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조색은 회색 계열이 대세…강조색도 어두운 톤 전환
아파트 장수명화·이미지변화 추구로 재도장 시장 커져
삼화페인트가 디자인 제공한 아파트 전경. [사진 : 삼화페인트]
주변 아파트들을 둘러보면 화려한 패턴과 활기찬 색상이 사라지고 어느새 차분한 회색빛이 많아진 것을 느끼게 된다.
글로벌 컬러 전문 기업 컬러로(Coloro)가 2023년 올해의 컬러로 디지털 라벤더를 선정한 이후 뷰티, 패션, 인테리어 분야에서 이 색깔이 휩쓸고 있다.
아파트에도 소비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반영한 색채 트렌드가 있다. 아파트 외벽 색은 푸르지오의 초록색, 자이의 파란색, e편한세상의 주황색 등 브랜드의 독자성을 표현하는 거대한 캔버스다. 친숙함, 고급스러움 등 아파트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수단이 바로 컬러다.
저채도 배색으로 고급스러움 표현
아파트 외벽의 색채 배색은 전체 면적의 60~70%를 차지하는 주조색과 20~30%를 차지하는 보조색, 5~10%의 강조색으로 이뤄진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아이보리 계열의 주·보조색에 노란색, 주황색 등 따뜻한 색의 패턴을 입힌 아파트가 주를 이뤘다. 2010년대부터 고명도 저채도 회색 계열의 주·보조색에 다양한 색군을 이용하는 추세로 전환됐다.
특히 2019년을 기점으로 주조색으로 고명도 저채도의 회색 계열, 보조색에 중명도의 회색 계열(다크 그레이)로 바뀌었다. 강조색은 다양한 색을 사용하되 주로 네이비나 딥블루, 딥그린 등 어두운 톤을 이용하는 추세로 전환됐다.
페인트업계는 하이엔드(최고급) 아파트 증가로 고급화를 추구하는 재개발조합과 입주자의 요구가 커짐에 따라 화려한 고채도 색 대신 고급스럽고 도시적인 저채도 색의 사용이 늘어났다고 분석한다.
2018년 분양한 푸르지오 아파트 외관 [사진: 대우건설]
2021년 분양한 푸르지오 아파트 외관 [사진: 대우건설]
대형 건설사들은 앞을 다퉈 브랜드 색상에 저채도 색을 채용했다. 건설사 브랜드 BI 및 고유색 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대우건설의 아파트 브랜드인 푸르지오는 고유색을 기존의 연두, 초록색에서 채도를 낮춘 브리티시 그린(British Green)으로 2019년 변경했다.
삼성물산은 2021년 래미안 BI를 변경했다. 고유의 색인 래미안 그린과 래미안 그레이를 그대로 살리고 브랜드 표기는 래미안 다크 그린 색상을 적용했다. 래미안 다크 그린은 래미안 아파트 외벽에도 적용되고 있다.
DL이앤씨의 e편한세상은 2020년 BI를 변경할 때 고유색인 오렌지색을 살리는 대신 표기를 없애고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인 오렌지색 구름 모양만 남겼다. 아파트 외벽은 고채도의 오렌지색 대신 갈색 계열의 저채도 색상을 적용하고 있다.
여러 건설사가 공동 시공하는 컨소시엄 대단지 아파트가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저채도 배색이 더욱 많아졌다. 이슬기 삼화페인트 컬러디자인센터 팀장은 “컨소시엄 아파트는 통일감을 주기 위해 외벽을 한 브랜드의 고유색으로 칠하거나 그레이, 다크그레이 배색을 선택한다”고 소개했다. 이 팀장은 “앞으로도 컨소시엄 형태의 시공이 많아지고 고급화 니즈가 이어져 저채도 배색 유행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재도장도 신축처럼⋯주변 경관 중점
외벽 재도장을 앞둔 아파트도 건설사 브랜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색보다는 회색 계열의 저채도 배색을 추구한다. 최근 지어진 아파트가 탁색, 어두운 톤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다.
