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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아피싯 웻차치와 태국 총리 (상)
Abhisit Vejjaj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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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싯 웻차치와(อภิสิทธิ์ เวชชาชีวะ)는 1964년 8월 3일생으로, 태국의 제27대 총리이자 현재도 재임 중인 인물이다. 아피싯 총리는 원래 2005년 2월부터 "민주당"(Democrat Party)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1991년 발생한 NPKC 군사쿠테타 이후 실시된 1992년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방콕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아피싯은 당내에서 빠르게 성장했지만 2001년 당수 경선에서는 패배했다. 그는 2005년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패배한 후 당수가 되었다.
"2005-2006 태국 정치위기" 당시에 아피싯은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국왕에게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총리를 교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에 대해 푸미폰 국왕은 매우 드물게도 대중적 연설을 통해 화답했다. 국왕은 "어명으로 임명된 총리에 대해 비민주적이라는 청원이 있었지만, 과인을 용서해달라.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불합리하다"고 답했다.(주5)
아피싯이 당수로 있는 동안 "민주당" 간부들은 탁신 총리에 대해 소위 "핀란드 음모"(Finland Plot)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탁신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아피싯의 민주당은 2006년 총선을 보이콧했다.(주6) 그는 같은해 발생한 "2006년 쿠테타"에 대해서 불쾌감을 표시하긴 했지만, 이후 일년간 태국을 통치하게 된 군사정권에 대해 저항하지 않았다.
검찰청의 한 조사부서는 2006년 총선을 보이콧한 민주당이 헌법적 위기 상황을 고조시키기 위해 여타 군소 정당들에게 뇌물을 준 혐의를 포착하고 민주당의 해산을 권고했다.
하지만 쿠테타 이후 새롭게 구성된 "헌법재판소"는 민주당의 뇌물공여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탁신 총리의 "타이락타이 당"(TRT)에 대해선 동일한 혐의에 대한 유죄를 인정하여 해산명령을 내렸다.
아피싯은 군사정권이 제정한 <2007년 헌법>을 지지하고, 그것이 <1997년 헌법>보다 진일보한 것이라고 말했다.(주7) 하지만 군사정권의 관리하에 치뤄진 "2007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친-탁신계 "국민의 힘 당"(PPP)에 패배했다.
이후 정치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태국 국민민주주의 연대"(People's Alliance for Democracy: PAD-일명: 옐로우셔츠) 운동의 지도자를 맡았다. PAD는 이후 6갸월이나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2008년 10월 7일에 진압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후 PAD는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과 "던므앙 공항" 등을 점거했다. 아피싯은 이러한 공항점거에 대해 유쾌하지 못하다는 목소리를 냈지만, 자신의 부총재들이 PAD 지도부를 그만두도록 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주8) PAD의 공항점거는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힘 당"(PPP)에 대해 해산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풀렸다.
이후 "네윈의 친구들 계파"(Friends of Newin Group)를 비롯한 여러 국회의원들이 PPP를 탈당한 후 새로운 정당들을 조직했고, "민주당" 당수였던 아피싯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국회 내 선거에서 총리로 선출됐다.(주9)(주10) |
아피싯은 세계경제위기와 국내 정치의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서 총리에 취임했다. 2009년 송깐(송크란, Songkran: 태국 전통 설날) 연휴에 "반독재 국가민주연합전선"(UDD: 일명-레드셔츠) 시위대가 "제4차 아세안 정상회담" 회의장에 난입했다.(주11) 시위가 방콕에서도 고조되자, 그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시위는 진압됐다.
하지만 UDD는 2010년 3~4월에도 또다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고, 새로운 총선실시를 요구했다. 아피싯은 이 시위가 불법적인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피싯 총리와 UDD 지도자들이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토론과 협상을 벌였지만, 새로운 총선일정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이후 시위대가 회기중인 국회에 난입하자, 아피싯은 그 다음날인 4월 8일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후 친-UDD 성향의 TV 및 지역 라디오 방송국들이 차례로 폐쇄됐다.
(사진) 2010년 5월 방콕의 레드셔츠 시위현장에서, 총상을 입은 동료를 호송중인 시위 참가자들의 모습.
