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
(조지 휫필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거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본문의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다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는 혈과 육에 상의함이 없이 당장 그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무엇을 해야만 했습니까? ‘아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가축 중에서 처음 난 것이나 가장 토실토실한 어린양이나, 혹은 짐승을 잡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다면 이처럼 무시무시한 장면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네 다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아주 견고한 믿음을 가진 자라도 이러한 주문에 마음이 휘청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여럿 중 한 아들을 주문하신 것이 아니라,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요구하셨습니다. 짐승이 아닌 그냥 아들 하나를 바치라고 했더라면 그 정도는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종의 몸에서 난 아들 이스마엘은 왜 안 됩니까?
아닙니다. 그의 후사인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늙어서 얻은 아들, '웃음‘이라는 뜻을 지닌 이삭을 바치라는 주문이었습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이었습니다. 그 자신의 모든 생명을 다하여 감싸고 있는 그 독자를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의 대상인 아들 독자를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지체함 없이 당장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산 위에서 번제로 아들이 아버지에 의하여 바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반박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반박입니다. 혹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자 하는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선한 사람조차도 ‘내 아들을 도살하라구요?’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은 자연 법칙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내가 무수히 많은 후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놓고선 그 아들이삭을 도살하라니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라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다고 합시다. 비록 나는 그를 극진히 사랑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것을 포기한다고 합시다. 내가 그를 살해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더 나아가서 나는 저 언덕에 도성을 짓고 있습니다. 나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가운데서 세상의 빛으로 빛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내가 그들이 역겨워하는 범죄를 저질렀음을 그들이 안다면 내가 어떻게 그 이방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내 아내 사라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내 사랑하는 아들의 피가 묻은 손을 가지고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 하나님 나를 용서하시고 이 명령을 거두어 주소서. 차라리 내 아들 대신 나를 취하소서.” 아브라함이 그처럼 말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신 불복종할 이유들을 충분히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에 사라가 늙어 그녀의 태가 죽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관여치 않았듯이 그는 “네 아내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아브라함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것은 무엇이든지 믿으십시오. 비록 그것이 전적으로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합당한 많은 이유를 대고 거절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종했습니다. 이성이 멈추는 곳에 믿음이 작동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여전히 이성적으로 사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유한한 지식을 가지고 무한한 것을 측량하려는 것이 비이성적인 일이 아닙니까? 유한한 지식을 가지고 완전에 이르는 경건의 비밀들을 찾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이성적이지 않습니까?
다시 족장 아브라함으로 가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22:3). 하나님께서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경건함과 마찬가지로 족장 아브라함의 겸손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자신의 나귀에 안장을 직접 지웠습니다. 비록 그는 젊은 두 사환과 아들이삭을 데리고 출발하였지만 그는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계획을 알리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그는 아내 사라에게조차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만일 알렸다가는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라가 이 일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이삭을 다른 곳으로 빼돌렸을지도 모릅니다. 이삭 또한 젊은 사람으로서 만일 그 일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밀치고 달아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한 탈출구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로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처럼 마음에 간사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단호하게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한 땅으로 떠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아는 바를 실천에 옮깁시다. 우리가 이미 볼 수 있는 것만큼 하나님의 섭리를 좇아갑시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아직 찾지 못한 것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길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어디서 바칠 것인지 그 장소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났습니다.
“제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22:4).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곳은 하나님이 그에게 처음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그 장소로부터 대략 3일 길을 걸어야 했던 거리였습니다. 실로 나이 많은 족장 아브라함의 심정이 이 삼일 동안 어떠했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 보십시오. 그 일은 돌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안 듭니까?
실로 나이 많은 족장 아브라함의 심정이 이 삼일 동안 어떠했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처럼 믿음이 강한 자도 아들이삭을 생각하면 속에서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한 노인이 아들의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번, 두 번, 세 번, 거듭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한없이 사랑하는 모습으로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가 지금 살아서 우리에게 그때의 심정을 말해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은 아들과 두 사환들과 함께하여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들에 대하여 말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제 삼일에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하나님이 지시한 곳을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의 종들이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 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도 돌아오리라”(창22:5). 이처럼 같이 간 사환들이 머물러 있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행동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창22:6).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를 부모로부터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아, 어린 나이에 비해 얼마나 성숙한 경건함인지요! 이삭은 양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올바른 제사를 위해서는 어린양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이여, 이삭으로부터 배웁시다!
그 지점에 도달했을 때,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에서 보듯이 이삭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그 어떤 반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었을 때 우리는 이삭의 어떤 불평의 소리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능히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달아나려고 몸부림쳤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사실 번제에 쓴 나무를 지고 갈 정도면 족히 그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나이 많은 아버지의 믿음에 동참하는 소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한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창22:7).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립시다. 믿음을 가지고 아버지가 아들을 내려놓은 그 장소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천사들이 날개를 치며 찬송하면서 그 제단 주변을 빙빙 돌았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눅2:14).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을 인간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오, 사랑하는 부모들이여, 죽어 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당신 앞에 설치된 아들을 바칠 제단을 상상해 보십시오. 나무를 차곡차곡 쌓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삭을 결박합니다.
