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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이해
욥기는 어떤 책인가? ‘욥’이란 이름은 일반적인 히브리 이름이 아니다. 욥이 하느님께 도전하며 저항하는 책의 내용을 고려할 때 히브리어 동사 ‘아얍(‘적이 되다’)’에서 파생된 작위적인 이름이다.
욥기에서 핵심 주제는 인간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고통’의 문제가 아니다. ‘하느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신학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가? 아니면 인간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섬기는가?’ (1:9)라는 질문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과 목적을 묻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끌어내기 위해 욥이라는 의인이 받는 고통이라는 주제와 내용을 전개한다.
1장 머리말
1.1-3:
저자는 욥을 우츠 땅에 살던 동방인, 즉 이방인으로 소개한다.(1,1-3) 성경의 책 한 권 전체의 주인공이 이방인인 경우가 좀처럼 흔한 일은 아니다(cf. 모압 여인 룻을 주인공으로 한 룻기) 이렇게 성경 저자가 굳이 이방인을 주인공으로 삼을 때는 속 깊은 신학적 의도가 있다. 저자는 이방인 욥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비단 유다인들뿐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여 시대와 국적을 초월한 모두를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의인의 고통과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고민과 성찰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1,1-5: 욥기의 욥은 의로운 사람의 전형이다. 인과응보의 신학에 따르면 욥은 자녀 재산 가족의 화목 등 축복을 마땅히 누린 합당한 사람이다. 첫째, 저자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주관하시지 않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신학적 이해를 전제로, 의인 욥의 몰락 또한 ‘하느님께서 아셨고 허락하신 일’로 표현한 것 입니다. 마치 하느님이 사탄의 계책에 말려들어서(?) 혹은 욥을 가벼이 여기셔서(?) 내기를 했다는 식의 이해는 옳지 않습니다. 둘째, 욥기 저자의 시대에 사탄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사탄은 세상을 두루 살피면서 때로 인간을 고소하고 중상하는 존재로, 천사들과 함께 천상 어전의 일원으로 하느님의 명을 수행하는 존재로 이해되던 때였지요.(1,6-7; 2,1-2).
1.6:사탄
욥기 저자 시대에 사탄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 사탄은 세상을 두루 살피면서 때로 인간을 고소하고 중상하는 존재로, 천사들과 함께 천상 어전의 일원으로 하느님의 명을 수행하는 존재로 이해되던 때였다(1,6-7; 2,1-2). 여기서는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하는 사탄의 말을 빌어, 하느님의 축복과 인간의 신앙을 인과관계로 묶어버린 전통적 교리의 맹점을 문제 삼고 있다.(1,9-11; 2,4-5) 이야기 초입부터 이것은 잘못된 기복 신앙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정작 주목하고 주의해야 할 것은 하느님과 사탄이 내기가 아니라 불현 듯 이유 없이 주어ㅈ는 시련에 대한 것과 욥의 응답이다. 그는 전 재산과 자식들까지 모두 잃고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1.21)라고 응답했고, 몸이 썩어 문드러져 잿더미 위에 앉아 아내의 폭언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2,10)라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증거했다.
1,6-12: 천상 어전
욥이 하느님을 경외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 그 자체인가? 인간 욥이 바란 하느님의 세상적 물질적 축복인가?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을 잃어버린 후에도 계속해서 하느님에게 충실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질문과 신앙이 제기된다.
욥은 하루 동안에 자신의 전 재산과 아들과 딸 모두를 잃는 비극적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데도 다음과 같이 처신했다. “알몸으로 세상에 나온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1,21-22). 욥의 가지고 누리던 자녀 재산 모든 것을 잃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고 충실하다.
1,27-10: 욥의 발병
하느님은 욥을 머리에서 발 끝까지 고약한 부스럼으로 쳤다. 부스럼 병은 당시 나병과 동일시되는 병이었다. 처참한 몰골이지만 아내의 악담에도 “하느님에게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라며 입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
1,11-14: 세 친구들의 방문
*3,1-4,26
욥과 세 친구는 이 사태를 신학적 사고 인과응보에 비추어 이해한다. 인과응보는 신학의 주요한 주제로 이 책 전체를 통과하며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인과응보 교리는 하느님은 각자 올바른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불의한 자에게 벌을 주신다는 가르침이다.
