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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ROTC 11기 임관30주년 기념책자에 기고한 초안입니다.
잊지 못할 이포(李砲)의 에피소드
박 종 완
"속초가서 녹초되고 거진가서 거지되어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우리가 광주 보병학교의 병과교육을 마치고 9기, 10기선배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한 곳은 강원도 인제군 원통의 칠성고개 아래에 있는 보충대였다. 별이 일곱이나 죽어 칠성고개라 불리운다는 우스개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바로 산너머엔 북한군이 인접해 있는줄 알고 우린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춘천가는 열차 중간에 청평, 가평에서 내리던 동기들이 무척 부러웠었다.
보병학교에서 16주간의 병과교육을 마치던 그날 밤 우리 동기들은 배치받은 사단의 위치에 따라 후방 1,000원, 서부전선 500원, 동부전선은 입만 가지고 회식을 하였었다. 기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거기서 거긴 데도 서로 조금이나마 위로하려 차이를 두었던 것인데 우리는 지금 동부전선하고도 최전방에 온 것이다. 다음날 소속부대 사단장께 신고한 후 연대 배치를 받고나니 동해안 경비 연대는 고사하고 제일 험하다는 향로봉 연대였다.
이 연대에는 같은학교 출신 동기인 화제의 인물 이포(李砲)와 같이 배치됐다. 그 친구의 별명은 후보생 시절부터 이포였는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나하면 가히 입만 뻥끗하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쏟아내는 그의 모든 입담이 타의 상상을 초월할 구라이기 때문이었다. 후보생 시절 그렇게도 명예위원장이 부러웠던지 단복에 똑딱이 단추를 붙이고 "대한민국 학군단 총명예위원장"이란 견장을 띠었다 부쳤다 하던 친구였으니 더 이상 뭘 소개하여야 할까마는 그에 관해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기도 안차는 일화가 더 있으니 30년이나 지난 지금, 어찌 그걸 밝히지 않으랴.
ROTC 동기중 최단시간 휴가 기록
사흘간의 전방 예비교육중 취침나팔이 울리면 그 친구와 나, 둘이는 슬며시 팬티바람에 나와 그곳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내가 “보이는 하늘면적이 열평이나 되냐?”하며 푸념의 한숨을 쉬면 자긴 잘 버틸 수완이라도 있는 듯이 “너나 뺑이 치지, 난 괜찮아”하고 예의 넉살을 부리며 비웃던 그 친구였다. 어쨌던 예비교육대에서의 성적은 우리 연대가 제일 꼴찌였다. 이를 안 연대장은 차도 보내지 않고 ‘구보로 오라’ 했고 우린 몇킬로의 신작로 길을 처음부터 뛰어 가는 것으로 연대장과의 상경례를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꼴찌를 한 배경에는 이포도 한몫 단단히 했을게다. 연대에서 이포는 1대대, 나는 3대대로 배치되었다. 같은 대대에 갈 요량으로 1대대에 배치된 동기생에게 바꾸자니 중화기 중대라 못 바꾸겠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게 말이나 되는 제의인가? 우린 그 자리에서 헤어졌지만 이포란 그 친구는 며칠사이 서울로 휴가를 다녀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친구 연대장에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구라를 쳤다고 한다. 연대장 신고를 마친 직후 혼자 연대장을 쫓아간 그 친구, “연대장님께 용무있어 왔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서울을 좀 다녀가라고 하셨습니다. 선처하여 주십시요! 당백!” “자네 부친이 누군데 부임 첫날부터 서울을 나오라 하는가?” “예! 저희 아버님은 이xx 중장이십니다!” “뭐라고?! 그런 사실 보고 받은 적 없는데???” 좌우지간 즉각 인사관을 불러 정신없이 휴가조치부터 시킨 연대장은 그 친구가 귀대하는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 부대 정문에서 권총을 차고 벼르고 있었다는데, 신원확인을 통해 아버지가 지방도시에서 사업하는 것이 다 들통이 나 버렸지만 이미 휴가를다녀온 다음인데 어쩌랴. 한방 쪼인트 까지는 것으로 그 엄청난 구라의 댓가는 치뤘지만... 그러나 그 친구, 11기 ROTC중 최고로 빠른 시일에 휴가를 다녀온 신기록을 세운 것만은 확실하다.
