 이제 최상의 깨달음의 세계, 선재동자가 마지막에 미륵보살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미륵보살을 만나는데 미륵보살은 미륵누각에 있었어요. 그래서 미륵누각이라 그렇게 합니다. 거기에 들어가며. 상당히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에 들어갔다 이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또 그보다 더 높은 毘盧遮那法界(비로자나법계)에까지 들어간다, 이건 완전히 진리화된 그런 것을 말하지요. 그래서 處處(처처)에 皆現國土(개현국토)라, 곳곳에서 국토를 나타낸다, 자기의 의지처, 자기의 의지처를 나타내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임제록 공부한다 하면 임제록에 들어간 거요. 그래서 임제록에 의지하는 거야. 법화경 공부한다 하면 법화경에 의지하고 법화경에 들어간 것이 되고 그렇습니다. 여기 뭐 入凡, 入聖, 入染, 入淨 하는 것은 전부 그거에요.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빼앗기고 끌리고 하는 것. 거기에 하나의 우리의 의지처가 되는 거죠. 다 국토를 나타내서 成住壞空(성주괴공)한다, 끌려다닌다 이말입니다 이건, 성주괴공. 국토는 뭡니까. 사물은 모두가 성주괴공하죠. 우리는 생로병사하고. 또 생주이멸 하듯이 어떤 국토 같은 것은 成住, 만들어졌다가 머물다가 무너지고 또 공으로 돌아가고, 성주괴공, 끌려다닌다 이 말입니다, 어떤 변화에 끌려다닌다. …하나니라. 佛出于世(불출우세)하사,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사, 大法輪(대법륜)을 굴리고 그리고는 도리어 涅槃(열반)에 들어가시되. 열반에 들어갔어요 지금 세존이. 그런데 不見(불견), 볼 수가 없다. 去來相貌(거래상모)가 있음을 볼 수가 없다. 지금 이순간 세존께서 출세하셨고 수행했고 6년 그 다음 법륜을 굴렸고 열반에 들어갔고 그 모습 어디 있습니까 지금. 求其生死(구기생사)나, 참다운 생사를 구하나, 了不可得(요불가득)이라, 그 생사를 구해보지마는 요불가득이여. 便入無生法界(변입무생법계)하야 곧 무생법계에 들어가서, 處處游履國土(처처유리국토)하야 곳곳에서 국토에 흘러 다녀서 入華藏世界(입화장세계)하야 화장세계에 들어가서, 盡見諸法空相(진견제법공상)하야, 모두들 제법이 공한 것을 보게 돼. 皆無實法(개무실법)이라, 다 실법은 없다. 어디에 들어가도 우리가 뭐 예를 들어서 일년의 삶을 우리가 되돌아 보고 한 달의 삶을 되돌아 보고 또는 하루의 삶을 되돌아 보더라도 사실은 오늘 하루만 하더라도 많은 어떤 그 경계, 많은 세계에 들락날락 들락날락해서 오늘 이 순간 여기까지 있어요. 그런데 뭡니까. 되돌아 보면은 제법공상이야, 모두가 텅 빈 것 뿐이야. 개무실법이야, 실다운 법은 없다. 그저 들락날락 했을 뿐이죠. 우리가 이런 이치를 알면요 가뿐해집니다 사실은. 그 다음에 아주, 唯有聽法無依道人(유유청법무의도인), 그런데 개무실법이야, 전부 실다운 법은 없는데 오직 청법무의도인이 있어. 법문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道人.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바로 그 사람, 그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이 있어. 그것이 여기 저기 흘러다니고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고 뭐 그렇게 합니다. 그게 그거 하나만은 진실이다 이런 뜻이겠죠. 앞에는 皆無實法 이라고 했고 그것은 진실이다. 그것은 是諸佛之母(시제불지모)라,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다 말여. 제불의 어머니를, 제불을 탄생시킨 어머니를 누가 가지고 있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거여. 우리 모두야 사실은. 우리가 諸佛之母야. 所以(소이)로 佛從無依生(불종무의생)이라, 무의도인으로부터 부처가 태어났지 나라고 하는 나의, 참 나, 나라고 하는 그 무의도인이 아니면 부처도 없어. 그래서 孤明이라고 했잖아요. 세속적인 안목은 사람 개개인을 동등하게 인정해 주지마는 불교에서는 오직 나로 인해서 누구도 부모까지도 나를 낳아준 부모까지도 나로 인해서 있는 걸로 보니까 나로 인해서 있으니까 부처인들 뭐 皆從無依生이야, 무의도인으로부터 나의 본래의 얼굴, 무의도인으로부터 부처도 태어난 것이다. 