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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마음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烘雲托月
윤선거의 파동기행巴東紀行을 통해 본
서기1664년의 황지모습
태백산속 오지였던 황지는 지역내에 전해오는 문헌자료가 극히 드물어 근대이전의 고증학적 향토사분야는 성과가 별로 없었다. 근래 몇 십 년 동안 본적사지에 대한 연구, 민속학에 대한 연구, 지명유래 정리등 각계에서 태백역사의 실체진실을 발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지방관은 본향출신을 기피한다는 조선시대의 상피제의 영향으로 다행히 우리지역에 관한 자료가 혹 타지역에서도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을 뿐 아니라, 일단 알려진 타지역 자료는 인터넷으로 공간적 장애조차 극복되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에 우리 태백시의 과거역사도 문헌학적 편린들이 하나하나 발굴되고 이것이 퍼즐조각처럼, 모자이크 그림처럼,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으니, 앞으로 태백의 옛 모습이 명백해질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면서, 이글도 이런 추세에 부합하는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보다 확실하고 정확한 번역에 앞서, 짧은 실력에도 불구, 이 글을 실어본다. "物性之安土"와 같이 번역이 어려운 부분은 앞뒤 문맥으로 의역하였다.
2010년 태백시청 윤순석 역
(현종5년 1664년)
4월14일 안의(삼척 신기면 안의리) 골짜기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덕전촌(도계 전두리 상덕탄광쯤) 계곡사이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계곡의 돌색깔은 모두 다섯 종류인데 모양이 매우 기이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척주에서 마뇌석이 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곳을 말한다고 한다. 해질녁에 느릅령의 남쪽 지록을 넘었다. 일행을 나누어 옥만玉萬등은 곧바로 황지로 향해 가도록 보내면서 월행(저자 윤선거(주1)의 형님 영월군수 윤순거 일행)이 도착하면 월행(영월군수 일행)에게 우리의 이동상황을 알려주라고 했다.
○十四日朝發。秣于德前村溪間。石色皆五狀甚奇異。輿志陟州產碼碯者卽此地云。晡踰楡峙之南枝。分送玉萬等直向黃池。蓋聞越行之當到俾告余行消息焉。
느릎령 고개를 넘으면 서쪽과 남쪽으로 양방향의 갈림이 나오는데 서쪽은 황지를 향하는 곳이고 남쪽은 뚜르내(천천穿川)를 향하는 방향이다.
오십천은 쌍 우물에서 발원하는데 쌍 우물은 절벽 단애에 매달려 있고 흐르는 모양은 폭포(현재의 미인폭포를 말함)와 같았다. 옛날 월돈각사月頓覺寺(흥전광업소 골짜기 위쪽)는 북쪽 계곡속에 있었고 마치 하늘기둥 같은 돌 봉우리(현재 낙타봉 또는 코뿔소봉이라 불리는 곳) 하나가 보이는데 계곡입구를 막아서 있으니 절의 안산에 해당한다. 민간에 전하는 말로 절의 중이 쌍정에서 물을 길어 부처를 공양했다고 하는데 그 거리로 보아 다 황당무개한 말이다.
느릅령 꼭대기는 백석이나 수확된다는 이름의 백석이라는 곳이 있는데 척주의 오지인 옥원빙곡沃原氷谷(월천상류 풍곡)에서부터 난 길로 올라오면 이곳에 도달한다. 일찍이 안숙晏叔(주2)과 함께 빙곡氷谷을 보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백석땅(주3)을 찾아보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백석이라고 명명한 것은 그 터가 평평하여 백석의 논을 일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지은 이름이지만 지금 지세를 보아하니 웅덩이 유구遺構는 있으나 관개灌漑할 물이 없다. 가물고 건조하고 물도 차서 붙쳐먹을 만한 좋은 땅이 아니다. 안숙晏叔이 혼동하여 들은 것 같다.
