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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5. 6. 17
출처>박근혜 미니홈피에서
[칼럼]
12.12의 진실(眞實)
글 : 지만원(池萬元)
1942년 11월 20일 강원도 횡성군 출생~
열사람이 어떤 見學 코스를 돌았다.
그후 각자 열사람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사람마다 본것이 각자 달랐다. 똑 같은 것을 보았는데, 어째서 본것이 각자 다른가?
각자는 자기의 머리속에 있는것 만큼만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인물. 역사적 사건을 보는데에도 보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른 것이다.
사회적 현상을 이해 하는 것은 지식(knowledge) 또는 정보(information)라고 한다.
지식(知識)과 정보(情報)를 얻는 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원천 자료를 직접 접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논리와 결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이 전해주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전자를 Firsthand knowledge(자기가 추구한 1차 지식), 후자를 Second hand knowledge(남이 전해준 2차 지식)라고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남이 소화해서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해주는 사람의 좁은 시각과 왜곡된 의사(意思)가 반영되기 쉬운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물(事物)을 인지 할때, 어떠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그 지식을 가공해 내었는지에 대해 먼저 따져야 한다.
역사적 人物과 사건에 대한 영상!
난무하는 소문에 따라 달라지고 기자들의 글 쓰기에 따라 달라지며, 누가 권력을 잡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지금 수많은 국민 각자에 인식되고 있는 12.12에 대한 영상 역시 이렇게 잡다한 편린(片鱗)과 상상들을 비 체계적이요.
비 과학적으로 꿰메어 형성한 백가백색(百家百色)의 것들일 것이다.
○최규하(崔圭夏)
전두환(全斗煥)시대 1980년 3월 13일 정승화(鄭昇和)는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金載圭) 내란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같은해 3월 18일 관할관의 확인 조치에 의해 징역 7년으로 감형 동년 3월 25일에 항소를 취하 함으로서 3월 26일 형이 확정 되었다.
그후 정권이 바뀌어 민주화시대가 왔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헌법상에 명시된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칙을 무시하고 1980년에 했던 재판을 다시했다.
1980년에 했떤 사법부 판결은 무효라는 것이다. 민주화 재판관들은 12.12는 신군부의 정치적 야욕이 작용한 하극상 반란 행위이고 5.18은 신군부에 의한 내란 목적 살인 행위이며, 정승화는 억울한 피해자라고 결론 지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무기 징역에 처하고 金 2천2백5십억원을 추징하며, 노태우(盧泰愚)를 징역 17년에 처하고 金2천6백2십8억9천6백만원을 추징한다는 판결에 따라 한때 군출신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는 감옥살이를 했다.
지난 1970년~1990년대의 역사는 김대중, 도시산업선교회, 위장취업, 386 주사파로 연계되는 소위 민주세력을 한축으로하고 그리고 이들 세력을 좌익으로 간주한 군사정권들을 다른 한축으로하는 양대 진영간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였고 12.12 및 5.18은 이 두세력중 누가 정권을 잡았는가에 따라 충신의 역사에서 역적의 역사로 뒤바뀌어 왔다.
시류(時流)에 순종하는 법관들은 권력이 주도하는 역사 재판에 도장을 찍어준 들러리(Rubber Stamper)가 되었다.
전두환 시대의 법관들은 5.18을 김대중이 불순세력과 연대하여 일어킨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규정했고,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은 시절에는 5.18을 12.12로 정권을 탈취한 반란수괴 전두환 일당이 민주혁명을 주도한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자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해낸 광주시민의 위대한 성공사로 규정햇다.
5.18을 광주사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5.18을 탄압한 전두환 군부세력을 불법 내란 세력으로 단죄 해야만 했고, 이 설계도에 따라 12.12는 당시 2성 장군에 불과했던 전두환이 4성장군인 정승화 총장을 불법으로 체포하고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협박하여 정승화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하극상 내란 사건으로 몰아갈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5.18은 12.12와 동전의 앞뒤를 구성하는 하나이며, 5.18역사를 쓰기 위하여는 반듯이 12.12역사가 먼저 쓰여져야 한다.
