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홍 갑(국사편찬위원회)선생님의 논문입니다.
역사학자의 논문이라 기존 보첩류에 비해 안강노씨에 대해여 객관적으로 연구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경주노씨 성립과 그 일파의 선산지역 정착과정
박 홍 갑(국사편찬위원회)
〈차 례〉
머리말
1. 우리나라 姓貫제도 형성과 발전
2. 경주노씨 기원과 시조를 전후한 世系 검토
3. 조선전기 인물 배출과 선산지역 정착과정
맺음말
머리말
우리나라 성씨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반적으로 쓰인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문물제도들이 거의 중국에서 들어왔는데, 성씨 또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울러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문물제도라 할지라도 우리 정서와 실정에 맞는 형태로 변형시켜 사용해 왔듯이, 성씨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중국의 그것과는 상이한 점이 많다.
성과 본관이 등장하는 시기는 신라중기나 후기부터인데,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에 들어와서이다. 태조가 통일 위업을 달성한 후 전국에 산재한 호족을 아우르기 위해 성과 본관을 分定한 것에서 출발한다는 시각이 있는 반면, 그 시기를 좀 더 늦춰 잡거나 성과 본관의 사회적 기능이 달랐다는 견해도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거주지를 제한받았던 본관제도는 민의 통제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지만, 그 후 거주지 이동으로 인한 移籍이나 賜籍과 賜貫을 통한 본관 개변은 물론이고, 본관지의 행정구역 변천과 함께 생성․소멸 과정 등을 거치기도 했다. 본고에서 살펴 볼 안강노씨 역시 경주의 속현이던 안강을 본관지로 삼았기 때문에, 안강이 폐현되고 나서 자연히 경주노씨로도 불려졌다.
이 때문에 근세의 성씨관련 자료에서는 안강과 경주노씨에 대해 시조를 따로 설정할 정도였는데, 이는 우리 성씨에 관한 역사적 맥락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출발한 오류였다고 본다. 적어도 임란 이전까지는 경주노씨라 불리지는 않았고, 거의 안강노씨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본고 서술 과정에서도 부득이하게 양자가 뒤섞여 있는데, 동일한 씨족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산에 정착했던 경주(안강)노씨 가문은 이미 몇몇 학자에 의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되었듯이, 경주노씨에 대한 기존 설명들 중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면도 있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새로이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노씨의 가계기록인 족보부터 검토해야 할 것이다. 족보류의 가계기록 자체에 대한 신빙성을 크게 부여하는 의견도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못하는 면이 많았다. 우리 족보는 17세기 이후 始刊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당대의 인물들까지 시조와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어 있기는 하나 그 신빙성은 여전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경주노씨 족보는 시조였던 光漢 이후부터 조선 초까지 연결할 계보 자료가 없어 공란으로 남겨 놓았다. 이것은 작위적인 왜곡은 없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고 족보에 실린 모든 내용들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것만으로 채워졌다고 볼 수도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우리 성씨에 관한 일반적인 상황을 개괄한 후 이를 바탕으로 경주노씨의 선계에 대한 세밀한 검증작업이 요구된다 하겠다. 이 작업에는 본관지 안강의 행정구역 변화 추이와 결부시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후 조선조에 들어와서 본관지 안강을 떠나 선산으로 이동한 경위를 추적한 다음, 그 후예들의 정착과정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조선후기 문중조직이 성립되기 이전, 특정 가문이 한 지역에 정착해 가는 과정을 살피기 위한 사례 연구인 동시에 선산지역 경주노씨 문중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선행 연구이기도 하다.
1. 우리나라 姓貫제도 형성과 발전
우리나라 성씨제도에 대한 기원을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유래는 매우 깊다. 원래 인간을 호칭하는 고유명만 있었는데, 중국식 한자 姓을 받아들이면서 성과 이름이 조합되었다. 가장 오래된 성씨로는 신라 왕실을 구성했던 박․석․김이나 사로국 6촌 촌장이었던 이․배․설․정․손․최씨 등 9성씨를 꼽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 혁거세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와 성을 朴이라 불렀다고 했고, 경주김씨나 김해김씨 시조 또한 비슷한 신화를 갖고 있다. 이처럼 시조 때부터 성씨를 사용한 듯 기록은 되었으나, 실제는 후대에 와서 소급 추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존하는 삼국시대 금석문에서는 성씨 사용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씨족이 분화․발전해 갔던 것과 漢姓化 과정은 구분해야 한다.
우리 성씨가 본격적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신라말~고려초였다. 당시 제작된 각종 금석문을 비롯하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고유 인명들이 많다. 이는 아직 중국식 한자 성을 받아들이는 초기단계였음을 말해준다. 간혹 漢姓 인명이 나오긴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성은 그 계보가 후대에까지 연결되지도 않았고, 이는 후삼국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5대 대성인 김․이․박․최․정씨가 모두 신라에서 출발한 성이었고, 이들이 오늘날 전체 인구의 절반을 상회하고 있다.