소위 깃발 매달고 구호까지 바꿔
이포란 별명답게 엉뚱한 짓을 저질렀던 일화는 또 있다. GOP로 최전방에 배치됐던 그 친구는 소대장에 부임하자마자 병사들 내무막사 옆에 있던 자기 막사에 깃발을 매달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장군기처럼 빠알간 색깔의 다이아몬드 계급장이 그려진 소위 깃발이다. 그는 전령을 시켜 아침에 자기가 옷을 입고 나오면 그 깃발을 게양토록 했고, 오후 근무가 끝나는 시간에는 하양식을 갖고 깃발을 내렸다. 또한 당시 ‘당백’이었던 사단 구호를 자신의 기풍답게 ‘화끈’이라고 바꾸고 자기 구역내에서는 그걸 사용토록 명령했다고 한다. 경례를 할 때마다 ‘화! 끈!’. 소대장 화답도 ‘화끈!’ 한동안 그 소대 구역내에서는 화끈소리가 하늘을 찔렀겠지. 그것이 얼추당추나 한 일이냐마는 상관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물론 그냥 넘어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병사들 습관이 어디 딴 곳으로 가느냐고? 사건은 크게 터지고 말았다. 휴가를 가기 위해 신고를 하려 연대본부에 간 그 친구의 소대 병사들. 연대장 1호차가 지나는 순간, ‘확!! 끈!!’하는 경례소리에 화들짝 놀란 연대장이 차를 세우고 병사를 불러 세우니 다시 ‘확!! 끈!!’. 병사가 실수를 근방 알아채고 “아닙니다! 당백입니다!”하고 반복했지만 일은 이미 벌어지고 말았다.
기가 막힌 연대장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먼치에서 펄럭이고 있는 깃발. 구호를 소대장이 바꿨다는 것을 직접 확인코자 몇시간을 짚차로 달려 왔건만, 기가 막히는 광경을 또 목격하고 말은 것이다. 소대 막사에 들어선 연대장의 귀엔 연신 ‘동작그만! 확!! 끈!!’ 또 ‘확!! 끈!!’이었다. 빠알간 다이아몬드 문양의 소위 깃발도 연대장의 눈을 비키지 못했다. 연대장의 일보 앞에 불려 선 그 친구... “야 임마! 너 정신 나갔어?! 연대장도 없는 깃발을 달아 놓칠 않나, 사단장도 못 바꾸는 사단 구호를 니가 바꿔?!” 이 웃지못할 실화는 ‘을지부대에서 그걸 모르면 간첩이지’라는 일화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행군 힘들까봐 뻥쳐줘
이후 들려오는 그 친구의 기행(奇行)은 계속 화제중의 화제였다. 얼마나 재주가 비상하냐하면 연탄수송, 배추수송 차만 오면 이 친구가 선임탑승을 하고 온다. 어떻게 된거냐 물으면 학군단 3기인 연대 보급관에게 그런 일은 자기가 적임이라고 구워 삶아 소대를 내팽개치고 왔단다. 아마 소대원들이 소대장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아사비사 할테고 그 소대 선임하사는 소대장 노릇 대신하느라 꽤나 고생을 했었을게다.
