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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줄타기인생
‘죽으라는 법은 없다.’ 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사람이 살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지게 마련이다.’ 라는 뜻일 터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버티며 살다 보면 아슬아슬 줄타기 곡예를 하듯 이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계획#
‘프랑크푸르트’에 다녀오기로 했다.
결국은 이것도 여기서 살아보려는 대책의 일환인데, 생각과 생각을 거듭한 끝에 정한 일이다.
옆방의 요한은 무슨 일인지 잠을 못 이루고 서성이는 것 같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으나 밖이 어두워 창으로 반사되어 들어오는 앞 아파트의 가로등 불빛에 시계를 보니 2시경이었다.
다시 잠을 청했고 4시 15분에 일어났다.
샤워부터 한 뒤 우유 한 잔을 마시고 집을 나섰다.
시간표의 첫차였던 5시 3분 기차는 놓쳤는데,
역에 가 보니 오늘이 일요일이라 그 차도 운행을 하지 않았던 걸로 나타났다.
6시가 다 되어 ‘이체(ICE)’ 뮨헨(Munchen)행을 탔다. 1등 칸.
조용히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고, 고속열차는 정말 진동마저 없이 스르르 미끄러지듯 달렸다.
어젯밤 선잠을 잔 까닭에 나는 졸면서 깨면서 창밖 풍경을 보며 시간과 기차에 실려 가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가까워질 때, 나는 차 안에서 전에 나에게 전화번호를 주었던 ‘H’란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 남자가 받았는데 내가 영어로 하니까, 그녀는 사무실에 있다고 했다.
난 그가 그녀의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사무실로 전화를 거니, 그녀는 미안하다며 손님이 와서 나를 만날 수 없으리라고 했다.
‘인연이 없나 보구나......’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를 만나, 최소한 그녀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이 00 선생'의(한국의 좀 유명한 화가로, 독일로 떠나오기 전에 내 대학 은사님이 한 번 찾아가 보라는 권유가 있어서 찾아 나섰던 길인데) 전화번호라도 얻어갈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내 유레일패스 하루치를 이용해 갔던 프랑크푸르트 계획은 무산되었다.
내가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한 뒤 실행했던 일인데,
결국 그것도 안 된 것이다.
뭐든 내가 시도하려는 것마다 돼주는 게 없다.
나는 그것이 혹시,
어젯밤 그려 붙인 드로잉 ‘주여,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의 여파는 아닌지, 어제 쓴 신(神)을 원망하는 내용과 관계가 없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바람을 불어 지푸라기마저 멀리 보내는 방해’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제목 하나는 잘 붙인 것 같다.
‘주여,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하고 비는 게 아닌,
‘주여,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하고, ‘설마 그래줄까?’ 하는 비꼬는 의도를 품고 있으니까.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그저 도심을 걸어 다녔다.
시내 번화가에는 한글로 된 백화점 안내판도 있고, ‘00 항공’ 지점도 눈에 띄었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 터였다.
그러나 일요일이라 시내는 조용했고 상점들은 문이 닫힌 상태였다.
슬슬 배가 고파와, ‘되너’라도 하나 사 먹으려고 광장에 가 보니 7마르크였다.
베를린에선 3마르크나 조금 비싸도 4마르크면 사먹을 수 있는데......
그래서 마음을 바꾸어 역 앞 통닭집으로 갔다.
닭 한 마리에 감자튀김까지 합하여 5마르크였다.
그렇게 싼 점심을 먹으려다 그 접시가 너무 뜨거워 검지손가락을 데었다. 그런데 나는 그마저 내 잘못인 양 아픈 표시도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맛도 없는 닭을 질겅질겅 씹어 먹었다.
너무 빡빡해서 코카콜라 한 컵을 시켰는데 잔돈이 2마르크가 안 돼서 취소하고, 나머지를 억지로 입에 몰아넣고는(빡빡한 살 부위는 결국 남길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왔다.
어쨌거나 배는 채운 거니까.
바로 역으로 가 이번에는 ‘함부르크’ 행 기차에 올랐다.
웬만해선 다시 가지 않으려 했는데, 서 00씨가 조만간 한 번 들러달라고 해서, ‘프랑크푸르트 계획’의 곁다리 기분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차피 유레일패스 하루치에 포함된 여정이라 기차요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아무튼, ‘되너’도 못 사먹는 주제에 기차는 1등 칸을 타고 다니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기차는 달렸고 차창으로 보이는 깨끗한 독일 마을과 이쁜 집들을 보면서,
‘저런 집에는 누가 살까?’ 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가고 있었는데, 어차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함부르크에 도착해도 시간이 남을 것이었다.
낮에 도착해봤자 서 00씨는 식당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나 혼자 식당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뭐 하나?' 하는 생각에(눈치만 보여질 것 같아), 나는 그 중간인 ‘하노버’에서 내리기로 했다.
어차피 유레일패스 하루치를 이용해 가는 중이라, 그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거기서 시간을 때우다 느지감치 함부르크 행 기차로 다시 탈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무 연고자도 없는 하노버에서 내렸는데,
역에서 나오다 음악소리가 들려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4인조 러시아 음악가들이었다.
둘은 아코디언 하나는 기타, 그리고 굵은 목소리의 가수는 탬버린을 들고, 아름다운 화음에 구슬픈 러시아 가락이 빠르게 또는 느리게 내 발걸음을 묶어 놓는 것이었다.
슬펐다.
이유야 어떻든 음악도 슬펐고 나도 슬펐다.
그 음악에 빠져 감상에 젖어 있다가, 아까 프랑크푸르트에서 콜라도 못 사먹은 잔돈 모두를 그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꼬불쳐놓은 100마르크짜리 지폐를(호주머니에 넣어둔) 만지작거리며 하노버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도시는 아담했고, 번화가의 상점들은 문이 닫혀있긴 했지만 그래도 도심의 중심가는 활기찬 것 같았다.
약간 피로를 느끼던 나는 숲을 찾기 시작했다.
도시가 크지 않아 한 10 여분 걸어가니까 역시 숲이 있었는데, 호수를 낀 숲이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도 봤지만 시 외곽에도 호수가 있는 등,
여기 ‘하노버’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 도심에서 바로 이어진 숲과 공원 등, 여러 모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게다가 오늘은 날이 맑아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상의를 벗고 일광욕을 하거나 산책을 즐기고도 있었다.
결국, 그 한 모퉁이 잔디밭에 앉아 나도 이렇게 뭔가를 끼적이고 있다.
가난한 화가, 떠돌이 화가, 이름 없는 화가 이 인야는 1998년 7월 19일 시간을 때우기 위해 독일 북부 도시 하노버에서 호수를 앞에 하고 잔디밭에 앉아 있는 여유를 가장하고 있다.
이름도 모르는 저 육중한 석조 건물 뒤로 하얀 구름은 흘러가고, 나는 땅거미가 지기 전에 다시 오늘의 목적지 함부르크로 향해야 하는데,
아,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는 물오리가 차라리 나보다는 백배 천배 더 행복하겠다. #
#‘프랑크푸르트’ 계획-II#
함부르크에서는 잘 먹고 잘 지냈다.
서 00씨는 늘 그렇듯 인정 있게 날 맞아주었다.
밥에 김치에, 돼지 갈비에, 나는 라면까지도 즐겼다.
그런데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우리가 무슨 인연이길래 내 쪽에서 보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게 되는지 염치없는 거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한편으론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가 날더러 한 번 여기 함부르크까지 오라고 했던 건, 나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나도 약간 놀랐지만, 그의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자세에 감동까지 하면서, 그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 여태까지 내가 그에게 진 신세만으로도, 그냥이라도 해줄 수 있는 우리 사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론 그가, 아무런 대책도 없던 나의 어쩌면 다음 달 생활비를 대준 꼴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함부르크에 와서 서 00씨를 만난 것으로, 다음 달 생활비 걱정에선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줄타기 인생’인 지금의 내 처지로서는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을 것 같다.
그는 나를 기차역까지, 플랫홈까지 가방을 들어다 주고 돌아갔다.
