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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군북 유현의 경충재(景忠齋), 농파정사(農坡精舍), 유은재(柳隱齋)를 자연석에 각자(刻字)한 입석(立石) 공사를 2017.10.16 무사히 마쳤다.
돌의 준비는 경충재 돌은 합천 황매산에서 지난해인 2016.8.30 1차로 구하고, 농파정사와 유은재 돌은 2차로 2017.1.3~1.5 김해 불모산에서 구했다. 준비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2017.9.14 김해종합석재토건(대표 ; 이희경)과 계약하여 2017.9.30~10.9(10일간) 추석 연휴가 끝나는 날인 10.10~10.11 2일간의 각자 작업과 입석 준비 관계로 함안을 총 11차례나 왕래하였다. 돌 하나 세우는 일이 그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에다 재실(齋室)의 재호(齋號)를 새기면 수천년을 간다. 목조건물은 지진, 화재나 수재에 약하다. 자연석의 밑면이 그런대로 판판하여 땅위에 그냥 노출로 세워도 무게의 중력으로 바르게 세워지지만 혹시나 아이들의 안전을 위하여 돌을 60cm 이상의 깊이 구덩이 흙 속에 뭍어서 세웠다. 60cm 길이 만큼 돌의 키가 짧아진 것이다.
평소 '초계정씨 함안경충종중' 대문중과 '초계정씨 함안유은후손종중' 소문중에 뭔가 보람된 일을 남기고 싶었다.
돌의 준비부터 입석 경비는 전적으로 나의 출연 찬조금 기증 형식으로 하였다. 서울의 정창영 형님, 유현의 정태영 동생, 인천의 정병권 장조카 3人의 노역 봉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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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1 자,
정삼영 차남 서울 서경대학 교수 정희태 박사의 '민초나라' 밴드 댓글을 본문에 올린다.
''큰일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어떤 것인지가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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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리 331번지 농파정사(農坡精舍)는 1950년 6.25 전쟁으로 본채와 사랑채가 전소(완전 소실)되었다.
군북면 일대는 6.25전쟁의 격전지였다. 정암철교(당시 국군과 미군은 전황이 위급하여 철교를 폭파함)를 건너온 인민군은 천제봉을 장악하여 봉산이고개를 넘어 함안 가야 진출을, 국군과 미군은 삼봉산을 점령 인민군의 함안 진출을 저지하는 과정에 장지리와 강주리 접경 남산들판에 운집한 군북면 피난민들 속으로 인민군이 석교천을 따라 진격해 들어오는 과정에 미군 정찰기에 의한 박격포 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컷다고 한다.
형님들의 전언에 의하면, 함안 삼봉산 격전지를 피하여 많은 식솔(食率)을 이끌고 법수 강주리와 돈대산 나루터를 지나 의령 용덕면(새총골 산소 김해김씨 양증조모의 딸 고모할머니 사는 곳)으로 다시 진양군 사봉면(김대금 조모의 언니가 사는 곳)으로, 다시 의령 정곡면 중교리(정순덕 고모가 사는 곳)을 거쳐서 지정면 성당리 독대(안맹수 큰형수 친정 곳)으로 피난한다는 게 피아간에 남강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전쟁지 속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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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돈대산 나루터는 함안군 법수면 황사리와 의령군 용덕면 소상리 사이 남강에 있는 나루터이다.
6.25 동란 때 함안 군북면 유현리가 피아간 격전지가 되면서 황급히 피난을 가서 강을 만난 곳이다. 돈대산 나루터는 강의 폭이 좁아서 깊고, 전쟁통이라 뱃사공도 없을뿐더러 배가 어디에 정박해 있는지도 모르기에 돈대산 1.5km 상류의 강폭이 넓고 물이 얕은 가운데 밤섬이 있는 곳을 건넜다 한다.
기산할매 안동희(安東喜 ; 순흥안씨, 종조모) 가족과 같이 피난을 가면서 남산벌(군북면과 법수면에 걸친 갈대 벌판)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기에 강을 건너면서 22살(1929. 음 11.27생으로 만 21살 격임)의 정영조 형님은 처자식 안맹수와 딸 유아 정윤선은 챙기지 않고, 급히 업어서 내려놓는다는 게 동생 정창영(1943 음 11.20생)을 업지 않고 기산할매 아들 정현관(정창영과 동갑 당시 7살)을 업어 내려놓았다는 실수 얘기를 생존시 창영형님에 자주 했다고 한다. 아마 배후의 남산들판에는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위급상황에서 여러 식솔을 건느린 유은 정현락 아버지(1912 임자생:壬子生 음 4.22생, 당시 39세로 2녀 출산의 며느리를 두었다)로 부터 벼락같은 성깔의 질책이 쏟아졌던 모양이다. 젊었을시 정현락 아버지 성격은 무서웠다.