4월 10일에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한 작전이 시도됐지만, 실패하여 일부 군인을 포함하여 총 24명이 사망하고 800명 이상의 부상자만 남긴 채 실패로 끝났다. 아피싯 총리는 4월 16일이 되자 시위대를 통제할 질서유지을 육군사령관(=참모총장)인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jinda) 장군에게 이양했다.(주12) UDD 지도자들이 3개월 이내 총선실시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아피싯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그는 5월 3일 TV 연설을 통해, 11월 14일 총선실시를 비롯한 "국가화합 로드맵"을 발표했다. 시위대는 이 안을 수용하면서, 추가로 군대의 철수와 유혈 진압작전과 관련하여 보안책임자의 경찰 출두를 요구했다. 아피싯은 로드맵 및 11월 14일 총선일정 외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5월 15일까지 시위를 중단하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하지만 UDD 시위대가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5월 13~19일 사이에 대규모 무력 집압작전이 펼쳐졌고, 5월 18일까지 사망자 85명과 부상자 1,250명 이상을 발생시켰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시위대가 점거한 집회구역(일명: 레드존-라차빠송 사거리) 주변에서 군대와 충돌하면서 발생했다.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는 "태국 정부가 비상사태 선포를 중립적이거나 야당 성향의 매체들을 탄압하는 데 이용하는 점이 개탄스럽다"고 밝혔고, "태국 언론인협회"(Thai Journalists Association)는 정부가 소유한 TV 방송국들이 "편파적인 정보"를 전달한다고 비판했다.(주13)(주14)(주15)(주16)(주17)
아피싯 총리는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가 매체들의 검열과 푸미폰 국왕 및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위원회)의 정치적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을 기소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밀원" 위원인 깜톤 신타와논(Kamthon Sindhavananda, กำธน สินธวานนท์) 예비역 공군소장은 아피싯 총리가 불경한 무리에 대해 대처를 너무 느리게 한다고 비난했다.(주18)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2010년 보고서>에서 아피싯 총리의 발언들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면서도, 실제의 행동에 대해서는 평가절하 하면서 "태국 정부는 인권존중 및 법치적 절차를 지속적으로 갉아먹고 있다"고 지적했다.(주19)
아피싯 총리 정권에서는 정부 부문의 부정부패 사건들이 수없이 발생했다. "사회개발 인간안정부" 장관인 위툰 남붓(Vitoon Nambutr, วิฑูรย์ นามบุตร)이 홍수 이재민들을 지원할 품목으로 썩은 생선통조림을 구매하여 사임했고, 보건부장관이었던 위타야 깨와파라다이(Vittaya Kaewparadai , วิทยา แก้วภราดัย)는 대규모 경기진작 사업인 <강력한 태국>(Thai Khem Khaeng) 진행과정에서 과도한 지출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사임했다.(주20)(주21)
아피싯 정부는 캄보디아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기도 했다. PAD(옐로우셔츠) 지도자 중 한사람인 까싯 삐롬야(Kasit Piromya)를 외무부장관으로 임명한 일,(역주) 양국 국경에 위치한 쁘레아위히어(Preah Vihear) 사원 주변에서 발생한 무력충돌, 탁신 전 태국 총리의 캄보디아 정부 경제자문위원 위촉 등이 그러한 사안들이다.
(주1) Powell, Sian (2008-12-15). "British-born Abhisit Vejjajiva is Thailand's new Prime Minister", London: Times Online.
(주2) Percival, Jenny (2008-12-15). "Thai opposition leader becomes PM", London: Guardian.co.uk.
(주3) The Nation, "Abhisit, Chuan's young protege gets his turn at last".
(주4) Los Angeles Times, "Thailand parliament chooses economist as prime minister".
(주5) 푸미폰 국왕의 정확한 발언 내용은 "การขอนายกฯพระราชทานไม่ใช่การปกครองระบอบประชาธิปไตย เป็นการปกครองแบบ ขอโทษนะ แบบมั่ว แบบไม่มีเหตุมีผล"이다. --- "HM the King's April 26 speeches", The Nation. 2006-07-05 접속.