5.18은 북한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민중혁명으로 칭송되고 민주화 세력에게는 그들이 세를 확산 시킬수 있는 가장 큰 명분과 금전적 보상수단으로 이용되 왔다.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부각함으로서 한(恨)을 품을 만큼 차별대우를 받아왔던 호남(湖南)의 위상이 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시하지 못할 수많은 국민이 5.18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지 않으며, 민주화 인사들을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순수한 애국자라고 생각하질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도 아쉬운게 하나있다. 5.18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중에도 12.12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비자금 문제에 격분한 나므지 그가한 행위 모두가 나쁜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바로 이러한 "1사100사" 마인드가 5.18 지지 세력에 힘을 보태주고 있는 것이다. 12.12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전두환을 무조건 5.18의 원흉이라고 몰아붙이고 싶어 하는 소위 민주화세력과 한편이 되어왔다.
5.18과 전두환은 역사의 천적이다. 5.18을 살려내려는 사람들은 전두환을 악마로 몰아왔고, 그러기 위해 12.12를 악마의 등극문으로 매도해 왔다. 전두환 등 군부세력은 선동-선전에 훈련된 민주화세력이 장악한 언론과 출판에 의한 여론몰이 인민재판에 속절없이 악마로 몰려온 것이다.
5.18을 "광주사태"로 규정한 세력도 정치세력이며,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세력도 정치세력이다.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5.18은 남 보기에 객관적 위치에 있는 학자들이 다시 써야 한다.
필자는 수리공학을 전공한 시스템공학자이며 학교 및 연구소에서 수리이론을 매체로 한 분석을 훈련한 사람이다. 수학적 기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이 책은 수학적 사고방식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이 책은 12.12에 대해 그 동안 그 누구도 접속할 수 없었던 방대한 원천 자료를 가지고 수학적 논리로 엮는 한국 최초의 역사 자료가 될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뒤를 이어주기를 바라면서 그동안 금기시됐던 또 하나의 철문을 열고자 한다.
5.18은 광주시민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국민 일부에 불과한 민주화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5.18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공유하는 국민의 역사이며, 모든 국민은 역사를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표하며 공론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5.18에 대한 사관은 학자들의 몫이지 정치인들이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학자들의 학문공간을 정치인들이 침범하여 사관을 정하고, 이와 다른 사관을 말하는 학자를 린치-탄압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야만행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필자는 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며, 광주사태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었다고 표현한 죄로 2002.10월 갑자기 들이닥친 광주경찰관들에 의해 수갑을 뒤로 찬 채, 6시간 동안 끌려가면서 온갖 물리적 언어적 폭력과 린치를 당한 후 100일간 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대법원 대법관들은 도주할 우려나 증거를 은닉할 우려가 전혀 없는 안양시민을 광주로 끌어다 구속시키고, 광주법관들이 재판하는 것이 법에 위배하지 않으니, 계속 광주에서 재판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5.18과 광주는 이만큼 신성시 됐고, 민주화세력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지녔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필자는 이 어마어마한 금단의 철문을 열기로 작정했다. 이 책은 정치권에 빼앗겼던 학문공간을 다시 찾기 위한 자유헌장에 대한 선언문이자 금단의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던 판도라 역사에 대해 제2, 제3의 연구를 이끌어 내기 위한 최초의 시도이니 만큼 또 다시 필자를 린치하거나 법적인 탄압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는 모처럼 가동된 역사연구를 탄압하는 또 다른 야만이 될 것이다.
그 역사가 부끄럽지 않았다면 광주와 민주화세력이 12명의 검은 유니폼의 조폭을 서울로 보내 필자의 집, 사무실, 차량을 파괴하고 동네사람들에게 한 시간 이상 공포감을 조성하고, 그것도 모자라 필자를 광주로 끌고 가는 야만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경찰이 이들의 상경 소식을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필자는 사무실에서, 가족은 집에서 이들 조폭들로부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봉변과 피해를 당했을 지 모른다. 필자는 이렇듯 과잉방어를 해야만 하는 저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사실자료에 입각하여 수학적 그림으로 펼쳐보일 것이다.