踰峙西南兩枝西則向黃池南則向穿川。五十川源發於雙井。井懸於絶崖溜如瀑狀。舊月頓覺寺在北谷中。見一石峯如天柱者當谷口爲寺之案山。諺言寺僧汲於雙井而供佛云。蓋謊語也。楡峙之上有百石地者。沃原氷谷之上游路達于茲。曾與晏叔期觀氷谷者爲觀百石地故也。百石之名爲其平原可作水田百石地。而今觀地勢則有停瀦而無川源。旱則乾水則冷。非可食之良田也。晏聞似錯歟。
저녁에 철암에서 잤다. 오십천 지역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동네라는 게 한 동네에 한집뿐이거나 한 두집에 불과 했다. 철암사람들은 사는 집들이 모두 봉당초가집이고 큰 산 깊은 계곡 사이에서 끼어 산다. 곰과 범의 굴이 우굴거리고 새와 맹수가 깃드는 곳인데도 스스로 삶을 살아갈 뿐 그 외는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정서적인 환경이 지역을 안정시킨다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夕宿于鐵岩。自入五十川洞。一舍一村。不過一二家。鐵岩民居一草屋。介在於大山深谷中。熊虎之所窟。鳥獸之所避。而猶自生生。不願其外。物性之安土。此可見矣。
4월15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동점에서 아침을 먹고 뚜르네(천천穿川)을 구경했다. 황지의 물이 삼십리를 흘러 작은 돌산 하나가 계곡입구를 고개로 가로 막아서 내외가 철벽같이 백길 낭떠러지로 깎아질러있으나 냇물은 곧바로 뚫고 흘렀다. 마치 도끼로 깨낸 것과 같고 깊고 검어 마치 용이 숨어있는 못과 같아 앞뒤로 장관이다. 총석정과도 같지 않고 기이하고 장대하여 같이 논할 것이 없으니 뚜르네(천천穿川)와 같은 것이 없다.
오후에 계곡을 거슬러 올라 열 번이나 냇물을 건너 황지를 향해 올라가다가 길이 너무나 험해 뚜르네(천천穿川)에서 다시 출발하여 철암의 묘물상 앞을 지나니 길이 아주 평탄해졌다. 하천의 물길을 보려고 물길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저녁나절쯤 마침내 황지에 도착했다. 형님일행은 어제 도착하여 아침에 방외굴方外窟로 향했다고 한다.
○十五日早發。朝飯于銅店觀穿川。黃池之水流三十里一小石山橫峙谷口。內外鐵壁削立百仞而川流直穿。若用斧破深泓邃黑。有似藏龍之淵。蓋前後壯觀無如叢石亭。而若論奇壯則又莫如穿川矣。午後溯流十渡上于黃池。路甚崎嶇自穿川還。由鐵岩之上妙物之前則路極平夷而爲觀水脈直溯川源。向夕方達于黃池。越行昨到朝向方外窟矣。
황지 위쪽으로 한 촌락이 있는데 여기는 경주에서 들어온 이기李杞의 형제 다섯 명이 살고 있었다. 이 곳 땅이 살만하다는 말을 듣고 집안을 다 데리고 와서 산지가 10년이 되었다고 한다. 대개 황지는 앞 들판에 물을 댈 수 있기 때문에 논농사가 가능했지만 산속이라 벼가 익기도 전에 서리가 빨리 내려 낭패를 보기 때문에 장차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말을 한다.
黃池上有村 乃自慶州來 李杞兄弟者五人。聞此地可居 捲家來居者 十年。蓋爲黃池灌于前郊 則可作水田 而山上早霜。禾稻未熟狼狽 將歸于南云矣。
대개 황지의 지형을 볼 것 같으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으며 주변 한바퀴를 돌자면 수십리쯤 되고 평평한 땅으로 되어있다. 태백산이 동쪽으로 가지 뻗은 곳을 대박봉이라 하는 데 그 아래에 황지연못이 솟아 나온다.
연못의 가로세로 폭과 넓이는 수 칸 정도이고 맑고 깊은 푸른 연못이다. 연못 속에는 돌과 바위가 쌓여있고 연못 밖으로는 평지다. 안으로 돌이 쌓여있는 것은 실로 기이하다. 가끔 연못물이 황색이 되기 때문에 황지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한다.
연못물은 솟아 나와서 바로 시내물을 이루어 흘러나오는데 아래위 연못과 더불어 방외굴方外窟의 지류와 합쳐져서 큰 하천이 되어 뚜르네(천천)로 들어가니 이것이 바로 낙동강의 발원지다.
