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백암고원으로 향하는 마차 속으로 차가운 가을 아침의 한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 무덥고 비 내리던 여름도 어느덧 훌쩍 지나가 버리고
늦여름 그렇게 애타게 울어 되던 매미들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남쪽지방에서는 태풍 산바가 서서히 북상준비를 마치고 있어 하늘은 구름이 잔뜩 드리워져있고 바람은 습기를 머물고 고원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산길 푸른 나무 속의 길을 한참 마차를 몰고 나가자 산 정상 근처에 우뚝 서 있는 클럽하우스가 무심객의 흑두 마차를 반겨주고 있었다.
오늘은 빌트원이 새로 구입한 백암고원의 비스타 컨트리 클럽에서 시범 라운딩을 하기 위해 빌트방 장로들이 아침 일찍 조우하고 있었다.
모두들 마음은 향후 빌트방 주최 논검대회의 주요 장소로 이용할 백암고원의 비스타 컨트리 클럽에 대한 호기심에 약간은 들떠 있는 분위기였다.
첫 인상이 좋아야 향후의 일들이 잘 풀리는 법…
모두들 마음 속에는 좋은 인상이 각인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흐릿한 아침 안개 속에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빌트방의 호법장로인 안산철권(安山鐵拳) 이찬용이 호기있게 게임룰을 제안했다.
“오늘도 역시 핸디 없이 한번 해 보시죠…”
“정..그러신다면 말리지는 않겠읍니다.”
“실력이 안되면 돈으로 해결하면 되지요…”
빌트방 집법장로 어도노부(魚島老夫) 오경식이 씨익 웃었다.
“저는 일단 핸디를 좀 받겠습니다 “
빌트방 외사장로 영천일웅(永川一雄) 김영준이 겸손하게 한 마디 했다.
“그럼 대결방식은 빌트방의 방식인 스트로크로 냉정하게 한번하시죠. “
빌트방주 무심객이 담담하게 대결방식을 선언했다.
빌트방 내부 대결은 나름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첫째는 봐주기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첫 홀부터 일파만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스코어카드에는 그 날의 진실만이 적혀질 뿐, 다른 조작은 어지간해서는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갑을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대결이기 때문이였다.
둘째는 빌트방 전체에 이 스코어가 거의 오픈되어 서로의 랭킹이 결정되고 그것에 의해 각자의 포지션이 결정된다는 것 이였다. 빌트방주인 무심객이 오픈하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것을 의도적으로 장려하여 직위나 나이, 학력등이 아닌 순수한 실력에 의해 랭킹을 책정하고 이를 우선시하고 있기 때문이였다.
쉽게 야기하면 골프장에서는 골프 잘 친 몸이 대장이고, 당구장은 당구 잘 친 놈이, 노래방에서는 노래 잘 부르는 놈이, 고도리 판에서는 고도리 잘 치는 놈이, 술집에서는 술 잘 먹는 놈이 대장인 것이 맞는 법이였다.
방주도 예외가 없었다. 그저 계급장 떼고 열심히 붙는 한 사람의 무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였다.
여러가지 따지고 가오 세우기에는 인생이 너무 허상이 많아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였다.
셋째는 스트로크 게임이 주는 치명적 위험성 이였다. 이 게임의 특성상 꼴등 한명을 거의 만신창이를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스베가스나 스킨스게임이 친선을 강조한다면, 스트로크 게임은 비정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잘 못 마인드 컨트롤 할 시에는 내상을 심하게 입게 되는 그런 독성이 있는 게임이였다.
마지막으로 빌트방 메이져 4인방에서 소외될 위험성이 있었다. 빌트원 서열 1-4위내에 들어서지 못 할 경우, 빌트방 골프모임인 원버디 행사 시에 제 2 그룹 이하에서 대회를 참여하게 되게 명예훼손과 더불어 신진 젊은 고수들에게 자칫 짓밟히는 수모를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장로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수치스러울 수 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골프 스코어는 바로 자신의 인격이자 자존심이엿다.
어도노부의 주황색 패션이 푸른 페어웨이와 그린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한가지 맘에 들지 않는 것은 라운딩 시간이 너무 이른 아침이라는 점이였다.
“아…아침에는 몸이 잘 안 풀리는데….”
한 떄 스크린 골프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뭇 직원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최근 필드에서는 신통치 않은 자존심 강한 어도노부가 아침 라운딩은 좀 불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이리 퍼팅이 안되지…”
골프가 안 되는 이유가 만가지라고 하던가…
“아..골프장 좋습니다…”
요즘 한창 기세가 오르고 있는 안산철권이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시원스러운 드라이버를 날리고 있었다.