나는 기차에 오르면서도 그에게 감사했다.(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기는 했는데, 흘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함부르크까지 왔으면서도, 이번에는 또 하나의 은인이랄 수 있는 피터씨에겐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원래 그러지 않기로 굳게 맘먹고 이쪽으로 발길을 옮겼기 때문에)
‘흠, 그러고 보면 서 00씨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어차피 ‘독일 이야기’니 그 사람이 그 당시에 차지했던 비중이 컸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과도 보통 인연은 아닌데......’
그래서일까?
나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지금은 함부르크로 향할 때처럼 슬프지 않다.) 기차를 타고 이번에는 ‘카셀(Kassel)’에 왔다.
그냥 바로 베를린으로 가기에는 유레일패스 사용 거리가 아까워, 오늘 밤까지 써 먹을 수 있는 걸 이용해, ‘다큐멘타(Documenta)전’이 열리는 카셀에 한 번 들러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산 쪽으로 향했고, 후회하면서도 산꼭대기 성까지 올라와 있다.
생각보다 먼 거리였다.
산 위에 호수도, 박물관도 잘 가꾸어놓은 숲도 있었다.
아름다운 곳에 인간이 즐기기 위해 건물과 길을 닦아놓은, 아름다운 곳 같다.
내가 앉아 있는 성의 정면으론 중턱의 박물관과 그 위로 직선의 도로가 보이고, 양 옆으로는 아름다운 카셀 시가 펼쳐져 있다.
가능하다면, 내 기(氣)를 여기서 뿜어보면서 이 도시를 정복하고 싶다.
독일에 오기 전에 만났던 후배 하나가 이 도시에 꼭 가보라고 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와 있는데,
와서 한 일이 성에 땀을 뻘뻘 흘리고 올라 온 것이 전부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나는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유레일패스 하루치를 ‘프랑크푸르트 계획’에 참 알뜰하게도 써먹었다. #
*
날마다 비 온다고 비웃었더니, 베를린도 아니, 독일도 요 며칠은 덥다.
가만히 있어도 덥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땀이 줄줄 흐르는 건 아니지만......
오늘 어머니께 전화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지 모른다.
날마다 나 잘되기만을 기도하실 나의 어머니......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야속하지 않다면, 그리고 어머니의 정성을 안다면, 최소한 일구월심 기도하시는 늙으신 우리 어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셨을 것이다.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을 신이 통제한다면, 억울하고 한스럽게 죽어가는 이도 없으리라.
신은 공정해야 하며 착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 편에 서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신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내가 어찌 믿겠는가 말이다.
아!
다, 부질없는 것이다.
(바르셀로나 해변 ‘바르셀로네따’에 쓰여 있었던 ‘쓸모없는 것(DIOS ES INUTIL)’이란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내가 1994년 바르셀로나에 첫 발을 들인 이래 나는 그 문구를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날이 갑자기 더워지니 내 행동반경도 혼선을 빚고 있다.
책 작업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나가기도 싫어 밖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그게 편하고 좋은데, 내 현실은 편한 것만을 쫓을 수 없게 한다.
남의 집에 산다는 것 자체가 자유롭고 편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서로 다른 사람끼리 한 공간을 공유하며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 같다.
어떤 때는 숨이 막혀오기도 한다.
아무리 내 신세가 궁색하다지만, 아직까지 난 이 집에 빚진 것도 없고 약점 잡힌 것 역시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다음 달 집세도 낼 수 있는 입장으로 바뀌어 있다.
허지만 하루하루 뭔가 바짝 조여 오는 느낌이다.
7 . 22
*
오늘도 더운 하루였다.
더운 열기가 확 느껴지는 낮이었다.
외출했다.
그리고 한 화랑에 들러 내 작품 자료 등을 건네주고 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 다섯 장의 엽서를 보냈다.
여기 독일은 우편요금도 비싸, 엽서 다섯 장 부치는데 12.5 마르크. 우리 돈으로 만 원도 넘게 들어갔다.
그 돈이면, 요즘의 내 하루치 먹거리를 사고도 남는데......
그리고 역시 '동물원(Zoo)' 교회에 들렀다.
의자에 앉아 예수상을 보고 또, 속으로 얘기했다.
‘주여,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는 아닐지라도, 다짐하듯 애원하듯 생각하듯 얘길 했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길가에 과일장수가 있었고, 수박이 탐스러워 보여 한 쪽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밤이 되면서 한 줄기 소나기가 내리더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림을 하려고 두어 시간 씨름하다 언뜻 어머니 사진을 꺼내 소묘를 했다.
그리고 그 밑에 서명을 하고, 이렇게 적었다.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백만 번 불러도 또 부를 수 있는 어머니!
천만 번 봐도 또 보고 싶은 나의 어머니!
7 . 23
‘당연히 그 이미지도 첨부해야겠지.’하면서 이미지를 가져오면서, 나는 그 드로잉 작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머니, 이제는 제가 쿠바라는 나라에 와 있답니다. 우리로 보면 한 여름 같은데요, 여기는 열대기후라선지 이제 5월로 넘어왔을 뿐이랍니다. 그런데 막 ‘망고’철이 시작되었구요, 그 과일이 저는 너무 맛있는데, 그래서 어머니께도 맛을 보여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네요. 근데요, 지금 생각해 봐도, 어머니가 늘 나무라셨 듯, 여전히 제 입이 좀 짧고, 과일 같은 걸 좋아하는 것도 다 어머니를 닮아서입니다.’ 하면서 연필로 된 간단한 드로잉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얼굴로 손이 갔지만, 노트북의 화면일 뿐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잠시 눈길을 창 쪽으로 돌렸다.
창 차단막 사이의 허공으론 파란 카리브해 바다에서 밀려오는 하얀 파도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
어제 좋은 꿈을 꿨다.
카지노 기계의 번호를 맞히는 것인데, 567인가 576인가를 맞혔더니 동전이 좌르르 쏟아져 나오는 꿈이었다.
그런 꿈이 나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할 줄도 모르는 복권을 사서 요한에게 물어 숫자를 적어 넣기까지 했다.
원래 내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하도 꿈이 생생했기 때문에 ‘혹시?’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여기는 여름인데도, 더운데도 모기가 없다. 엊그제 문을 열어놓았을 때도 몇 마리 나방이 들어와 귀찮게 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날 곤충은 몰려오지 않았다.
밤이 되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후텁지근하지 않고 모기가 없어서 좋다.
어제, 오늘 ‘되너’ 하나씩으로 점심을 때웠다.
3마르크라 나에겐 가장 싼 점심이다.
생활이 안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본 의식주, 아니 식주 걱정이 없고, 내 작업하고 언어 좀 배운다면 지금으로썬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저녁 식사를 한 뒤, 요한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은근히 나를 비꼬는 투로 얘기를 했다.
‘아니, 요놈이 왜 이러나? 지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왜 나에게 풀려고 하지?’ 하며, 나는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대응하는 대신 그의 말을 무시하는 방법을 썼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으니까. 최소한 그가 얘기하는 것이 윗사람에게 하는 ‘예절’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은 말이기에, 아예 무시해버렸던 것이다.
‘무슨 말이었기에 그랬을까?’ 하면서 나는, ‘도대체 내 일기이기도 하지만, 이런 대목에선 나도 답답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고 난감하게 앉아 있다가,
“물이나 한 잔 마시자!”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그런 그와 살기 불편해졌다. 그는 왜 나를 건들고 자극하려는 것일까?
나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화풀이 상대가 없다 보니 나 같은 사람에게 풀려는 걸까? 그런 놈하고 한 집에서 산다는 게 짜증까지 나는데,
마음에 걸린다기 보다는 귀찮고 성가실 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집을 알아봐야 하나?
나의, 이 떠돌이 생활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좋은 꿈이라도 꾸어야 할 텐데......
7 . 24
#좋은 꿈#
화랑가를 돌면서는, 그 전날이거나 그 결과를 알아보러 가는 날일수록,
‘좋은 꿈을 꾸어야 할 텐데......’ 하고 간절하게 비는 버릇이 요즘에 생겼다.
허다 못해 좋은 꿈이라도 꿔야 뭔가 기대라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평소엔 잘만 꾸는 꿈마저 꾸어지지 않거나, 꾸었다 해도 잘 기억나지 않곤 한다.