옛날 피난 갈때 가재도구 필수품은 박바가지였기에 꼭 지참, 피난가는 날 비가 내려서 나(1949 음 2.14생 ; 만 1살 5개월)를 박바가지를 씌워서 조복희 어머니가 책임으로 업었다 한다. 생존시의 형님들로부터 자주 들은 일화이다. 울산 정윤선 유아(1949 음 윤달 7.23생)도 역시 박바가지를 씌워서 출동했다. 작은집 정정식 숙부집에는 피난 위급 중에 4남 정상영(1950 음 6.17생)이가 태어나기도 했다
옛날에는 유교전통사회였기에 아기는 무조건 여자가 책임지는 시대였다. 정영조 형님이 처자식(안맹수와 정윤선 유아)를 챙기지 않고 동생을 먼저 챙긴 것도 아이는 애 엄마 책임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관습이 깔려 있었다.
나이들어서 안맹수 형수(1928 무진생:戊辰生 음 5.7생으로 정영조 형님보다 1년 연상이다)는 수시로 피난시에 처자식은 뒤에 따라 오는지 안 오는지 챙기지 않고 너무 무심했다는 말을 주변에 많이들 했다. 아마 나이도 어린 만 21살 신랑으로 어른들 앞에서는 부부간 애정 표현을 못하던 시대였기에 충분히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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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지만 격전지(남강 건너 인민군 점령지역 방향 친척이나 인척 마을)만 찾아 피난하다보니 1929 기사생:己巳生 음 11.27생으로 22세(만 21세)였던 정영조 형님은 국군과 인민군 어느 쪽에도 징병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어느 쪽이든 훈련도 없이 전선에 마구 투입했기에 잡혀갔다면(징집) 대부분 전사했다고 한다. 정영조 형님은 이듬해인 1951.6.18 경찰학교 입교로 부산철도경찰대근무 피명(被命) 순경을 받아 1961.6.23 경사(10년 근속)로 창녕군 유어면 지서장을 끝으로 퇴임했다. 6.25참전용사로 노무현정부 때인 2004.8.18 표창을 받았다.
1950.9.15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되면서 모내기를 해놓고 첫벌 논을 메고서 7월 말경 피난을 가서 10월 초에 고향에 돌아오니 가꾸지 않은 벼가 전쟁통에도 하늘이 도왔는지 우순풍조(雨順風調)로 저절로 누렇게 익어 풍년이 되어 있었다 한다.
피난을 가기전 전쟁통에 주민들이 들판에다 소를 코뚜레와 꼬삐를 풀어 들에서 풀을 뜯어먹고 살게하고, 돼지 닭 등 가축을 모두 풀어 놓았는데(방사), 들판에 무리지어 있는 소떼들을 인민군의 군량으로 쓸 바에야 전쟁통에도 평소 간담이 큰 정정식 숙부가 누구 소인지 분간이 안되는 들판의 소 한마리를 잡아 몰고와 해체했다고 한다.
피난 가면서 소고기를 다 처분할 수가 없어 삶은 살고기를 된장과 간장에 염장으로 이리저리 다져넣고 황급히 피난을 떠났다가 10월 피난지에서 돌아오니, 간장독은 다행히 무사하고 국군과 미군들이 퇴각하는 인민군을 수색하는 과정에 총 개머리판으로 때렸는지 된장 독은 손바닥 만하게 깨어져서 구멍이 나 있어도 된장이 흘러내리지 않고 여름 햇볕과 비바람으로 굳어지며 숙성되어 있었다 한다.
그해 11월 전소된 본채와 사랑채를 지을 때, 의령 용덕에서 목재를 등짐으로 나르는 일꾼들이 소고기가 염장된 된장씨래기국 한 그릇으로 반찬 2~3 가지로 밥 한 대발을 맛있게 뚝딱했다는 평소 조복희 어머니의 증언을 여러번 청취하기도 했다. '소고기된장씨래기국밥'이 된 것이다.