옆에서 울고 있는 늙은 아비를 상상해 보십시오. 왜 아브라함이 울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까?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는데 말입니다. 경건한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사랑스러운 말들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브라함의 뺨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을 것 같습니다. 복받쳐 오르는 마음으로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여호와께서 너를 내게 주셨으니 이제 너를 취하시는 분도 여호와시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찌로다! 잘 가라, 내 아들 이삭아!’ 동시에 이삭 역시 그의 하늘의 아버지께 자신의 영혼을 순순히 맡기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육신의 아버지께서 자기를 죽이는 일을 잘 감당하도록 힘을 주십사 하고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제가 아버지나 아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하려고 애쓰는지 아십니까? 사실 그 심정을 알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실로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을 그려 볼 뿐입니다.
이제 운명적인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손들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22:10). 그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칼이 그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려던 찰나였습니다.
오, 하늘이여, 노래할 지어다! 오, 땅이여, 기뻐하라! 인간의 막다른 길은 하나님의 기회이니! 보십시오. 칼이 이삭의 목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하노라”(창22:12). 여기서 아브라함은 아들이삭을 상징적인 차원에서 죽음으로부터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사실상 제단에 바쳐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바쳐진 제물로 간주하셨고 그를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잠시 눈을 돌려 만일 아브라함이 지금 이곳에 있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지시할 것인지, 그 지시가 무엇이든지 실천하기로 합시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눈을 사람에게서 돌려 영원히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니 여러분들 마음이 크게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마음이 돌덩어리가 아닌 한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친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이 사건 뒤에 숨겨진 한 가지 비밀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이 제 말을 막고서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여러분의 마음은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도 그렇게 크게 감동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우리 모두는 타락한 피조물임을 주지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실로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을,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을 흠모한다면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높이며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오, 성도들이여!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려고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아브라함이 어떻게 제단을 지었는지, 나무를 차곡차곡 쌓고서 이삭을 결박하고 그 제단 위에 올려놓았음을 들을 때,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결박하시어 그의 공의로운 제단에 바치시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그의 몸에 올려놓으셨음을 생각하십시오.
아들이삭을 바치려고 칼을 든 손으로 내려치고자 하는 장면을 읽을 때, 오, 여러분이여! 생각하십시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죽이시는 고통을 실제로 당하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삭이 자신을 태워 죽이게 될 나뭇짐을 지고 가는 장면을 읽으셨지요? 이 장면이 여러분을 갈보리 언덕으로 이끌고 갑니다. 자기가 달려 죽게 될 그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힘겹게 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예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삭보다 더 놀라운 일을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흠모해야 함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그렇게 할 의무가 전혀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보시 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10:9)라며 순종하셨고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제단이 만들어지고 나무가 차곡차곡 쌓이고 이삭이 그 위에 결박되어 올려짐을 생각하라고 하니 눈물이 납니까?
찬송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영원한 영광이시며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단순히 결박된 것이 아닙니다. 저주의 나무에 달려 손과 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여러분!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달려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를 향하여 내뱉는 모든 조소를 받으시고 옆구리에는 창으로 찔리시어 그의 성결한 성전에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생각하십시오!
만물의 하나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는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가 고개를 숙이시고 마침내 인성을 지니신 영혼을 포기하시는 장면을 그려 보십시오. 이삭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습니다. 한 어린양이 이삭 대신에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대신할 제물이 없습니다. 예수는 피를 흘리셔야만 했습니다.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어린양을 영원한 때부터 준비하셨습니다. 그는 정한 시간에 바쳐져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저주의 나락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눈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울음을 그치라고 말할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찌른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장자를 잃고 우는 여인처럼 우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반역자였으며 영광의 주님을 죽인 살인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많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때문에 그 엄청난 고난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용서를 베푸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합시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그를 영화롭게 합시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부분적으로나 혹은 전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그리고 그 의를 통하여 되는 것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굳게 부여잡는 순간, 인간은 모든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거저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처럼 여러분도 이 세상의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십니까? 간단히 말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삭을 포기하도록 힘을 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탐욕, 친구들, 쾌락 등을 포기하게 만듭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십니까? 그러하다면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크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도들에 대하여 말하거나, 머리로만 가진 믿음을 말하고 그 믿음의 능력이 어떠함을 마음속으로 결코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고 떠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닙디다. 마음의 신앙,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지 않는 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여! 지금까지 들은 말씀으로부터 배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실 때 여러분의 모든 세상적인 위안거리들을 다 버리십시오. 세상적인 것들과 연계되어 있는 것을 기꺼이 포기하십시오.
여러분들 중에는 마치 자신의 영혼처럼 소중히 여기는 친구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식들이 그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명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누구든지 다 자신들만의 이삭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들만 특별히 즐기는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위하여 그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십시오. 주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희생하라고 말씀하실 때 혈과 육과 상의하지 마십시오. 지금 본문에서 우리고 만나고 있는 족장 아브라함이 한 것보다 더 누구와 상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들은 적어도 아브라함처럼 시험을 받고 있는 자로서, 저는 그의 모범이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기를 소망합니다. 아브라함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오!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을 생각하십시오. 그가 이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신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지금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영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이삭과 더불어 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십시오. 그 순간이 곧 여러분에게 다가올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도 그들과 함께 앉아 노래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그들과 함께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을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을 영원무궁토록 찬양할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