그리고 어떤 때 그럴싸한 꿈을 꿔도(한 번 있었다.), 꿈이 현실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래서 그깟 알량한 꿈을 믿지 않으려 해도,
다시 그런 경우가 되면, 또 꿈이라도 잘 꾸고 싶어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도 가련하기도 하다.
하도 모든 일이 안 되고, 또 아무리 내 꿈이 ‘개꿈’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꾸어대는 그 많은 꿈 중에 좋은 꿈 한 두 개라도 맞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허황된) 바람도 한 구석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꿈이 정말 맞기도 한다는데, 나라고 정말 평생 맞지 않는 꿈들만 꾸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 결과는,
‘우리 화랑은 주로 설치미술 쪽이라......’ 하고 에둘러 핑계를 대면서 거절당하거나,
‘우리는 내년까지 일정이 꽉 차 있어서, 지금 당장 그 어떤 전시 계획을 잡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고 다소 일리 있을 듯한 답으로 뭔가 미련을 남겨준 곳도 있고,
‘당신은 독특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긴 하는데, 너무 개성이 강해서......’ 하는 차라리 하지 않는 말이 더 나을 듯한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곳도 있었고,
‘우리는 당신 그림 같은 스타일엔 관심이 없다!’고 확고하게 말을 하면서 전혀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화랑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열일곱인가 스물 가까운 화랑을 돌아봤는데, 그나마 나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곳은 두 곳 정도였는데, 그런 데서도 뭔가 적극적이거나 확실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요즘엔 화랑을 가는 게 차라리 겁이 나는 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화랑들의 그런 반응에, 그것도 모든 곳의 반응이 그렇게 부정적인 게(사실 그리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나를 피하는 눈치이긴 하지만.) 나를 막막하게 한다.
이제 찾아갈 화랑도 많이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나는, ‘좋은 꿈’ 꾸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그리고 혹시 화랑과 뭔가 약속이라도 잡힐 경우엔,
‘좋은 꿈’을 꾸고 싶고,
어쩌다 꿈이 괜찮기라도 하면,
‘오늘, 새로운 화랑에라도 한 번 찾아가볼까?’ 하는 심정이 돼 있는 나다.
그런데 오늘은,
‘이럴 줄 알았다면, 꿈 해몽하는 책이라도 한 권 사올 걸......’ 하는 생각까지 들어,
‘내가 정말, 미쳤군!’ 하면서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한동안 화랑가 얘기가 뚝 끊겨서, ‘뭘 하고 있다지?’하고 있었는데, 그 얘기가 결국 나왔는데 ‘꿈’과 연결시키면서 풀어나갔군. 근데, 스페인까지 가서 연습까지 했던 ‘거리의 초상화가’ 얘기는 도대체 왜 안 나오는 거지? 그 일은 아예 하지 않을 생각인가? 아니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있었던 건가......’
#오스트리아 청년#
오늘 한 화랑에 갔다가 거의 문전박대를 또 당한 뒤,
씁쓸한 마음으로 나오면서도, 토요일이어서 그길로 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화랑은 안 됐지만, 그래도 그 오스트리아 청년은 만나지 않을까 하고......
27 분을 기다렸지만(내가 그랬던 이유는, 오늘은 2시 48분에 도착했기 때문에 3분 늦어서였다.), 오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이토록 애타게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진실되어 보였거니와 그를 만나면 내가 거리에 나앉을 뭔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인데,
그와 헤어질 때 그저 막연하게 ‘토요일 오후 3시에 식당 앞’이란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그를 그곳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정확하게 3시 정각에 나타났기 때문에,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를 3시를 기점으로 앞뒤 15분씩 30분을 기다리는 게 버릇이 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은 3분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27분을 기다렸다는 말이다.
슬펐다.
‘아, 드디어 그 얘기가 나오는구나. 안 나올 리는 없는 얘기니까......’
마음 털어놓고 얘기할 사람 하나도 없는 이 베를린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 하나를 알고 있다는 것이 마음의 커다란 위안이 되기도 해서, 그런 사람과는 세상사는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고 도울 게 있으면 서로 도우며 지내고 싶어서 그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어쩐지 그는 나와 아주 잘 통할 사람 같다는 기대감도 작용한다.)
그런데 그는 그 뒤로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실망이 크다. 아니, 이제는 슬프다 못해 마음까지 아프다.
이 세상의 한 사람, 알고 지내고 싶었던 사람을 잃어버린 상실감이 크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나는 그 때 그와 헤어지면서, 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다음 약속 방법에 대해 소홀이 했는지 후회가 막심하다.(그의 이 메일이라든지, 전화번호라든지 허다 못해 오스트리아 주소라도 알아두었을 걸...... 하는 생각이 너무 간절하다.)
허긴, 그 때야 그 뒤로도 오며가며 한 번씩은 쉽게 만날 줄로 알았다. 일이 잘 풀리면 이제는 더 맛있고 멋진 식사도 함께 할 수 있을 줄로 생각했었다. 내가 그의 형뻘인데, 그것도 큰 형뻘일 수도 있는데, 그깟 맛있는 식사 한 끼 못 사겠는가 말이다.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못 보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지금의 나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제는 거리에 나앉아야겠다.’는 심정인데, 그의 도움이 간절하게 필요하기도 해서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본 정보로는, 여기 베를린에서도 거리에 앉아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라도 하려면(바르셀로나보다는 규모도 적고 활기차지 못하지만), 이곳 당국에서 내주는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하기에는 언어도 부족하고 여기저기 찾아가야 하는 절차 문제도 복잡한 것 같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가 적격일 것 같아서다.
그리고 초창기에 언뜻 그런 얘기를 나누었을 때, 그가 뭔가 그 계통에 대해서 아는 것도 있는 것 같아서,
나중에 한 번 깊게 얘기해 보자고 서로가 의견을 맞춰본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를 더욱 절박하게 찾고 있는데, 도대체 나타나질 않고 있는 것이다.
‘아, 그랬었구나!’
그런데 이제는 그를 만나 ‘거리 화가’ 얘기를 하는 것보다도, 사람 자체를 만나고 싶은 그리움이 더 커진 상태다.
여기는 거리에 나앉는 것도 상당히 그 절차가 까다롭고 또 감시나 통제도 심한가 본데(역시 독일이라서 그런가 보다. 스페인만 해도 어설플 수 있었는데......), 어쨌거나 처음엔 그 일 때문에 그를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는,
‘아까운 사람 하나 놓쳤구나!’ 하는 심정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근데,
그도 그 뒤로 나를 찾았을까?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매주 그곳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필이면 그가 나를 기다렸던 시간에(혹시 내가 스페인에 가서 없을 때?) 나는 가지 못해서, 둘이 서로가 어긋났을 수도 있었을까? 그래서 실망한 나머지 다시 안 나타나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그것까지는 내가 모를 일이다.
다만, 나는 그를 다시 만나고 싶은데, 그럴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아니, 앞으로 영원히 그를 못 볼 수도 있다......
그 길로 나는 다시 그 교회에 갔다.
의자에 앉아 예수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혼자 말했다.
‘그래, 또 보란 듯이 안 되었답니다. 물론,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겠지만요. 게다가 그 오스트리아 청년마저도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그도 어쩌면,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러고 나서도 허망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왜 그 교회까지 갔었던 걸까? 화랑 일이야 이미 물 건너 갔다고 쳐도, 그 오스트리아 청년을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빌고 싶어서?
예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나는 지금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그래, 여기에도 이미지를 붙이자.'며, 나는 ‘독일 참고 이미지’에서 '기진맥진'이라는 연필로 한 간단한 드로잉을 갖다 붙였다.
*
오늘, 일요일.
종일 집에 틀어박혀 그림을 했다.
그리고 나 혼자 웃었다. 그림이 잘 나와 주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도 이따금, 일요일이라 혹시 어디선가 전화라도 한 통 올 줄 알았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다.
그런 미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늘 자책하면서도 나는 늘 그 타령이다.
방에 그림이 늘어간다.
하면서 보면 좋았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그저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게 중 몇 개는 그 느낌이 다르다.
내가 여기 베를린에 와서 그린 그림에 약간의 변화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난 그림을 보며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통의 보상을 찾기도 한다.
