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역사 - 광양 비촌마을 참사와 황순모 선봉장
| 023. 0. 30. 21:01 우리가 기려야할 황순모 선봉대장과 기억해야할 비촌마을 수어댐 풍경. 일제는 의병마을인 비촌을 불태워버렸다. 1974년 건설된 수어댐으로 비촌은 현재 물속에 잠겨있다. 비촌은 황순모 선봉대장과 황병학의병장의 고향이다.
전남 광양시 진상면에는 수어(水魚)댐이 있다. 수어댐은 1974년 건설이 시작돼 1978년 완공됐다. 여천국가산업단지에 공급할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댐이다. 정부는 1974년 여천에 총 572만 평 규모의 종합화학기지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비상 저수용 댐으로 수어천 댐을 건설키로 했다. 당시 정부는 여천 산단에서 사용할 공업용수를 이곳에서 60㎞ 떨어진 섬진강에서 취수해 공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섬진강은 갈수기에는 물이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었다. 연중 40일 동안에는 취수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정부는 수어천에 비상저수 댐을 건설해 여천 산단에 물을 공급키로 했다. 수어댐의 유역면적은 49㎢이다. 댐 건설이 시작되면서 수어천 일대 마을 이주사업도 함께 진행됐다. 이때 비촌(飛村)마을은 물이 차지 않는 인근 불암산 능성이로 옮겨졌다. 삼한시대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 1600~1900여년 만에 제터를 잃어버리고 산으로 옮겨진 것이다. 수어댐 건설로 비촌마을 110세대와 평촌마을 80세대 주민들이 태어나고 자란 터를 잃어버렸다. 비촌마을의 원래 터는 지금 수어댐의 한 가운데 바닥이다. 수어천이라는 이름은 ‘물이 합쳐지면서 서로 어우러지는 내’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우+내=어우내’가 됐는데 ‘어와 내(川)’에 ‘물 수(水)’자를 넣어 수어천이라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이곳에 옛날부터 수어, 즉 숭어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어서 수어천이라 했다고도 전해진다. 비촌(飛村)에는 삼한시대 매우 큰 마을(邑)이 있었다고 한다. 삼한 시대 옥룡에 내천현성(奈川縣城), 골약동 중군리에 중군현지(中軍縣地)과 함께 비읍지(飛邑地)가 있었다는 설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마을이 생긴 것은 기원후 1년에서 300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은 1530년쯤 창원 황씨(昌原 黃氏) 황후헌(黃後憲)이 들어오면서 생겼다. 비촌마을의 원래 뜻은 ‘넓은 마을’이다. 비촌마을은 수어천 변에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았던 매우 큰 마을이었다. ‘넓다’라는 뜻을 지닌 우리 말의 ‘넙’이 마을의 뜻을 지닌 ‘몰’과 합쳐져 넙몰이 됐는데 ‘널몰-날몰’로 음이 변화됐고 이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날’을 ‘날 비(飛)’의 ‘날’로 여겨 비촌으로 됐다는 것이다. 비평리(飛坪里)라는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시 비촌리와 평촌리(坪村里) ,탄치리(炭峙里)를 병합할 때 비촌과 평촌에서 ‘비’와 ‘평’ 자(字)를 따와 비평리라 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비촌리의 비(飛)자는 ‘날아가 버린다’는 뜻보다는 ‘높게 되다’, ‘승격되다’, ‘번창하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수어댐의 풍경은 평화롭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의 수어댐 풍경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수어댐은 비촌마을의 비극을 품고 있는 곳이다.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수어댐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일제가 의병 마을이라 해서 불태워버린 예전의 비촌마을은 물속에 잠겨 있다. 물속에 잠긴 수어댐에는 비촌마을 주민들의 몸부림이 담겨져 있다. 가족들 앞에서 무참하게 숨져간 황순모 선봉장의 원혼과 절규가 자리하고 있다. 정들었던 집을 떠나 옆 동네로, 혹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했던 비촌마을 수몰민들의 애환도 함께 스며있다. 수어댐에 잠겨있는 우리 선조들의 나라사랑과 애국혼을 잘 알고 지키는 것이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이다. 황순모 선봉장의 손자 황부현씨가 비촌마을이 수장돼 있는 수어댐을 가르키고 있다 비촌마을에 살던 황씨 일가들은 집이 불타버리는 비극을 맞게 된다. 광양 백운산(白雲山) 일대를 배경으로 해 활동하면서 일제를 괴롭힌 의병부대 황순모(黃珣模,1873~1908)선봉대장과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의병장이 비촌마을 출신이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황순모, 황병학은 숙질과 조카사이로 200여명의 의병들을 모아 일제에 맞서 싸운 인물이다. 일제는 황순모·황병학 의병부대가 광양일대 일본인들을 공격해 처단하는 등 큰 피해를 입히자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일본 헌병과 경찰은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의 고향마을인 진상면 비촌마을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황순모와 황병학의 소재를 물으며 닦달했다. 