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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6:4(316) 부모의 도리와 자녀의 행복 2020.5. 10
에베소서 6:4을 근거로 부모의 도리와 자녀의 행복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자성어에 보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논하는 여러 단어 중에 “부자자효(父慈子孝)”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부모는 자녀들에 대하여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부모의 도리와 자녀의 도리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때, 그 가정은 올바르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맞는 말이죠, 자녀들이 효행으로 도리를 잘 지키면 부모가 행복해집니다. 또한 부모는 자애로움으로 자녀를 대하게 되면 자녀들도 행복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가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이 간단한 원리를 놓쳐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 덕민 교회 모든 가정들의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자애로움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님에 대하여 효행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유우머가 있습니다. 오나가나 말썽만 피우는 초등학교 문제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고, 학교폭력에 관계 되고, 심지어 약한 친구들을 겁박하여 강탈까지 서스럼 없이 하는 아들입니다. 이렇게 두었다간 이 아이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입니다.
이에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습니다. 산소 앞에서 아버지가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립니다. 준비해 간 회초리로 아버지는 자기의 종아리를 내리 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뻔하지 않습니까?
이를 본 아들이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만류하면서 엉엉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런 일 이후에 이 문제아 초등학교 아이가 마음을 바로 잡아 먹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세월이 훌쩍 흘러갑니다. 초등학교 아이였던 아이는 어느 듯 아버지가 되었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자리에서 자식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놈이 수십년 전에 자신이 햇던 못된 짓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술 더 떠서 더 잔머리를 굴리면서 나쁜 짓을 합니다. 엇길로 나가는 아들 모습을 본 아버지는 어떻게 행동 했을까요?
수십년 전에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아버지의 모습, 회초리를 들어 자신의 종아리를 후려쳤던 그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올바르게 바뀐 것을 떠 올립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산소 앞으로 갑니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햇던 그대로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후려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아이는 눈만 말똥말똥 쳐다 보면서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만 봅니다. 자신은 예전에 울면서 아버지의 손을 잡아 만류하였건만, 이 아들은 그냥 멀뚤 멀뚱 쳐다만 봅니다. 그리고는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에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엄마. 아빠가 왜 저래요? 아빠가 미쳤나 봐요.”
급변하는 세태를 풍자한 유머이죠. 요즈음 세상은 저와 여러분들이 자라던 옛날과 많이 다릅니다. 얼마나 변했는지요? 한두 가지가 달라진 게 아닙니다. 문화와 환경이 경천동지할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아이들의 사고방식 또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따라 잡지 못할 정도로 많이 변해 버렸습니다. 너무나 급변해 버린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간격이 많은 부모님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부모 된 자로서 어떻게 믿음으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덕을 세우는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행동의 지침을 삼고 귀한 이정표를 세우는 시간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1. 자녀를 분노하게 하지 말고 분발하게 하라
4절 “또 아비들아. 너희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본문의 시작에서 “아비들아!”라고 언급합니다. 아비들아 라는 말은 ‘아버지들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에는 아버지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처럼 표현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원어에 살펴보면, 아버지와 어머니, 즉 부모 모두에게 이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첫 번째로 당부하신 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님들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바로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됩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자녀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녀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부모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자녀들이 분노를 품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 성경에 보면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현대인의 성경)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공동번역) 등으로 번역합니다. 올바른 사고방식과 행동을 하는 부모라면, 부모의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녀의 마음에 분노를 심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작년에 40대 남매가 자신들의 친 아버지를 처참하게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패륜(悖倫)이죠. 아무리 이런 저런 정황을 살핀다고 하더라도, 친남매가 마음을 같이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건조사가 진행될수록,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친남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손가락질과 비난이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그 남매는 40대 중년이 되기까지 아버지에 대한 어떤 분노를 계속 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식을 가지고 있는 40대 나이에 자신들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분노는 인생을 망칩니다. 이 세대는 분노의 세대입니다. 매사에 분노와 증오가 차고 넘칩니다. 길 가다가 쳐다봤다고 주먹질을 날립니다. 고속도로에서 내 차 앞에 끼어들었다고 보복합니다. 백화점에서 직원이 맘에 안 든다고 과한 분노를 표출하여 무릎 꿇고 빌게 만듭니다. 여자가 싫다고 해서 아무나 걸리는 대로 여자를 죽입니다.