어쨌든 내 방은 이제 진짜 화가의 방 같다.
색깔을 많이 쓰지 않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다양한 형태와 색감으로 벽면이 채워져가고 있는 중이니까.
나에게 세끼 식사만 제공된다면, 난 아무 불만 없이 방에 처박혀 꼼짝 않고 그림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이 공간엔 음악도 없고 TV도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조건들이 날 더욱 집중하게 해 작업하는 데는 더 좋을 수도 있다.
이 부분에도 ‘고독한 화가’라는 드로잉을 갖다 붙였다.
어머니께 편지를 써야 하는데, 쓸 건더기가 없다.
뭔가 긍정적인 일이 있어야 쓸 맛도 날 텐데, 마냥 이 타령인 것도 모자라 갈수록 부정적으로 치닫는 상황이다 보니 편지쓰기조차 겁난다.
내일은 7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된다.
뭔가 밝은 일이 일어날 법도 한데......
7 . 26
*
베를린에 와서 처음 편지를 받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G였다.
짧은 그녀의 편지엔 많은 뜻이 함축돼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기쁘고 슬프고, 편지를 받은 건 기쁜데,
내가 ‘그녀의 매우 특별한 친구(?)’라는 말이 슬프고,
‘사랑한다’는 말 대신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이 슬프고,
‘내 남자친구가 최근까지 덴마크에서 나와 함께 지냈는데, 빈둥대다가 스페인으로 돌아갔다.’는 말도 나를 슬프게 했다.
어차피 난 그들 연인 사이에 끼어든 ‘타인’이었을 뿐이다.
내가 끼어든 건지, 그녀가 나를 끼어준 건지......
그래도 나는,
‘나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이(그녀의 스페인 남자친구) 슬퍼지는 건 원치 않는다’며 그녀가 나를 진정으로 원했을 때에도 자제를 했었는데,
그 결과가 나를 이렇게 더 큰 슬픔 속에 갇히게 했다.
7월이 다 가고 있어서인가,
허기야 하지가 지난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어서 그러겠지만,
밤이 길어짐을 느낀다.
낮에는 덥다가도 밤에는 선선하다.
이렇게 여름이 조금씩 가고 가을이 오는 것 같은데,
하는 일 없이 베를린에서 시간만 축내고 있는 느낌이다.
내일은 무엇을 할까?
7 . 28
*
오늘도 도서관에 갔다.
마치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책 보고 자료 복사해서 돌아왔다. 그 일밖에 한 일이 없다.
그런데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나는,
‘이 일도 하다 보니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는데?’ 하고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입에 풀칠도 못하는 주제에......
저녁나절 한 차례 소나기가 내리더니 바람이 서늘해졌다.
가을 같이 선선해져서 문을 닫아야만 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생각들을 쫓아다니다가 밤을 보냈다.
결국 밤도 공쳤다.
7 . 29
나, 돈의 힘
살아가면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많은 문제 중에는, '마음'과 '노력'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는 '돈의 힘'을 빌리기도 하는데, 그건 매우 효과적이자 위력 또한 크다.
*
그들(옆방 손님들)은 갔다.
새벽부터 한바탕 온 동네를(윌리암 집과 여기 사이를 요란법석으로 오가며) 뒤집어놓는 것 같더니, 동이 트기 전의 어둠 속으로 떠나갔는데, 떠나는 것 역시 요란했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그들이 떠나는 바람에, 옆방의 나도 덩달아 깰 수밖에 없었고, 침대에서 뒤척이며 내내 혼란과 짜증스런 시간을 보내다가, 떠나는 그들 차량 소리까지가 마을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정말, 뭔가 전쟁을 끝낸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후련하기도 했고 뭔가 허망하기도 했고......
그런 뒤에도 나른한 기분으로 누워있다가 날이 샌 다음에 나와보니, 테라스가 가히 가관이었다.
그들이 먹다 만 음식 찌꺼기하며, 주인집에서 빌렸을 접시 포크 등이 탁자에 지저분하게 놓인 건 물론, 역시 먹다 남은 망고와 바나나도 구석에 몇 개 나뒹굴고 있었고, 버리고 간 속옷도 있었고, 망고 씨앗 등 음식물 쓰레기, 그리고 뚜껑이 열린 깡통과 사용할 수 없는 오리발 등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문을 닫고는 나는, 뒤 테라스로 나갔다. 그런데 그 쪽 방 뒤 테라스 역시 양말 쪼가리 버리고 간 세면도구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여자가 둘이나 끼어 있었는데도 그 누구 하나 뒤처리를 하지 않고 떠났던 것이다.
그래서 바다 쪽을 향해 의자를 돌려놓고 앉았는데,
그 얼마 뒤 집주인 초초가 테라스에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라스 청소를 할 것이었다.
약간 불안한 마음에, 그러면서도 오랜만에 평화로운 아침을 맞으며,
나는 한참 동안을 그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온몸의 긴장이 좍 풀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야, 일어났군요! 난, 문이 잠겨 있길래, 아직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이젠 조용히 지낼 수 있어서 좋겠어요?" 하고 뒤에서 인사를 해 온 건, 초초가 아닌 윌리암이었다.
그래서,
"근데 윌리암, 니가 왜 여기에?" 하고 내가 의아해하자,
"아, 내 동생 초초네 식구들은 그 사람들 나가는 차편에 '니께로'에 나갔어요. 그래서 내가 대신 청소하는 중이에요." 하는 것이었다.
내가 천천히 아침을 챙겨 먹는 사이 윌리암은 대충 청소를 끝내고 돌아갔는데,
오랜만에 조용하기도 해서 그랬겠지만, 오늘은 아침이 참 길게 느껴졌다.
더구나 이 집 주인 가족도 도시로 일 보러 나갔다는데, 이 집엔 나 혼자만이 남아있어서,
더 훵하고 긴 아침이 되었다.
아무튼 나는 햇볕에 말리기 위해 오랜만에(근 열흘 만에) 침구를 앞 테라스에 다 내놓았다.
사실은 내가 어제 숙박료를 지불할 때 집주인이, 오늘은 내 침구를 싹 갈아준다고 했었는데, 새벽에 말도 없이 니께로에 간 것도 그렇고 해서(돈을 받을 때만 친절한 척하고, 그 뒤에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행동에),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 혼자라는 사실에, 오늘은 하모니카도 좀 큰 소리를 내며 불었고,
그런 뒤에는, 모처럼 손도 풀 겸 그림 작업을 하느라 망고 하나를 접시에 담아 놓고 그리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은 다시 조용한 혼자만의 생활을 했더니, 자유로운 건 당연했고 뭔가 후련한 느낌도 아주 강하게 함께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렇게 혼자 있어야만 뭐든 하는 사람인 듯해서 약간 씁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모처럼 일기 스케치도 하고, 드로잉도 하는 등 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 생태학자들이 오면서 근 열흘 동안 내 생활을 못하고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며, 그로 인해 받았던 손해는 어찌할 것인지......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너무 세서 그런지 모기와 날 것들이 보이지 않아, 실로 오랜만에 한밤중에 전기를 켜놓고 노트북도 킨 채 일을 조금 하고 있다.
그런데 습기가 조금 포함된 바람이라선지, 눅눅한 기운 때문에 몸이 개운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모기가 없다는 게 이리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옆방 쓰레기들이 떠나면서 어째 이상하게도 그 검은 날 것들도 자취를 감춘 모습이라,
'그것도 참 희한하네! 그들이 오면서 벌레들도 기승을 부리다가, 그들이 가자 거짓말처럼 사라졌으니......' 하다간, '누가 보면 거짓말이라고 하겠네......' 하고도 있었다.
5 . 6
*
"쏴아!"
