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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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자 : 작년 고부 등지에서 무슨 사연으로 민중을 크게 모았는가?
전봉준 : 그때 고부 군수의 수탈이 심하여 의거하였다.
심문자 : 흩어져 돌아간 후에는 무슨 일로 군대를 봉기하였느냐?
전봉준 : 이용태가 내려와 의거 참가자 대다수가 일반 농민이었음에도 모두를 동학도로
통칭하고, 그 집을 불태우며 체포하고 살육을 행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났다.
심문자 : 전주 화약 이후 다시 군대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냐?
전봉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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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을사조약으로 인해 국가의 위신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② 조선의 전통을 무시하는 단발령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③ 일본이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④ 토지 수탈을 위해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세웠기 때문이다.
⑤ 삼정이정청을 세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답: ③
*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층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봉기하여 관아를 일시 점령하였으나 후임 군수 박원명의 회유에 의해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에 의한 정부의 동핚농민 탄압에 저항하여 4월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우며 다시 봉기하였다(1차 봉기: 무장 기포 -> 백산 봉기). 이후 황토현(5.8), 황룡촌(5.25)에서 각각 감영군과 경군에 승리하며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한편 정부의 요청에 의해 청군이 출동하고 톈진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출동하자, 6월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화약을 맺고 폐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하기로 합의하고(전주화약), 이후 농민군은 전라도 53개 군에 자치행정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7월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경복궁을 점령하며 내정을 간섭하자,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10월 다시 봉기(2차 봉기: 삼례 집결)하여 남접과 북접의 농민군이 연합부대를 형성하고(11월 초, 논산에 대본영 설치), 외세를 몰아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파견된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12월 공주 우금치에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① 을사조약(1905.11)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② 을미사변과 을미개혁(1895.10~1896.2) 때에 단발령이 시행되며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④ 일제는 토지수탈과 농업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1908).
⑤ 철종 때에 임술농민봉기(1862)를 진압하고, 민란의 원인인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박규수의 건의에 따라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으나, 근본적 해결이 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