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사가(祈戰死歌) _ 철기 이 범 석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민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외적 놈들을
삼천리 강산에서 열혈히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백두산 찬 바람은 불어 거칠고
압록강 얼음 위에 은월이 밝아
고국에서 전해 오는 피비린 냄새
분하고 원통하다 우리 동족들
물어 보자 동포들아 내 죄뿐이냐
네 죄도 있으려니 같이 나가자
정의의 손과 칼을 손에다 들고
동족을 구하려면 목숨 바쳐라
겁 많고 창자 썩은 어리석은 놈
자유를 찾겠다는 표적만으로
죽기는 싫어 해도 행복만 위해
우리가 죽거든 뒤나 이어라
한배님 저희들은 이후에라도
천만대 자손들의 행복을 위해
맹세코 이 한목숨 바치겠으니
성결한 전사를 하게 하소서
세상사(世上事) 모든 것이 살자고 하는 짓으로 이해한다면 `싸우다 죽게 해 달라는 기도의 노래 '기전사가(祈戰死歌)'는 정녕 두렵고 무서운 염(念)이다.
이 노래는 일제에 대한 분노와 독립군의 분기로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의 사슬 속에서 피어린 삶을 사는 동포들의 속박을 원통해 하고 있다. 또한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공감대를 통해 맺어진 투철한 동지의식의 고무(鼓舞)가 피를 끓게 한다. 특히 4연의, 조국이라는 대아적(大我的) 가치를 외면하고 소아적(小我的) 가치 속에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타협주의자 · 기회주의자 · 이기주의자들, 즉 매국노적 삶을 사는 무리들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 매섭다. 그리고 한배님께 죽음을 소망한다.
후손들의 아름다운 행복 외엔 죽음의 조건이 없다.
비장미를 넘어서 성스럽고 순결하기까지 하다.
마치 홍암대종사의 순명삼조(殉命三條)의 한 구절을 보는 듯하다.
한편 우리는 이 노래가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지은 노래란 점에서 낭만을 넘어 숙연함이 앞선다.
더욱이 이 노래를 읊은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 장군이, 청산리전투 당시, 스물 한 살이라는 나이로 북로군정서의 연성대장(학생교도대장)이 되어 직접 사선(死線)을 넘었던 장본인이자 대종교의 원로라는 점에서도 한 인간의 종교적 유언장(遺言狀)을 보는 듯한 결연함을 엿볼 수 있다.
청산리전투는 우리 민족으로 보면 독립운동사의 찬연한 금자탑이다. 반면에 일제로 본다면 일본역사에 있어 기억하기 싫은 굴욕적인 패배로 기록된다. 천 여명의 비정규 한국독립군이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일본 정규군을 박살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전투에서 많게는 2,300여명에서 적게는 900여명의 일본군 사상자가 나왔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이범석 장군이 결연한 의지로 기도하는 대상이 우리 민족 성정(性情)에 녹아 흐르는 삼신일체 하느님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먼저 그가 속해 있던 북로군정서를 보더라도, 1911년 만주에서 최초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의 후신이라는 점이다. 대종교 중광의 뜻을 계승하여 출발한 중광단은 대종교인들로 조직된 까닭에 신앙심(信仰心)과 애국심(愛國心)이 일치투합된 단체였다. 그 단체의 후신인 북로군정서도 자연히 그러한 정신적 토대를 계승하게 되는데, 당시 대종교 동도본사(大倧敎東道本司)가 북로군정서의 본부로 쓰였다는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닐 것이다. 대종교의 청년회원들도 모두 북로군정서에 편입되어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던 백포 서일 종사는 수전병행(修戰竝行)의 삶으로 일관한 인물로, 단체 구성원들에게 끼친 정신적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그러므로 돈독한 대종교인이었던 철기 이범석 장군도 생전에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군들이 대종교 신앙으로 굳게 뭉쳐 있었기 때문에 분열이나 의기소침이 없었다. 그리고 10월 3일 개천절이 되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빠짐없이 하늘에 제천을 올려 한배님(하느님)께 조국광복과 민족번영을 기원했다."
이렇게 볼 때 기전사가(祈戰死歌)는 이러한 수전병행 군교일치(修戰竝行 軍敎一致) 정신으로 노래된 것이다. 그리고 북로군정서의 이러한 정신 위에서 구현된 역사(役事)가 청산리전투다.
지금의 우리 민족은 위와 같은 정신으로 장렬산화(壯烈散華)한 대종교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