“아이언하고 퍼팅은 자신이 있는데….. 오늘은 묘하게 숏 게임이 안되네…”
영천일웅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자신의 드라이버를 고객에게 뺏기고 새롭게 구입한 드라이버를 요리저리 시험하면서 열심히 치고 있었다.
무심객 역시 어제 열심히 연습한 숏게임에 만족하며, 유틸리티로 세컨 오비를 쳤지만 묵묵히 아이언으로 거리를 조절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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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조망되는 중부고속도로에서는 추석 성묘전 벌초 차량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고..들판은 서서히 누른 색으로 변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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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치열한 승부를 한 전반 보나코스에서는 무심객 46, 안산철권 47, 어도노부 51, 영천일울 54를 기록하였다. 어도노부가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중간 절치부심의 막걸리 타임을 해야 했다.
후반은 벨라코스 좀 더 어렵고 벙커가 많은 곳…벙커옆 벌개미취가 보라색 향기를 품으며 소소하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코스였다.
역시 그늘집 막걸리 술 한잔의 위력은 잔인했다. 가장 타격을 받은 이는 영천일웅이였다. 나름 전반의 선정으로 어도노부를 후반에는 캐치업할 수 있다고 믿었건만…
본인이 스스로 무너져 갔다.
“아.,. 이럴 수가…”
파 5에서 치명적인 양파가 나올 줄이야….
그야말로 멘붕 상태로 빠져들어가는 파5 양파…
거기에 파이트머니까지 무한대로 빨려나가면서, 도저히 스스로는 수습할 수 있는 경지를 지나쳐 버렸다.
한가닥 남은 자존심만이 영천일웅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다리는 풀리고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외롭지만 누구도 위로해 주지 않는 상황….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얼굴 표정은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산철권도 전반 나름의 점수가 만족했으나, 후반은 쉽지 않았다. 어도노부의 날카로운 샷들이 안산철권을 압박했다.
숏게임의 실수가 몇번 나오면서 최종 스코어가 자꾸 90대 후반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최후까지 최선을 다해서 100개는 넘지 말자”
“최근 들어 골프에 투자한 시간이 얼마인가……”
안산철권이 이를 악물고 아이언을 휘둘리고 있었다.
어도노부의 표정에는 비장함이 묻어 나왔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1등은 아니여도 2등까지 뺏기면 스스로의 존엄이 무너지는 상태였다. 만에 하나 백을 넘기면 그야 말로 동네에서 얼굴 들고 다니기 어려워진다.
“오늘 방주님 정도 퍼팅만 됐으면 10타는 줄일 수 있는데….”
“퍼팅그립을 한번 바꿔 볼까요…”
후반전 처절한 집중력을 발휘해 결과적으로 안산철권과 공동 2위를 하게 된 어도노부는 오늘은 자꾸 뭔가 안 되는 이유가 필요했다.
무심객은 한치 양보 없는 대결 속에서도 나름 여유를 간직하고 있었다.
오비를 몇 방 쳤지만 그 동안의 취약점 이였던 숏 게임이 나름 되고 있었다.
“역시 골프는 힘을 어떻게 빼야 하는 지가 중요한 운동이야….”
“골프장은 고민 많이 했는데…그런대로 마음에 드네…다음에 손님 모셔와도 괜찮을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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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한치의 양보도 없는 승부의 종착역이 다다르고 무심객이 캐디녀에게 개디피를 여유있게 지불하였다.
물론 본인의 돈은 아니고 상대방의 돈을 가지고 지불하는 것 이였지만…
회원의 의무를 다했다는 안도감이 마음속에 깃들고 있었다.
“다음에 또 오세요…매너도 좋으시고 진행도 빨리 해 주셔도 첫 팀으로 오셔도 좋을 것 같아요…”
캐디녀가 상큼한 미소를 띠우며 작별인사를 하였다.
마지막 맥주와 소주로 백암순대를 곁들인 뒷 풀이가 필요했다.
내상 입은 자들은 술로서 이를 달려줘야 하니….
가을 바람 소슬히 불어오는 산길에서 귓가에 정강스님의 노래가 들려왔다.
“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영원한 실체는 없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영원한 나의 것도 없네…
인연따라 모였다가 인연따라 헤어지는 것
세상만사 억만겁을 벗어
나는 이제 알았네… “
“윤회의 수레바퀴..정강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