어젯밤 자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 용수철처럼 일어나 차단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고, 이미 나는 창의 차단막을 다 열어놓고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틈 사이로 물보라가 날아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만큼 바람이 세다는 것이었고, 침대에 누워서도 그 물기를 속수무책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그런 빗물을 차단할 그 어떤 다른 도구거나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 보통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내 먼 기억 중에, 그러니까 어릴 적(1960년대) 정말 온 국민이 지금의 쿠바처럼 가난하게 살 때, 여름 장마 철에 우리 집도(초가집) 천장에서 물이 샜는데, 물 떨어지는 곳에 그릇을 놓고 그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던, 그 막막했던 '걱정스러움'이 상기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침대에 웅크린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더니 어느새 잠이 들어주었고, 그렇게 들었던 잠은 6시쯤 깼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마을 모퉁이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이는 게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이지? 오늘도 버스가 운행되나?'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마을 사람들이 말쑥하게 차려입고 가방 같은 걸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버스가 운행될 것 같아서,
'나도 나가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정신없이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안마을 쪽에서 버스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깥마을 종점에 갔다가 돌아나올 때 타면 되는 거라서, 부랴부랴 서둘러 내려갔는데,
"오늘, 버스가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던데,
그런데 물도 마시지 못하고 나온 상태라 얼른 돌아와 냉장고에서 물만 꿀꺽꿀꺽 들이마신 뒤, 다시 나갔더니 때마침 버스가 올라오고 있어서,
그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는 긴 마을 진입로 숲을 쿵쾅거리며 달리다가 또 다른 쪽 해변에서 승객을 태우려고 섰는데, 나는 거기 '꼴로라도(Colorado)'란 해변에서 내렸다.
그런데 나와 함께 내렸던 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내가 다시 버스가 지나왔던 길로 걸어가려니까,
"여기서 마을까지 15킬로인데, 걸어가려구요?" 하고 물어서,
"내가 할 일이 있어서 그래." 하면서 웃어주었다.
내가 오늘 얼떨결에 버스를 타고 그렇게 마을을 빠져나왔던 건,
처음 이 마을에 도착하면서, 나에겐 끝도 없던 숲길을 달려온 끝에야 겨우 나타난, 이 마을에 대한 '신비감'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언젠간 한 번 그 길을 직접 걸어보면서, 그림 구상을 해 보자!'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림 ‘세상 끝에 있는 마을’을 그리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연구를 위해, 나온 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지나온 길을 거꾸로 걷기 시작했는데, 그 '꼴로라도(Colorado)' 해변도 색깔은 좋았다.
그리고 해변을 지나자 야자수 숲이 펼쳐졌고, 이 지역 생태공원의 '박물관'도 지나니,
본격적인 여기 ‘끝 마을 입구’에 닿을 수 있었다.
아까 버스에서 물어보니,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는 ‘니께로’에서 10시에 출발한다고 했는데,
지금이 7시가 조금 넘었기 때문에, 버스가 오기 전에 내가 ‘까보 끄루스’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스팔트 도로 사정이 너무나 안 좋은 건(여기저기 움푹움푹 파여있어) 처음 오던 날부터 알았지만, 내가 직접 걷다 보니 금방 온몸이 땀에 젖었고, 숲길이라서 그런지 모기와 날파리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닌, 여기는 파리까지 피를 빨아먹는 듯, 살갗이 노출된 팔뚝에 앉으면 따끔거리는 등, 걷는 것마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쓰고 갔던 둥근 모자를 벗어 흔들면서 날 것들을 쫓기에 바빴는데,
그러면서도 나는 그 길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내리막 오르막이 반복되는 언덕 고갯길로,
날것들에 쫓겨 빠르게 걷다 보니 어느새 상의 티셔츠는 빨래가 돼 있다시피 했고,
길가에 있는 전봇대의 번호를 세면서(그 숫자가 하나하나 늘어나야 마을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기계처럼 걷다 보니,
어느새 중간의 제일 높은 고개도 지났고, 또 그러다 보니 며칠 전 마을 쪽에서 걸어서 닿았던 지점도 지나게 되었다.(나는 이 일을 위해, 이미 한 번 반대쪽에서 걸어오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2시간 반을 넘게 걸어서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윌리암에게,
"근데,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버스를 운행하는 거야?" 하고 물으니,
"오늘이 '어머니 날'이라, 사람들이 니께로의 '공동묘지'에 왕래해야 해서 특별운행을 한 거에요." 해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숙소로 돌아오는데,
'아, 오늘이 '어머니 날'이라는데, 나는 정말, 꽃 들고 찾아갈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건 물론이고, 이제는 늙은이가 돼 있는데도, 날 찾아올 자식 새끼 하나 없는 '독거노인' 신세로구나......' 하고 자조적인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새로운 그림 ‘세상 끝에 있는 마을’을 해야만 하니......' 하는 설렘에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와 내내 그림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림은 쉽지만은 않아(그것도 예상된 일이다.), 스케치만 하는 것으로도 오후가 다 갈 정도로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이 스케치 하나를 바탕으로, 몇 개의 시리즈로 이어질 작업이라, 그만큼 정성을 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5 . 8
*
어젯밤도 바람이 무척 셌다.
그래도 하늘엔 조금씩 커지는 달이 떴고, 별도 반짝였지만,
'이 날씨를 어떻게 믿어?' 했듯이, 새벽엔 비가 내렸다.
그나저나,
'근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내가 놀라고 있는 게 있는데,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모자반'과 함께 왔다던 그 검은 벌레들이 사라진 게 보통 신기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역시 나를 괴롭히던 옆방 손님들이 떠난 것과 거의 동시에 그 벌레들마저 사라져,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어리벙벙해 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어제 그저께 바람까지 세게 불어, 모기와 그 벌레마저 없어진 것으로,
어젯밤엔 불을 켜놓고 글 작업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아니 의아해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5월이 되면서 여기도 하절기라서 그런지 살갗이 끈적거리는 건 피할 수가 없지만......
5 . 9
#윌리암의 배포#
오늘 오후 내가 그림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계단에 인기척이 있었고 윌리암이었다.
"인야, 망고 사왔어요." 하기에 보니,
그가 플라스틱 바케스 통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엔 잘 익어 붉은색의 큼직한 망고가 가득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망고가 어찌나 큰지 웬만한 멜론 정도는 돼 보였고, 언뜻 보기에도 열댓 개가 넘어 보여, 나는,
"이 많은 걸......" 하고 놀라면서도 너무 흡족해서,
'그래, 이런 니 배포가 나하고는 딱 맞지!' 하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는,
"이건, 따다가 깨진 모양이니, 우선 이것부터 드세요." 하면서 약간 깨진 망고 하나를 들고 뒤 테라스 빨래터에 나가더니 씻어 가지고 돌아와서는 또,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고 나중에 시원하게 드세요." 하면서 본인이 직접 냉장고 안에 넣어주기까지 하니,
"그래, 그러고 말고!" 하면서, 나는 그 먹음직스럽고 큼직한 망고들에 군침을 흘리면서도 그의 언행에 감동까지 하고 말았다.
나에겐 그의 마음 씀씀이도 고맙지만, 망고만큼이나 큼직하고 시원시원한 배포가 더 맘에 들어서였다.
그가 좀 그런 편이다.
어제도, 공복의 내가 ‘세상 끝에 있는 마을’ 그림 구상을 하기 위해 이 마을 들어오는 길을 두어 시간 걸어오다 그의 집에 들렀는데,
그가 뒷마당에 앉아 생선을 다루고 있었다.
"인야, 무슨 일이에요?" 하고, 온몸이 땀으로 젖어 축 늘어진 모습으로 나타난 나를 보고 그가 놀랐는데,
나는 그 얘기를 하면서,
"윌리암, 나 배고파 죽겠다!" 했더니,
"그래요? 잠깐만 기다려요!" 하고 그 즉시 일손을 털더니(귀찮았을 텐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 즉석 보까딜료(여기 주먹만 한 쿠바 빵에 치즈 조각을 넣고 토스트 판에 눌러 구워)를 만들어, 커다란 컵에 망고 쥬스를 가득 담아 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허겁지겁 먹었는데,
"하나 더 해드릴까요?" 하기에,
"아니, 이거면 됐어!" 했는데도,
"그럼, 주스라도 한 잔 더 하실래요?" 하고 물어(조금 전 마신 것도 큰 컵에 담았던 거라),
"니네도 먹어야잖아?" 하자,
"또 만들면 되죠!" 하면서, 바로 냉장고에서 또 주스를 꺼내더니,
내가 마시던 컵에 하나 가득 채워주었던 그다.