3,1-10:욥의 독백(자기 저주)
극도의 고통 앞에서 욥은 종전의 태도에서 돌변한다. 하느님을 저주하는데 이르진 않지만 자기 존재와 살아있음을 격렬하게 저주하며 죽음을 희망한다.
4-5장: 엘리파즈의 첫째 담론
엘피파즈는 욥이 당하는 고통이 전형적인 인과응보라고 한다(4,1-11). 그는 욥) 인간의 의로움이 하느님보다 의롭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하느님께 호소하고 맡겨드려서 회복할 것을 권고한다.
6, 1-7:욥의 첫째 담론
6장
욥은 엘리파즈의 의견에 자신의 무고를 제기한다. 전지전능한 하느님 앞에서 유한한 자신을 하소연하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가르쳐 달라고 묻는다.
7장: 유한한 인간 인생
고통당하는 욥이 직면하는 날(日)과 시간은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다. 인생은 고역이고 인간은 나약하다. (욥기와 특히 이 본문에서 부활 사상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시다. 권능의 하느님과 나약한 인간) 욥은 그래서 더 입을 다물지 않고 탄식의 항거를 한다.
8장: 빌 것의 첫째 담론
빌닷은 욥이 당한 고통은 인과응보라고 한다. 정의로우신 하느님이 까닭없이 욥을 벌하신 것이 아니다. 인과응보에 대해선 앞서 살아간 선조들의 가르침과 그 결과인 악인들의 운명을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욥에게 회개하고 과거의 행복을 회복하라고 조언한다.
9장 욥의 둘째 담론
욥도 하느님의 절대적 정의, 지혜, 권능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인간이 없음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무고한 욥)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은 부당하다.
10장 욥의 둘째 담론
욥은 연약하고 무고한 자신에게는 어둠과 고통을 주시고, 정작 악인들에게는 빛과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의 불의에 절규한다. 그리고 연약한 인간인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항거한다.
11장 초바르의 담론
초바르는 욥의 인과응보를 말한다. 하느님의 지혜가 욥의 지혜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크고 넓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욥)인간의 거짓과 죄악을 알아낸다. 12절에서 초바르는 욥이 마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들나귀와 같다고 한다. 그러나 욥이 회개하고 하느님을 향한다면 회복될 것이라고 한다.
12장 욥의 셋째 담론
초바르에게 비난받은 욥은 인간은 누구나 사건을 겪으며 비로소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일반상식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왜냐하면 절대 통치자이신 하느님은 그 막강한 지혜와 권능으로 인간의 흥망성쇠를 임의대로 행하신다.
13장 욥의 셋째 담론) 욥의 항변과 자기변호
욥의 친구들은 정의로운 하느님을 대변한다고 나서서, 그릇된 분별인 허위와 불의로 고통당하는 욥을 향해 논쟁한다.(두 번 죽이는 확인 사살과 같다). 신학이 하느님과 인간에 대하여 결정적인 마지막 말을 할 때, 신학은 위험하다. 하느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기존 사상)先入見은 가장 큰 덫이 될 수 있다. 이 본문의 맥락은 그런 위험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러기에 새로운 사조의 주인공 욥은 꿋꿋하게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면서 구체적으로 고통을 중단시키고, 얼굴을 드러내고 나타나 자신을 불러 해명을 들어 달라고 탄원한다.
14장 욥의 셋째 담론) 욥의 한탄
욥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나약하고 한 번뿐인 인생도 혼란이 가득하다.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다. 욥은 이런 욥) 인간 존재에게 희망을 꺾고 고통을 허락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원망한다(이 본문에서 부활 신학은 없다. 부활 사상은 주전 2세기에 이르러 구체화 될 것이다).
15장 엘리파즈의 둘째 담론
엘리파즈도 욥에게 인과응보를 들이댄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의롭지 않다. 엘리파즈는 욥이 잘못되고 거짓된 앎과 지혜로 논쟁한다고 질책한다. 엘리파즈는 욥이 유사 이래 계승된 참된 진리인 인과응보 사상을 무너뜨리는 자라고 질책하며, 죄인이 감당해야 하는 인과응보의 당위성과 그 현상에 대해 나열한다.