若悟無依(약오무의)하면, 만약에 無依道人,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그러면서 지금 이렇게 역력히 법문하는 소리를 듣는 청법무의도인, 이것을 만약에 깨달을 것 같으면은 佛亦無得(불역무득)이라, 부처라 해봤자 그거 뭐 아무런 소득이 없어. 얻을 게 없어.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만약 이와 같이 본다면은 이것이야말로 眞正見解(진정견해)다, 이렇게 보아야 이게 진정견해다. 진정견해라고 하는 말은 그냥 참되고 바른 소견, 이런 뜻이죠. 그래서 이제 정견, 요걸 줄이면은 正見 이렇게도 말합니다. 이건 흔히 불교안에서 이야기하는 건데 분명히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기서는 청법무의도인을 이해하는 거. 그것은 諸佛의 母라고 했어요. 그리고 부처도 無依道人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래서 그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의도인을 깨달을 것 같으면은 뭐 부처라고 하는 것도 또한 어디서 따로 얻을 것이 없다 이래 놨어요. 그래서 그 한 물건 有一物於此(유일물어차)하니 한 물건이 여기 있으니 上柱天下柱地(상주천하주지)라, 하늘로서 떠받들고 밑으로는 땅까지 다 뻗쳐있어. 名不得狀不得(명부득상부득)이야. 이름으로 뭐라 지을 수도 없고 모양으로 그릴 수도 없어. 空耶有耶(공야무야) 吾未知其所以(오미지기소이)로다, 이게 공한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인가. 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일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읊조려 놨습니까. 이게 이제 불교의 생명이고 특히 선불교의 생명이거든요. 그리고 우리들의 참생명이고, 개개인의 참생명이죠. 이것에 대한 이해가 이게 진정견해입니다. 여기는 분명히 그렇게 돼 있어요 임제록은. 그리고 저도 이제 그렇게 늘… 진정견해… 뭘 그럼 바로 안다는 뜻이냐. 그 한 물건의 존재에 대해서 바로 안다. 그렇다고 있는 건 아니에요, 있는 건 아닙니다. 무아라고 하는 문제하고 여기 늘 상충이 되는데 이론을 뜻을 정확하게 모르면 상충이 되지마는 무아가 그렇게 하는 거에요. 무아가 그렇게 하는 거에요. 무아가 제불의 母야. 왜냐. 찾아봐도 없으니까. 꼬투리가 없으니까 무아지. 꼬투리 없다고 없는 건가 어디. 이 공간이 텅 비었다고 없는 거요? 여기서 어떤 과학적인 기자재를 들이대가지고 여기서 뽑아내면 백 가지도 넘는 요소를 이 공간에서 뽑아낼 수가 있잖아요.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잖아. 그 어쨌든 눈에 안 보인다고 무아라고 합니다. 남방불교에서 공부해 온 사람들이 이제 무아를 가지고 자꾸 이야기하면서 이 일물에 대한 존재를 상당히 부정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이 진정견해는 다른 입장으로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예를 들어서 뭐 무슨 마이크 하면 마이크에 대한 진정견해, 이것도 이야기가 돼요. 그 다음 꽃에 대한 진정견해. 도자기에 대한 진정견해. 얼마든지 다 갖다 붙힐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공한 것이다, 공성, 제법공상이라든지 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어떤 존재의 공성에 대한 이해를 또 진정견해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건 전혀 상반되는 거죠 사실은. 존재의 공성을 아는 것이 진정견해다. 물론 空해요. 이 마이크 있지마는 이거 다 낱낱이 분해해 버리면은 마이크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연필만 하더라도 이게 몇 개의 부속품으로 되어 있는데 이거 다 분해해 버리면은 이거 존재하지 않아요. 이렇게 해서 우리 육신을 그리고 또 우리의 어떤 정신 세계를 그리고 모든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 천지 자연까지도 전부 인연의 힘에 의해서 잠깐 조립된 것이지 사실은 그게 공한 것이다 텅 비어 없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 몸이 건립돼 있고 거기에 우리의 무슨 뭐 부귀 공명이니 하는 것도 건립이 돼 있고 생로병사도 거기에 건립돼 있다 바탕은 공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을 진정견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물론 그거는 이제 존재의 공성에 대한 진정견해죠 그건. 