우리 성씨는 중국 당나라 「氏族志」「郡望表」「通志略」에 나오는 유명 姓字를 모방하였는데, 신라의 9성씨 역시 박씨를 제외한다면 모두 중국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신라하대 당나라 유학생이나 왕래하던 상인들이 중국의 유명 성을 대거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盧氏 역시 최초의 得姓 과정에서 중국에 있던 姓字를 그대로 모방하였던 것은 물론이고, 조상의 유래 역시 그 기원을 중국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모화사상에서 나온 것일 뿐, 실제 조상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노씨뿐만 아니라 남양홍씨, 면천변씨, 연안이씨, 해주오씨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 성씨는 부계 혈통을 밝혀주는 ‘姓’과 그 성이 딛고 일어선 지역을 나타내는 본관인 ‘氏’가 합쳐진 것이다. 이렇듯 우리 성씨는 혈연과 지연을 분리해서는 존재가치가 거의 없다. 이에 따라 일찍부터 ‘土姓’이란 용어가 사용되어 왔다. 지연적인 ‘土’와 혈연적인 ‘姓’의 조합이기에 단순히 한 지역의 토착 성씨란 의미를 뛰어 넘는다. ‘土’의 의미는 본관지를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 할지라도 원래 성의 出自地인 본관을 뜻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성이 없던 천민을 호적에 등재할 때도 본관만은 기입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본관의 중요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토성이란 용어는 고려 말 조선 초기 문헌에 주로 쓰였는데, 이는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가 전국에 산재한 토착세력에 대한 우대책으로 姓과 氏를 分定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후삼국 통일 당시 영토였던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 지역에만 토성이 존재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일종의 논공행상이란 의미와 골품제를 대체할 무엇이 필요했고, 또 효율적인 지방 통제를 위해 토성을 分定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생겨난 토성들은 지역적인 이동은 물론이고, 그 자체가 분화․발전․소멸 과정을 거쳤다. 조선 초기에 와서 『세종실록지리지』각 군현 성씨조에 亡姓과 來姓으로 표현된 것들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신생 고을이 생기면 고을 읍사를 돌보는 향리들이 필요했고, 각 고을별 향리 조정책으로 새로이 續姓이란 용어도 생겨났다. 이렇듯 고려시기 이래 전국 규모의 성씨 전모가 수록된 것이 『세종실록지리지』였다. 이는 우리나라 성씨 일람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데, 성씨가 처음 사용된 이래 조선초기까지의 상황을 총정리 한 것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이곳에는 약 250개의 성과 4,500개에 이르는 본관이 정리되어 있다.
고려 초기만 해도 성씨가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았다. 성씨는 원래 중앙귀족부터 稱姓하기 시작하여 지방 유력층에게 파급되어 갔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조선조 16세기까지도 無姓層이 약 40%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당시 성관제도는 중앙권력의 지방지배 차원에서 운영된 면이 강하며, 이미 중국식 성을 가졌던 씨족은 그것이 바로 토성이 되었다. 간혹 賜姓을 받은 자가 있었지만, 그들 중에 이미 한자식 성을 사용했던 씨족은 기존 성을 토성으로 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통일신라이후 군현 단위의 행정구역 편성은 대개 고대 성읍국가 이래의 國, 城, 村들이 따로 독립하거나 아니면 몇 개가 합쳐져 이루어졌다. 그런데 토성 수는 합쳐져 생긴 고을 숫자와 동일하게 나타나는 곳이 많다. 따라서 城이나 村을 대표하던 씨족들이 토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성립된 토성은 그 후 부단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였는데, 이는 본관지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과 맥을 같이 하였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우리 성씨는 전통시대 지방 행정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안강노씨 역시 안강 지역 행정구역 편성과 연관됨은 물론이다.
전통시대 군현들의 고을 형태는 읍치(읍내), 수령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지였던 直村, 이보다 멀리 떨어진 외곽촌, 속현이나 향․소․부곡과 같이 군현 단위에 병열적으로 존재했던 任內(管內와 같은 뜻) 등 4단계로 구성된다. 임내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나 향․소․부곡․역․장․처와 같은 행정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임내는 독자적인 행정체계를 갖고는 있지만, 큰 고을에 예속되어 있었다. 경주, 상주, 남원처럼 큰 고을일수록 많은 임내를 보유한 것은 당연하다. 안강 역시 경주 임내로 존속해 왔는데, 이와 관련하여 유의할 점은 읍치와 직촌․외곽촌․임내 각각에 토착한 성씨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임내의 성씨 중에는 주읍의 토성과 같은 姓字가 많았다. 이는 주읍 토성들이 임내(관내)로 이주한 결과였다. 안강에도 노씨를 비롯한 토착 5개 성씨 외에 주읍이던 경주에서 이주해 온 최씨와 이씨들이 있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우리나라 성씨는 지방 행정구역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즉, 군현제도를 정비하면서 그 곳의 토착세력들에게 본관과 성을 동시에 공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행정구역마다 성씨 명칭들이 달리 사용되고 있었던 점도 주의해야 한다. 토성은 來姓, 續姓, 賜姓을 제외한 성씨인데, 읍치(내)를 장악한 人吏姓, 직할촌의 百姓姓, 외곽촌의 (外)村姓으로 구분되기도 하고, 주읍인가 아니면 속현이나 향․소․부곡인가에 따라 주․부․군․현성, 속현성, 향․소․부곡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속현성이나 부곡성 등은 바로 임내성이다. 주읍에 예속된 속현 이하를 임내(관내)라 불렀기 때문이다.
위의 분류는 읍격에 따라 姓勢 역시 좌우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안강노씨의 경우 토성이자 임내성이었고, 임내성 중에서도 속현성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이렇듯 토성은 행정구역 체계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었는데, 성 자체가 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이라도 본관에 따라 격에 차이가 있었다. 즉, 본관지 고을 대소에 따라, 혹은 그 아래 놓여 있는 속현인가 향소부곡인가에 따라 성씨의 격이 결정되었다.