(주6) Straits Times, "In for 'roughest ride'", 2008-12-15.
(주7) The Nation, "Draft gets Democrats' vote", 2007-7-9.
(주8) The Economist, "New face, old anger", 2008-12-18.
(주9) The Nation, "“สนธิ” เปิดใจครั้งแรก เบื้องลึกปมลอบยิง โยงทหารฮั้วการเมืองเก่า", 2009-5-1.
(주10) The Telegraph, "Thai army to 'help voters love' the government", 2008-12-18.
(주11) Korea Times, "Class War in Thailand", 2009-4-17.
(주12) AP, "Thai army chief takes charge of restoring order", 2010-4-16.
(주13) Prachatai, "SEAPA troubled by Thailand's clampdown on TV station, websites; free expression gravely threatened under state of emergency", 2010-4-9.
(주14) Reporters Without Borders, "Government uses state of emergency to escalate censorship", 2010-4-8.
(주15) The Nation, "Sondhi's son alleges "Gestapo" behind his father's assassination attempt".
(주16) Spiegle, "I'm Like a Rat", 2009-4-20.
(주17) John Heilprin (Associated Press) (2009-4-22). "Thai diplomat accuses ousted leader in shootings". Taiwan News. "http://www.etaiwannews.com/etn/news_content.php?id=926672&lang=eng_news".
(주18) Bangkok Post, "PM pledges new drive to protect King", 2010-2-7.
(주19) The Nation, "Abhisit sets human rights record poorer : HRW".
(주20) Bangkok Post, "Witoon quits over fish", 2009-2-4.
(주21) Thai-Asean News Network, "New Health Minister to be Named after New Year", 2009-12-29.
(역주) 까싯 삐롬야는 평소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에 대해 "조폭"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한 인물이다. |
1. 가족사항 및 성장과정
아피싯 총리는 1964년 8월 3일 영국의 뉴캐슬(Newcastle upon Tyne)에서 출생하여, "이튼 학원"(Eton College)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후 "옥스포드 대학"(Oxford University)의 "철학, 정치학, 경제학 통합과정"(PPE)에서 제1등급 우등생으로서 학사학위를 받은 후, 동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주23) 그는 태국어와 영어 모두가 매우 유창하다.
(사진) 아피싯 총리의 부친인 아타싯 웻차치와 씨.
아피싯의 부친 아타싯 웻차치와(Athasit Vejjajiva, อรรถสิทธิ์ เวชชาชีวะ)는 "런던 대학"(Lodon University)의 "가이즈병원 의학부"(Guy's Hospital Medical School)에서 1959년 의학학위(MB,BS)를 취득한 후, 3년 뒤에 영국 일반의 자격(MRCP)을 획득한 내과의사이다. 아타싯 씨는 "마히돈 대학"(Mahidol University) 총장을 역임한 바 있고, 1991년 발생한 NPKC 군사쿠테타 지도부에 의해 보건부 부(副)-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아피싯 총리의 증조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증조부의 형인 롱 웻차치와(Long Vejjajiva หลง เวชชาชีวะ 혹은 Phra Bamrad Naradura)는 약 50년 전에 보건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주24) 부친인 아타싯은 "태국 왕립학술원"(Royal Institute of Thailand: RIT, ราชบัณฑิตยสถาน) 원장도 역임한 바 있는데, 아피싯이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태국 최대의 기업집단 중 하나인 "짜른 폭판 그룹"(Charoen Pokphand Group, เครือเจริญโภคภัณฑ์: CP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태국 최대의 축산 및 수산업 기업인 "짜른폭판 식품"(Charoen Pokphand Foods: CPF) 사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대가족 오너가 소유한 "짜른폭판 그룹"은 농업, 유통, 이동통신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이다.(주25)(주26)
(사진) 1986년, 젊은 시절의 아피싯 총리와
부인 핌뻰의 연애시절 모습.