정임규(호적명 ; 정도익), 김대금 조부모님은 유현 평촌 집 뒤 산에 토굴을 파서 피난을 가지않고 지내시다 국군과 미군 수색대에 잡혀서 거제 피난민 수용소에 있다가 1950년 12월 초 경에 귀환하였다. 두분이 돌아가신 줄 알고 걱정하다 다시 상봉하여 눈물 바다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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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덕석(멍석)말이 몽둥이(곤장) 훈계 사건이란? ; 정임규(당시 71세) 김대금(당시 70세) 조부모가 전쟁중에도 피난을 가지않고 집 뒤 산 대밭에 파놓은 땅굴(1970년대 초까지 그 굴이 있었다)에 지내다 통역을 앞세운 미군 수색대에 잡혀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잡혀갔다가 다시 분류되어 피난민수용소에 재차 수용되었다 한다.
그 무렵 유현리의 육경도(1912생, 정현락 아버지와 동갑으로 당시 39세)씨도 같은 처지로 거제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되어 사람이 천자문을 읽을 정도로 그런대로 똑똑하다보니 수용소에서 발탁되어 피난민 배식분배 등의 수백명을 책임지는 급식반장급
직책을 하면서 같은 유현 마을의 아는 어른인데도 늙었다고 예우는 커녕 그것도 전쟁시의 배급 권력이라고 천대를 했다는 것을 1950년 12월 초에 유현에 돌아와서 육경도씨의 마을 어른도 모르는 고약한 처세를 자초지종(自初至終) 진솔하게 주변에 얘기했다고 한다.
당시 정현락 아버지의 사촌되는 정현철(鄭鉉徹 ; 계해생:癸亥生, 1923생, 당시 28세, 정무영의 父) 아재가 이 말을 듣자마자 당장 육경도의 나쁜 소행(버릇)을 고친다고 불러내어 홍순태 집 마당에서 둥근 볏집 덕석에 말아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올때까지 몽둥이로 패는 훈육사건 목격담이 정영만(당시 18세), 정삼영(당시 14세), 정갑영(당시 11세) 형님들에 의해 오랫동안 이야기 꺼리로 회자되기도 했다.
덕석말이(머리와 얼굴, 목은 밖으로 노출)는 조선 유교사회 농경시대의 함안의 독특한 마을 규범으로 도덕윤리 기강을 세우는 훈계 풍습으로 전래되는 마을 자체의 징벌이었다고 한다. 지개 바작대기나 괭이, 곡괭이자루 등으로 용서를 빈다는 말이 나올때까지 10~30여 회 패지만, 덕석의 쿠션으로 팔과 다리뼈, 척추 등이 크게 다치는 일은 없지만, 마을의 엄정한 훈육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한다. 육경도씨는 전쟁통에 어른에 대한 무례한 짓을 했어도 영리한 분이라 겁을 내어 재빨리 용서를 싹싹 빌었기에 10회 정도로 끝났다고 한다. 정현락 아버지와 갑장인 육경도씨의 나쁜 소행은 밉지만 이 정도로 끝내자고 정현철을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정현철 아재는 건장한 6척(180cm가 넘는)의 장신으로 일제강점기 일본군 징병으로 끌려가서 중일전쟁에 참전,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보다 전쟁을 잘하여 당시 일본군 선봉부대 부사관(하사관)을 지낸분으로 대가 차서 주먹으로는 광복 후 자유당시대에 군북면 일원에서 들난 인물로 주변에서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광복후 함안, 군북 등지의 소시장 유명 중개인을 하다 작고했다.
1940~1950년대 민초들의 '덕석말이 몽둥이(곤장) 사건'을 야사로 부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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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규(1880년 경진생:庚辰生) 조부는 1951년 신묘년(辛卯年) 음 2.1(양 ; 3월 초)에 72세를 일기로 졸하셨다. 현 농파정사인 새집 사랑채 입주 1달만이었다. 그런 연유로 효자였던 유은 아버지가 조부의 호 '농파(農坡)'를 따서 농파정사(農坡精舍) 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임시 거처 헛간 움박에서 지내며 1950년 11월~1951년 2월 의령군 자굴산 아래 용덕면에서 기둥 등 주요 목재를 벌목 하여 35리길(14km)을 그것도 남강의 돈대산나루를 건너서 지게로 운반하여 새로 지었다 한다.
註 ; 의령 자굴산 용덕면에서 목재를 운반한 이유는~?
1910~1945(35년간) 일제강점기와 1950년 6.25전쟁을 겪으면서 함안의 여항산이나 의령의 자굴산 등 높은산이나 종중 선산 주변의 묘소 벌안 솔(묘 돌이 소나무, 묘 둘레 솔)을 빼고는 대부분의 산들이 목재가 될만한 큰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산이었다. 취사와 온돌방 화목(땔감)이 부족하여 볏짚, 보리짚, 들판의 갈대(경상도 방언 ; 샛대), 늪가의 줄대, 밀낫(미는 낫)으로 잔디와 땅까시덩쿨까지 밀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6.25전쟁 후라 목재도 귀하였고 의령에서의 먼거리 운반이라, 오늘날에 와서 보면 목재는 빈약하지만 6.25 피란사의 소실과 복구를 돌이켜 본다면 소중하고 보배로운 농파정사 사랑채이다.