일제는 황순모의 집을 포함해 황씨 일가가 모여 사는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비촌마을 황순모 선봉장은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 그래서 황씨 일가들이 황순모의 집을 중심으로 해 여러 채의 집을 짓고 한울타리 안에 모여 살고 있었다. 황순모선봉대장이 백운산에 은거하면서 의병활동을 벌일 때, 일본에 빌붙어 살던 면장 황모씨가 의병들의 은신처를 일본군에 밀고해버렸다. 황모씨는 의병명단까지 일본군에 넘겼다. 황모씨의 밀고로 일본군은 광양의병대장 황순모와 조카 황병학의 정체를 알게됐다. 일본 헌병대는 즉각 황순모와 황병학의 집이 있는 날몰(광양 진상면 비평리 비촌마을)로 몰려왔다. 그리고 황순모의병장의 가족과 친척들을 협박하고 황순모의병장의 집과 그 일가의 집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런 다음 “황순모와 황병학을 잡아 바치지 않으면 황씨들을 모조리 포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일본헌병대는 비촌마을을 불바다로 만들고, 황순모·황병학 가족들에게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 다음 마을을 떠났다. 비촌마을 사람들은 불타버린 집터위에 다시 집을 짓고 살았다. 참혹한 세월이었다.
전남역사 - 황순모 선봉장을 총살하고, 광양 비촌마을 불살랐다. (남한대토벌작전시 일제는 마을을 불태워 의병들의 은거와 지원을 봉쇄했다)
비촌마을 입구의 황순모, 황병학 기적비
일본에 나라가 먹힌 뒤 비촌마을 사람들은 요주의 인물이 됐다. 일본 헌병들이 수시로 찾아와 들쑤시고 갔다. 일제에 협력한 일부 황씨 가문사람은 마을사람들을 만날 때면 조용히 살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일제강점기에 비촌마을 사람들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광복이 되고서야 비천마을 사람들은 마음 편히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회산황씨유허비와 황순모기적비
그러나 비천마을은 또 다시 비극을 맞게 된다. 수어댐 건설이 확정되면서 조상 대대로 살던 집터를 떠나 불암산 산중턱으로 이주를 해야 했던 것이다. 비촌마을이 수어댐에 잠기면서 일제에 의해 불태워졌던 비촌마을의 비극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수어댐을 바라보이는 곳에외로이 남아있는 황순모 의병장의 묘소만이 그날의 비극과 역사의 교훈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황순모 선봉장의 손자 황동현씨(좌측)와 황부현씨가 할아버지 황순모선봉대장의 의병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라도 의병은 1896년 장성과 나주를 중심으로 해 일어났다. 역사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으로 조선백성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일제는 1895년 명성왕후를 시해했다. 국모를 시해하고 조상대대로 물려오던 풍속을 하루아침에 바꾸려는 일제의 만행에 조선백성들의 의분이 끓어올랐다.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학계에서는 1894년 후반부터 1896년 사이에 일어난 의병들을 전기의병(前期義兵)이라 한다. 친일파 정권이 1895년 11월 15일을 기해 내린 단발령은 호남의병을 촉발시켰다. 단발령은 일제의 경복궁 침입이나 국모시해보다 더 폭발력이 컸다. 단발령은 상투로 상징되는 조선민족의 자존심과 민족혼을 제거시킴으로써 일본에 대한 복종심을 키우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었다. 또 조선민족 개개인이 상투를 잘라냄으로써 조선왕조에 대한 체념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호남지방의 전기의병은 전남 장성에서 먼저 일어나고 그 이후에 나주에서 생겨났다. 그래서 호남유생들은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 힘을 모아야하며 단발령은 당장 중단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는,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장성의 기우만은 1896년 1월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고 창의를 모색했다. 그리고 1896년 음력 2월 7일 장성향교를 도회소로, 양재사를 도회소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기우만의 격문을 받은 나주의 유생들과 향리들은 의병 거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896년 음력 2월 4일 나주의 유생들은 기우만의 창의를 지지한다는 답통(答通)을 장성으로 보냈다. 장성의병은 나주의병과 연합부대를 결성하기 위해 1896년 음력 2월 11일 나주로 이동했다. 이때 나주로 이동한 장성의병의 규모는 200여 명이었다. 그러나 장성의병과 나주의병은 고종의 해산종용에 따라 2월28일~29일 사이에 해산해 버렸다. 광양지역에는 명성왕후시해와 단발령이 내려졌던 1895~96년 사이에 별다른 의병봉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1906년 후반부터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황병학·황순모 의병부대와 안규홍·조규하·강진원 등 의병부대가 활동을 시작했다. 광양지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의병부대는 백낙구 의병부대이다. 황병학·황순모 의병부대는 백낙구의병부대가 일제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겨 지역민들이 다시 일어선 부대이다. ▶백낙구의병부대
백낙구의 의병활동을 소개한 독립신문
