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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隆陵)에 얽긴 정조(正祖)의 풍수지리 1.21대 영조(英祖) : 영빈 이씨 장남 -莊祖(사도세자)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노론들의 무고로 인하여 영조의 질타가 심해지자 우울증과 같은 증세로 왕궁을 탈출하고,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는 등 행동에 대하여 신하 나경원이 세자비행10조목을 상소하여 뒤주속에서 죽음. 2. 22대 정조(正祖):사도세자의 차남으로 임금이 되었으나 가. 문효 세자 (선빈 성씨의 장남)가 홍역으로 5살에 사망(1786년) 정조는 늦게 얻은 세자로 기쁨에 차서 병을 하는 세자를 위해 의약청을 신설하고, 대 사면령을 내리며, 과거를 실시하고, 국가를 축제분위기로 연결하였으나 슬픔에 빠졌다. 나. 선빈 성씨의 죽음: 임신 중(1786년)-문효세자 어머니 다. 정조의 조카 상계군의 사망(1786년)-정조의 이복 아우 은연군의 아들. 3.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고 대신들의 파벌싸움이 심하게 일어나면서 정조마저도 위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 영조의 계비 대왕대비 정순왕후도(자식이 없음) 위험을 느끼면서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현 서울 시립대 내)을 걱정하니 정조는 이장을 준비 시켰다. 정조의 고모부인 박명원(영조 영빈이씨 장녀 화평옹주 남편)과 지관 차학모는 흉지임을 확인하고, 좋은 터를 잡고, 좋은 날을 택하는 과정이 3년이나 걸렸다. 더디어 정조가 유릉을 직접 확인하고서 재왕13년 1789년 수원인 유릉에 이장을 하였다. 이 터는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용이 구슬을 물고 노는 형)의 명당으로 일찍이 고산 윤선도가 천년에 한 번 볼찌도 모를 최고의 명당이라고 평가한 자리였다. 명당을 얻고 난 정조는 주역점을 보니 겸괘오효(謙卦五爻)가 나와 “이롭지 않는 일이 없으며 국사에 경사가 있을 것이라 풀이 하였다.” 이듬해 (1790년) 셋째 계비 수빈박씨가 왕자를 낳았다. 정조는 세자를 얻은 기쁨은 명당의 발복으로 보고 자주 유릉을 찾아 참배하였다고 한다. 이 세자가 23대 순조임금으로 11살에 등극하여 34년가 왕위를 지켰다. 4.이 곳이 지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이며 華城은 정조가 불행했던 아버지에게 효도도 있었지만 세자가 없는 왕실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세자를 얻은 기쁨으로 자신이 참배할 행궁(行宮)을 짓고 융릉을 오래 보존하고자 화성을 쌓았다. 大臣 김종수가 화성기적비(華城紀積碑)에도 명시된 화성은 풍수적 이유가 아니면 해석할 수가 없다.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87-1 :융건릉(隆健陵 소재)-사적206호 수원 오산간 국도에서 병점분기점을 만나면 84번 국도로 직진하면 오른쪽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