도대체 이 모든 분노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분노는 사회적 문제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어디서부터 고치면 될까요? 하나님은 오늘 부모들에게 말씀합니다. “자녀들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게 하지 말라!” 분노의 세대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모든 부모에게 있습니다. 부모가 만들 비뚤어진 분노에 자녀들이 그대로 무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어떤 일로 말미암아 분노를 품게 될까요?
1)부모의 잘못 된 가치관입니다. 사람은 가치관대로 살아갑니다. 가치관에 따라 인생의 모든 문제를 결정합니다. 직업 선택, 결혼, 친구, 학문 연구, 사회생활이 모두 가치관에 따라 결정 됩니다. 삶의 목표도 가치관대로 결정 됩니다. 돈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돈에 목숨을 겁니다. 지식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지식에 인생을 겁니다.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면 사랑에 삶을 바칩니다. 영생 천국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면 영생 천국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문제는 잘못 된 가치관입니다. 돈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보세요. 돈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돈이라면 친구도 버립니다. 돈 때문에 가족도 버립니다. 돈을 위해 명예를 팔고, 돈을 위해 정의를 버립니다. 부모세대가 보여주는 이런 잘못된 가치관이 바로 자녀들의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부모의 잘못 된 기대, 혹은 편애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무언가 특별하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내 아이는 수재이고 천재이고 상위 1%의 영특한 아이”라는 기대감을 가집니다. 이런 것이 나쁘지 않습니다. 기대하는 만큼 자녀들에게 헌신과 사랑을 쏟아 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기대와 편애는 자녀에게 큰 부담이 됩니다. 전교 수석을 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삶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가끔 들려옵니다. 남들보다 크게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없습니다. 왜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거에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지 확신이 없어요. 부모가 아이에게 잘못된 인생관을 심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3)충동적이거나 폭력적인 훈육입니다. Feldman의 연구 결과를 보면, “부모의 훈육방식은 범죄 행동의 억제력을 배우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자녀가 잘못하였을 때에 어떤 방식으로 훈육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이의 잘못을 두고 부모가 특히 충동적이거나 폭력적인 행동, 또한 도에 넘치는 심한 체벌은 자식에게 두고두고 심한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아이를 나무라고 훈육 할 때에, 특히 매초리를 들어야 할 때는 부모의 행동이 과하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부모가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자녀들도 충동적으로 행동합니다. 훈육의 일관성이 없이 이랫다 저랫다 할때에, 자식은 정서적으로 불안해집니다.
4)상벌의 공평성이 없을 때 노여워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칭찬이나 책벌에 민감합니다. 그리스 격언에 보면, “부모님의 올바른 칭찬이나 격려는 자식을 용기 용사로 만들고 지혜로운 현인으로 키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고압적인 자세로 기른 아이들, 또한 부모가 칭찬이나 격려에 인색하게 기른 자식들은 자신감이 없습니다. 특히 상벌에는 공평성이 있어야 됩니다. 윤리적인 잘못은 크게 나무라되, 실수나 과오는 크게 나무라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한 것은 엄히 꾸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물건을 잘못 다루거나, 실수를 한 것은 크게 나무라지 말아야 합니다. 기말 시험 잘 봤다고 포상금을 주면서, 봉사활동 하는 것은 말리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한다면 문제입니다. 상벌은 항상 일정한 규범 속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받은 상벌에 대하여 수긍하고, 잘못을 고치고, 혹은 선한 일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는 인격으로 성장합니다.