16장~17,5: 욥의 넷째 담론
욥이 보기에 심신의 고통을 겪지 않는 자가, 전형적인 인과응보로 고통당하는 사람과 논쟁하기는 쉽지만 백해무익한 일이다. 이런 경우 본질적인 것은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참되고 진실한 공감과 연대이다. 욥은 자신은 무고하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땅’이 피를 덮지 않는 증거를 청하며, 또 다른 증인인 ‘하늘이 자신을 대신하여 하느님과 논쟁해 주기를 희망한다.
17장 욥의 넷째 담론 계속
영이 부서지고 넋이 꺾인 욥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 무덤과 죽음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18장 빌닷의 둘째 담론
빌닷도 인과응보를 앞세워 불의하고 하느님을 모르는 욥의 고통을 받는 것을 정당화한다
19장 욥의 다섯째 담론
욥은 자신을 단죄하는 빌닷의 인과응보에 대한 무지와 허위를 비판한다. 자신은 무고하다. 자신이 겪는 고통은 하느님 일방의 학대로 하느님과 원수가 되었고,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그런데 기껏 찾아온 세 친구마저 하느님처럼 단죄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 칼 맞을 죄악이다. 욥은 일관되게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며 인과응보를 거부한다. 필요하다면 천사) 변호자)후견인이 앞세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은 하느님을 기어이 만나리라고 갈망한다.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하느님이 아니다. 창조주가 인간이 죄짓기만을 기다렸다가 벌을 주시는 옹졸하고 비정한 하느님은 하느님일 수 없다.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고 죄인이 뉘우치고 돌아와 치유되고 낫게 하시어 구원으로 이끄는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다.
20장 초바르의 둘째 담론
초바르는 인과응보 사상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악인의 비극적 종말을 제시한다. 재력과 금력 권력을 가진 악인들은 축적은 대개 불의하게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제가 짓지도 않은 것을 수탈로 이루어진 것이다. 초바르는 욥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부자가 되었고 그래서 벌을 받고 있음을 말한다.
21장 욥의 여섯째 담론(악인의 번성과 축복은 무슨 일?)
초바르의 논리에 욥이 반론을 제기한다. 인과응보 섭리에 의해 악인에게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종말이 따르던가? 오히려 악인들이 장수하고 번영한다. 악인들은 심지어 하느님께도 폭력을 휘두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그 자식이 벌을 받을 것”이라 하지만 죽은 뒤 인간은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정의롭다면 각자 그 행실대로 그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 욥의 판단에 초바르의 담론은 가짜이고 거짓이다.
22장 엘리파즈의 셋째 담론
엘리파즈는 일관되게 인과응보 사상을 제기한다. ‘욥이 올바르게 살았는데 하느님이 그를 벌했을까?‘ 엘리파즈는 더욱 격앙된 어조로 욥의 죄악을 구체적으로 낱낱이 제시한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욥의 냉소를 질타한다. 죄악은 결국 끝이 있기 마련, 그러니 하느님과 화해하여 평화와 행복을 되찾으라고 권고한다.
23장 욥의 일곱째 담론(하느님의 부재와 침묵)
욥은 자신의 무고를 재천명한다. 욥은 하느님과 만나 시비를 가리고 자유인이 되고자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이런 일은 인간사에 빈번하기에, 욥) 인간은 무섭고 두려울 뿐이다. (욥이 토로하는 하느님의 부재와 침묵에 대해 33장에서 엘리후가 반대 논증을 펼칠 것이다.)
24장 욥의 일곱째 담론(하느님의 부재와 침묵)
어찌하여 전능하신 분께서 재판 날을 밝히지 않으시는가? 어찌하여 그분을 아는 이들이 재판의 날을 보지 못하게 하는가?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죄인과 악인의 불의한 일들이 부지기수이지만 하느님은 대응 없이 무심하시다. 그런데도 악인에게 분명히 그 행실에 대한 종말이 있다.
25장 빌닷의 셋째 담론
빌닷은 인과응보를 다시 강조한다. 하느님 앞에서 욥) 인간이 어찌 의롭다고 하겠는가? 욥은 의롭지 않고 죄인임을 제시한다.