아래위연못上下淵이라는 말은 황지연못의 동쪽에 아래위로 층이 져있는 용연이라는 연못을 말하는데 물이 연못 속에서 솟아나와 시냇물을 이루고 있어 진짜 볼만하다고 하는데 이 때는 해가 저물어 찾아가보지 못했다. 방외굴方外窟은 황지의 서쪽에 있다. 굴은 평창군 대화리의 것에 비해 좀 더 깊고 또 신기했다.
蓋觀黃池之坪東西長而南北短。周回可數十里作一平陸。太白山東枝名大朴峯之下。黃池出焉。池之延廣廑數間而澄碧爲深淵。淵中岩石交積。外則平原內有積石。眞可異也。有時池中色黃故名以是云。池水涌出卽成川而注。與上下淵,方外窟之流。合爲大川歸于穿川。是乃洛東江之源也。上下淵者在黃池之東。龍淵有上下二層, 水自淵中涌出成川。極可觀也。而日暮未及尋往。方外窟者在黃池之西。窟比於大和差深而大川從窟中流出。亦可奇也。
우리 조선국 태조대왕의 조상 능을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황지연못 위의 산 언덕 하나를 가리키면서 연하산(현재는 蓮花山이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煙霞山”으로 표기되어있다)을 안산으로 삼았으니 형세가 주변과 두루 이어지고 맞닿아 있어 심히 풍수지리에 대한 안목이 마땅하니 어쩌니 한다. 저녁에 방외촌으로 가서 형님과 같이 잤다. 취려 김생이 받들어 모시러 왔다.
國朝先陵之不得尋者指黃池上一山丘, 以煙霞山爲案, 形勢之周遭。甚宜於風水之眼云。夕往陪宿于方外村, 金甥就礪奉行而來矣。
4월16일 삼척사람 김립등이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삼척 사또가 김립등 서너 사람과 말 두어 마리를 우리일행에게 딸려 보내면서 우리를 송별했었는데 지금 뒤따라오시던 형님일행을 만났으니 비로소 돌아가도록 했다.
삼화사 중 각기覺機도 또한 이곳에서 헤어졌다. 각기覺機는 열심히 나를 따라다녔다. 헤어질 때 덕담 한 마디를 청하기에 글로 써서 줬다. 아울러 이상여의 도계(향약같은 규약인 듯)를 잘 받들게 했다. 아침에 방외굴을 지나 하방재何方峙를 넘었다.
낮이 되서야 업평장業平莊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장산고개를 넘어 은장암, 골동암鶻同岩(영월 상동면 꼴두바우) 봉전촌蓬田村(봉우재쉼터쯤)을 지나 저녁에 청천촌淸川村에서 잤다.
○十六日。陟人金立等辭歸。陟令以三人兩馬送我行。今遇越行始許其歸。覺機亦從此辭。機也辛勤隨我。臨別請得一言, 書以贈之。兼奉相如道契。朝過方外窟逾何方峙, 晝秣于業平莊逾壯山峙。歷隱藏岩鶻同岩,蓬田村夕宿淸川村。
4월17일 덕비촌德阜村(현재 내덕리쯤) 진사 정진기鄭震奇의 옛집을 지났다. 아현牙峴에서 강계江界 유여락柳汝恪의 옛집을 지났다. 운잔령雲棧嶺을 넘었다. 아침밥을 송현촌松峴村(현재 송현분교쯤)에서 먹었다. 점심을 배나무촌梨樹村(현재 영월 중동면 이목리쯤)에서 먹었다.
저녁 먹을 시간쯤에 소미원고개小微院峴(현재 소라리재 부근)를 넘었다. 해질녁에 직곡촌直谷村을 지나 어둑어둑해서 십치十峙를 넘었다. 명생촌命生村에 들어갈 때는 횟불을 들고 들어섰다. 대승암大乘庵에서 잤다.
(대승암의) 천순天順대사는 이미 풍악산으로 출발하고 없었다. 천순대사는 시를 남겨서 의심義諶장로에게 부쳐 보냈었다. 천순은 의심義諶대사의 수제자다. 일찍이 자기 스승을 찾아뵙고 싶다고 하기에 나와 함께 풍악산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내가 풍악산 정양사에 도착하여 의심義諶 노대사를 만났을 때는 천순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의심義諶 노대사와 함께 잠시 이야기만 하고 하루저녁 자고 헤여졌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언급해둔다.
