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우 이 야 기 (2/1부)
작가:이은집
*프로필*
이은집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현)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역임.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겸 저작권위원장.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원.
문예계간지 <한빛문학> 주간.
그 외 방송작가와 작사가로 활동
1971년 창작집 <머리가 없는 사람>으로 등단.
저서 <후예> <눈물 한방울> <스타 탄생>
<통일절> <통일가족 통일남북> <한국인 멸종>
<청산별곡> 등 35권 출간.
<충청문학상> <한국문학신문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세계문학상> <헤세문학상>
<카뮈문학상> <무궁화문학상> 등 16개 문학상 수상
2014 세종우수도서 선정
2016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창작지원금 선정 등.
1.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옆에도 산, 산너머에도 산…. 하늘만 빼꼼히 열린 산골이었습니다. 가까운 산은 짙은 초록, 먼 산은 연한 파랑, 그 가운데 산은 짙초록연파랑…. 붉은 아침해, 노란 저녁달, 하얀 새벽별…. 바람따라 구름 흘러가고, 물결따라 세월 지나갔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바우가 태어나기는 봄이지만, 한 밤중에 관솔불 밝혀놓고 뒤란 장독대옆에 황토로 단을 모으고 삼신할머니께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 빌기는 지난 해 가을부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돼지 한 마리가 품속으로 달려드는 꿈을 꾼 뒤에 바우를 낳았답니다.
그때 할머니는 기뻐서, 외로 새끼를 꼬아 고추와 숯을 꿰어 사립문위에 늘어뜨리고 나뭇간 깊숙히에 숨겨둔 벼를 꺼내어 절구통에 쾅쾅 찧어 하얀 쌀밥에 미역국 끓여 엄마를 드렸습니다.
한 이레, 두 이레, 세 이레….
삼칠일이 지나자 엄마는 부숭부숭한 얼굴로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울밑에는 호박 구덩이를 파고 웃방에는 고구마 종을 박고 밭뚝가에는 오이와 참외를, 그 사이에는 옥수수를….
올해 농사 지을 생각을 하면 엄마도 할머니도 걱정부터 앞섭니다.
며칠전에 아빠가 쪽발이놈들에게 끌려가 멀리 남양군도라는 곳으로 징용을 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서 밭 한 귀퉁이에는 부루쌈, 쑥갓, 아욱도 심어야겠고, 여름반찬 하려면 가지와 열무우, 배추며 양념거리 고추, 깨, 파…. 그뿐인가? 감자, 강낭콩, 녹두, 동부, 수수, 조, 시금치, 도마도, 벼, 보리 등 뿌리고 가꾸고 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일 속에 날이 저물고 또 달이 가니 어느듯 아기는 백일 지나 첫 돐 지나 쥐암쥐암 도리도리 작짱작짱 온갖 예쁜 짓 다 했습니다.
인제 우리 아기 이름을 지어야 할 텐데 무어라 할꼬?
돼지꿈을 꾼 후 낳았으니 돼지라 할까?
아니면 장쇠, 개똥이, 돌이….
허나 얼른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아차! 이때 문득 생각나는 이름! 바우! 뒷산의 장수바위를 따서 바우라 하자! 이 나라를 건지는 장수가 나온다는 전설이 얽힌 장수바위가 아닌가? 엄마도 할머니도 흡족했습니다.
바우야! 바위처럼 변함없이 바위처럼 우뚝하게 이 나라의 일꾼이 되거라.
2.
하늘이 노하셨는지 벌써 석달째 가뭄이었습니다. 아침에 잔뜩 끼었던 구름도 저녁때면 붉새로 그칠 뿐 도무지 비 한 방울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물꼬 싸움에 동네마다 아우성이었습니다.
거기에 큰 칼을 차고 말 탄 순사가 매일같이 공출을 하라고 을러댔읍니다.
못살겠다! 못살겠다! 하늘도 땅도 우리를 버렸구나!
사람들은 괴나리 봇짐을 싸질머지고 산을 넘어 멀리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우네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아빠의 소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나물을 캐러 갔다오면 바우에게 묻습니다. 너의 아빠 언제 오겠나 머리 짚어 보아라. 바우는 언제나처럼 맥도 모르고 뒷통수를 짚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한숨을 푸우 내쉬며 뜯어 온 나물을 고릅니다.
씀바귀, 밥주걱, 냉이, 달래, 쇠스랑나물, 조팝나물, 거머리나물, 황새꼬투리, 질경이, 참비듬, 풍년치, 물버리쟁이, 누룽지나물, 치나물, 떡치, 개암치, 띠꽐, 개발자국, 꿩나물, 깨속사리, 원추리, 고추나물, 콩꼬투리, 벙구, 두릅, 다래덩굴, 뱁새덩굴, 싸리순, 흰잎, 종그락순….
산나물과 들나물을 따로 갈라놓는 엄마의 눈에는 하얀 이슬이 맺힙니다.
이 나물을 삶아서 말려 팔아야 보리죽이라도 굶지 않게 됩니다.
