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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두 가지 인생관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 연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4).
11장에는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짧은 묘사가 모여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큰 고난과 박해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분발시키고자 이 장을 썼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따를 본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가르침이자 역사입니다. 역사의 큰 가치는 가르침이 어떻게 적용되고 실천되는지 보여주는 데 있으며, 우리가 가진 것이 다만 이론만이 아님을 일깨워 주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고찰할 인생관은 이미 검증과 시험이 끝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았던 강하고 비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해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습니다.
대부분 동의하듯이, 11장에 나오는 이들은 가히 탄복할 만한 인물들로 역사에 우뚝 서 있습니다. 이들은 마땅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이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들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역사에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삶에 패배하지 않고 승리했으며, 그 때문에 영웅들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살펴보며 교훈을 배워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아벨과 아브라함과 노아와 모세를 비롯하여 11장에 열거된 인물들의 이름이 알려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과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똑같은 육신과 연약함과 문제를 가지고서도 다른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상황에 아주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기에 거대한 산봉우리처럼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다르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요? 대다수 무명의 실패자들과 달리 이들이 세상의 삶에서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기질의 문제로 설명하고 싶을 것입니다. 특별히 낙관적이고 낙천적이며 희망적인 인생관을 가졌기에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삶은 힘들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비관적이고 절망적이며 냉소적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특별히 회복력이 빠른 본성을 타고나서 그런 흐름에 맥없이 휩쓸리지 않은 것일까요?
그 대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11장의 이야기와 구약성경에 나오는 더 긴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이들의 기질이 서로 얼마나 달랐는지 한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모세와 아브라함 같은 이들 예를 들기 위해 제가 임의로 고른 두 사람을 보십시오. 기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것입니다. 다윗이나 바락이나 입다나 기드온 같은 인물들도 보십시오. 이들 역시 각기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질로는 이들의 삶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심한 어려움과 시련을 겪지 않아서 그렇게 성공적으로 산 것이겠지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당신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온실 속에서 자란 이들이 많잖아요. 보호를 받으며 자란 이들이 많지요. 당신들도 나같이 고생하고 나 같은 문제를 겪었다면. 하면서 쉽게 기독교의 주장을 불신해 버립니다. 이처럼 너무 혹독한 삶에 짓눌려 기독교의 관점과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 말하는 자들이 그리스도 밖에 많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얼마나 심한 시련을 당했는지 알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힘든 시간을 보내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11장을 썼습니다. 요컨대 "이 믿음의 영웅들을 보라. 이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보라. 어떤 곤경에 직면했으며 어떤 싸움을 싸웠는지 보라. 그럼에도 그들은 모든 어려움을 딛고 승리했다"라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대체 무엇일까요?
장차 우리의 상황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무슨 일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불확실성이 삶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국가나 국제관계나 정치나 경제적인 의미에서만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인간관계도 불확실합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삶은 우리의 끈기를 가혹하게 시험하는 어렵고 고되고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은 이 모든 공격과 시험 속에서도 영광스럽게 승리하며 살았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이 말은 죽음의 순간에도 믿음이 낳은 소망으로 충만했다는 뜻입니다.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낙담과 절망 가운데 죽지 않았습니다. 임종의 순간에 “이 소망을 붙잡았지만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잘못 생각했던건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승리자로서 확신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끝까지, 죽음을 넘어서까지 굳센 믿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짓눌리지 않고 모든 것을 딛고 일어나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대체 무엇일까요?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말할 수 있는 첫번째 특징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달리 삶과 그 의미 및 목적에 대한 주변 세상의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1장뿐 아니라 히브리서 전체가 지적하는 요점이 이것입니다. 예컨대 노아를 보십시오.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그는 남들과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대다수 이웃들과 같은 관점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 같은 관점을 취했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 다른 관점을 받아들였고 그 관점에 따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태어났음에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히 11:8). 그는 기꺼이 안정된 삶을 버리고 불확실한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모세 같은 인물도 보십시오. 바로의 딸의 아들로 자라 전도가 유망했음에도 그 모든 것을 등지고 노예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에는 그 당시 천한 직업이었던 목자가 되었습니다. 왕궁에서 편하고 사치스럽게 자라난 사람이 어디까지 몰락했는지 보십시오. 왜 이렇게까지 몰락했습니까? 주변 사람들과 다른 인생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은 이런 의미에서 유일무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시각과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분석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상은 두 무리 기독교적 인생관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입니다. "모든 비그리스도인이 결국 한 철학을 믿는다고 말하는 건 확실히 아니겠지요?"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당으로 구분되지만, 어느 정당이든 고수하는 관점은 똑같습니다. 영적 관점이 아닌 물질적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인생관은 단 두 가지 - 기독교적 관점과 비기독교적 관점-로서, 믿음으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비기독교적 관점을 믿지도 않고 옹호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기독교적 인생철학과 인생관은 어떤 것일까요? 이 관점의 큰 특징은 대부분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생각하길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 아닙니까? 저는 사람들이 주변 사건들의 압박에 짓눌려 이렇게 된다고 봅니다. 평범한 이들은 주장합니다. "생각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강대국들을 좀 보세요 세상의 삶이 얼마나 불확실한지 보라고요. 생각하는 게 뭐 중요합니까? 그냥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면 되지요."