고려이후 지방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토성 역시 변화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 태조가 대대적인 토성 분정을 한 것은 성씨를 국가적 편제 하에 두어 호구파악이나 세금 부과 등을 용인하게 하겠다는 의도였다. 고려 지방제도에 있어 군현을 유지하는 3대 요소는 행정구역․주민․향리이다. 원활한 지방행정을 위해서는 향리 공급이 우선되어야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소재 각 고을별 토성은 그 고을 邑司를 구성하는 향리 성씨를 대상으로 기재한 것이다. 그렇다면 토성이 생성된 이래 그 역할은 분명하다. 지방 단위의 읍사를 장악하면서 꾸준하게 중앙관료를 배출하는 모집단으로서의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안강노씨 역시 고려시기에는 안강현 읍사를 장악한 토착 향리집단이었던 것이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토성 중에서 상경 從仕한 부류도 있고, 토착했던 지역에 남아있던 재지세력도 있었다. 재지세력이 남아 있는 한 亡姓은 되질 않았다. 재지세력은 각 군현의 邑司를 담당하는 향리들이었다. 고려시대 고급 관인들을 분석하면 거의가 토성 출신이고, 그 나머지는 중국이나 발해에서 귀화한 인물과 그 후손들이었다. 재경관인들이 낙향을 할 때는 원래의 고향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처가나 외가 쪽을 낙향지로 택하는 수가 많았다. 재지세력들 또한 처향 혹은 외향을 따라 이주하는 경우도 흔하였다. 당시 자녀 균분상속제 하에서 재산이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고려시기에는 새로운 정착지로 본관을 개변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이주한 가문을 보면 본관지를 떠나도 移籍하는 사례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안강에 토착했던 노씨가 선산으로 이주한 것도 후자의 경우이기에 안강이란 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15세기 말부터 종래에 세분되었던 본관이 主邑 중심으로 통합되어가는 추세였다. 그것은 조선건국 후 지방제도를 개편하는 가운데 임내가 주읍에 통합되는 시대적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런 추세에 편승하여 기존 속현성과 향․소․부곡성은 기존 본관을 버리고 통합되었던 주읍을 본관지로 선택한 씨족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내성에서 출발하여 이미 명문으로 성장했던 가문은 기존 본관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많았다. 아울러 조선시대에는 본관을 개변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는 군현 통폐합으로 개변한 경우도 있었지만, 동성은 동본이라는 관념 하에 顯祖를 받들지 못한 가문들이 본관을 바꾸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조선후기에 들어와 안강이 폐현되자 안강노씨 역시 경주노씨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러한 연유로 근세의 성씨관련 자료에는 안강노씨와 경주노씨 시조가 각기 다른 사람으로 기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착오인 것으로 판단되며, 자세한 사항은 다음 장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2. 경주노씨 기원과 시조를 전후한 世系 검토
우리 문헌에 世譜 혹은 族譜라는 용어는 고려시기에도 간혹 보인다. 그러나 이를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편찬된 족보류와 동일한 것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대개 내․외손 4대 정도를 기록한 가첩이나 家乘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내․외손을 함께 기록한 것은 당시의 결혼풍속과 상속제도가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을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역사상 수많은 족보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것이 1476년(성종 7)에 편찬된 『안동권씨성화보』였는데, 이 역시 내․외손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권씨의 외손이었던 서거정이 쓴 서문에서 “아무리 명문이라도 몇 대만 지나면 고조․증조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한 내용에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16세기를 지나 17세기 이후가 되면 가히 보학의 시대라 할 만큼 족보 편찬이 많아졌다. 그런데, 가첩과 가승을 비롯한 족보류의 초안 작업이 있었던 가문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先代世系를 정리하여 연결할 자료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시기에는 의도적인 왜곡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 발간된 족보들은 명문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조상 이력에 대한 과장이 심하게 자행되었고, 지나치게 世系를 소급하여 꿰맞추기를 기도 했다. 또 중국에 같은 姓字가 있다는 것을 빌미로 많은 가문에서 자신의 조상을 중국 인물과 연결하기도 했다. 조선후기의 만연한 중화사상 때문이었다, 오늘날 족보류를 인용할 때에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 초기를 전후한 성씨 상황은 『세종실록지리지』가 기본 자료가 되고, 16세기 성씨를 판단하는 데는 『大東韻府群玉』의 성씨조항들이 믿을 만하다. 그러나 전자는 편찬된 후 비장되어 열람이 금지되었기에 족보편찬 당시에는 참고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대동운부군옥』이 간행된 후 조선후기 보첩 간행의 준거로도 활용될 수 있었는데, 이 역시 세세한 世系를 확인해 주는 자료는 아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보첩류가 심하게 왜곡하기 이전의 자료이기 때문에 성씨 관련 연구에는 크게 도움이 된다.
따라서 안강 노씨의 기원을 살피는 작업도 보첩류보다는 우선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내용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편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속현이 넷이니, 안강현은 본래 신라 비화현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의창군 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주·부·군·현의 관할을 정하매 경주부의 임내로 붙였고, 공양왕 2년 경오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으며, 본조 태조 3년 갑술에 다시 본부의 임내로 하였다.【신라 파사왕이 음집벌국을 취하여 음집화현을 두었는데, 뒤에 그 땅을 안강현에 합속 시켰다.】 …… 본부의 토성이 6이니, 이·최·정·손·배·설이다. 天降姓이 3이니, 박·석·김이다. 來姓이 1이니, 康이요,【洞州에서 왔다.】 賜姓이 1이니, 偰이며,【원나라 崇文監丞 偰遜은 고창국 사람인데, 원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동방으로 와서, 그 맏아들 판삼사사 설장수가 관향 주기를 청하니, 태조가 계림으로 본관을 삼기를 명하였다.】 續姓이 1이니, 楊이다.【기계에서 왔는데, 이때에 향리가 되었다.】 안강현의 성이 5이니, 안·노·김·황·염이요, 중국에서 온 성[唐來姓]이 2이니, 邵·邊이며, 續姓이 3이니, 윤【송생에서 왔다.】·최·이【本府에서 왔다. 모두 향리가 되었다.】이다.……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안강현은 본래 신라 비화현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다가 신라가 통일된 후 경덕왕이 안강으로 이름을 고쳐서 의창군이 관할하도록 하였다. 의창군은 흥해의 옛 이름이다. 그 후 고려 현종 9년(1018)에 지방제도 개편을 하면서 주·부·군·현의 관할을 정할 때 경주부의 임내로 붙였다고 한다. 따라서 태조 23년 즈음 각 지방의 토착세력을 대상으로 토성을 분정할 당시에는 경주 관할이 아니라 흥해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아무튼 고려 태조 때부터 안강 지역에 토착하고 있던 노씨를 포함한 다섯 유력 씨족들이 토성으로 分定되어 안강현의 邑司를 장악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에 예속된 후에도 이들 다섯 토성들이 독립적으로 안강현의 향직을 이어갔을 것이다. 안강이 경주의 속현이었기에 단지 현령이 파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지, 읍사를 운영하는 향리는 지속적으로 공급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개 속현에도 주현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읍사를 구성하는 姓團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속현의 토성이었다. 따라서 안강 읍사를 장악하며 향직을 이어갔던 안․노․김․황․염씨들이 경주부윤의 통제 하에 안강현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강현이 이렇게 내려오다 공양왕 2년(1390)에 경주 속현에서 독립되어 비로소 감무를 둔 적이 있다. 이때에는 독자적으로 현령이 파견되어 안강을 다스렸다. 그러나 5년 후인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다시 경주부 임내로 붙였기에 속현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조선 초기 안강은 기계, 신광 등과 함께 경주 속현으로 존재했다. 그런데 안강이라는 지역의 행정구역 변천과는 상관없이 이곳을 본관으로 한 성씨들은 안강현 읍사를 구성하는 성단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은 위의 『세종실록지리지』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근세에 편찬된 성씨관련 자료에는 경주노씨와 안강노씨가 서로 다른 시조를 두고 있는 양 기록하고 있다.