필자는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기 전인 몇 달 전까지, 12.12를 하극상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방대한 수사자료를 검토한 결과 12.12는 당시 47세에 불과했던 신참 육군소장이 이룩한 위대한 역사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그가 아니었다면 한국사회는 부하를 신뢰하면서 부하의 집에서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려했던 박대통령과 그의 경호원 8명을 순식간에 살육한 패륜아 김재규, 그리고 그를 도와 세상을 장악해 보려던 정승화 일당들에게 한 시대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 떨칠 수 없다.
김재규 일당 6명이 자기를 믿고 하루의 피로를 풀러 온 대통령 식솔 9명을 순식간에 살육한 그 순간 이후의 과정을 보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자리 하며 큰 소리 치던 인간들이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챙겨야 할 교훈인 것이다.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은 대통령을 방치한채 제 몸 숨기기에 급급해 했다. 사고의 진상규명을 명령해야 할 최규하 총리는 김재규가 범인인줄 알면서도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국무회의를 주재했고, 회의 도중 빠져나와 김재규에 가결내용을 귀띔해주었다.
김재규 범행을 눈치 챈 정승화는 국방장관 등 그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김재규가 하라는 대로 계엄군 배치를 직접 주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청와대 경호병력이, 청와대 울타리 밖에 동떨어져 있는 궁정동 사고현장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명령을 내려 사고현장를 한동안 은닉시키는 등, 컴퓨터보다 더 치밀한 조치를 순식간에 해치우면서 김재규에 중간보고를 했다.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은 멀리에서 나는 총소리에 놀라 8시간 이상 숨어 다니다 국방부 청사 어두운 계단 밑에서 초병에 의해 발각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金桂元)은 김재규와 한 편이 되었다가 2시간 만에 마음을 바꾸어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밀고했다.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내무장관, 법무장관 들은 있으나 마나였고, 대통령 정무수석이라는 사람은 사고 직후 병원으로 사라져 숨어있었다.
이상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자. 박대통령과 차지철이 사라진 이후에는 어른이 없었다. 모두가 김재규와 정승화의 위세에 눌려 찍 소리 없이 몸조심만 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정승화!
그는 자기 행적을 감쪽같이 속이고 대통령보다 더 막강하다는 비상계엄권을 휘두르는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약점을 알고 있는 전두환을 누르고 김재규를 옹호했다. 스스로 최규하를 2년 시한의 대통령으로 앉혔고, 김종필(金鍾泌)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는 과정에 뛰어들어 이를 저지시키는 등 정치를 직접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3군사령관,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을 위시한 수도권 일대에 포진돼 있던 내로라하는 군벌들은 모두가 김재규-정승화 계열, 대세는 이미 꺾여 있었다. 새 세상에 적응하려고 몸조심 하기에 급급했던 이 시기에, 새 세상의 정상에서 칼을 치켜 들고 한 시대를 열어가는 정승화, 그를 체포한다는 것은 상상을 넘어도 한참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갓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47세에 불과했던 청년 장교 전두환이 이끄는 소수의 군인들에게 기개와 애국심이 살아있었기에, 전광석화의 속도로 김재규를 구속할 수 있었고, 이어서 정승화를 전격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념과 애국심이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생사를 건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두환이 대통령 직책을 어떻게 수행했고, 정권 말기에 어떻게 부패했는지 그건 별도의 문제다. 단지 여기에서는 12.12가 과연 민주화세력이 매도하고, 민주화세력에 아부한 극소수의 법관들이 판결했던 바와 같은 하극상이 아니며, 쿠데타도 아니며, 군사반란이 아니라는 것을 수시기록들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헌법을 스스로 능멸한 법관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적 판결행위를 고발하고자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