그 후 나는 GOP로 올라가게 되었고 6개월 후엔 1대대와 교체를 하게 됐다. 우리 소대막사에 나를 찾아온 이포는 대뜸 “전방에 오다가 연대에 들렸더니 너 후방특명이 났더라”고 전했다. "이포야. 나한테만큼은 제발 포 좀 쏘지마라"했더니 틀림이 없단다. 후방의 다른 사단으로 간다니 서둘러 야전복을 비롯해 자질구레한 소품 그 친구에게 다 넘겨주고, 이틀이나 걸리는 예비대까지 정신없이 내려왔다. “향로봉아〜 산머리 곡산아 〜 내 니 얼굴 다시는 안볼거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행군하던 그 시간동안은 정말 하늘을 날러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려온지 며칠이 지나도 연대에선 아무 연락이 없었다. 뚜뚜삐삐 알아보니 연대에선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단다. 전방으로 딸딸이를 돌려 "야 이포야!!! 너 죽을래? 왜 나한테 구라친거야?" 대답인 즉슨 엄동설한에 이틀간 행군하며 올라오는데 너무 힘들어 나 편히 내려가라고 뻥 쳐 준거란다. 어이가 없지만 그냥 웃고 넘길 수 밖에...
그 후 나는 사단 연락장교로 나오게 됐고 그 친구는 계속 소총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원통에서 자주 만났다. 이유인즉슨 ‘제3차 신경통’이라는 병명으로 후송생활중이라는 것이었다. 전방생활은 못하겠고 갖다붙인게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제3차 신경통’이라니 이 요령꾼을 누가 말리랴.
거기엔 몇 명의 같은 대학 출신의 군의관들이 이 친구에게 두손발 다 들고 협조해 주었기 가능한 일이었다. 후송생활중엔 서울행이 잦아져 당시 볼품없던 투구형의 작업모는 미군의 납작한 빵떡모자에 중위 계급장이 얹혀져 다른 부대 동기생들은 카튜샤 장교로 전입온 줄 알았단다.
마지막 구라 “정보부 취직”
세월이 흘러 전역을 앞두고 열린 연대장 환송연에서의 일화는 또 빼놓을 수가 없다. 다들 취직시험 본다고 휴가들은 다녀 온지라 다들 취직 보고를 하는데 연대장이 "이 중위도 어디 취직됐나?" "연대장님 저 우습게 보지 마십시요. 저 3국에 배치됩니다" 연대장이 놀라 “어딘데?” “이래뵈도 저 중앙정보부에 취직됐습니다” “어잉, 3국이 뭐 하는덴데?” “그건 비밀상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연대장님과 곧 만나 뵐 기회가 있을 겁니다” 회식이 끝난 후 "연대장님! 저 원통 나갈때 차좀 빌려 주십시요" 연대장이 쾌히 승낙했다. 1호차를 둘이 타고 나오며 "이포야. 너 3국이 어딘지 정말 아냐?" "이문동 3국도 모르냐? 거기가 군 담당이야" 연대장이 마지막으로 또 그 친구 구라에 넘어간 것이다. 사단 전역신고를 마치고 하숙집 인사도 못했는데 그 친구가 그냥 인제로 가서 서울로 가잔다. 나중에 알고보니 목욕탕 때밀이한테 깔아놓은 외상값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대와 함께 모든 것이 다 ‘빠이빠이’였다.
이포는 사회에 나와 캐나다로 떠나 지금은 가끔 고국을 찾는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만나면 그 때 이야기에 둘은 배꼽을 잡는다. 지금 다시 하라면 멍석을 깔아 놓아도 못할 일들이지만 그 때는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였고 그의 두꺼운 얼굴덕에 가능했으리라.
이포야! 보고싶다.그리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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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솜씨도 좋으시지만..너무 웃다가 눈물납니다. 아마 그 이포님이 사업도 잘 하실것 같습니다..남자는 배짱이라 했는데 무슨 일이든 잘 밀고 나가셨을겁니다.ㅎㅎ
그래서 젊음이 좋다고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분~ㅋ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배짱두둑하고 멋진 젊은이였군요.그때의 친구분들 그 시절을 생각하시면 그때의 젊음으로 잠시 나마 돌아가 이루 말할수 없이 즐겁겠어요...이포님 영원한 전설을 남기셨서 저도 글을 읽는 내내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웃게 해 주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