노루페인트 색채 시뮬레이션 [사진 : 노루표페인트]
지남철 노루페인트 디지털마케팅 팀장은 “재도장 시 고급화를 위해 아파트 명칭을 변경하거나 기존의 아파트 이미지를 벗기 원하는 아파트들은 최근의 색채 트렌드를 따라 저채도에 명도 대비를 준 색채 디자인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 팀장은 “재도장 시 변경된 브랜드 고유색을 적용하고 싶어도 준공 시기에 따라 최신 로고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는 브랜드 고유색과 기존 로고가 어울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이때 최근의 보편적인 아파트 색채 트렌드에 따라 디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페인트업계는 외벽을 재도장할 때 색채 트렌드와 함께 주변 환경과 잘 융화되는지, 아파트 색채로 인해 주변 경관이 저해되지 않는지도 중요하게 평가한다.
서울 및 수도권은 아파트 밀집도가 높고 스카이라인이 높아 고채도의 색상과 다양한 톤의 색상을 사용하기보다는 비슷한 계열의 디자인과 색채를 주로 사용한다. 특별히 튀지 않고 인근 단지와도 융화되는 컬러팔레트 안에서 색을 선택한다.
밀집도가 낮은 지역의 아파트는 조금 더 개성을 강조하거나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 해안지역의 경우 바다와 어울리는 파란색 계열의 배색을 선호한다.
이에 많은 지자체들은 지역 경관과 정체성 확립을 위해 건물 건축 시 적용할 수 있는 환경색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놓고 있다.
대구시 환경색채 가이드라인
대구시의 경우 시가지권역에서 주거지역은 안정된 느낌의 기조색으로 중명도나 고명도, 저채도를 바탕으로 한 회색이나 황토색 계열의 색상을 권장한다. 대구 동구권역은 팔공산의 자연경관과의 조화를 위해 기조색을 흰보라색, 보조색을 밝은 청록색으로, 강조색을 대구하늘 청색으로 할 것을 추천한다.
페인트업계는 아파트에서 재도장을 진행할 때 지역 환경색채 가이드라인을 반영해 도시 색채와 지역별 상징색, 색채의 특징과 특성을 분석하고 색채 디자인을 선정한다. 이어 색채 시뮬레이션으로 주거 형태, 경관 등 주변 환경에 적합한 추천 배색을 제안한다.
컬러디자인 서비스 활발
최근 건설경기가 위축되면서 재건축·리모델링을 미루고 아파트 장수명화와 이미지 변화를 위해 외벽 재도장에 나서는 아파트가 늘어난다. 이에 따라 재도장 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 페인트업계의 설명이다. 업계는 맞춤형 색채 디자인을 내세우며 아파트 고객 모시기에 나선다.
노루페인트는 재도장 시장을 노리고 홈페이지에 아파트 재도장 전용 페이지를 오픈했다. 컨설팅 프로세스와 디자인 시뮬레이션 등 재도장 원스톱 서비스에 대한 내용이 설명돼 있다. 아파트가 의뢰할 내용과 정보 등을 입력하면 전문가가 현장을 방문해 환경, 고객의 요구 등을 확인한 후 색과 디자인을 제안한다.
삼화페인트 컬러디자인센터 사무실 [사진: 삼화페인트]
삼화페인트는 재도장 시장 공략을 위해 올해 1월 조직개편에서 컬러디자인센터 내 재도장디자인팀을 구성했다. 이 센터는 매년 건설사별 신축 입주 단지를 대상으로 외벽, 주차장, 조경, 커뮤니티 시설 등에 대한 색상 마감 내역을 조사하고 분석한다. 이를 토대로 아파트 도장 안내서, 컬러 프로모션 가이드 등을 발간하고 아파트 등에 컬러 컨설팅을 실시한다.
KCC도 컬러&디자인센터를 통해 신축 아파트의 외벽 디자인 트렌드를 분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구축 아파트 재도장을 위한 재도장 종합 안내서 ‘RE-ACT(Repainting Apartment Color Trend)’를 발간했다. 또 외벽 재도장을 계획하고 있는 아파트를 대상으로 색채 디자인 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슬기 삼화페인트 팀장은 “입주자대표회의가 젊어지면서 신축 아파트와 같은 배색의 니즈가 높아지고 있다”며 “페인트회사는 입주민이 원하는 색채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컨설팅하고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위해 지자체와 아파트를 중재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남철 노루페인트 팀장 역시 “재도장 아파트는 연한이 모두 다르고 콘크리트 상태, 오염도, 크랙 등 상황이 똑같은 곳이 한 군데도 없다”며 “이런 내용을 잘 파악하고 입주민을 설득해 적재적소에 적합한 색채 디자인을 제공해 최상의 만족도를 만드는 것이 올바른 색채 서비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