진정견해는 맞아요. 존재의 공성에 대한 진정견해고 임제스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한 물건에 대한 진정견해, 聽法無依道人, 諸佛之母, 그래서 부처마저도 바로 이 無依道人으로부터 탄생되었다, 하는 이것에 대한 바른 이해, 바르고 참된 견해 이걸 이제 진정견해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여기에 대해서 아이 뭐 진정견해 이제 모든 것이 공하다고 보는 게 연기니까 공하다 이렇게 보는 게 진정견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계시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13-8 찾을수록 멀어진다 學人不了(학인불료)하야 爲執名句(위집명구)하야 被他凡聖名礙(피타범성명애)일새 所以障其道眼(소이장기도안)하야 不得分明(부득분명)이니라 祇如十二分敎(지여십이분교)는 皆是表現之說(개시표현지설)이라 學者不會(학자불회)하고 便向表顯名句上生解(변향표현명구상생해)하나니 皆是依倚(개시의의)라 落在因果(낙재인과)하야 未免三界生死(미면삼계생사)하나니라 儞若欲得生死去住脫著自由(이약욕득생사거주탈착자유)인댄 卽今識取聽法底人(즉금식취청법저인)하라 無形無相(무형무상)하며 無根無本無住處(무근무본무주처)하야 活鱍鱍地(활발발지)라 應是萬種施設(응시만종시설)하야 用處祗是無處(용처지시무처)일새 所以覓著轉遠(소이멱착전원)이요 求之轉乖(구지전괴)니 號之爲秘密(호지위비밀)이니라 찾을수록 멀어진다. 學人(학인)이 不了(불요)하야 학인들이 알지를 못해서, 爲執名句(위집명구)하야, 명구를, 이름과 구절을 집착하기 때문에, 被他凡聖名礙(피타범성명애)일새, 저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그 이름에 걸림을 입었을새, 당했을새, 그래 무슨 범부, 성인 또는 큰스님, 작은 스님, 무슨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렇게 이름 그건 전부 지어 붙힌 거에요. 내가 요즘 그말 잘 쓰는데 전부 사람들이 이름 지어 붙힌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이름이 있었어요? 무비라고 하는 것도 이름 지어 붙혀서 무비지 뭐. 부르기는 좋잖아요 일단은. 그거야 전부.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분명한 분명히 존재하는 사물에다가 이름을 지어 붙힌 것까지는 봐줄 수가 있어요 사실은. 이건 국화다, 뭐 흰 국화다 노란 국화다 그건 봐줄 수 있어요. 그런데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정신세계에서 아주 여러 가지로 그려지는 그런 그림에 대해서 이름을 지어 붙혀 놨다니까. 그게 이제 우리가 환장할 일이야. 그래 그걸 자꾸 듣다 보면 세뇌가 돼 가지고 그만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없다면 말도 아닌 거요 이건. 틀림없이 있는 거야 너무나 확실하게 있는 거지. 이름 지어 붙힌 것인데 우리의 어떤 정신 세계의 차원을 이렇게 설정할 수가 있지 않느냐. 뭐 글씨를 하나 배워도 붓글씨를 하나 배워도 1급도 있고 2급도 있고 3급도 있고 저 18급에서부터 1급까지 또 거기서부터 단수도 매길 수가 있고. 바둑을 배워도 마찬가지여. 18급에서부터 1급까지 1급에서부터 9단까지 단수 매길 수 있는 거여. 그런데 뭐…그 9단 두는 사람이나 18급 짜리나 뭐가 다른 게 있습니까. 그냥 사람일 뿐이야 사람일 뿐이라고. 그렇게 이름 지어 붙힌 것입니다 이름을 지어 붙힌 거. 정신세계에. 사물에다 이름 지어 붙힌 것은 괜찮다 나는. 그것도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건 오류가 적지가 않지마는 그러나 그거는 우리가 상식인으로서는 그건 이해한다 말이요. 이건 마이크라 하자 이건 컵이라고 하자 이건 연필이라고 하자 이건 꽃이라고 하자. 좋다 말야 그건. 그런데 우리의 정신 세계는 물질의 세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거든요. 몇 배로 더 광대하고 몇 배로 더 복잡한 거라. 종류도 많고 기기묘묘한 거야. 