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가)-보안회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켰다.
② (나)-황국 중앙 총상회가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③ (다)-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였다.
④ (라)-경제 자립을 위한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되었다.
정답: ④
* 개항 이후 시기별 경제 상황
임오군란 직후 체결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9)으로 청상인에게 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내지 통상이 허용되었고, 최혜국 대우 조항에 따라 일본과 서구 열강의 상인도 동일하게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개항장의 객주를 비롯해 자본 축적에 성공한 일부 상인들은 외국 자본과 경쟁하기 위해 동업자를 모아 상회사를 세우기 시작하여 1883년부터 대동상회, 장통상회 등이 설립되었다.
시전상인들도 이에 맞서 1890년 철시 투쟁을 벌였으며, 황국중앙총상회(1898) 등을 조직하여 상권수호 운동을 발전시켜 나갔다.
아관파천(1896.2) 직후 서구 열강들은 이권침탈을 가속화하였다. 열강들은 저마다 최혜국 조항을 내세워 광산, 삼림 철도 등의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자주국권 확립을 촉구하는 구국선언 상소문(1898.2)을 올리고, 종로에서 만민공동회(1차: 1898.3)를 열어 이권수호운동을 전개하여, 부산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시키며 이전에 침탈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일단 저지되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6월 일제가 토지 약탈을 위해 황무지 개간을 요구하자,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7월에 보안회와 농광회사가 설립되었고, 8월에 이를 무산시켰다
통감부 설치 이후 정부가 일본에게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의 차관 채무를 지게 되자, 국민의 성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1907).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서울에서 결성된 국채보상기성회를 중심으로 각종 계몽단체와 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 기관이 참여하는 가운데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 및 해외로까지 확산되었으나, 통감부의 탄압(간사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으로 좌절되었다.
한편, 일제가 1908년에 설립한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역둔토나 국유 미간지를 약탈하려는 일본의 국책 회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