안강현에는 노씨를 비롯한 5개의 토성 외에도 중국에서 건너 온 성씨 2개와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속성 3성씨가 공존하고 있었다. 안강에 속성이 존재했던 것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현이 독립적인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향리 조정책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인구이동이나 감무 파견 등에 따라 안강현 읍사를 이끌어 갈 향리층이 부족해지자 경주에 있던 최씨나 이씨, 청송 송생의 윤씨를 안강으로 이주시켜 읍사 운영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노씨와 안강노씨에 대한 문제에 대해 논의를 좀 더 진행하기 위해 『세종실록지리지』소재 노씨 관련 자료를 모두 뽑아보기로 하자.
위의 표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 노씨의 토성 수는 대략 23개 정도였다. 그밖에 속성과 촌성․인리성 등을 합치면 본관 수는 30개 안팎으로 추산된다. 앞에서도 설명이 되었지만, 경주부 토성으로는 노씨가 존재하지 않았고 안강에만 토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주노씨가 처음으로 보이는 자료는 『대동운부군옥』이다. 이 책 上平聲 “盧” 조항 성씨조에 의하면, 노씨 본관에 대해 교하, 광주, 경주, 풍천 등 4곳만 예시하고 있다. 이 4곳 중 경주 외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모두 해당 지역 토성으로 나타난 지역이다.
『대동운부군옥』은 권문해가 선조 22년(1589)에 20권 20책으로 편찬을 완료하였으나 임란으로 바로 간행되지 못하다가 후에 간행되었다. 따라서 16세기 후반의 상황을 잘 담고 있다고 판단되는데, 앞에서 제시된 교하․광주․경주․풍천을 본관으로 한 노씨가 조선 전시기를 통하여 가장 두각을 나타낸 명문들이다. 문제는 안강이 경주로 표기되었다는 것인데, 16세기 중반까지도 안강은 경주의 속현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 면리제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경주 소속의 면으로 변해 갔다. 이 과정에서 안강노씨는 자연히 경주노씨로도 불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사정을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할 당시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이 책의 경주노씨에 대한 주석에서 “其先出於安康縣 麗初盧光漢之後”라 하여, 그 선계가 안강현 출신이라 밝히고 있는데, 이는 안강현이 이미 폐현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사례라 추정된다.
그런데, 근대에 편찬된 성씨관련 자료에서는 안강노씨와 경주노씨를 따로 소개하고 있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1908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안강노씨 시조를 고려조에 직장동정을 역임한 仁景으로 표기하였고, 경주노씨 시조에 대해서는 고려 초기 인물이었던 江漢이었음을 전제한 후 “其先出於安康”이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이렇듯 안강과 경주노씨 시조를 각각 달리 기술하고 있는데, 후자는 앞에서 예시한 『대동운부군옥』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안강노씨 시조 노인경이란 인물이 직장동정을 역임했다면 고려 중기 이후의 인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노광한은 고려 초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광한 후손의 한 갈래가 안강노씨가 되었다는 의미로 봐야 하지만, “其先出於安康”라는 주석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이는 후대 성씨관련 자료 편찬과정에서 안강노씨와 경주노씨가 따로 존재했던 것으로 오인하여 생긴 결과가 아닌가 한다.
조선전기 문과 급제자 명단인 『문과방목』에서 노씨 합격자를 조사하면 모두 6명 정도가 찾아진다. 이곳에서는 모두 안강노씨로 표기되어 있는데, 특히 인조 때에도 여전히 안강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권문해가 경주노씨라는 명칭을 사용하긴 했어도, 안강 폐현 후에도 여전히 이를 본관지로 애용했음이 분명하다. 1727년에 李裁가 지은 경암공 노경임(1569~1620) 행장이나 죽월헌 노계정(1695~1755)이 직접 남긴 선조 묘지명, 그의 행장 및 묘갈명(채제공 찬) 등에서도 반드시 “경주 안강”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이처럼 조선후기 노씨 문중에서 “경주 안강”으로 본관을 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혼란을 가중한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앞에서 소개한 『증보문헌비고』에는 노씨 본관을 모두 137개로 나타내고 있다. 이에 비해 1924년에 간행된 『전고대방』에서는 총 15개 본관지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안강과 경주노씨에 대한 주석 역시 『증보문헌비고』처럼 그 시조를 달리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전고대방』은 『증보문헌비고』 내용을 단순 참고한 것이라 여겨진다. 159개 노씨 본관을 소개한 『조선씨족통보』(1924) 역시 『증보문헌비고』 내용을 답습하여 안강과 경주노씨 시조를 달리 기술하고 있다. 다만 경주노씨 난에 “慶州盧氏 一云府使盧協之後”라는 주석을 첨가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노협은 인조 15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부사를 지낸 인물인데, 『국조문과방목』에는 그의 본관을 안강으로 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안강과 경주노씨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증보문헌비고』에서 안강노씨 시조에 대해 직장동정을 역임한 仁景으로 표기한 까닭은 무엇인가? 현재의 경주노씨 족보상 仁景이라는 고려시대 인물이 찾아지긴 한다. 인경은 판서공파 1세인 倫의 아들인데, 대체로 고려 중기쯤의 인물에 해당한다. 여기에 보이는 노인경이 직장동정을 역임하였다면 안강노씨 시조로 지목된 인경과 동일인물일 확률이 높지만, 자료부족으로 더 이상의 논의를 진척시키기는 어렵다. 선산지역에 세거하였던 종선 계열은 고려 초 대광정승을 지낸 광한을 시조로 하지만, 그로부터 조선초기까지 계보를 메우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비해 倫을 파시조로 하는 판서공파는 비록 단선이지만 계보가 연결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일찍부터 가첩 정도의 계보가 정리되어 내려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오늘날 노씨 족보에는 본관에 상관없이 당나라 말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왔다는 穗를 시조로 하는 동시에 그의 아들 9형제가 분봉 받아 각각의 본관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중기에 편찬된 『대동운부군옥』에서는 이런 사실이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근세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 등에서는 4형제 분봉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垓가 광주백으로, 塢가 교하백으로, 坵가 장연백으로, 址가 풍천백으로 각각 봉읍을 받아 본관을 삼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초기 보첩류 기록에는 중국과의 관련성이나 분봉에 대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노경임이 선조 34년(1601)에 지었다는 「舊家牒序」에는 적어도 그러하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본관에 상관없이 모두 동일시조 아래 9형제가 분봉되었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마치 수많은 본관을 가진 박씨가 모두 혁거세 자손으로 연결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18세기 중반이후에는 같은 성씨이면 동일자손이란 미명아래 대동보가 유행하였는데,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본관이 다르면 혈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시각이고,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 장에서도 설명이 있었다.