26장 욥의 여덟째 담론(빌닷 논쟁 일축)
욥은 빌닷의 논쟁이 누구에게 들은 것인지 묻는다. 빌닷의 사상은 하느님의 큰 가르침에 비하면 아주 작은 미미한 가르침(인과응보)이라고 일축한다.
27장 욥의 여덟째 담론(빌닷 논쟁 일축)
욥은 하느님이 살아 계시고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무죄를 취소도 포기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27,11-12에서 욥이 빌닷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알려주겠다는 것은 28장부터 제시된다.)
*27,13-23:
이 본문 내용은 맥락상 욥이 아니라 빌닷(또는 초바르 용으로도 추정)의 마지막 담론이다. 빌닷은 인과응보에 의한 악인의 운명을 묘사한다.
28장 인간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
욥은 27,11에서 세 친구의 잘못된 지혜를 깨우쳐 주고, 참된 하느님의 지혜)권능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바 있다. 그것이 28장에서 제시되고 있다. “지혜는 누구에게서 오리오”“ 그에 대한 대답은 하느님만이 아신다라고 한다. 사실 하느님이 지혜 자체이시다. 그런 후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
인간은 지혜로 자연에서 귀중한 자원을 찾아 유익하게 활용한다. 그러나 지혜는 금과 은으로살 수 없다. 참된 지혜에 이르지도 못한다. 인간과 인간 세계에 절대 지혜란 있지 않다. 반면에 하느님은 절대 지혜로 지혜 자체이시다. 모든 것을 홀로 완전하게 아신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지혜를 갈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피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갈망하고 추구하는 지혜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인간 개인과 집단이 정신을 열어두어야 한다.
29-34장 욥의 독백
*세 친구와 논쟁을 마친 욥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행복해하고 현재의 고통을 돌아보며 하느님께 맹렬히 질문하며 호소한다. 하느님의 답변은 38,1절에 제시된다.
29장 욥의 독백 1(과거의 행복)
욥은 독백으로 과거에 누렸던 행복을 회상한다.
30장: 욥은 독백 2(현재의 고통)
욥은 현재의 고통 특히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을 한다. 하느님께 부르짖건만 대답하지 않고 줄곧 서 있어도 눈길을 주지 않으시는 무자비한 하느님을 원망한다. 하느님의 부재와 침묵에 대해서는(30,20;23장) 33,13-18절에서 엘리후가 대답을 줄 것이다.
31장 욥의 무고 선언
욥은 시종일관 자신의 무고를 선언하면서 자신의 인생사 여러 방면에서 의롭게 살아왔음을 ’내가 만일...‘이라는 수사修辭를 사용하며 낱낱이 천명한다.
32-37장 엘리후의 연설(후에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
*엘리후의 담론은 세 친구의 전형적인 논쟁인 인과응보 내용을 답습한다. 그러나 새로운 한가지를 추가하는데, 욥에게 절대 지혜이신 하느님이 이루신 창조와 창조질서의 업적을 찬미할 것을 제시한다.
32장 엘리후의 첫째 담론
자칭 자신만만한 사상과 언설을 지녔다고 자처하는 젊은 현자 엘리후가 등장한다. 그는 부실한 논쟁을 벌여 욥의 논증을 넘지 못한 세 친구에게 또한 시종일관 무고를 주장하는 욥에게 화를 낸다. 자신의 사상적 역량으로 제시한다.
33장 엘리후의 첫째 담론 계속
33,13-33:
엘리후는 위대하신 하느님께 무고하다고 다투는 욥이 옳지 않다고 한다. 욥은 무자비한 하느님은 자신의 질문과 호소에 부르짖음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 적이 있다(30,20절). 엘리후는 이 말에 반박하며, 하느님은 언제나 응답(한 번 그리고 또 한번)하신다고 한다. 문제는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고 거절하는 있다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말씀 전달은 꿈과 환영, 고통,천사)중개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천사 중개자(23-24) 보증인 16,19 변호인 19,25를 상기시킨다. 하느님의 주권과 관련하여 신비스런 중개자가 암시된다.
34장 엘리후의 둘째 담론
엘리후도 전통적인 사상인 인과응보에 따라 욥의 유죄를 제시한다. 엘리후는 “욥이 자신은 올바르게 살았지만, 하느님이 일방으로 행복과 권리를 박탈하였다”라고 한 욥을 비난하며 사실 “욥은 악인이었다”(34,7-9). 전능하시고 의로운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제 행실대로 되갚으신다. 엘리후가 보기에 욥의 무죄 주장은 터무니없다. 그러므로 이왕의 죄에 하느님 반항 죄까지 더 보태고 있다.