이윽고 할머니가 구럭을 메고 들어왔습니다.
봄이면 고사리를 꺾고 도라지를 캐고, 여름이면 산딸기, 버섯을 따고, 가을이면 밤, 고욤, 아그배, 으름, 머루, 도토리, 상수리를 주워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엄마는 엄마대로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바쁜 일로 나돌아다녀야 했으므로 바우 혼자 집을 지키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날도 바우는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가 파리떼가 콧구멍으로 기어드는 바람에 재채기를 하며 깨었습니다.
눈부신 따가운 햇살이 마루끝에 기어오르고 있었읍니다.
처마끝의 제비 새끼가 가끔 벌레를 물어오는 어미에게 자기 먼저 달라고 울어낼 뿐 사방은 아주 조용했습니다.
순간 바우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 함마! 바우는 목청을 돋우어 부르며 기엄기엄 문지방을 타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바우에겐 너무나 높은 문지방이므로 가랑이가 걸려 곤두박질을 하고 말았습니다.
『으악!』
바우는 기절을 했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엄마와 할머니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이마에 손을 짚은 채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어멈아! 네가 굴뚝이 무너졌다고 고치더니 그게 동티가 났나보다.』
『글쎄요. 그렇담 동티잡이를 해야지요.』
엄마는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서 솥에 밥을 지어 주걱을 꽃은 뒤 물 한동이를 길어다가 박아지를 엎어 놓고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회초리를 꺾어다가 둥둥 두드립니다.
『백살동티, 흑살동티, 독살동티! 모든 동티는 썩 물러가거라! 만약에 안물러가면 큰 칼 씌워 가마솥에 쳐넣고 푹푹 삶으리라!』
바우는 꿈속같은 환각에서 할머니의 외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뒷산의 장수바위처럼 동티쯤한테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3.
휘영청 밝은 달밤에 베짱이가 옥수수잎 줄기 위에서 요란스레 울어댑니다.
바우는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서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릅니다.
엄마는 그 옆에서 달창이 숟갈로 사륵사륵 감자를 까고 계십니다.
『소금장수 얘기를 할까?』
『그건 어젯 저녁에 했잖아?』
『그럼 꼬리 셋 달린 불여우 얘기…?』
『히잉! 아까 하구선…!』
『에, 그럼 얘기는 얘기, 쐐기는 쐐기! 무논에 거머리, 마른 논에 우렁이…!』
『싫어! 싫어!』
『호! 녀석두 참…!』
할머니는 얘기가 동이 나신 모양입니다.
『빨리 해줘! 또 하나….』
『오냐! 오냐! 옛날 옛적 갯날 갯적 귀뚜라미 소시적에 헌 파랭이 밑에 새 파랭이, 새 파랭이 밑에 헌 파랭이, 개똥불 똥구멍에 불이 화직끈 뚝닥 날 적에 한 사람이 있더란다.』
『응! 그래서…?』
『잘 살다가 모레 죽어서 그저께 상여 나갔는데, 내가 잘 얻어먹고 너 주려고 얼멩이에다가 술 받고 밑 빠진 병에다 떡 얻어가지고 오는데, 사천 노인네 개가 달라고 왕왕 짖으며 쫓아와 다 주고 와서 너는 못주었다.』
『에잉! 그게 무슨 얘기야?』
『호호호! 아이들이 옛날 얘기 너무 즐기면 후에 가난해진다. 그만 자요.』
할머니는 살부러진 부채로 모기를 쫓으며 바우를 달랩니다.
어느새 모여든 구름장이 하늘을 가리며 때 아닌 빗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바우는 할머니 치마품에 싸여 허둥지둥 방으로 찾아갑니다.
방문을 열자 쑥 연기에 마취되었던 모기가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앵앵 소리칩니다.
이때 남양군도로 징용을 나갔다가 며칠전에 풀려오신 아버지가 마을을 다녀오신 듯 비서리질 하기에 바쁩니다.
바우는 내일도 계속될 꽹과리, 북, 징, 장구, 피리, 소고 등의 신나는 풍장소리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요즘 동네에서는 매일같이 사람들이 모여서 흥겹게 놉니다. 특히 바우 아빠의 꼽추춤은 동네 사람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읍니다.
베게를 등에 넣고 허리를 굽힌 채 두 팔을 휘젓는 모양이란 배꼽을 쥐어잡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삼순 아빠의 돌무꼭지 돌리는 것도 볼만합니다. 세 발이 넘는 끈을, 머리를 흔들어 뱅글뱅글 돌리는 재주란 그 누구라도 혀를 차게 했습니다.
바우는 이즈막에 갑자기 이처럼 춤을 추고 풍악을 잡는 까닭을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신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대추볼같이 쪼글쪼글한 주름살을 활짝 펴며 호들갑스런 웃음을 날렸습니다.
첫댓글 이 소설은 서점에서도 품절된 작품을
저와의 소중한 인연으로 한국문인협회
이은집 부이사장 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탐독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