성균관 생원 노규태가 지은 경주노씨 乙未譜(1835년) 서문에 의하면, 중국 范陽盧氏의 한 갈래가 동쪽으로 와서 정착했다는 동래설과 함께 신라 말 고려 초 9아들에게 분봉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동래하였다거나 분봉 받은 이가 누군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거명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서문에서는 광주․교하․풍천노씨 인물들을 거론함으로써 노씨는 모두 한 뿌리라는 대동보적인 성격을 내 보였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대동운부군옥』에서 경주노씨에 대해 “其先出於安康縣 麗初盧光漢之後”라고 표기한 것은 당시 대체로 통용되던 상황을 옮겼을 것이다. 이 책은 권문해가 선조 22년(1589)에 20권 20책으로 편찬을 완료하였으나 임란으로 간행은 그 후에 이루어졌고, 발문은 김응조(1587∼1667)가 찬했다. 이 책에서는 노씨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경주노씨 문중 자료 중에서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것에서도 큰 변화는 없다. 즉, 노경임이 신축년(1601) 경에 쓴 것으로 보이는 「松菴公(노수함)遺事」에는 조상 내력에 대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영조 3년(1727)에 이재(1657~1730)가 찬한 「敬菴公(노경임) 行狀」에도 “그 선조로 신라 대광정승 광한이란 분이 있어 비로소 族姓書에 오르게 되었다” 라고만 언급하여 『대동운부군옥』 수준에 머물고 있는 한편, 그가 지은 묘지명에도 더 이상의 언급은 없다. 또한 이보다 시기가 다소 앞서는 것으로 보이는 노경임 묘갈명에도 신라 대광정승 광한의 후예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이 묘갈명은 『대동운부군옥』 발문을 쓴 김응조(1587∼1667)가 지은 것이다.
죽월헌 노계정(1695~1755)이나 서산와 노상추(1746~1829) 등 무반으로써 현달한 인물이 등장한 시기에 기록한 글에서도 시조 광한에 대한 언급만 보일 뿐, 중국에서 건너왔다거나 9아들이 각각 분봉 받았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중국 동래설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 노경필 행장이다. 영조 21년(1745)에 이광정이(1674∼1756) 지은 「선무랑행안기도찰방櫟亭公(노경필)行狀」에는 “노씨는 중국에서 건너와 우리나라에서 9개 관향으로 나뉘었는데, 안강을 본관으로 하는 갈래는 신라 대광정승 광한을 중시조로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순조 8년(1808)에 金㙆이 지은 「성균진사 松菴公(노수함) 행장」에는 “본관이 안강으로 신라 대광정승 광한이 비조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어 순조 11년(1811) 鄭玧이 지은 「將仕郞 亦樂齋公(노경륜) 行狀」에는 “시조인 坤이 경주 안강에 봉해져 본관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소위 안강백으로 봉해졌다는 盧坤이 노경륜 행장에서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이는 乙未譜(1835년)가 만들어지기 바로 전이다. 을미보에는 중국 范陽盧氏의 한 갈래가 건너왔다는 동래설과 9子 분봉설이 함께 실렸는데, 아마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노씨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근거는 매우 희박하며, 아홉 아들 분봉 사실 또한 그대로 믿기는 곤란한 면이 많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노씨 문중만이 아니라 다른 성씨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3. 조선전기 인물 배출과 선산지역 정착과정
조선전기만 하더라도 “봉제사 접빈객”이라는 유가의 도리가 그 사회에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가문들에서 조선 초기 인물에 대한 失墓가 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조상숭배 사상이 조선전기에도 만연하였다면 묘지까지 잃어버릴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우리는 조선후기의 관념으로 조선전기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족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란 이후 족보가 유행하기 시작하자 이를 始刊할 즈음에는 체계적인 계보를 연결할 자료를 갖지 못하는 가문이 태반이었다.