불가사의하고 하루에도 뭐 팔만 사천 가지로 우리가 마음을 쓰는데 그거 쓰는 마음 마음 하나마다 전부 이름을 지어 붙혀. 그 이름이지 뭐 그야말로 지어 붙힌 이름이지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물결 따라서 아까 이야기했지마는 물결 따라서 작은 물결, 큰 물결, 동쪽으로 치는 물결, 서쪽으로 치는 물결, 뭐 1센티 짜리 물결, 2센티짜리 물결, 3센티짜리 물결.. 그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냥 물인데 1센티짜리 물결이다 2센티짜리 물결이다 1미터짜리 물결이다 뭐 10미터짜리 물결이다… 물에서 보면 물이 보면은 웃기는 이야기에요 이건. 금방 내려가 버리면 아무 것도 없고 그런데 잠깐 파도치는 걸 가지고 그렇게 이름 지어 붙히는 거죠. 야 이것 참 대단한 이야기야 이거. 딴 데선 못듣는 거야. 皆執名句하야 다 명구를 집착해 가지고 저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이름에 걸림을 당했을새 所以(소이)로 障其道眼(장기도안)이라, 그래서 道眼을 장애한다. 나도 도안이 벌써 열릴 뻔 했는데 그놈의 이름에 팔려 가지고 헤매다가 수십년을 이름에 팔려 헤매다가 그만 도안이 캄캄해져 버렸어. 도안을 장애해 가지고서 不得分明(부득분명)이니라, 분명함을 얻지 못함이라. 祇如十二分敎(지여십이분교)는 다만 저 십이분교는. 저 불교의 경전을 형식과 내용에따라서 열 두가지로 이제 분류하는 거죠. 혹은 또 아홉 가지로 분류하면 이제 9부교 또는 9분교. 또 12부경 무슨 12분교.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내용과 형식이 예를 들어서 뭐 장행으로 산문으로 이렇게 죽 설명해 놓은 게 있고 혹은 또 게송으로 해 놓고 게송으로 해 놓은데 또 응송이 있고 중송이 있고 그렇죠. 중송은 예를 들어서 반복해서 그렇게, 산문을 반복해서 한 것을 중송이라 하고. 그 다음에 응송은 이제 예를 들어 거기에 맞추어서 이야기한 것 등등 또는 뭐 수기라고 하는 것도 있고. 무문자설, 부처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스스로 그렇게 법문한 것도 있고 또 인연에 대한 이야기, 별별 옛날 인연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에 비유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에 뭐 본사, 본생, 뭐 부처님 당신에 대한 과거 이야기 또는 제자들에 대한 과거 이야기 뭐 별별 그런 걸 다 나눠요 나눈게 십이분교야. 그게 다 뭐여? 皆是表現之說(개시표현지설)이라, 표현하자고 해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가 있다. 그런 것을 學者(학자)들은 알지를 못하고 거기에 그냥 목을 매. 목을 매 가지고 자꾸 그런 걸 이제 공부하다보면 세뇌가 돼 가지고, 便向表顯名句上生解(변향표현명구상생해)라, 곧 표현한 명구를 향해 가지고서 표현하자고 해 놓은 그런 명구를 향해서 알음알이를 낸다. 알음알이를 낸다 이거여. 그래서 나는 그 온전한 학자도 못되고 또 선방에 기웃거리고 또 이제 경학에 기웃거리고 해서 사실은 내가 내 나름대로는 합리화시키고 제대로 걸어왔다고 생각하지마는 어디에 집착을 이런 데 집착을 안하니까 집착을 안하다 보니까 그거 알뜰하게 연구 안 하는 거야. 온전한 학자도 못되는 거지. 그거 집착을 해 가지고 아주 뭐 목을 매고 집착을 해 가지고 그걸 연구를 해야 무슨 뭐 박사학위 논문도 나오고 별별 논문이 나오고 그래 가지고 될텐데 그거 뭐 별거 아니고 그거 표현지설이야. 그거 표현하자고 임시로 만들어 지어 붙힌 이름인데 그거 뭐 그렇게 골치 아프게 속 썩힐 거 있냐 머리 썩힐 거 없다 이렇게 된 거야. 그러다 보니까 공부할 재미가 없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經이나 어록을 보다가도 어려운 것 있으면 그냥 넘어가 버려요. 쉽게 이해되는 것만 봐도 천지인데 뭐. 아니 한 권 중에 한 권이 예를 들어서 백 장짜리 책이라고 하면은 거기 열장만 이해해도 어디야 십분의 일만 이해해도. 나머지 골치 아프고 이해 안 되는 건 뭐 볼 필요도 없는 거야. 나는 그래서 難字도 잘 안 찾아 모르는 건 그냥 넘어 가 버려. 아는 것만 해도 내가 소화하고도 남고 얼마든지 법락, 법희선열을 실컷 누리고도 남는데 뭐 골치 썩여 가면서 어려운 거 파헤치려고 그렇게… 그래서 방거치기가 된 거지 사실은. 방거치기란 말 알아듣는 모양이네요.(허허허)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거지. 