그렇잖아도 목이 탔던 나는 보까딜료도 그렇지만 방금 전에 마셨던 망고 주스가 더 맛있었던 것으로, 더 달라고 하기가 미안할 정도이 많은 양이었기 때문에 주저했던 것인데,
나도 그런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아낌없이 몽땅몽땅(비단 이것뿐만이 아닌, 평소에도) 퍼주는 모양새가,
가만히 보면 '음식 인심'도 좋고 손도 커서,
내 맘에 쏙 든다.
그러니 내가 이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그를 믿고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괜찮은 생각#
이 마을에 마차를 끌고 와 행상(주로 과일)을 하는 젊은(40대) 마부 하나가 있다.
요즘 많이 나오는 '망고'거나 '바나나', 그리고 '고구마'거나 '유까'도 파는 것 같은데,
오늘도 오전에 글 작업을 하는데, 뚜깍또깍 말 발굽 소리가 나기에, 일손을 멈추고 얼른 나가 보니, 그가 막 이 집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이봐요!" 하고 내가 큰 소리로 부르자 그가 뒤로 돌아보며 말을 멈추기에,
"망고 있어요?" 하고 묻자,
"그럼요!" 하기에 내가 내려갔다.
그래서 100뻬소 치를 샀고, 고구마도 댓 개를 샀다. 나중에 윌리암이 들르면 쪄달라고 부탁하려고.
그러면서 뭔가 스치는 게 있어서,
"저, 혹시 내가 부탁을 하면 들어줄 거요?" 하고 물으니, 그가 눈이 동그랗게 나를 바라보았다.
"아랫마을 끝 집에 사시는 안토니오 영감님을 아오?" 하자,
"그럼요!" 하기에,
"그럼, 내가 미리 지금 선불로 줄 테니...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 영감님께도 망고와 고구마 좀 배달해 줄 수 있겠소?" 하자,
"당연히 해드리지요." 하고 수락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는 아랫마을로 가던 길이니까, 그로서도 못할 일은 아닐 것이어서.
그런데 그가,
"얼마 치를 갖다 드릴까요?" 하고 묻기에,
"영감님도 혼자 사시는데, 얼마나 많이 드시겠소? 그러니..." 하면서, "그보다는, 내가 당신을 믿고, 미리 선불을 줄 테니(하면서 500뻬소 지폐를 주면서), 당신이 알아서, 그 돈의 액수만큼... 근데, 오늘 한 번에 다 갖다 드리면, 과일이 상할 수도 있고 또 영감님이 다 못 드실 수도 있으니, 다음에 올 때하고 두세 차례 나눠서 갖다 드려 줄 수 있겠소?" 하자,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렇게 하지요." 하는 대답하는 모습이 퍽 진실돼 보였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샀던 물건을 챙기면서, 다시 한 번,
"오늘도 한 뒤, 앞으로도 두 번 더 배달해야 되오. 한, 일 주일 쯤 차이를 두고......" 하자,
"잘 알았습니다!" 하고 활짝 웃었다.
그렇게 내 '바람의 방'으로 올라오는데, 그건 퍽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내가 들고 가는 것도 무겁고, 매번 윌리암에게 부탁하는 것도 이젠 미안한데, 그 마부가 자신의 물건을 파는 길에 그 집에 배달하는 것이라서...... 그래서,
'이건 한국 사람의 방식이야!' 하고, 한국인의 '배달 문화'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기까지 했는데,
좋은 생각임(good idea)에는 분명했다. #
*
오늘은 한마디로 말해서 바람이 없는 날이다.
아침부터 뭔가 이상하고 불안해서 보니, 바람이 없었고 바다 역시 잠잠했다.
그래서 보니, 바다엔 엄청난 모자반이 또 밀려와, 이 마을 해변을 다 덮고 있었다.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겹겹이 쌓인 모자반도 어느 한순간(하룻밤) 파도거나 폭풍이 몰아치면, 그 중 일부(이미 말라 붙은 것) 빼고는 어딘가로 또 말끔하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요즘 이 마을의 해변은 모자반이 뒤덮어버렸고, 지금도 잔뜩 몰려 오고 있는 중이다.
오후엔, 어제 저녁에 꽤나 공을 들여 밑그림을 그려두었던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물 처리(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에 들어갔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조금씩 완성의 단계에 접어 들어갈수록 나는 희열에 젖어갔다.
그리고 결국 서명까지를 했는데, 그 느낌도 좋아서,
'그래! 이런 걸 하려고 내가 여기서 이렇게 있는 거지!' 하고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그림을 다 그려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윌리암일 터였다.),
나는 그림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얼른 감추려고 했는데, 들키고 말았다.
“그림을 다 그린 건가요?” 하고 그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묻기에,
“응? 그래...” 하고 약간 당황하면서 내가, “조금 더 생각할 게 있어서......” 하고 쭈뼛거리자,
“좀, 보여주면 안 돼요?” 하고 아예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평소엔 문밖에서만 보고 돌아가곤 하던 그가.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윌리암, 너도 이 그림 안에 있어!“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키며 보여주자,
”야, 멋지다!“ 하면서, "인야, 당신은 정말 예술가 같아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습도 들어있는지라, 이리저리 그림을 살펴 보면서 보통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돌아갔고, 나는 피곤하기도 해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 ‘이 세상의 끝에 있는 마을’의 ‘마을 부분’을 수채로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일단 그걸 해 놓아야, 그 중간의 겹치는 숲의 풍경들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지가 나올 것이어서......
그런데 더워서 웃통을 벗고 했는데도, 오늘은 바람이 없고 몸에 땀이 밸 정도였다.
어쩌면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드는 신호일 수도 있었다.
5 . 10
*
아침에 다시 마을 절벽에 나갔더니, 모두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짓말처럼 모자반의 많은 양이 사라진 뒤였다. 그런 모자반 상황의 사진을 찍고 올라와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점심을 이 마을 식당에 가서 먹기로 했다. 약 한 달여 이 집 음식을 먹었더니 물리기도 하고, 또 이 집 음식이 싫어서 내린 조치였다.
지난번 그 생태학자들도 이 집에서 잠은 잤지만 음식은 식당에 가서 먹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윌리암이 보여, 그 얘기를 했더니,
하필이면 식당이 공사 중이라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난감해하다가,
"그럼, 윌리암, 니네 집에서 먹고 싶은데......" 하자, 다소 난처한 표정이더니, 알았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얼마 뒤, 뭔가 떠들썩한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서 나가 보니, 초초가 뭔가 한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오던데, ‘옥수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사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많이 사왔으니, 알아서 쪄 오겠다기에,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었는데, 윌리암이 점심을 배달까지 해와서,
"내가 가서 먹으면 되는데, 왜 귀찮게 갖고 왔어?" 했더니,
자기네 집은 청소 중이라 복잡해서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점심을 먹었지만, 좀 미안하기도 하고 난처하긴 했다.
그런데 그 얼마 뒤 초초가 옥수수 열 개를 쪄왔는데(그 비용으로 100뻬소를 주니, 아무 말도 않고 받아갔다.), 김이 무럭무럭 나기에 일단 하나를 먹어 보니,
한국의 찰옥수수와는 달랐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침 잘 됐다며, 안토니오 영감님 한테도 따끈따끈한 옥수수 맛을 보여드리기 위해 그 중 반절을 가져가기로 했다.
그렇게 영감님 집에 갔는데,
"아이고, 사람까지 시켜서 망고와 고구마를 보내줘서 아주 잘 먹고 있어요. 너무 고마워요!" 하는 건 좋았는데,
웬걸?
영감님이, 이가 없어서 옥수수는 못 먹겠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아차, 이런 실수를!' 하고 나는 고개까지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다지? 여든이 되신 분에게 이가 생생하게 있을 리가 없는데......' 하는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뒤 앉아 얘기를 나누다, 오늘도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오늘은 모자반과 모자반이 밀려오면서 실려 왔던 작은 죽은 물고기가 썩어 생긴 안 좋은 냄새가 주변에 풍겨서,
옷의 물기만 말린 뒤에 바로 돌아왔다.
그런데 옆방엔 한 늙수레한 부부가 새로 들어와 있었는데,
여자의 생김새는 쿠바인 같았는데, 카나다 국적의 부부라는 것이었다.