경주(안강)노씨 역시 족보를 시간할 즈음에 시조로 알려진 노광한과 연결할 자료는 거의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조선 세종조에 태어난 從善과 禧善 형제를 1세로 하여 보첩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종선 형제를 낳아 준 아버지와 할아버지조차 연결할 자료를 갖고 있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안강노씨는 고려 이래 안강의 토성으로 자리 잡았고, 조선 초기에 이르게 되면 여러 갈래의 계파가 생겼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선 형제를 1세로 하는 보첩을 만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료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조선전기 문과 급제자 명단인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6명 정도의 안강노씨 인물이 찾아진다. 그런데 이 인물들은 현재의 보첩에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문과에 합격할 정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보첩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불완전함을 나타내 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표 1> 조선전기 안강노씨 문과급제자 현황(『국조문과방목』에서 발췌)
성 명
급제년
전력
부
조부
증조
외조/처부
직력
거주
비 고
盧 浩
세종 1
생원
盧仁度
徐選(利川)
長興庫使
선산
盧尙志
세종 5
생원
盧衡
盧峯
盧成伯
周公沼(草溪)
司諫
상주
판서공파
盧晉諧
세종 17
생원
盧浩
(盧仁度)
繕工 主簿
선산
盧 麒
명종 11
생원
盧禹弼
盧景仁
院正
상주
판서공파
盧景任
선조 24
유학
盧守諴
盧希軾
盧綰
張烈(仁同)
柳雲龍(豊山)
校理 玉堂
선산
경암공파
盧 協
인조 5
참봉
盧八元
盧銓
宋希祿(恩津)
府使
京
오늘날 경주(안강)노씨 계보에서 1세인 從善은 첨정공파, 아우 禧善은 사간공파 기세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고려 중기 인물인 倫의 아들 仁景을 기세조로 하는 同正空派(혹은 판서공파)가 있는데, 이들은 종선․희선 계열과는 연결되지 않는 別系이다. 동정공파 중에서 세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한 노상지는 倫으로부터 9세가 되는 인물인데, 첨정공파 1세인 종선보다 생존 연대가 앞선다. 따라서 선산에 정착한 종선 형제보다 그 계보를 훨씬 전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가문이다. 아무튼 앞에서 살펴 본 3계파가 오늘날 경주노씨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 볼 내용은 첨정공파를 이끄는 종선의 선산지역 정착과정이다. 노종선은 한 때 선산출신으로 영남사림파를 이끌던 김종직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한훤당 김굉필과도 교류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세조조와 성종조 때에 利原縣監과 군기시 첨정(종4품)을 지낸 바 있는데, 역임한 관직으로 미루어 무과 출신일 확률이 높다. 비록 문반직을 지냈다고는 하나 문과 출신이 아닌데다 문음으로 진출했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의 선산 정착과정은 자세하진 않으나, 벼슬에서 물러난 뒤 조선의 추로지향으로 일컬어지는 선산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묘소가 금오산을 마주하고 있는 봉곡리와 성남리 사이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에 정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기 거주지 이동 상황을 추적하면 대개 처가 혹은 외가 마을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는 균분상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혼인으로 인한 이주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종선의 선산지역 정착 역시 그런 면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산 성남 일원에 처가나 외가로부터 상속받은 농지가 이미 확보되어 있어야만 이주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노종선이 평소에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고 농암 김주의 충정을 흠모하여 선산으로 옮겼다는 것은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긴 하지만,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노종선의 혼인관계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의 처 김씨는 본관조차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산의 입향조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 노종선이지만, 그 보다 이른 시기에 선산에 살았던 안강노씨 인물도 보이고 있다. 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한 盧浩가 바로 그다. 선산 읍지 중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간행되었던 『일선지』에 따르면 노호에 대해 남면에 거주했다고 하였고, 그 보다 시기가 늦은 『선산읍지』 桂榜조에서는 그에 대해 “안강인”이라 기록하고 있다. 문과 급제자 명단인 『문과방목』에서는 본관지를 선산이라 표기하였으나, 이는 거주지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아들 노진해 역시 세종 17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의 본관지를 안강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종선 이전에 노씨가 이미 안강에서 선산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족보상으로는 노종선을 상한선으로 하여 그 윗대까지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일선지』에는 선산 출신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재되어 있는데, 경주노씨로는 노호 외에도 노종선, 노수함, 노경필, 노경임 등 모두 5명이 올라있다. 따라서 안강에서 선산으로 정착했던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으나, 현재 알려진 것보다 더 이른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그리고 위의 『일선지』에 등재된 인물로 추측컨대, 선산지역으로 이주한 안강 노씨는 이 지역 양반 사회에서 일정한 지분을 확보한 것만은 틀림없다 하겠다.
노종선의 아들 소종은 충무위 사직을 지냈다. 충무위는 조선 초기 군사조직의 근간을 이루었던 5위의 후위를 이루는 군사조직이었다. 사직은 종5품의 무관직이다. 노소종은 무반직으로 있다가 연산군의 폭정과 무오․갑자 등 사화가 연이어 일어나자 향리에 되돌아 온 것으로 보인다. 소종의 아들 관 역시 部將을 역임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무반직을 대대로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선산 문동으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노관은 사림파의 거두 김굉필에게 수업하여 재행으로 천거되었으며, 그의 아들 희식은 정붕 문하에 종유했고, 동래교수를 지냈다. 노관의 손자 노수함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선산지역의 거유이던 송당 박영에게서 배웠다고 전한다. 그는 중종 35년(1540)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인근의 명문 출신 옥산장씨를 부인으로 맞을 수 있었다. 장씨부인은 증 이조판서 장열의 딸이니, 여헌 장현광의 손위 누이였다.