그렇지만 구애받지 않고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야 또. 생각해보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파고 들면은 안 걸릴 수가 없습니다. 걸려야 그게 연구가 되는 거야. 걸려야 연구가 되는 거야. 연구한 사람치고 안 걸린 사람은 없습니다. 안 걸린 사람이 그거 왜 연구하겠어요? 이거 다 헛거고 남이 괜히, 그거 일 좋아하는 사람이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이름이다 이렇게 알아버렸는데 그 밑천을 환히 알아버렸는데 그거 뭐 그렇게 골치 썩여가면서 연구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스님들은 경학이라든지 교리라든지 이런 것이 아주 어중간해요.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고 보면 뭐 모르는 것도 또 없고 어중간해. 그게 이제 소견이 그렇게 됐기 때문에 그런 거야 소견이. 이유가 있어요 다. 소견이 그렇게 돼 버렸기 때문에 아 그거 뭐 표현하기 위해서 지어 놓은, 옛날 사람들이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 붙혀놓은 이름인데 뭐 거기에 그렇게 목을 매고 매달릴 게 뭐 있나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 자유롭죠.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거요. 그래서 학자들요, 특히 유교학자들 보면 그야말로 머리카락에다 구멍을 내고 그 안에서 집을 짓는 거야. 그렇게 잔챙이가 된다니까 사람이. 그렇게 작아져요 사람이. 그래야 또 연구가 되는 거야. 마음이 그렇게 미세하게 작아져야만 연구가 되는 거죠. 그런 것도 우리가 파악하고 나는 이래이래서 이렇다 그 정도는 스스로 자신을 가늠하고 있어야 돼요. 그렇다고 뭐 에이 이까짓 거 뭐 다 소용없는 거다, 그저 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름이다 너무 또 그렇게 치우쳐버리면은 엉뚱망뚱해서 아무 것도 아닌 거죠. 表現之說이라 학자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表顯名句를 향해서, 上를 향해서 알음알이를 내나니 皆是依倚(개시의의)라 이것은 다 의지하고 또 의지하는 것이다 거기에. 落在因果(낙재인과)하야, 인과에 떨어져서. 未免三界生死(미면삼계생사)하니라, 인과 벗어나자고 하는 건데 인과에 딱 떨어져 가지고는 삼계생사를 면하지 못한다. 인과에 떨어진 것을 여기서 부정하는 입장으로 이야기하니까 어유 그 하늘같은 인과를 그걸 부정하면 어쩌냐고 속으로 또 그렇게 생각할라. 임제스님의 이 법문은 그런 차원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하는 그게 인과거든요.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어떤 가르침이 참 위대하고 정말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전해주고 싶다 하는 그런 것 있습니까 혹시? 어떤 이치가. 천도가 그런가요, 천도 하는 것? 요즘 천도 많이 하죠. 불교 안에서 천도하는 이치 예를 들어서 豫修齋(예수재) 지내고 하는 거 그거 많이 이용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불교에 대해서 대단한 법인가요? 무엇이 우리 마음 속에 정말 대단한 법이라고 생각이 되는가. 이런 것들도 한번 마음 속에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까 여기서 진정견해라고 해서 一物에 대한 거 나는 참 그걸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무의도인, 청법무의도인.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이것 뿐이니까 말하고 듣고 하는 이 사실, 이 존재, 이것이 들어서 다 하는 거고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고 이것이 모든 것을 낳고 모든 것의 근본이고. 그래서 나는 그점을 상당히 참. 뭐 법화경 같은데서도 그 주머니 속에 꿰어 채워 준 보물이라고 하는 게 바로 그 점 아닙니까. 바로 그거거든요. 그래서 그 점을 상당히 나는 부처님 가르침 중에 소중한 가르침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옛날 근본불교 같은 데서는 인과의 이치, 연기의 이치, 이걸 또 상당히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죠. 