35장 엘리후의 셋째 담론
욥은 하느님이 인간의 정의와 불의에 무심하다고 비난한 적이 있다. 욥은 인간세계의 정의와 하느님의 정의를 동일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엘리후는 인간세계의 정의(불의)와 하느님의 정의와 불의는 같지 않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정의는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그 실천적인 영역에서 단죄는 최종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한다.(“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는 것은 욥처럼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불신하는 악의 교만 때문이다. 욥의 송사訟事는 이미 하느님 안에 있으니 욥의 할 일은 기다리는 일이다.
36장 엘리후의 넷째 담론(인과응보와 회개 촉구)
엘리후는 자칭 완전한 현자로 자처하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대변하고 욥의 무고 주장을 비난한다. 엘리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악인은 벌주고 의인은 존귀하게 대한다. 그러나 의인이 고통을 당할 때는 그들이 저지른 것을 알려주고 악행에서 돌아서라고 명령한다. (고통은 회개와 축복으로 이끄는 도구). 의인) 그들이 순종하면 행복과 생명을 얻고, 거역하면 불행과 죽음을 거둔다. 욥이 겪는 지금의 고통은 과거의 악행 때문이다. 그러니 조심하여 행동하고 하느님의 지혜가 이룬 위대한 창조 업적을 찬미하라고 제시한다.
*36,26~37,24:하느님의 우주적 신비와 위대함
엘리후는 욥에게 권고한 후, 하느님의 신비와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우주의 현상들, 우주는 가을 겨울 여름으로 제시한다. 봄이 빠져 있다. 봄은 38,1-42의 하느님 말씀을 생명의 시작인 봄으로 우회적으로 대체하고 있다.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영원하시다. 자연현상을 보라. 하느님의 명령에 어김없이 순응한다. 이것은 완전한 지혜이신 하느님의 권능이다. 이렇게 권능이 뛰어나신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닌 정의가 넘치는 분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느님을 경외한다. 하느님은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는 자(가령, 욥)는 거들떠보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
38-39장 주님의 첫째 말씀
38,1-3: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너는 누구냐?
욥은 앞에서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따지게 해주시라고 청한 바 있다. 마침내 그 요청에 대한 답이 온다. 하느님이 폭풍 속에서 말씀하신다. ‘폭풍‘은 하느님이 나타나심을 드러내는 현상이다. 또한 고통에 빠져 있는 욥의 상황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미 제시한 욥의 시비是非 제기에 대한 답변을 생략하고, 오히려 당신이 물을 터이니 대답하라고 하신다. 만사의 전권자는 욥이 아니다.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인간에게 도전의 순간이다. 도전에 맞서는 최선의 방책은 하느님과 그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데 있다.
38,4-30:
하느님은 욥에게 되묻는다. 누가 천지를 창조하였고, 창조 질서를 주관하고 운행할 때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를 제시함과 동시에 인간의 미소함과 무지를 보여준다. 자연과 그 질서에 대해서도 무지무능한 인간이 어떻게 전지전능한 하느님과 그 섭리인 고통에 대해) 따지려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38,39-39,30:
인간은 어떤 짐승들이 신비스러운 그들만의 고유한 감각과 지각으로 생존하고 세대를 교번하는 현상에 경탄한다. 동물을 창조하고 그렇게 완전한 본능을 주신 분은 인간이 아니다. 하느님이시다.
*39,26:
어떤 동물들) 매는 인간이 절대로 알 수 없는 동물적 지혜와 슬기가 있다.
40장 주님의 꾸짖으심-욥의 답변-주님의 말씀
40,1-2: 주님의 꾸짖으심-유구무언 욥-주님의 말씀
“불평꾼이 전능하신 분과 논쟁하려는가
전능하신 하느님을 비난하는 자는 답하여라”
욥의 첫째 답변
앞에서 욥은 하느님께서 숨지 말고 나타나시어 자신의 무고를 밝혀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하느님은 전혀 답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느님은 자신에 맞서 논쟁과 비난을 제기한 욥에게 물으신다. 존재의 전권자全權者는 인간이 아니고 하느님이다.