송암공 노수함의 아들은 여섯인데, 전 부인 전의이씨와 후취 옥산장씨가 각각 3명씩을 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중에서 장자와 차자는 후사가 없었고, 셋째인 경필과 다섯째인 경윤, 여섯째인 경임이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 경필은 여헌 장현광과 동갑의 나이였는데, 어려서부터 아버지 송암공으로부터 함께 글을 배웠다. 그리고 한때 朴演․呂大老․申之悌․張悌元․崔晛 등 인근의 명망 있던 선비들과 교유하였으며, 한강 정구 문하에 드나들면서도 학문을 익혔다.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23세에 장현광․박수일 등과 함께 향천을 받았다. 향천으로 능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임란이 일어나자 막내 동생 경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상주일대에서 싸웠다. 그 후 선조 27년(1594)에 안기도 찰방으로 임명되어 쇠잔한 驛을 소생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향년 42세의 일기로 그의 임소인 안기역에서 생을 마쳤다. 그가 생존했을 당시 문동에서 도개 화림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리고 그의 아우 경임 역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평 숭암으로 거주지를 옮겼는데, 이는 이들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 더욱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옥산장씨 소생 경륜은 명종 21년(1566)에 문동에서 태어나 8세 되던 해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고, 장성하자 한강 정구에게 사사하였으며, 고빙운․김진호와 도의로 사귀었다. 26세에 향시에 입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오르지 못했다. 왜란이 일어나자 모부인과 가솔들을 거느리고 선산 동쪽 청화산으로 피하였다가 의성을 거쳐 상주 백화산으로 옮기는 등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아우가 전란으로 죽고 그의 형들도 세상을 떠난 이가 많았다. 따라서 그는 노씨 가문을 지키는 일에 보다 적극적이었으며, 안동 임하에서 도심촌에 옮겨 살 때 유성룡의 형 유운룡이 마침 한 동리에 우거하였던 인연으로 이들 가문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그의 동생 경임이 유운룡의 딸과 혼인했던 것이 그것이다. 그의 아들은 모두 여섯인데, 둘째 아들이 형 경필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경임은 그 보다 일찍 죽었으니, 그 이후 노씨 가문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갔던 사람이 그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시기 노씨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노경임이었다. 선조 2년(1569) 선산 문동리에서 태어난 노경임은 5세 되던 해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고, 어려서부터 그의 중씨 경필의 賢行을 본받는 한편 외숙인 여헌 장현광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또한 서애 유성룡 문하에서도 학문을 익혔는데, 임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선조 24년(1591)에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에 분관되었다. 그러다가 왜란이 일어나자 형 경필을 도와 향병을 모집하여 상주에 방어선을 치고 적을 막아냈다. 이듬해 봄에 승문원 정자(정9품)를 거쳐 차례대로 승진하여 저작(정8품)과 박사(정7품)를 역임했다. 그런 후 선조 27년(1594)에 陞六[出六] 되어 공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가 그해 겨울 병조좌랑으로 자리를 옮겼고, 얼마 뒤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한 후 관동순무어사로 나가면서 10가지 시무책에 대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다시 사헌부 지평으로 돌아왔다가 곧 사직을 청하여 향리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봄에 예조정랑에 임명된 후 이어 홍문관으로 옮겨 수찬과 교리 등을 차례로 역임했고, 이후에는 예천군수, 풍기군수, 성주목사 등 외직을 두루 거쳤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낙동강 가에 詠歸亭이란 조그만 정자를 짓고 학문으로 소일하며 지냈다. 만년에 선산군 남쪽 모로실에 터를 잡아 거처를 옮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620년 향년 5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후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는데, 선산에 거주하는 노씨 일문에서 가장 현달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노경필 3형제가 오늘날 경주노씨 주류를 이루는 역정공파, 역락재공파, 경암공파의 시조인데, 모두 수함의 아들이다. 그리고 이들과 종형제인 수검의 아들 경좌는 선산에서 문경 호계로 이주하여 터를 잡았으며, 그 후손들은 이곳을 세거지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주노씨 월계공파가 바로 그 후손들이다. 또한 종선의 현손이자 동래부사를 역임한 보세는 중종 때 의성군 사곡 화전으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지며, 그 후손들인 동래공파들은 줄곧 그곳에서 살아 왔다. 따라서 선산 문동에서 출발하여 몇 대 내려오게 되면 선산 관내의 인근지역은 물론이고, 이웃 고을인 상주나 의성 등지로 각자 별업을 마련하여 흩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가면 선산에 세거한 역정공 후손들 가운데 노계정과 노상추 등 무반으로 입신하여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들이 연달아 배출되었는데, 이때가 경주노씨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그러나 노상추 당대까지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두 차례나 이주를 할 정도였다. 즉, 그가 29세 되던 1774년 호구단자에 의하면 선산 禿同洞面 第一禿同洞里 6統의 新戶 호주로 표시된 것으로 미루어 다른 지역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禿同洞里는 안강노씨 원래 세거지였으니, 다른 가족들과의 합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가 35세 되던 1780년에 다시 선산 도개면 第10華林里 1統의 新1戶로 이주하였는데, 이후로는 이곳에 정착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잦은 이주는 이때까지도 사회․경제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다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기세조 종선의 아우 희선은 군위군 오천거매로 이거하여 그의 후손들이 140여 년간 살았고, 희선의 현손 대기는 팔공산 아래 금매동으로 이주 하였다가 재차 타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희선의 10세손인 세표는 1700년경에 선산 산동면 봉산으로 옮겨 살았고, 그의 아들 계문이 다시 군위군 산성 봉림으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들과 계보 상 연결되지 않는 盧倫 후손들은 상주에 대대로 세거하였는데, 그 입향 경위에 대해 고증할 문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려말 판도판서를 역임한 노성백이 상주 출신인걸로 보아 그 당대 이전에 안강에서 상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선산에 정착했던 계파보다 더 이른 시기에 본관지인 안강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노성백의 부인이 상주 김씨인 것으로 미루어 처가에서 분재 받은 상속분의 토지와 노비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재산들은 주로 상주 일원에 산재하였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그가 상주에 정착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을 물론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한 노기가 바로 그 후손이다. 노성백 후손들은 1750년경 노이검 대에 이르러 상주 청리청하에서 의성군 단밀 생송으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맺음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보첩류는 해당 성씨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안강현(경주 속현) 토성으로 정착했던 안강노씨가 조선후기에 와서 경주노씨로 불려 지면서 조선전기 인물에 대한 추숭작업에 매달리는 한편 보첩도 간행하기 시작했다. 현재 남아있는 각종 묘갈명이나 행장 등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다른 문중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시대 문중조직이란 게 17세기 이후에야 나타났고, 문중의 구심점이 되는 조상모시기에 대한 풍속 역시 조선후기에 와서 진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형편이다 보니 경주(안강)노씨 또한 족보를 처음 만들 때 시조로 알려진 노광한이나 그와 연결된 조상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을 리 없었고, 이리하여 세종 때에 태어난 從善과 禧善 형제를 1세로 하는 족보를 편찬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 24년(1591)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노경임이 노씨 문중에서 가장 현달한 인물이었는데, 그가 지었다는 「舊家牒序(1601)」에서도 조상에 대한 내용을 알 길이 없어 안타깝다는 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노경임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진 간단한 가첩이 후대 족보 편찬에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노경임이 신축년(1601) 경에 쓴 것으로 보이는 「松菴公(노수함)遺事」에도 조상 내력에 관한 내용은 전혀 나타내지 못하였고, 영조 3년(1727)에 이재(1657~1730)가 찬한 「敬菴公(노경임) 行狀」에서 신라 대광정승 광한을 시조로 내세우고 있을 정도다. 