○十七日。歷德阜村鄭進士震奇舊居,牙峴柳江界汝恪舊居。踰雲棧嶺朝食松峴村。午飯梨樹村。夕踰小微院峴暮過直谷村。昏踰十峙炬入于命生村。宿大乘庵。天順師已向楓岳矣。留詩以寄仍示義諶長老。天順卽義諶之高足也。曾言欲尋其師。與余約同入于楓岳。余到正陽遇諶老而順不至矣。仍與諶老少話。一宿而別。故篇內及之。
○ 황지경유 이전과 이후의 ≪파동기행≫ 여정旅程
(생소한 옛지명도 있지만 그대로 적는다.)
현종5년 1664년 정월1월21일부터 작자 윤선거는 작은 형님 윤순거를 모시고 양평군 용문의 운계서원雲溪書院을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강원도일대를 돌아보는 관동기행을 시작한다.
이후 원주 제천을 경유, 작은 형님 윤순거가 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영월로 들어와 2월 한 달을 노산군 묘(단종능) 참배 및 ≪노릉지≫ 교정등으로 소일하다가 3월부터 본격적으로 동행東行을 한다.
주요 경로는 평창읍, 방림역, 대화역, 진부역을 지나 월정사‚ 금강연, 오대산사고지등 오대산 일대를 둘러보고, 횡계역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대관령을 넘어서 왕산 오봉서원, 강릉 송담서원을 둘러보고, 북으로 오죽헌, 주문진쪽 연곡, 청학산靑鶴山, 천유동天遊洞, 비선암秘仙岩, 경담鏡潭을 유람한다.
동산현(인구역)洞山縣(獜丘驛)을 거쳐 하조대河趙臺, 양양 낙산사, 설악산 비선대, 영랑호, 광호廣湖를 보고 청간역정淸澗驛亭, 만경루萬景樓, 청파대淸波臺, 선유담仙遊潭, 고성高城 화진정花津亭‚ 열산현(운근역)列山縣(雲根驛), 명파역明波驛, 감호鑑湖 비래정飛來亭을 보고 고성읍내를 거쳐, 해산정海山亭, 사선정四仙亭, 철점鐵店, 등로역(임도현)藤路驛(臨道縣) 문암門岩, 금란굴金蘭窟, 총석정을 두루 봤다.
또 조진朝珍에서 금강산으로 입산하니 마점磨店, 장안전촌長安田村, 철이현鐵伊峴, 배점拜店을 경유, 장안사로 들어갔다. 다시 십왕十王 백천동百川洞, 지장암地藏庵, 고성문古城門, 표훈사, 정양사를 보고, 만폭동을 거슬러 올라 화룡담火龍潭,진주담眞珠潭,선담船潭,벽하담碧霞潭,청룡흑룡담과 보덕굴普德窟을 돌아, 마하연摩訶衍, 유점楡岾을 지나서 동해안쪽으로 되돌아 나온다.
다시 남쪽으로 열산현烈山縣, 간성杆城 은신대隱身臺, 능파정凌波亭, 선유담仙遊潭, 청간정, 영랑호를 거쳐 동해신묘東海神廟, 양양전천襄陽前川을 지나 상운역祥雲驛, 향포香浦, 사곡沙谷, 쌍한정雙閑亭으로 해서 경포대鏡浦臺를 먼발치로 보면서 한산사寒山寺, 화비령火飛嶺, 율치栗峙고개, 고평릉역古平陵驛, 척주陟州 북평北坪의 송라정松蘿亭, 죽서루, 능파대淩波臺,를 본 후, 척주의 오지奧地 옥원沃原 빙곡氷谷으로 가려던 계획이 성원이 안되어 취소되고 발길을 돌려, 두타산頭陀山 삼화사三和寺, 무릉계武陵溪, 과암瓜庵, 동석動石을 유람하고 이승휴李承休의 별서別墅인 간장암看藏庵에 들렀다가 오십정五十井, 삼소현三小峴, 삼기촌三岐村, 안의곡安意谷(신기면 안의리)을 경유하여 지금의 태백지역으로 들어온다.