뭐 첫 손가락 꼽는 가치있는 가르침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그 사리불하고 목건련이 출가하게 된, 불교로 귀의하게 된, 개종하고 불교로 귀의하게 된 동기도 연기의 이치를 설명듣고 개종을 해 버렸거든요. 마승이라고 하는 비구를 만나서 당신 어떤 스승에게서 어떤 법을 배우냐 라고 물으니까 바로 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 我佛大沙門 常作如是說 이 게송을 이제 소개했잖아요. 모든 존재는 전부 인연의 이치에 의해서 생기고 인연의 이치에 의해서 소멸한다,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는 항상 이러한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이렇게 이제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그 한마디에, 그게 연기의 도리거든요. 연기의 도리 한 마디 듣고 그야말로 개종을 해 버리고 250명인가 되는 그런 많은 제자들을 다 데리고 부처님 앞으로 귀의해버렸죠. 그런 이들에게는 연기의 이치가 그렇게 제일 가치있는 가르침으로 그렇게 봅니다. 이 일물의 가르침하고 무의도인하고는 차원이 또 다르죠. 다릅니다, 그건 내용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보통은 뭐 매일매일 그냥 따뜻한 방에서 자고 따스한 밥 먹고 이것도 또 좋잖아요. 허허허. 의식주 문제 걱정 안 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잖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거 한번 스스로 사람 따라서 다르겠지마는 스스로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어요. 儞若欲得生死去住脫著自由(이약욕득생사거주탈착자유)인댄, 그대가 만약에 生死去住脫著이야, 죽고 살고 거하고 머물고 또 인연을 벗어버리고 하는데 住하는 것을 벗어버리는데 脫著, 벗어버린다, 자유함을 얻고자 하는 거. 벗어버리고 잊고하는 거, 탈과 착이니 탈과 착에 자유로움을 얻고자 할진댄. 일상생활에 우리가 걸리고 있는 그런 모든 현상들입니다. 그럴려면은 한마디로 해탈이죠. 卽今識取聽法底人(즉금식취청법저인)하라, 그러네요 여기에도 청법저인 나오네요. 바로 이 순간 우리가 법문 듣고 있는 그 사람, 그 사실을 識取하라, 識取, 알아서 취하라. 완전히 내 것으로 하라 라고 하는 뜻에서 取 자를 붙혔습니다. 알아서 취하라. 참 정말 이게 나의 생명이고 불교의 생명입니다. 바로 이점이에요. 청법저인, 무의도인, 또 무위진인, 수처작주하는 그 주인. 그 사람은 無形無相(무형무상)이여. 또 無根無本無住處(무근무본무주처)야. 그러면서 活鱍鱍地(활발발지)라, 어디에도 매이지 아니해. 아무리 뭐 아주 감옥, 감옥 속에 또 감옥 짓고 감옥 속에 또 감옥 지어가지고 십 중 이십 중으로 철장을 그렇게 친다 하더라도 이 한 물건 무의도인, 청법저인 이거는 그냥 저 높은 하늘로 하늘로 천리 만리 그냥 활활 자유롭게 다니는 거죠. 그게 활발발지 아닙니까. 무근본하며 무주처라. 아무리 철조망에 가두고 가두고 천 겹 만 겹으로 가둬놔도 그 물건 그것은 나는 활발발하게 마음대로 쏘다니는 거죠. 그건 어떻게 할 길이 없어요 뭐. 應是萬種施設(응시만종시설)하야, 이 만종시설에 응하나, 이 한 물건이 만가지 시설함에 응하지마는 用處(용처), 응용하는 그곳이 祗是無處(지시무처)라, 응하지마는 그 한 물건 입장에서 보면은 어느 곳도 처소가 있는 게 아니야. 所以(소이)로 覓著轉遠(멱착전원)이라. 그것을 찾으면은 찾을 수록 더욱 멀어진다. 거기에 어디에 쓴다고 해서 지금 뭐 임제록 읽고 있다고 해서 거기에 내가 있는가 아니 거기에 내 물건이 있는가 라고 이렇게 하면은 찾으면은 벌써 저만치 도망가 있는 거요. 그건 이제 주객이 나눠질 수 없는데 우리가 임시로 주객을 나눠 놓습니다. 찾을 놈과 찾는 나를 나눠 놓고 이렇게 한번 우정 찾아 보는 거에요 주객을 나눠가지고. 그게 나눠지는 게 아닌데. 그러니까 이게 그림자와 같아 가지고 자기 그림자를 자기가 못 밟듯이 자기 마음 자기가 손에 안 잡히는 거야. 그래 멱착전원이라, 찾을 수록 더욱 멀어진다. 삼세 전부터 마찬가지고 역대 조사도 역시 마찬가지여 못 찾아요. 마음 마음 마음이여 그 마음 참 찾기 어렵구나. 달마스님도 일찌기 그랬잖아요. 