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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취산의 향실 > |
사진설명: 나이 80에 이른 부처님은 영취산을 뒤로 한 채 열반의 길에 오른다. |
라자가하 영취산에서 ‘쇠망이 오지 않는 일곱 가지 가르침’인 칠불퇴법(七佛退法)을 설한 뒤, 부처님은 나란다를 거쳐 파탈리 마을(현재의 파트나)에 도착했다. 마침 이웃나라 밧지족을 막기 위해, 파탈리 마을에 새로운 성을 쌓고 있던 마가다국 대신(大臣) 스니다와 밧사카라에게 가르침을 폈다. 부처님은 이어 파탈리 마을의 앞날을 예언한다.
“아난다여! 이곳이 고귀한 장소이며, 또한 상인들의 교차지점인 한, 파탈리푸트라는 마가다 제1의 도시이고, 물자의 집산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난다여! 파탈리푸트라에는 번영을 해치는 세 가지 장애가 있을 것이다. 불에 의한 것, 물에 의한 것, 그리고 사람들의 불화에 의한 것이 세 가지 장애다.”
그리곤 “강물이 강둑 가득 차 올라 까마귀조차 강물을 먹을 정도”인 갠지즈에 도착, “힘센 사나이가 팔을 폈다 굽힐 정도의 짧은 순간에 홀연 비구들과 함께” 강을 건넜다. 당시 부처님이 갠지즈강을 건너기 위해 나간 문은 ‘고타마 문’, 강을 건넌 곳은 ‘고타마 나루터’로 명명됐다.
지난 3월24일 오후 3시30분. ‘열반의 길’을 따라 파트나에 도착했다. 비하르주의 주도(州都) 파트나의 옛 이름은 파탈리푸트라. 한역 경전엔 화씨성(華氏城)으로 나온다. 도시가 온통 꽃으로 덮여 있었기에 ‘꽃의 성’으로 불렸던 파트나는 마가다 국을 계승한 마우리아 왕조 때 대단한 번영을 누렸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아쇼카 왕의 보호 아래 파트나 불교는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파트나는 전 인도대륙을 통치하는 중심도시로, 자기 위상을 한껏 세상에 드높였다. 불전(佛典)의 제3결집도 파트나에서 거행됐다.
갠지즈강 건너 바이샬리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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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즈강과 다리 > |
사진설명: 파트나에 있는 갠지즈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 그 옛날 부처님이 갠지즈강 건넌 곳을자세히 알 수 없다. |
그 틈에 머리칼을 빡빡 깍은, 특이한 모습의 사람들이 여기 저기 보였다. 안내인에게 물으니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머리카락 몇 올만 남기고 삭발하는데, 빡빡 깍은 사람은 부모가 죽은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자세히 보니 과연 머리카락 몇 올이 머리에 붙어있다. 머리카락이 강변 이곳저곳에 흩어져, 바람에 날리는 이유를 그제야 알게됐다. 삭발했지만 슬픈 표정은 아니었다. “부모가 죽어 좋은 곳에 태어나는데,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인도인들은 생각한단다. 갠지즈 강변은 생과 사의 현장이자,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처럼 보였다.
重病 걸린 부처님 정진으로 극복
〈마하파리닛바나 숫탄타〉를 보면 부처님이 갠지즈강을 건널 당시에도 강변엔 사람들이 붐볐다. “강변에는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보였다. 어떤 이들은 배를 찾고, 어떤 이들은 뗏목을 찾았다. 또 어떤 이들은 대나무 뗏목을 엮고자 했다. 그때 부처님은 마치 힘센 사나이가 팔을 폈다 굽힐 정도의 짧은 순간에 홀연 비구들과 함께 저쪽 언덕으로 건너셨다.”
물론 강을 건너는 모습 자체는 부처님 당시완 많이 다를 것이다. “옛날엔 배타고 건넜겠지만 지금의 파트나 시민들은 대부분 차 타고 강을 건넌다”며 안내인은 머리 위의 긴 다리를 가리켰다. 바이샬리로 통하는 큰 다리가 생긴 후 갠지즈 강변의 종교적 분위기는 많이 상쇄된 듯 했다.
갠지즈 강을 건넌 부처님은 나디카 마을을 거쳐 바이샬리에 도착, 암바팔리 동산에 머물렀다. 암바팔리는 당시 바이샬리를 대표하는 유명한 유녀(遊女). 부처님이 자신의 동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즉시 수레를 타고 망고동산으로 갔다. “부처님이시여! 내일은 여러 비구들과 함께 부디 저의 공양을 받아 주소서.” 부처님은 청을 침묵으로 수락했다.
암바팔리의 공양 소식을 접한 릿차비족은 ‘공양 양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암바팔리는 “아니옵니다. 어르신! 설령 이 풍요로운 바이샬리 마을을 전부 준다해도 그것만은 양도할 수 없사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며 양도를 거절했다. 다음날. 부처님은 비구들과 암바팔리의 정원에 갔다. 공양을 마치자, 암바팔리는 “부처님이시여! 이 정원을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들에게 기진하겠습니다. 부디 수락하여 주소서.” 부처님은 청을 받아들였다.
“자신·진리를 의지처로 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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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나 전경 > |
사진설명: 도시가 온통 꽃으로 덮여 '꽃의 성'으로불렸던 파트나에서 부처님은 갠지즈강을 건넜다. |
부처님은 바이샬리 벨루바 마을에서 중병에 걸렸다. 심한 고통이 엄습하여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부처님은 고통을 참았다. “내 가까이에서 시봉하는 이들에게 여태껏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비구들에게 한번도 깨달음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열반에 들면 안된다. 지금은 정진으로 병을 극복하고, 유수(留壽. 생명 연장)를 확립하여 머물도록 하자.” 병마를 이긴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자신과 진리를 의지처로 삼아라’는 법문을 했다.
“아난다여! 비구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였느니라. 아난다여! 중요한 것은 비밀로 한다는 ‘스승의 권한(師拳)’이라는 것은 여래의 가르침에는 없느니라. …(중략)…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들 비구도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자신에게 귀의할 것이며 타인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또 진리를 의지처로 하고 진리에 귀의할 것이며,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유적만 남아 ‘과거’ 전해
우리가 찾아간 바이샬리에도 유적은 있지만 ‘살아있는 불교’는 없었다. 부처님께 꿀을 공양한 원숭이들이 팠다는 선후지, 그 옆에 있는 대림중각강당, 바로 앞에 늠름한 아쇼카석주가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부처님이 그렇게 강조한 “진리에 귀의하고 자신에게 귀의하는” 수행자나 불교는 없다. 바이샬리 곳곳을 둘러봐도, 불교 흔적은 유적 위를 지나가는 ‘바람’에만 있을 뿐, 지상(地上)에는 없었다. 그것이 한없이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