40,3-5:
욥은 온갖 내용으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싸웠다. 심지어 하느님과 불러내는 발칙하고 거친 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하느님 창조물들과 창조 질서의 권능과 신비들을 확인하며 위대한 하느님 앞에선 인간)자신의 무지와 미소함을 자각한다. 그러니 유구무언이다.
40,6: 폭풍은 하느님 나타나심의 모습이다. 고통의 폭풍 속에 있는 욥의 모습이기도 하다.
40,6-14:
존재의 전권자이신 하느님은 욥)자신의 정의를 앞세워 하느님의 정의에 시비한 욥을 꾸짖는다.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는 욥의 고통이 인과응보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논쟁을 총동원하였다. 사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상선벌악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었다. 이러한 사조에 엄청난 변화가 제시된다. 욥기 저자들은 욥기 내세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하고 있다. 욥은 일관되게 무고를 선언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심지어 하느님께도 그분의 부재와 침묵의 늑장 대응을 원망하며 자신의 시비를 가려줄 것을 거칠게 탄원하였다. 이제 인과응보 사상은 한계상황에 직면한다. 하느님이 옳고 욥이 그른가? 아니면 욥이 옳고 하느님이 그른가? 이것에 대한 대답이 제시되어야 한다. 답변은 ’8절‘에 주어진다. 인간의 정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정의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 욥이 범한 죄는 인간세계의 도덕적 죄 인과응보가 아니다. 그는 신학적 죄를 범한 것이다. 신학적 죄란 무지무능한 인간이 전지전능한 하느님과 똑같다는 존재와 행위의 착오이다. 창세 3장에 바로 그런 죄가 나온다. 이 점에서 욥과 세 친구 엘리후도 모두 죄인이다.
40,9-14:
이 본문에서는 그런 신학적 죄들을 풍자적으로 제시한다. 즉 인간이 하느님을 비판함으로써 스스로 신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죄를 짓는 자는 하느님이 실현하지 않는 정의를 자기가 실현한다고 착각한다. 스스로를 신격화한 그런 인간 앞에서 하느님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도 너를 인정하리라”라고 비꼬신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성서 전체의 핵심이면서도 많은 경우 잊고 있는 사실 즉,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41,15-24: 브헤못
이것은 고대인들이 하마, 코끼리 악어 등 거대 바다 짐승에게 붙인 이름이다.
41장 레비아탄
악어로 표상되는 레비아탄은 신비스런 용을 가리킨다. 레비아탄은 피조계를 위협하는 악의 상징이다. 하느님을 이 용을 물속에 가두셨다. 하느님은 욥에게 당신이 악을 지배하는 것처럼 욥도 악을 지배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고 하느님께 절대 신뢰를 하라는 초대이다.
42장 하느님께 대한 욥의 둘째 답변
42,1-6:
*이 책 전체의 핵심이다. 40,1-5절에서 욥은 피조물과 그 질서를 관장하시는 하느님의 권능과 꾸짖음 앞에서 유구무언이 될 것을 결심하였다. 이제 욥은 인격 대 인격의 지혜(見)로 고백한다. 이 대목은 이 책 전체의 절정이며 핵심이 되는 열쇠다. 40,15절에서 욥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지혜 앞에서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다. 이제 욥은 더욱 분명해진 체험에서 나오는 믿음을 고백한다. 참된 하느님께 다다르지 못하도록 장애가 되었던 신학 <하느님과 계시((인과응보 사상)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42.5>을 넘어섰다. 욥은 마침내 살아 계시고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인격 대 인격으로 뵈며 참회한다.
하느님과 그분의 계시 진리는 자기만족 상황의 귀로만 들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욥의 경우, 그는 뜻밖에 직면해야 하는 처절한 고통을 인격대 인격 즉 온 마음과 몸으로 겪으면서 정의와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을 뵐 수 있었다.(42,5)
욥은 하느님을 만나기 전 많은 질문을 던졌다. 이제 하느님과 만났는데 정작 하느님은 한 가지도 대답해 주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그러나 이 마지막 본문을 통해 하느님은 인간의 깊은 열망을 알고 계시고 그 열망에 응답하시며,(인과응보와 상선벌악) 인간과 연대하고 친교를 맺어 주신다고 말한다.