함안, 의령 일원은 6.25전쟁 낙동강방어선 피아 격전지였기에 조상이 도왔는지, 이리저리 피난중에도 희생된 가족이 없었기에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한다.(주변 타 가족은 희생이 많았다) 목수는 집안의 대목수 정삼도(鄭三都 ; 정영철 父), 부목수 정영술(鄭永述 ; 정병우 父)이 했다고 한다.
전방에는 남북 쌍방간 1953.7.27 휴전협정이 될 때까지 만 3년 1개월간 전쟁이 지속되었다.
유현리 331번지는 유은(柳隱) 정현락(鄭鉉洛, 호적명 ; 鄭光植)을 비롯한 위로 누님 정순이(鄭順伊 ; 달성 서씨 출가), 아래로 정현중(鄭鉉中, 호적명 ; 鄭正植), 정순덕(鄭順德 ; 경주김씨 출가), 정봉순(鄭鳳順 ; 광주안씨 출가) 2남 3녀가 태어난 탄생지이다.
정영조(鄭永祚)를 비롯한 정영만(鄭永萬), 정을남(鄭乙南 ; 순흥안씨 출가), 정삼영(鄭三永), 정갑영(鄭甲永), 정창영(鄭昌永), 정필남(鄭必南 ; 홍역으로 조졸:早卒), 정봉영(鄭奉永), 정태영(鄭泰永) 7남 2녀가 때어난 생가지이다.
정정식의 자녀로는 4남 2녀 중, 위로 정영남(鄭永南 ; 재령이씨 출가), 정점영(鄭点永) 2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정영조 자녀로는 2남 4녀 중, 호적부 미등재 여아(女兒 ; 홍역으로 조졸), 정윤선(鄭允先 ; 함안조씨 출가), 정병태(鄭秉泰) 3명이 태어났다.
정영만 자녀로는 1남 2녀 중, 정숙희(鄭淑姬 ; 홍역으로 조졸)가 났다.
정삼영 자녀로는 4남 2녀 중, 정정미(鄭貞美 ; 뇌염으로 조졸)와 모번 331번지에서 331 - 1로 분할(1993.9.7 부동산 특별조치법 때 합가:合家에서 분할로 정삼영 소유)된 분가에서 정경문(鄭景文), 정희태(鄭熙台), 정순문(鄭順文), 정성문(鄭成文), 정종대(鄭鐘大) 6명은 모두는 실제로 분할되기 전에 났다. 1993.9.7 이전에는 이전에는 공부상 331번지에 소속(포함)된 부속 아래채(별채) 격이었다.
註 ; 이판기씨도 1993.9.7 특별조치법 때 331 - 2로 분할해 주었다. 당시 부산 정영조 형님의 의견을 들어 측량 등 공부 처리를 내가 주관했다.
정갑영 자녀로는 1남 2녀 중, 정황부(鄭黃夫)가 났다.
유현리 신촌에 거주하는 정태영 자녀로는 1남 4녀 중 정범진(鄭汎眞), 정범은(鄭汎恩) 2명이 분가하기 전에 났다
전체로 29명이 유현리 331번지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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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당시는 현대 의학이 발전하지 못했고, 특히 전통 민방치료에만 의존하는 열악한 농촌의 의학 사정에 의하여 2~5세의 여아(女兒) 3명은 홍역, 뇌염 등으로 잃었다. 오늘날은 예방접종 등으로 다 생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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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長孫) 정병권(鄭秉權)을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은 유현리 331번지에서 태어나지 않아도 호적부상에 출생지 본적은 유현리 331번지로 되어 있기에 공부상 법적인 생가지가 된다. 유현리 331번지를 본적지로 하는 후손은 100여 명이 족히 넘는다.
농파정사는 이렇게 초계정씨(草溪鄭氏) 함안유은후손종중(咸安柳隱後孫宗中)의 탄생지(誕生地), 발원지(發源地), 산실(産室)이기에 후손들은 고향에 들릴시에는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농파정사를 향하여 간단한 목례(目禮:눈인사)라도 올린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로 대복(大福)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입석 공사 관련 사진을 종중 사료 기록물로 게재한다.
입석(立石) 각자(刻字) ; 2017.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