求之轉乖(구지전괴)니, 구할 수록 더욱 어기나니, 號之爲秘密(호지위비밀)이니라, 이건 이름해서 비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 분명히 있긴 있는데 이건 찾지 못하기 때문에 비밀이죠. 참 표현 근사해요. 이것을 일러 그것은 비밀이야. 그건 비밀이야 그래버려. 뻔히 알고 있어. 우리가 뻔히 알고 있지마는 손에 안 잡히는 물건이야. 매일 매일 쓰고 아니 매순간 매순간 이렇게 잘도 그것을 활용하고 있으나 그게 손에 안 잡히고 찾을수록 멀어지고 구할수록 멀어진다. 그건 비밀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참 표현이 이게 아주 명표현입니다. 13-9 인생이 무상함을 알라 道流(도류)야 儞莫認著箇夢幻伴子(이막인착개몽환반자)하라 遲晩中間(지만중간)에 便歸無常(변귀무상)하나니 儞向此世界中(이향차세계중)하야 覓箇什麽物作解脫(멱개십마물작해탈)고 覓取一口飯喫(멱취일구반긱)하고 補毳過時(보취과시)하야 且要訪尋知識(차요방심지식)이요 莫因循逐樂(막인순축낙)하라 光陰可惜(광음가석)이니 念念無常(염념무상)하야 麤則被地水火風(추즉피지수화풍)이요 細則被生住異滅四相所逼(세즉피생주이멸사상소핍)이니라 道流(도류)야 今時(금시)에 且要識取四種無相境(차요식취사종무상경)하야 免被境擺撲(면피경파박)이어다 인생무상이라, 道流(도류)야 그대는 莫認著箇夢幻伴子(막인착개몽환반자)하라 꿈과 같고 환과 같은 이 몸뚱아리를 오인하지 말라. 遲晩中間(지만중간)에, 머뭇거리고 하는 사이에 머뭇거리는 사이에 便歸無常(변귀무상)이라, 곧 죽게 된다 곧 무상으로 돌아가고 마나니 儞向此世界中(이향차세계중)하야 그대들이 이 세계 가운데를 향해서 覓箇什麽物作解脫(멱개십마물작해탈)고 무슨 물건을 찾아서 무슨 물건을 찾아서 해탈을 지을 것인가. 覓取一口飯喫(멱취일구반긱)하고 한입에 들어가는 밥을 찾아서 먹고 또 補毳過時(보취과시), 누더기를 기우면서 시간을 보내는도다. 보취는 누더기 깁는 거에요. 옛날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기운 옷 많이 입었어요. 진짜로 떨어져서 새 옷을 구할 수가 없어서 그때는 전부 광목이었어요. 나이론 나오기 전에. 그래서 정말 많이 기웠어. 진짜 떨어져서 많이 기워 입었는데 나중에 나이론 나오고 무슨 또 모직 나오고 뭐 합성 뭐 나오고 그러니까 그 다음엔 수좌들이 이제 우정 생생한 옷을 뜯어가지고 쪼가리 내서 누더기로 만들더라고요. 난 또 처음 그 신기한 거 봤어요. 그래갖고 누더기가 예술품이야 이제 또. 그걸 쪼가리 쪼가리 기워가지고 옷 만들고 뭐 방석 만들고 뭐 우정 또 그렇게 하대 참. 사람이 참 묘하지요. 그 멀쩡한 걸 가지고 말야. 멀쩡한 거 그냥 쓰면 좋을텐데. 이 보취과시라고 하는 것은 정말 떨어져서 누더기를 기우면서 시간을 보내는도다. 그렇죠 뭐 배불리 먹고 그 다음에 뭐 누더기나 깁고 그러면서 세월 보낸다. 且要訪尋知識(차요방심지식)하고,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방문하고 찾고 莫因循逐樂(막인순축낙)하라 그럭 저럭 그냥 편안함을 쫓아 다니지 말라. 光陰可惜(광음가석)이라 시간은 가히 아까운 것이라. 念念無常(염념무상)하야 순간순간 무상해서 麤則(추즉) 크게 보면은, 地水火風(지수화풍)에, 지수화풍을 입고, 지수화풍 사대가 흩어지는 것을 당하게 되고, 細則(세즉) 세밀하게 보면은 순간순간 뭐라고, 生住異滅四相(생주이멸사상)의 핍박한 바를 입게 되나니라. 그렇죠, 생주이멸, 우리가 이렇게 앉아있는 하루쯤이야 뭐 변화가 있을라고. 하지마는 매초매초 우리의 육신은 생주이멸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어느날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거지. 道流(도류)야 今時(금시)에 且要(차요) 또한 중요한 것은 識取四種無相境(식취사종무상경)하야 네 가지 무상한 경계를 식취해서 免被境擺撲(면피경파박)이어다 저 경계의 파박함을 입음을 면할지어다. 이건 이제 옛날 당나라때 속어인데 파박이라, 맞부딪힌다. 회친다, 손뼉친다 뭐 그런 뜻이 있는데 끌려 다닌다, 팔려 다닌다, 끌려 다니고 팔려 다닌다. 경계에 팔려다님을 입음을 면할지어다. 그러니까 늘 우리는 경계에 팔려 다니죠, 경계에 끌려 다니고. 경계에 끌려다님을 면하라. 무상경을 식취해라 그말이죠.
첫댓글 用處祗是無處(용처지시무처) 所以覓著轉遠(소이멱착전원)이요.ㅡ그 작용하는 일정한 곳이 없기에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멀어져... 마음 마음 마음이여 그 마음 참 찾기 어렵구나.()()()_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고맙습니다.