태백지역을 보고난 뒤 이후 일정은 상동재를 넘고, 4월18일 대승암을 출발하여‚ 밀곡창密谷倉, 대야촌大野村, 여랑암女娘岩, 정양촌正陽村, 동강진東江津을 건너 영월 군아郡衙에 들어가 몇일간 탁금정濯錦亭등지를 돌아보며 다음 여행을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다음,
다시 남으로 향산香山, 도담島潭, 구담龜潭, 가은성可隱城, 옥순봉玉筍峰등지를 유람‚ 학서암鶴棲庵, 황강黃江 강촌江村, 봉황대鳳凰臺, 연풍延豊, 괴천槐川, 괴산군 사현沙峴, 주성酒城, 청주 남천교南川橋를 건너, 저산역猪山驛, 동진東津, 연기燕岐, 5월2일에는 금강을 건너 공산公山을 보고, 적암積岩에 들어와 저녁에 후당後塘에 돌아오는 것으로 파동기행은 마치고 뒤에 5개 단락으로 주요 경치를 요약하고 있다.
註1) 윤선거(광해2년 1610년 ~ 현종10년 1669년) : 파동기행巴東紀行의 저자.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이다. 자字를 길보吉甫 호를 노서魯西라고 한다. 윤황尹煌의 아들이고‚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외손자이며 윤선거尹舜擧, 윤상거尹商擧, 윤문거尹文擧의 아우이고, 소론의 영수領袖 윤증尹拯의 아버지다. 영광靈光에서 태어났고 어머니가 창녕昌寧 성씨成氏 성혼成渾의 딸이였기에 일찍부터 외가의 학풍도 접할 수 있었으며,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으로 송시열宋時烈, 윤휴尹鑴, 유계兪棨, 송준길宋浚吉, 권시權諰등과 교유하였다.
인조11년 1633년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1636년 후금이 칭제稱帝 국서를 보내와 신복臣伏하기를 요구하자 유생들을 규합하여 사신의 목을 베어 대의를 밝힐 것을 주청하였는데, 그해 12월 병자호란으로 강화江華에 피난하였다가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처妻는 자결하였으나 그는 평민의 복장으로 탈출한 것이 평생의 후회가 되어 살아간다. 이때 자결한 처의 초상을 예법에 맞게 주관하여 치룬 것이 당시 9살난 아들 윤증尹拯이다.
이후 효종2년 1651년이래 사헌부 지평등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강화도에서 대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동법大同法을 강조하였고‚ 선비들에 대한 언로를 열고 붕당을 없애고 군정에 대해 군포軍布를 덜어 민생民生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적으로는 그가 유계兪棨와 교환된 서신으로 볼 때 역학易學에 대해 상당한 전문가였다. ≪후천도설後天圖說에≫을 지었고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하였는데‚ 동문수학하던 송시열과 윤휴가 학문적으로 대립하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바, 이 때문에 송시열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여, 그의 사후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부탁한 묘갈 문제로 심화되더니 결국 노론 소론으로 분당되었다.
그의 사후 숙종41년 1715년에 일어난 노론 소론의 싸움은 유계와 함께 편찬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이 원인이였는데 이 때문에 아들과 함께 관직을 추탈 당했다가 경종2년 1722년에 부자父子가 함께 관직이 복구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영춘永春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사龍巖祠‚ 노성魯城(지금의 논산)의 신곡서원新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계갑록癸甲錄≫, ≪노서유고魯西遺稿≫등이 있는데, 파동기행은 노서유고의 속집 권3편이며 이 글에서 같이 관동 일대를 유람한 윤순거는 친형이었지만 큰 집에 양자로 출가하였기에 사촌형인데 이때 영월군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註2) 정양(鄭瀁.1600.선조 33∼1668.현종 9)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부익자孚翼子ㆍ포옹抱翁. 안숙晏叔은 자字다. 할아버지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이고, 아버지는 강릉부사 정종명鄭宗溟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참의 홍인걸洪仁傑의 딸이다. 병자호란 강화도 함락 당시, 형은 전사하였고 뒤따라 가족들과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살아남아 태백산 주변인 영월 상동 내리와 봉화춘양등지를 은거하며 태백 5현이라고 불려지다가 50이 넘어서야 벼슬길에 들어 1664년 파동기행 당시에는 강원도 간성군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장령벼슬을 하던 1668년에 죽었다. <어록해語錄解>를 중수, 간행하였다.
註3) 백석평 : 곡식 백가마니 소출지라는 뜻으로서 당초에 산속의 느릅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릅령을 아래 인근 백산지역을 말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