웻차치와 가문은 객가어(客家話, Hakka) 사용 화교계 가문으로, 최소 18세기 후반부터 태국의 지배층 엘리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유력 가문이기도 했다.(27)(28)(29) 웻차치와 가문의 중국 성씨는 "유안"(袁)이다.(주30)(주31) 이들이 "웨차치와"(Vejjajiva)란 성씨를 사용하게 된 것은, 라마 4세 국왕의 치세 때 롭부리(Lopburi) 지방에 거주하던 의사인 동시에 군장교(중위)였던 롱 웻차치와 박사에 대해, 그 자신과 부친, 그리고 조부에까지 소급시켜 이 성씨가 하사되면서부터였다.(주32)
아피싯은 동갑내기인 삠펜 사꾼타파이(Pimpen Sakuntabhai: 1964년 8월 5일생)와 결혼했다. 그녀는 쭐랑론꼰 대학을 졸업했고, 치과의사를 하다가 현재는 "쭐라롱꼰 대학"(Chulalongkorn University) 수학과 강사로 재직중이다. 그녀의 부친은 "탐마삿 대학"과 "쭐라롱꼰 대학"의 정치학 교수를 지낸 퐁펜 사꾼따파이(Pongpen Sakuntabhai, พงศ์เพ็ญ ศกุนตาภัย) 씨이고, 모친은 방콕 부시장을 지낸 빠빠삠 사꾼따파이(Prapapim Sakuntabhai) 씨이다.
아피싯 총리 부부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장녀인 빵 웻차치와(Prang Vejjajiva, ปราง เวชชาชีวะ: 1990년 12월 28일생)와 아들 빤나싯 웻차치와(Pannasit Vejjajiva: 1993년 8월 9일생)이다.
아피싯의 형제로는 2명의 누나들이 있는데, 소아정신과 의사인 얼리사 와차라신투(Alisa Wacharasindhu, อลิสา วัชรสินธุ)와 왐판 웻차치와(Ngarmpun Vejjajiva, งามพรรณ เวชชาชีวะ: 1963년생)이다.(주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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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큰 누나인 얼리사 와차라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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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작은 누나인 작가 왐판 웻차치와.
태국 저작권협회 사무국장이다. |
2. 정계입문
1991년, 자칭 "국가평화유지위원회"(National Peace Keeping Council: NPKC)라 불리는 군부 내 세력이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아피싯의 부친 아타싯 웻차치와는 보건부 부(副)장관에 임명됐다.(주34)(주35) 이후 1992년 실시된 총선거에서 아피싯은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자신의 정치적 경력을 시작했다(28세). 그는 이후 1995년 총선과 1996년 총선에서 게속해서 재선됐다. 그는 2001년 총선과 2005년 총선에서는 "민주당"의 정당명부제(=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민주당 대변인, 정부 대변인, 총리실 사무부총장,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장, 총리실 장관(=비서실장+관방장관)을 거쳤다.
아피싯에 대해서는 때대로 잘생긴 외모에 의존하여 자신의 경력에 활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 소속 동남아 전문 경제학자 다니엘 리안(Daniel Lian)은 탁신 전 총리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아피싯이 잘 생긴 용모 외에, 태국 국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주36) 하지만 태국의 보수 영자지로 "민주당" 지지 성향을 가진 <네이션>(The Nation) 지는 그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아피싯의 무기는 순수한 몸가짐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라며 변론하기도 했다.(주37)
3. 민주당 당수
2001년 민주당 당권경쟁에서, 아피싯은 노련한 정치인인 반냣 반탓탄(Banyat Bantadtan, บัญญัติ บรรทัดฐาน)에게 패했다. 하지만 2005년 총선에서 반냣 당수는 탁신의 "타이락타이 당"(TRT)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기록했다. 결국 반냣은 사임했고 아피싯이 그 뒤를 이었다.