唯有聽法無依道人...고맙습니다. _()()()_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_()_()_()_
큰스님 강의는 참 시~~~원 통~~~쾌 합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識取四種無相境(식취사종무상경)하야免被境擺撲(면피경파박)이어다.. 네 가지 무상한 경계를 식취해서 경계에 끌려다님을 면하라...고맙습니다.. _()()()_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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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순간 우리가 말하고 듣고 하는 이 사실, 이 존재, 이것이 들어서 다 하는 거고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고 이것이 모든 것을 낳고 모든 것의 근본이다..禪慧珠 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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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今識取聽法底人하라 _()()()_
감사합니다,진정견해,
聽法無依道人, 諸佛之母, 그래서 부처마저도 바로 이 無依道人으로부터 탄생되었다, 하는 이것에 대한 바른 이해, 바르고 참된 견해 이걸 이제 진정견해라고 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眞正見解라고 해서 一物에 대한 거 나는 참 그걸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무의도인, 청법무의도인.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이것 뿐이니까 말하고 듣고 하는 이 사실, 이 존재, 이것이 들어서 다 하는 거고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고 이것이 모든 것을 낳고 모든 것의 근본이고. 그래서 나는 그점을 상당히 참. 뭐 법화경 같은데서도 그 주머니 속에 꿰어 채워 준 보물이라고 하는 게 바로 그 점 아닙니까. 바로 그거거든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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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執名句하야 다 명구를 집착해 가지고 저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이름에 걸림을 당했을새 所以(소이)로 障其道眼(장기도안)이라, 그래서 道眼을 장애한다. 나도 도안이 벌써 열릴 뻔 했는데 그놈의 이름에 팔려 가지고 헤매다가 수십년을 이름에 팔려 헤매다가 그만 도안이 캄캄해져 버렸어. 도안을 장애해 가지고서 不得分明(부득분명)이니라, 분명함을 얻지 못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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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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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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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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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선혜주님 고맙습니다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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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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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