여자는 다소 호의적인 표정인데다 말도 걸어와서,
"요즘, 모기 때문에 밤에는 상당히 괴롭거든요?" 하자, 여자가 깜짝 놀라는 등 얘기가 통하던데,
잠깐 남편(영감)이 나오는데, 내가 인사를 하려는데 휙 외면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무슨, 저런 늙은이가 있어?' 했지만, 세상엔 그런 '인종차별자'도 있는 것이라,
'내가 옆방 복은 없나 보네! 이번에는 인종차별자가 들었으니......' 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들은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기는 했다. 물론 테라스에 나가 불도 켜지 않았고, 약간 어두워질 때 자신들 방에만 불을 켰다 어느새 끄기까지 했다.
나도 어차피 낮잠도 못잔 터라,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첫잠을 자다 후끈거려서 일어나 보니, 그제야 10시 20분이었다.
옆방을 보니 불은 켜 있던데, 그들은 정말 조용했다.
모기가 있어서 일은 못하고, 나는 테라스에 잠깐 혼자 앉아 있다, 바닷가 언덕으로 나갔다.
그리고 1시 넘어 돌아왔는데, 약간 선선한 바람이 불었지만, 불 켜고 일할 엄두조차 나지 않아서,
그대로 사바나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게 내 유일한 모기퇴치 방법이다.)
5 . 11
*
모기에 뜯겨가며 또 하룻밤을 지냈더니, 오늘 아침엔 감회가 새로웠다.
요즘 밤마다 모기 때문에 시달리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른 아침에 보니 이 방까지 박쥐들이 드나들었지만,
그들은 사람을 귀찮게 굴지는 않으니까......
오늘은 아침에 해가 뜨긴 했는데,
하늘 한쪽에는 구름이 껴 있고 다소 스산하게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빨래를 해 널긴 했는데,
'이러다가 비라도 내린다면?'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그러다 마을 모퉁이에 나가 보니 밤사이에 모자반이 또 상당히 사라진 모습이고, 냄새도 많이 줄어들은 것 같았다.
아침의 그런 날씨는 내내 우중충하더니, 점심 무렵엔 결국 비가 조금 내렸다.
그런데 윌리암이 전에 내가 부탁했던, 문어와 랍스터를 구해 쪄왔다.
나는 문어가 클 줄 알았는데 아주 작았고, 랍스터 역시 머리가 뚝 끊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여기 문어는 이렇게 작아?" 하고 묻자,
"겨울철엔 제법 큰 것들이 잡히는데, 요즘엔 잘 안 나와요." 하던데,
금방 쪄서 따끈따끈한 접시가, 뭐든 내 부탁을 들어주려는 그의 성의 같아서 고마웠다.
그에게 400뻬소를 지불했다. 그러면서,
"윌리암, 오늘은... 어제 삶은 옥수수도 있고 이 해물도 있으니, 아예 그걸로 점심을 먹어야겠다. 그러니, 점심 먹으러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를 보냈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남겼던 딱딱하게 식고 굳은 옥수수였지만, 문어를 잘라 점심으로 먹고,
큰 망고 하나로 입가심을 하고 있는데,
윌리암이 다시 올라왔다. 그러면서 그릇 하나를 내미는데,
내 점심이 부실한 것 같다는 판단으로, 콩과 고구마를 섞어 만든 죽 같은 걸 가져왔던 것이다.
(그의 이런 마음이 늘 나를 감동시킨다.)
그래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배불리 점심을 먹은 꼴이 되었다.
그렇게 먹고 낮잠까지 자고 일어났는데,
하늘은 멀쩡하게 개어 있었는데, 바람이 상당히 셌다.
그 바람은 ‘미친바람’이었고, 결국 세상에 비를 뿌리기도 했다.
그러니,
'아, 내가 능력이 있다면 이 바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하기도 했는데,
사실 나는 그런 그림을 그린 적도 없지는 않았는데, 그게 좋은 그림인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5 . 12
#이제는...#
아침에 윌리암 집에 인터넷하러 갔다가,
'와삽'으로 스페인 친구들에게 그저께 그림 ‘바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보냈더니,
거기에 따른 반응이 매우 직접적이었다.
그 중에는 '산티아고'로부터 전화통화 요청이 있어서 받았는데,
그들(부부)도 난리였다.
"인야, 그림이 너무 좋아!" 하면서도, "어떻게 지내?" 하며, 먹는 거에 날씨를 포함한 건강 걱정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산티아고, 사실은 내가 여기에 오라고 하고는 싶었지만(그는 내가 오라고만 하면 올 준비도 돼 있던 친구였다.), 나는 견딜 수 있지만, 당신은 힘들 것 같아서... 그럴 수는 없었어." 하자,
"쿠바의 어려운 상황은 나도 어느 정도 짐작해. 그러니, 걱정하지 마." 하면서 날 이해한다면서도, "며칠 전에 우리 친구들 모아 여기서 식사를 했는데, 인야, 당신 얘기를 하면서 지금 쿠바에 있다며, 그동안 보내 준 그림과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모두들 좋아했고 또 대단하다고 난리였어!" 하며 부부가 함께 내 전화를 받아서,
모처럼 친구간 대화의 갈증도 푼 기분이었다.
그러고 돌아온 나에겐,
요즘, 또 한국으로부터(친구들)의 소식이 뚝 끊긴 상황에도 신경이 가고 있었다.
처음 내가 몇몇 친구에게, 이 ‘쿠바’라는 낯선 나라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할 때만 해도, 나름 관심을 갖고 답을 해오거나 걱정을 해주던 사람들이,
내가 여기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간다는 연락을 한 뒤 어느 한 순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소식을 끊은 것이다.
물론 나는 그들과 그저 평소처럼 이런저런 넋두리거나 하소연 등으로 소식을 이어갈 생각이었는데, 그들의 변화에 당혹스러우면서도, 일면 섭섭함도 생긴 상탠데,
이제는 마음 정리도 돼가고 있다.
굳이 내 쪽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인데,
그들 모두 다는 아니겠지만, 어떤 이들은, 이렇게 외국으로 훨훨 돌아다니는 내가 부러운 나머지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 심사가 일어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미쳐,
조용히 살아가는 그들을 더이상 자극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이러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나는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내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가서, 돌아왔네 만나자 하는 얘기조차도 삼가야 한다는 결론도 끄집어낸 것인데,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내다 보면,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나서도 내 외국에서의 얘기를 떠들어 봤자,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고, 또 그래야 정말 조용하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는 뭔가 새롭고 특별한 문제를 만드는 것보다, 그저 조용히 일상처럼 지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니까...... #
*
어제 저녁 내내 밤 내내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시원하긴 했는데도 어째 몸이 눅눅한 걸로 보면, 여기도 점점 여름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일 듯했다.
거기다 모기한테도 물려 가렵고, 머리도 가렵고......
그래서 보면, 나는 아무래도 이런 열대기후와는 체질상으로 맞지가 않는 사람 같다. 요즘 툭하면,
'내가 왜, 이런 끈적거리고 눅눅한 곳에 와 있다지? 세상엔 선선하고 쾌적한 곳도 많은데......' 하는 것도 모자라, '앞으론, 가급적 이렇게 더운 나라엔 가지 말기로 하자.' 하는 생각이 지배적인 걸로만 봐도.
옆 방에 묵었던 카나다인 부부는 정말 없는 듯 있다가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다시 혼자가 되어, 나가기도 싫고 해서 미적대면서 오후를 보냈다.
그런데 저녁 무렵에 이 집 주인의 친구인지 친척인지가 들어왔는데,
혼자라서인지 조용하긴 했지만, 문을 어찌나 요란하게 닫는지 내가 몇 번을 깜짝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밤사이에 모기 때문에 몇 번을 깼는지 모른다.
밤이 전쟁터로 바뀐 기분이다.
5 . 13
'그렇게 점점 그 마을에 머무는 게 싫어지고 있었지......'