3.1. 탁신 파동
탁신 총리가 2006년 2월 25일 조기총선을 실시할 것을 예고하자, 아피싯은 "자신이 바람직한 통치(good governance)와 윤리적 자세, 그리고 권위적이지 않은 모습의 총리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다음날의 발표에서, "민주당" 및 여타 야당들이 선거를 보이콧할 것이라 말했다. 아피싯의 "민주당"은 반한 실빠-아차(Banharn Silpa-Archa) 전 총리가 이끄는 "태국민족당"(Thai Nation Party) 및 사난 카쫀빠삿(Sanan Kachornprasart, สนั่น ขจรประศาสน์) 예비역 소장이 이끄는 "마하촌 당"(Mahachon Party, พรรคมหาชน: 위대한 국민당)과 공조하여, 새로운 총선이 "적법성을 결여"했고, 탁신 일가가 "친 코포레이션"(Shin Corporation) 주식을 싱가포르 정부의 투자회사인 "테마섹 홀딩스"(Temasek Holdings)에 면세로 매각한 일에 대한 "여론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피싯은 또한 단기간에 총선을 실시하는 것은 "탁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선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 아피싯 총리 부부와 자녀들.
탁신 총리의 TRT는 아피싯이 상상한대로 2006년 4월 총선에서 사실상 경쟁상대가 없을 정도로 압승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강세인 지역에서 투표율이 20%가 넘지못한 곳들이 발생하여, 이러한 선거구들은 헌법에서 규정한 최소한의 투표율에도 미달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러한 선거구들에서 보궐선거를 실시키로 결정하고, 최초 선거를 보이콧했던 정당들도 보궐선거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선관위가 새로운 정당들을 보궐선거에 나서도록 할 권리가 없다면서 선관위를 고발했다. 헌법에 따르면 선거 후 30일 이내에 정부를 구성해야 됐지만, 궐위된 의석들 때문에 정부가 구성되지 못해 헌법적 위기 상황이 발생할 상황이 되었다.
3.2. 2006년 총선 부정선거 혐의
TRT는 "민주당"이 2006년 4월 총선에 군소정당들도 보이콧하는 데 참여하도록 뇌물을 주었다고 고소했다. "민주당"은 이러한 혐의를 부정했고, "2006년 쿠테타"가 발생한 후에 이뤄진 헌법재판소의 재판을 통해 2007년 5월 30일 무죄 선고를 받았다.
2006년 7월 28일, 차이까셈 니띠시리(Chaikasem Nitisiri, ชัยเกษม นิติสิริ) 법무부 부(副)장관이 이끌고 11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는, 2006년 4월 2일 총선 보이콧 문제와 관련하여 발견된 증거들을 토대로, "민주당"과 "타이락타이 당"(TRT), 그리고 여타 3개 정당들에 대해 해산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주38)(주39)
2006년 9월 쿠테타가 있고 나서 진행된 2007년 2월의 헌법재판 과정에서, 2006년 4월 총선 당시 "진보민주당"(Progressive Democratic Party) 소속 후보자들이 증인으로 나와, 총선에서 기만을 당해 후보직을 사퇴했다고 증언했다.(주40) 또한 3인의 증인들도 출석하여 "민주당" 지도부였던 타원 센니얌(Thaworn Senniam, ถาวร เสนเนียม), 위랏 깔라야시리(Wirat Kalayasiri, วิรัตน์ กัลยาศิริ), 쭈어 라차시(Jua Ratchasi)가 총선 후 치뤄진 보궐선거 당시, 시위대를 선동하여 후보등록을 방해했다고도 증언했다.
검찰은 "민주당"이 선거무효를 만들려고 했고, 보궐선거에서도 이러한 일을 지속했다고 주장했다.(주41) 반면 변호인은 TRT가 증인들을 매수하여 "민주당"을 음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마침내 판결을 통해 "민주당"에 드리워진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리고, 반면 탁신의 TRT에 대해서는 동일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여 해산명령을 내렸다.(주42)(주43)
(주38) The Nation, "Bangkok's Independent Newspaper".
(주39) The Nation, "OAG proposes dissolution of Democrat, Thai Rak Thai, 3 other parties", 2006-7-27.
(주40) The Nation, 2007-2-2.
(주41) The Nation, "Witnesses link Democrats to registration delay", 2007-2-23.
(주42) The Nation, "Historical rulings unfold", 2007-5-30.