42,6:
속죄 예절에 대하여 말한다. 욥) 인간은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교만을 저지르는 신학적 죄를 범했다. 교만은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과 똑같이 여기고 하느님께 겨루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인 자신의 존재와 처지를 수용하고 인정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런 자유로운 상태에서라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42.7:올바른 것
“욥은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였다.”(42,7) 하느님께서 어여삐 보신 이 “올바른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욥이 친구들처럼 구태적 인과응보의 묵은 인간적 논리 안에 하느님과 진리를 가두어 놓고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을 체념하며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기어이 그분을 만나 뵙고자 했던 용기와 끈기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겠다. 이 세상이 고통이 그저 인과응보의 원칙, 인간이 파악한 원칙에 따라 운용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끝까지 외쳤던 욥의 모습을 하느님은 의로움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42,7-9: 하느님의 세 친구들에 대한 단죄와 욥의 중재 기도
욥의 세 친구는 하느님의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과응보에 대해 욥처럼 무지하면서도, 전통적인 사상에 편승해 솔직하게 대응하는 욥을 단죄했다. 세친구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는 기존 사상을(인과응보)에 편승하여, 고통에 처한 인간 존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세 친구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는 욥의 전구에 달려 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과 진정한 인격적 친교를 나누는 가난한 사람만이 하느님과 화해시킬 수가 있는 자격이 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현자 엘리후는 누락되고 있다.
42,7-17:맺음말
이 부록은 1,1-2,13절에서 시작한 욥기의 마무리 부분이다. 3,1절부터 42,6절까지는 긴 논쟁본문이다. 부록인 이 배치 목적은 인과응보 사상과 완전한 결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후대의 편집자는 또 다른 의도로 2,11-13절/3,1-42,6절/42,7-17절 순서로 편집했다.
42,10-17 욥의 회복
이 본문은 욥이 과거 축복을 되찾는 것으로 끝난다. 올바른 사람은 행복을 상으로 받게 된다는 것으로 일정 부분 인과응보의 회귀이다. 욥은 율법의 규정대로(탈출 22, 6) 과거에 잃은 것에 대해 갑절의 배상을 받는다. 140년을 살았다는 것을 보면 건강도 회복된 것이다. 떠나갔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와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세상 인심은 병들고 가난하면 인적이 멀어지고 부유하고 건강하면 발길이 부산하다 잠언 14,20) 욥기는 일말의 여성신학 확장을 제시한다.
욥이 전신에 부스럼 발병으로 비참한 고통을 당할 때, 욥의 아내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악담하였다. 그 아내는 이름도 받지 못하고 포악한 이미지만 남겼다. 이런 포악한 여성성의 회복과 확징일까? 욥기 마무리에서 다시 얻은 그의 딸들은, 아들들을 제치고 이름을 받고, 아들들과 동등하게 유산을 받으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리따운 여성들이라고 찬양을 받는다(2,9;42,13-15).
입력:최마리 에스텔 수녀/2024년 11월 18일 pm 11:20
참고:1.해설판 공동번역 주석. 2.성서백주간 도움책 예언교훈편 3.주석성경
첫댓글 서너시간이면 욥기 이해 정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왠걸? 무지와 교만한 스스로를 부끄러워합니다.
성경 말씀은 보물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백주간식으로 복습 정리를 하면서 강수원 신부님의 잘 정리된 글에 많은 이해의 도움이 되었음을 고백합닏. 큰 감사 전합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분들께 (김혜윤 수녀님)
한동안 방에 사막 사진을 걸어두고 본 적이 있었다. 사막을 다녀오신 어느 분의 말씀이 마음에 남아있어서였다. 그곳에 가면 무엇이 세상의 중심인지를 알게 된다고 했던가. 바람과 모래, 별과 태양이 살아있는 그곳에서 인간은 그저 피조물일뿐,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 한 분뿐이심을 새삼 느끼게 된다는 거였다. 불평, 불만, 분노는 삶의 주인이 「나」라고 자부한 오만함에서부터 기인된다. 나의 죄를, 한계를, 초라함을, 그리고 나의 실패를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언젠가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시는 분들께, 그리고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던 말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11월 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