그러니 그 이후 간행된 족보에서 보이는, 예컨대 조상의 기원을 중국에 연결한 것이나 아홉 아들이 분봉되어 노씨(교하, 광주, 경주, 풍천 등)가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식의 대동보적 성격을 드러낸 것은 조선후기 족보의 한 전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족보상 경주노씨 1세 인물로 추앙되는 종선 형제가 세조 이후 안강에서 선산으로 이주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에 안강노씨가 선산에 정착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한 盧浩가 바로 안강출신이자 선산 남면 거주자였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도로 상주에 정착했던 경주노씨 계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이미 고려 말 이전에 안강을 떠나 상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대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선산 사찬읍지 『일선지』에는 노호를 비롯하여 노종선, 노수함, 노경필, 노경임 등 모두 5명의 안강노씨 인물들이 올라있다. 따라서 선산지역에 이주한 안강노씨가 이 지역 양반 사회에서 일정한 지분을 확보한 것만은 틀림없다 하겠다. 이들 후예들은 문․무반직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仕宦하는 동시에 인근 사족들과도 끈끈한 연을 맺음으로써 그 위상을 이어갔다. 특히 선산 거유 송당 박영에게서 배워 중종 35년(1540) 진사시에 합격한 노수함의 경우 증 이조판서 장열(장현광의 부)의 딸이 그의 부인이었다. 그의 아들 여섯 중에서 장자와 차자는 후사가 없었고, 셋째인 경필과 다섯째인 경윤, 여섯째인 경임이 두각을 나타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이들 3계파가 오늘날 경주노씨의 주류를 이루는 것도 그 때문인데, 대개가 선산을 중심으로 인근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들 가문은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한 때 쇠락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영조 이후 노경필 후손 중에서 노계정, 노상추와 같은 무반 고위직을 연달아 배출하면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追補]
고려 명종 때 활약하던 상장군 노탁유 묘지명에는 “杞溪縣人"이라 소개함과 아울러 증조 이하 계보를 “□居-安孟-永醇-卓儒-陽赫”으로 밝히고 있다.(김용선 편저, 1993,『高麗墓誌銘集成』盧卓儒墓誌銘 扁, “刑部尙書龍虎軍上將軍盧卓儒 : 君諱卓儒 杞溪縣人也 考諱永醇 參知政事尙書左僕射贈諡敬肅□ 祖諱安孟工部尙書左右衛上將軍 曾祖諱□居追封中尹 ……生陽一男□□員外郞陽赫”) 또한 그의 아버지 노영순 역시 『고려사』 열전에서 “기계현인”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고려사』권100, 열전 13, 盧永淳條 ; 아들을 孝敦만 기록) 그들 씨족의 본관이 기계였음이 분명하다.
※盧永淳條 : 의종 때에 내시로 들어가 합문지후(閤門祗候)로 되었다. 희종 4년(1208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있다가 죽으니 나이 62세었으며 의정(懿貞)이라고 시호를 주었다. ===따라서 이름, 관직, 시호가 상이하다.
그런데 교하노씨 문중에서는 시조 이하 계보를 “康弼-安孟-永醇-卓儒-冲鶚”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盧□居와 盧康弼이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지만, 묘지명이 당대의 기록이란 점에서 신빙성이 더 높은 편이다. 교하노씨에 관한 자료를 보면, 공양왕 비 순비가 창성군 盧稹의 딸인데, 고려사 열전에 소개된 노진의 아버지 노정[正頁]을 소개하는 내용에서 “交河縣人”임을 밝히고 있다(『고려사』 권131 열전 44, 盧[正頁]條). 노정 열전에는 그의 아들과 손자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는데, 교하노씨족보와 대개 일치한다.
순비를 배출한 노씨 일족 거주지는 교하가 아니라 경상도 경산이었는데, 충렬왕이전에는 장산으로 불려 진 곳이다. 공양왕 2년에 왕비 노씨의 출신지였던 경산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던 사실에서 그 거주지를 확인할 수 있다(『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경산현조). 그렇다면 거주지가 장산이었지만, 열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본관은 이미 교하로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교하노씨 일족들이 본관지 교하를 떠나 경상도 장산(경산)에 정착하게 된 연유나 배경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고려말 조선초기에는 본관지를 떠나 처향이나 외가향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고려사』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약 200년의 시차가 있지만, 기계노씨와 교하노씨가 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교하노씨세보』에 의하면, 시조 노강필은 신라 말 杞溪에 세거하면서 관향을 章山(경산의 옛 이름)으로 하였다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선성부원군에 봉해지면서 교하로 복관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기계․장산․교하가 모두 노강필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교하노씨 시조 ‘노강필’이 기계노씨 ‘노□거’와 同一人임이 증명되어야 기계노씨와 교하노씨 世系 연결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동일인임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기계노씨가 고려중기 이후 교하로 移籍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이 당시는 거주지 이동에 따른 이적도 존재했던 사회였기도 하다. 移籍이었다면, 고려 중기 명종까지는 기계노씨였다가 그 이후 어느 시기엔가 교하노씨로 이적하였을 것이다. 기계노씨가 고려 중기 이후 씨족으로서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적은 단순한 거주지 이주가 아니라 본적까지 옮기는 것을 뜻한다(박은경, 2004,「고려시대 移籍 연구」『한국중세사연구』17). 앞에서 살펴 본 장산은 본관을 옮기지 않은 단순한 거주지 이동이었을 확률이 높다. 장산노씨로 표기되지 않았던 점 등 여러 정황으로 봐서 그렇다. 따라서 고려말까지 기계→교하→장산이라는 거주지 이동이 있었지만, 본관은 기계에서 교하로 개관하였을 뿐이고, 그 시기도 고려 후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을 조선후기 족보편간 과정에서 시조 노강필에게 연결 지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씨족사에 있어 시조는 족보 편간 당시 조상을 추심하다 마지막에 도달한 인물이지만, 현조와 명조를 설정해 두고 후손들을 찾아 넣으면서 가계도를 그려간 경우도 많았으리라 본다. 이 때 처음부터 체계적인 계보 자료가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혼동과 혼선이 있기 마련이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족보에서 고려시기 인물 계보가 단선으로 내려오거나 실전되어 공란으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던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아울러 중국의 벌족과 동일한 姓字란 이유로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식의 윤색은 어느 가문 없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 모화사상에 젖은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한림학사 穗가 신라에 건너 와 그의 아들 9형제가 봉군되는 과정에서 塢가 교하백으로 봉군되어 교하노씨가 생성되었다는 설이나 시조 강필이 장산노씨로 하였다가 교하노씨로 복관하였다는 설명 역시 앞에서 살펴 본 교하노씨의 역사적 추이와는 상충되는 점이 많다. 이는 조선후기 족보 편간 과정에서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