(주43) The Left/Right Debate, "Thai Tribunal: Democrat Party Cleared Of Electoral Violations (Nasdaq)", 2007-5-30. |
3.3. 야당 시절의 정책적 기조
2006년 4월 29일, 아피싯은 "민주당" 연례 전당대회에서 총리 후보로 나설 것이라 발표했다. 그는 교육 부문에 초점을 맞춘 "국민을 위한 의제(agenda for people)를 공약했다. 그는 "국민을 최우선으로"(Putting People First)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운동에 들어갔다. 아피싯은 또한 전력과 상수도 같은 분야를 민영화시키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고, 탁신이 이미 민영화시킨 기업들도 국유화시킬 것이라 다짐했다.(주44) 소위 "탁시노믹스"(Thaksinomics)라 불렸던 탁신의 경제정책 핵심 의제들에 관해, 아피싯은 "30바트 의료제도, 부락기금(Village Fund), 대/중/소 기금(SML) 정책 등은 폐지시키진 않겠지만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피싯은 나중에 탁신이 취한 30바트 의료제도를 완전 무상 의료제도로 바꿔야만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주45)
아피싯은 "민주당" 소속 의원 전원에 대해 재산등록 및 사기업에 연관된 내용을 공개토록 할 것이라 발표했다. 이것은 원래 법적으로는 내각 각료들에만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국회의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주46)
아피싯은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도 몇몇 개요들을 밝혔다. 여기에는 국영기업인 PTT(국영석유가스공사)의 배당금을 인상시켜 석유기금의 채무를 변제토록 하고, EGAT(태국전력공사)로 하여금 치솟는 유가의 충격흡수를 분담시키는 방안도 들어있었다.(주47) 그는 나중에 석유기금 유지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부과된 석유소매가 1리터 당 2.5바트씩의 세금을 폐지시키는 방안도 내놓았다.(주48)
아피싯은 2006년 7월 13일 고조되고 있던 태국 남부의 폭력사태와 관련하여, 남부지방이 처한 문제들에 대한 공약들을 내놓고 긴장해소를 약속했다.(주38) 그는 또한 무상교육과 교과서, 우유의 제공, 간호학교 학생들을 위한 보충급식제, 최저임금의 인상과 같은 대중주의적 정책들을 발표하기도 했다.(주49)
(주44) The Nation, "Abhisit vows fresh start, honest govt", 2006-4-30.
(주45) "BBC Profile".
(주46) The Nation, "Abhisit announces candidacy for PM", 2006-4-29.
(주47) The Nation, "Can Abhisit lead Thailand?", 2006-5-30.
(주48) The Nation, "Economy to be the top priority for Abhisit govt", 2008-12-29.
(주49) The Nation, "Abhisit pressures PM to TV debate", 2006-8-7. |
3.4. 2006년 군사 쿠테타
2006년 9월 19일, 예정됐던 총선을 불과 몇주 앞둔 시점에서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아피싯은 모든 정치행위가 금지되기 몇 시간 전에 이 쿠테타에 대한 소감을 피력했다.