백낙구는 전북 전주사람이면서도 광양 백운산을 무대로 의병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백낙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을 진압하는 초토관(招討官)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조정대신들의 부패와 외세침략에 무력한 조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이때 눈병에 걸려 귀국했으나 시력을 잃고 말았다. 백낙구는 백운산으로 들어가 눈병을 치료하며 운둔했다. 을사조약 체결소식을 들은 뒤 의병에 투신할 것을 결심했다. 기우만과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들어가려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백낙구는 경남 서부지역인 진주의 실직한 군리(郡吏)들과 광양주민들을 설득해 200여명의 의병들을 모았다. 진주의 관리출신들은 폭동을 일으키려다 백낙구를 만나 의기투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백낙구는 이승조·이도순·이지상·권창록·안치명(치중)·김봉국 등과 함께 1906년 11월 7일 광양 관아를 점령해 무기와 군자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구례를 공격했다가 동료들과 함께 체포당했다. 백낙구와 의병들은 순천분파소로 이송됐다가 광주로 이감돼 재판을 받았다. 의병장 백낙구는 일제 헌병으로부터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의병에 투신한 명분과 목적을 아래와 같이 당당하게 밝혔다. ‘슬프다. 오늘날 소위 대한국은 누구의 대한국인가. 과거 을미년에는 일본공사 삼포(三浦)가 수차 마음대로 군대를 풀어 대궐을 침탈하니 만국이 이를 듣고 실색했다. 조선 팔도 사람들이 이를 원수처럼 여겨 애통해 한 이래 12년이 흘렀다. 위로는 복수의 거의가 없고 아래로는 수치를 씻는 논의가 없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더욱 모욕을 가하여 군대를 끌고 서울에 들어와 상하를 능멸하고서 자칭 통감이라 한다. 그 통(統)이란 것은 무엇이며 감(監)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500년 종사와 삼천리강토, 이천만 동포가 이웃나라의 적신 이등박문에게 빼앗기는 바가 되었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그려 분함을 외쳐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가. 이에 백낙구는 스스로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여 힘껏 일본인 관리를 공격하여 국경 밖으로 내쫓고 또한 이등박문을 사로잡아 의병장 최익현 등을 돌려받고자 하다가 시운이 불리하여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체포되었으니, 패군장이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에 사실대로 말하노라.’ 기우만은 광주경무서에서 심문을 받다가 백낙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기도 했다. ‘의는 대단했으나 군사가 적어 실패했다. 사람은 비록 죽었지만 의만은 죽지 않고, 나라는 비록 망해도 의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의가 같으면 마음이 같아, 비록 시키지 않아도 시킨 것과 같다” 백낙구는 15년형을 선고받고 1907년 5월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 유배됐다. 그해 12월 순종(융희황제)의 특별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곧바로 전북 전주로 가서 의병에 합류했다. 그는 1907년 말 전북 태인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에 순절했다. 우국 선비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 1맹인 의병장 백낙구의 활동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백낙구는 두 눈을 실명했다. 전투할 때마다 가마를 타고 일본군을 추격했다. 패할 때도 가마를 타고 도주했다. 세 차례 붙잡혔는데, 결국 총을 맞아 죽었다. 광양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백낙구는 발발(勃勃)한 기개가 있다고 말한다.’ [출처] 전남역사 - 광양 비촌마을 참사와 황순모 선봉장|작성자 네오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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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모 (黃珣模)
인물
대한제국기 광양의 백운산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장.
이칭
자사중(士重)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 남성,
출생 연도1877년(고종 14) ~ 사망 연도1908년(순종 1) 10월
출생지전라도 광양
대한제국기 광양의 백운산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장.
자는 사중(士重). 전라도 광양 출신. 통정대부 황윤락(黃潤珞)의 아들이다.
접기/펼치기생애 및 활동사항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당질(堂姪)인 황병학(黃炳學)과 함께 100여명의 포수를 모아 의병부대를 조직, 광양의 백운산(白雲山)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7월 광양군 망덕만(望德灣)에 정박하여 있는 일본인 배를 습격하여 격침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 때 황병학이 총탄에 맞자 의병들이 흩어져 인근 산골짜기에 피신하였는데, 그 해 10월 일본헌병대에 붙잡혀 순국하였다.
접기/펼치기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이,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한국독립운동사』1(국사편찬위원회, 1965)
접기/펼치기집필자
김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