5)부모의 범죄 행위입니다. 부모의 범죄는 자식의 행동에 크나큰 영향을 미칩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으로 위신이 떨어진 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세요. 맏아들 암논은 이복 누이 다말을 욕보입니다.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은 암논을 칼로 쳐 죽입니다. 압살롬은 아비의 왕권을 찬탈하려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아들 아도니야 역시 임종을 앞둔 아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범죄 할 때 자녀들의 가슴에는 분노와 증오가 심겨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공평과 정의롭게 살아야 하지만, 특히 자녀를 가지고 있는 부모라면, 더더욱 성경 말씀대로 올바른 행동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에 사랑하는 자기 자녀를 분노하게 하고자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녀를 노엽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를 빗나가게 하기 쉽고, 관계를 악화시키기 쉽습니다. 이런 행동을 부모된 내가 먼저 행하지 않도록 삼가 말씀에 비추어 올바르게 행동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2. 주의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4하반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 단어는 “양육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녀의 양육자입니다. 양육(養育)이라는 말은 ‘자양분을 주어 기른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여러 가지 의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녀에 대한 올바른 양육입니다.
결혼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식을 낳아 잘 기르는 데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잘 양육시키는 것이, 모든 믿는 부모님의 책무입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의 심정으로 밭에 거름을 주고, 물을 줍니다. 잡초를 뽑아줍니다. 자녀들이 잘 성장하도록 믿음에 근거한 올바른 사고방식으로 양육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말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으로서 먼저 모범을 보이면서, 자녀를 세상적으로 키우지 말고, 신앙교육을 통해 훈련된 크리스천으로 키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제가 생각하기에 요즘 부모들은 자식을 예뻐 할 줄은 알아도 올바로 훈련할 줄은 모르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여운 아이이지만, 타인에게는 둘 도 없는 미움을 받는 아이로 만듭니다. 아이는 일곱 살 이전에 모든 지능, 사회성, 대인관계, 참을성, 다 형성 됩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라고 아무렇게나 가르치지 마세요.
아이가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돌부리를 나무랄 것이 아니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뛰어간 아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조심하지 않고 넘어진 아이를 훈계를 해야지, 부모가 튀어나온 돌부리를 탓한다면, 아이 인생을 망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 탓만 하는 그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는, 매사에 자기 잘못은 없고 남 탓만 하게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적 환경은 날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보다는 인터넷과 핸드폰을 더 좋아합니다. 핸드폰을 통해서 등장하는 인터넷의 여러 인물들이 부모님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생각합니다. 부모가 하는 말은 신용하지 않고 텔레비젼 광고는 믿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외과 의사인 줄 아는 초등학생들이 수두룩합니다. 역사적 인물은 모르고 아이돌 스타는 영웅입니다. 도적놈이든 사기꾼이든 텔레비젼에 많이 나온 사람이 영웅이에요.
오래 전에 일본에서 옴 진리교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주인 아사하라 밑에서 대변인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독가스로 테러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인 집단이 옴 진리교입니다. 도망간 범인을 잡는다고, 일본전역에 허구헌날 텔레비전을 통해 이 사람의 사진이 방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얼굴이 반반하니깐 갑자기 유명 인사가 됩니다. 살인범을 추앙하는 사람들까지 생기는 기현상이 발생합니다. 맨날 텔레비전이 나오니까! 살인범도 영웅이 된 것입니다. 이런 고약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환경 속에서 자식을 기르고 있습니다. 바르게 훈계하기 힘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먼저 믿으면서 부모 된 우리 모두의 사명이 막중하다는 뜻입니다.
부모 된 모든 자들은 갑절의 땀을 흘리면서 자식을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 우리는 가정과 이웃이 하나로 연결되었던 시절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가정은 가정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다 해체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신앙교육이 올바르게 실천되지 않는 상황에 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최악의 교육 환경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라”고 권면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자녀 양육입니다. 주님은 가는 곳마다 어린 아이를 품에 안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부모로서 자녀 양육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