혹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현 세상과 시간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과 토론해 보면 육신의 생존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있음을 알게 됩니다. 죽은 후 몸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물으면 '우리는 현세의 삶만 걱정해요"라고 합니다.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그 밖의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의 불신자들도 똑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날 하루를 위해, 그 순간을 위해, 자기 세대를 위해, 지상의 삶에 대한 자기 신념을 위해 살았습니다. 불신자들의 시각에 항상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이 이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삶을 즐기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생각하는 삶의 주된 목적이자 목표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이 실제 사는 모습을 보면 어떤 철학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떻게하면 인생 최고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를 묻습니다. 물론 그 형태는 아주 다양합니다. 쾌락-술, 춤, 도박에 열광하는 것도 그중 한 형태입니다. 땅에 사는 동안 재미있게 즐기며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얻고자 매진합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데 시간을 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술과 음악과 철학에 있습니다. 춤추러 다니는 사람들과 이런 사람들의 기본 철학은 확실히 다르지 않느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똑같습니다.
모두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자기 집에 블라인드를 치고 삽니다. “세상에 문제가 있지만 굳이 보고 싶지 않다. 우리 집에도 곧 들이닥치겠지만, 일단은 블라인드를 치고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즐기겠다. 괴로운 문제는 생각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시각과 사고방식도 똑같았다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기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마 24:37-39). 오늘날 인류에 대한 완벽한 묘사 같지 않습니까? 현재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뻔히보면서도 이런 시각과 철학에 만족하는 것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그 자리에 멈추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 묻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이생의 삶과 세상과 그 즐거움만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인물들의 첫 번째 특징은 이런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관점은 무가치하며 옳지 않다"라고 하면서 다른 인생 철학을 옹호했습니다. 이들의 철학은 본문에 나오는 다음 구절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이들은 사람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대신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옛적에도 자신을 계시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온전히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들은 그 메시지를 믿었으며 그 메시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이들이 가장 먼저 믿은 메시지는 하나님의 위격과 성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모호한 것으로서, 실제 의도나 목적을 살펴보면 전혀 믿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그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기록된 이들은 하나님이 계시며 그가 이 세상과 삶을 만드셨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날이 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들의 시각에 나타나는 두 번째 특징은 인간관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인간을 거의 동물 세상에서 주로 하는 일이 먹고 마시는 것에 불과한 동물 에 가까운 존재로 여겼지만, 이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 영과 혼을 두셨다고 믿었습니다. 이 말의 성경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들은 하나님이 죄와 그 모든 폐해를 보셨음에도 세상을 구원하시며 사탄의 속박에서 풀어 주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약속을 이들에게 미리 주셨습니다. 처음부터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을 주셨고, 그를 통해 결국 메시아, 구원자가 올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 내내 그 약속을 반복하셨습니다.
이들의 비결은 그 약속을 믿은 데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두고 맹세하건대, 내가 너희를 구원하고 용서하겠다. 때가 차면 내 아들을 보내겠다. 그가 죄를 속하면 내가 사람들을 용서할 것이요 결국 완전케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을 받아들였고, 그 약속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이들의 특징이요 이들이 옹호한 철학이었습니다. 세상의 철학과 얼마나 다른지 보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믿음의 사람들은 행동으로 자기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4절에서 말하듯이, 이 모든 말씀을 이론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믿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바에 부합하는 삶을 삶으로써 그 진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고, 그래서 고향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노아도 하나님을 믿었기에 만인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멸하겠다고 말씀하셨다"라고 하면서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방주가 완성되기까지 120년이나 걸렸음에도 자신이 믿는다고 말한 그 일을 계속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했고,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느 세상 사람들의 삶과 완전히 다릅니다. 유일무이하고 특별합니다. 신약성경은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고후 6:17). 우리는 이생의 삶과 물질과 일정 형태의 쾌락만을 위해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그 모든 부도덕함과 술 취함과 도박과 도둑질과 강도질과 거기에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인생관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 모든 것에서 떠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가치는 나타나는 증거를 통해 입증됩니다. 복음을 진정으로 믿는 자들은 세속적인 삶을 영혼에 위험한 것으로 여기며 “나는 그런 삶이 두렵기에 거기에서 떠나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산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참 신자의 믿음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지적하고 싶은 사실은, 이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모든 대가를 치름으로써 그 진정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잃는다해도 기꺼이 믿음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모세가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 보십시오. 아브라함이나 다른 이들이 무엇을 포기했는지 보십시오. 이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를 진정으로 믿었기에, 자신들의 전부인 그 진리를 포기하거나 잃을 위험에 처했을 때 모든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것을 지킨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세상에는 여전히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독일 교회에도 히틀러와 그 도당에게 굴복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강제수용소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항상 보여주는 마지막 특징은 지치지 않는 열심과 부지런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구한 것입니다. 이들은 6절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분임을 알았으며, 그를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그것이 이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들은 삶에서 승리했고 삶을 이겨 냈습니다. 죽음에서 승리했고 죽음을 이겨냈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가 살았던 세상이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시각과 철학이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떻게 삶을 직면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삶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쪽에는 세상의 관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불멸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언젠가 하나님을 대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으며, 자기 힘으로는 그를 만나기에 합당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무한한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삶,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세상과 영광에 참여하는 삶을 주십니다.
우리는 둘 중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이런 삶을 살았고,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사모했습니다. 우리도 세상과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주변 지인들 사이에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리 삶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무관심한 자들의 관점과 완전히 다른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행동을 통해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삶과 죽음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며, 그가 우리를 통제하시고 다스리시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를 알고 기쁘시게 하며 따르는 일에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살았던 성도들의 증언에 근거하여 말하건대,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무슨 일을 겪든지 넉넉히 이기고 극복하며 승리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을 입증해 보이십시오.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나타내십시오. 이것이 인류 역사에 영광스럽게 우뚝 솟은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하나님, 우리 모두 그 무리에 속하게 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