#거리 두기#
아침나절에 가까운 곳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서,
‘이게 무슨 일이라지?’ 하면서 나가 보니,
이 집 뒷 마당, 그렇지만 옆집인 듯 '아몬드 나무' 잎 사이로 언뜻 보이는 곳에서 나는 소리로, 어느새 돼지 큰 놈 하나가 새하얗게 벗겨져 뉘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그 돼지를 잡는 소리가 한참 동안 온 동네에 울려 퍼졌던 것이었다.
그래서 섬뜩한 기분이어서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는데,
문득,
'저 고기를 살 수 있다면, 좀 사서, 안토니오 영감님께 갖다 드리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지난번 그분과 ‘니께로’에 나갔을 때,
고기를 사서 영감님 여동생과 나눠드리려다가 못했던 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 있던 참이라,
잘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창문 차단막 사이로 보니, 윌리암이 아랫마을을 다녀오는지 자전거를 탄 채 마을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그래서 급히 테라스에 나가,
"윌리암, 오늘은 점심 가져오지 마라.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 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먹을 거야." 했더니,
"안토니오 영감님이 오늘 ‘니께로’에 나가셨는데요?" 하면서 뭔가 바쁜 듯, 그가 손만 번쩍 들고는 자기 집 쪽으로 황급히 내려가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헛걸음할 뻔했네!’ 하고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돼지고기’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니,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아니, 어차피 나는 여기를 떠날 사람이고, 지금도 며칠 내로 떠날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어쨌거나 그동안 혼자 사는 여든 노인과 정이 제법 들었는데, 이제 이별은 피할 수 없으니......’ 하는, 안토니오 영감님과의 이별이 걱정거리로 떠올랐던 것이다.
‘윌리암’이야 젊은 사람이니까, 앞으로도 서로가 ‘와삽’ 같은 걸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겠지만, 그 영감님과는 그럴 일도 없으니(핸드폰도 없고 사용할 줄도 모르는 분이라)...... 그런데, 이러다가 어느 날 내가 훌쩍 떠나면?
물론 그분의 상실감이 어떨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돼지고기고 뭐고, 그런 일 자체를 벌여서는 안 된다!’ 하면서, ‘그보다는,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그분과 ‘거리 두기’를 하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금씩 정 끊기 연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던 것이다. 아니, 굳이 일부러 그런 일을 하기보다는, 더이상 정을 느끼게 하는 일이거나 미련을 남길 일은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그건, 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오후 두 시가 넘어가면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는데, 그 양이 적지 않았다.
그러면서는 일도 없이 나는 또,
'안토니오 영감님이 오늘 니께로에 나갔다는데, 사람도 없는 집에 비가 내려(그 집은 천장에서 물이 샌다.), 물난리가 났겠네......' 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또,
'이런 것도 내 ‘오지랖’일 뿐이야. 내가 그런 데까지 신경을 써선 안 돼.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이니......'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내 생각일 뿐,
그분은 그래도 아무 일도 없는 듯 잘만(행복한 듯) 사시니까.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삶에 불만도 없으시고...... #
# 돈의 힘#
뭔가 이상 전선이 생겼다.
윌리암이 나를 피하고 내 숙소에 오지 않는다. 처음엔,
'왜 그렇지?' 하고 의아해했지만,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는 하다.
최근 내가 조금씩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본 그가 나에게 뭔가 섭섭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여태까지 나를 참 많이도 도와주었는데, 그게 다 헛수고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또,
'그렇다면 니가 나를 여태까지 도와준 것은, 물론 인간적인 면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대가를 바라고(장삿속?) 해 준 것밖에 되지 않는 거 아냐?' 하는 식으로 약간의 실망도 했다.
나는 정말 그를 믿고 좋아했었는데...... 그리고, 사실 나는 여길 떠나기 직전(떠나면서) 일정액의 돈으로 고마움을 표하려고 돈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는데......
그런데 오늘 아침에도 본인이 직접 자기네 염소 두 마리를 끌고 나와 풀을 뜯게 하던데,
이 주변을 빙빙 돌면서도(나를 염탐하러?),
이전처럼 나를 부르거나 인사를 해오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에서도, 그런 이상 기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제도, 안토니오 영감님 집에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앉아 있을 때 그가 지나가면서 나를 부르기에,
내가 올라오라고 손짓을 하자,
곧 돌아온다며 포구로 도망치듯 갔던 걸 마지막으로(나는 그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끝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나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어느 상황에서든 이렇게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 거기서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오해를 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윌리암과의 관계에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더욱 괘씸하고 나 역시 뭔가 배신감까지 느끼면서,
'지금 당장 떠나버려? 정말, 그가 생각하고 있듯, '잘 있어라'라는 말만 남기고?' 하는 심정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실망했기에, 내일 당장 떠날 수도 있다.
그렇지민 안토니오 영감님과 그, 그리고 나와 셋이서 함께 식사라도 한 끼 한 다음에 떠날 계획이었기에, 그 일만큼은 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차피 윌리암 같은 놈과는 그럴 얘기할 필요도 없겠지만, 안토니오 영감님과는 뭔가 소박한 '송별회' 정도는 해야만 하니, 내가 좀 참아야 한다.
그렇다면 며칠 추이를 더 지켜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오후에 윌리암이 시원한 ‘망고 주스’와 바나나 세 개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제야 나는 씨익 웃으며(만약 그가 계속 나를 피했다면, 나도 그대로 떠났을 수도 있다.),
"야, 윌리암! 너는 내가 그냥 입 딱 씻고 떠날 거라고 생각하냐?" 하고 묻자,
몸을 약간 움찔하면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 머무는 사이에 니가 나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그런 너의 고마움을 내가 모를 것 같아?" 하자,
입을 약간 씰룩하면서 어깨까지 들썩이기에,
"너도 알다시피 내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서 많은 돈을 준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난... 여기를 떠나는 날 너와 헤어지면서 너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려고, 돈 몇 푼을 이미 준비까지 해놓았는데......" 하면서 나는 탁자 서랍에 이미 챙겨두었던 000 유로를 꺼내면서,
"야, 며칠만 더 참을 수 없었냐? 내가 떠나는 날까지?" 하고 약간 공박을 가하자, 그가 내 눈치를 살피는 듯 시선도 다른 데로 옮기던데,
"너도 나, 잘 알잖아? 지저분하고 복잡한 거 싫어하면서 매우 솔직하다는 걸?" 하자,
그도 고개를 끄덕이기에,
"그래, 좋아! 어차피 말도 나온 거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자,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그동안 쓰고 싶어도 안 쓰면서 이 돈을 모아왔던 거거든?(사실이었다. 내 처지에 그 정도의 돈이 작다고 할 수 없는 돈이 분명했으니까. 더구나 여기 쿠바에서는 결코 적은 돈도 아니니까.) 그러니, 섭섭타 생각 말고... 받아라." 하고 돈을 내밀면서,
"윌리암,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 하니,
그는 별 동요도 없이 그런 내 말을 다 들었던 것도 모자라,
그 돈까지도 아무 소리도 않고 받는 거 아닌가.
(최소한 '고맙다'는 말은 할 줄 알았는데, 그 말마저 없어서 사실은 내가 더 놀랐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 내가 알아 보니, 이 마을 포구에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생선을 실어가기 위해 온 트럭이 한 대 있는데,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돌아간다는 것 같드라구요. 그러니, 내가 그 운전자에게 말을 해, 인야가 그 차를 타고 가면, 힘들고 복잡한 여행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 하기에,
"그렇게 해 주면, 당연히 고맙지!" 했더니,
"알았어요!" 하면서 휭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쨌거나 나는 윌리암과의 문제를 풀긴 한 것 같다.
그런 뒤,
그가 점심을 가져왔고, 망고가 다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또 다시 큼직한 망고도 세 개를 가져와,
얼추 내가 떠날 때까지의 먹을 건 보충을 해놓은 꼴이다.
그리고 그 얼마 뒤 또, 그가 갑자기 올라와, 문어를 두 마리나 사왔다며 보여주면서,
"인야, 이번 건 좀 싱싱하고 큰데, 곧 삶아 올 게요!" 하고는 바삐 돌아갔는데,
'요즘에 통 안 나타나더니, 돈을 주니... 벌써 몇 번째냐? 아이고!' 하면서 나에게선 절로 웃음이 나왔고,
'돈의 힘'이 그토록 크다는 걸 나는 느끼고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