우리는 어떠한 초 헌법적 변화도 지지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이미 발생했다. 태국은 진보해왔고, 이제 쿠테타 지도자들이 전진적인 방향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은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국민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스스로 약속한 개혁조치들을 이행하는 것 뿐이다. 그 점을 몸소 보여주어야만 한다. 나는 모든 제한조치들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해제되길 바란다. 새로운 헌법을 작성할 필요는 없으며, 필요할 경우 1997년 헌법을 수정하면 되는 것이다. 1년이나 걸릴 이유가 없다. 6개월이면 좋다고 생각한다.(주50) |
아피싯은 군부가 임명한 과도총리인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예비역 장군에게 전적인 협조를 약속했고,(주51) 군사정권이 만든 <2007년 헙법> 초안에 대해서도 "둘 중 덜 나쁜 것"이란 이유를 들어 지지를 했다. 그는 "민주당" 입장에서는 새로운 헌법이 <1997년 헌법>과 유사한 것이지만, 결점을 많이 보완한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국가안보평의회"(Council of National Security: CNS - 군사정권 지도부)를 만족시키려면 그 초안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평의회가 독자적인 포고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초안을 거부하게 되면, 평의회에 권력을 이양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익을 고려하고 민주주의가 조속히 복원되길 원하기 때문에, 초안을 제출할 것이다.(주7) |
아피싯은 새로운 헌법의 결점을 인정하면서, 만일 자신이 정권을 잡게 되면 여타 정파들과 협력하여 헌법을 개정할 것이라고 약속했다.(주52)
3.5. 2007년 12월 총선
쿠테타 이후 새롭게 선포된 헌법에 따라 실시된 2007년 12월 총선에서, 친-탁신계 사막 순타라웻(Samak Sundaravej)이 이끈 "국민의 힘 당"( People's Power Party: PPP)이 6개 정당 연합을 통해 승리를 하자, 아피싯의 "민주당"은 다시금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 2008년 1월 28일 국회에서 실시된 총리선거에서 아피싯은 163표를 얻어, 310표를 획득한 사막에게 패했다.(주53)
3.6. 총리로의 선출
2008년 9월 9일, "헌법재판소"는 사막 순타라웻 총리가 총리로 선출된 후에도 계속 TV 요리쇼에 출연하여 출연료를 받음으로써, 사적인 이익추구 금지를 위반했다며 총리직 해임을 결정했다. 이후 9월 17일에 국회 내에서 새롭게 총리선출 투표가 진행됐지만, 아피싯은 163표를 얻는 데 그쳐 298표를 획득한 탁신 전 총리의 매제이기도 한 PPP의 솜차이 웡사왓(Somchai Wongsawat)에게 패하고 말았다.(역주)(주54)
2008년 12월 2일, PAD(옐로우셔츠) 시위대가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하고 있는 와중에 진행된 선고공판을 통해, "헌법재판소"는 PPP를 비롯한 연립여당 구성 정당들에 대해 해산명령을 내림으로써, 아피싯의 민주당 정권이 탄생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헌법재판소"는 또한 PPP 당직자 한 사람이 개입된 사건에 솜차이 총리도 연루됐다고 인정하여, 그에 대해 총리직 해임 및 5년간 정치활동 금지도 결정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솜차이 총리의 연립정부가 붕괴하고 "국민의 힘 당"(PPP)도 해산을 하게 되자, 많은 국회의원들이 "민주당" 쪽으로 전향하며 새로운 동맹세력이 구축되었다. 이러한 전향자들 중에는 PPP의 후신으로 새롭게 탄생한 "프어타이 당"(Puea Thai) 소속 의원들도 있었고 --- 특히 PPP 중에서도 "네윈의 친구들"(Friends of Newin) 계파 --- 역시 PPP와 함께 해산을 당한 사난 카쫀빠삿(Sanan Krachonprasat, สนั่น ขจรประศาสน์)이 이끌던 "찻타이 당"(Chart Thai Party) 및 "중도 민주당"(Neutral Democratic Party) 소속 의원들도 있었다. 또한 "태국 단결국가개발 당"(Thais United National Development Party)도 이같은 움직임에 편승했다.(주55) 이렇게 확장된 "민주당" 주도의 연합은 이제 아피싯을 총리로 선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주56)(주57)(주58) 태국 국회는 2008년 12월 15일 임시투표를 열어, 아피싯을 총리로 선출했다.(주59)
(역주) 2006년 쿠테타 이후에도 친-탁신계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고, 2번이나 총리를 배출했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인해 권력을 상실했다. 그것은 헌법재판소와 선거관리위원회 등 헌법기관들과 사법부가 쿠테타 직후 임명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등 여전히 군부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54) The Nation, "Somchai elected new prime minister".
(주55) The Nation, "Democrats claim majority to form government", 2008-12-7.
(주56) The Nation, "Newin embraces Abhisit, but rejecting Thaksin "was tough"", 2008-12-10.
(주57) The Nation, "Abhisit poised to be PM as democrats seek house vote", 2008-12-8.
(주58) BBC News, "Thai opposition 'set for power'", 2008-12-10.
(주59) BBC News, "New Thai prime minister elected", 2008-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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