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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와 진흙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로마서 9:10〜24)
성경에는 하나님을 토기장이, 우리를 진흙 한 덩이에 비교한 말씀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먼저 이사야서 29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여기에서 토기장이는 하나님, 진흙은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를 지으신 분이고 나는 지음을 받은 물건입니다.
이사야서 45장 9절에는 같은 내용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예레미야서에는 토기장이와 진흙 이야기가 좀 길게 나옵니다.
예레미야서 18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 우리는 진흙 한 덩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이 말씀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로마서 9장 19절에서 29절까지를 살필 차례인데 토기장이와 진흙 한 덩이가 이 말씀의 중심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 19절에서 28절까지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 가운데에서도, 다시 말해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구원 받는 자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5절과 26절에서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호세아서 2장 23절과 1장 10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도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도 말하고 있습니다.
9장 27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이사야서 10장 21절과 2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남은 자 사상’이라고 하여서 이사야서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마서 9장 19절에서 29절까지에서 토기장이와 진흙 이야기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말하려고 동원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고 하나님은 토기장이, 나는 진흙 한 덩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유대인의 구원 문제, 이방인이 구원 문제는 이미 여러 번 나왔고 앞으로도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나는 진흙 한 덩이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나를 지은 분이고, 나는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려 줍니다.
말을 바꾸면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지난 주일 오후예배에서 담임목사님께서 오페라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쟝의 노래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장발쟝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기본적인 대답은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왔다’,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정성껏 지으시고 보내주셔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우연히 온 것이 정말로 아닙니다.
우라는 또 ‘나의 주인은 나다’ 이렇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주인은 나를 지으신 토기장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드셨습니까?‘할 때가 있습니다,
이거, 칭찬 받을 질문입니까?
20절과 21절에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토기장이에게는 손에 들려있는 진흙 한 덩이로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주석 가운데 이것을 ’하나님의 불가침적인 주권‘이라고 부르는 주석이 있는 것을 이번에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머지는 모두 피조물입니다.
하나님만 창조주이시고 나머지는 모두 피조물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참 장엄한 선언입니다.
제가 학생 시절에 수요예배를 드릴 때 담임목사님께서 출석한 교인들에게 돌아가면서 성경말씀을 한 절씩 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나까 교인들은 수요예배에 오기 전에 성경 한 절을 택해 외워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급하게 교회에 오느라고 그것을 잊고 말씀 외우기를 준비하지 못했으면 얼른 둘러대는 것이 창세기 1장 1절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면 교인들이 다 웃고, 목사님도 웃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열여섯 글자로 된 간단한 말씀입니다.
그때는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 둘러대기용으로 사용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간단한 말씀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입니다’라는 엄숙하고 깊은 신앙고백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뒤에 알았습니다.
‘하나님만 창조주이시고 다른 천지만물은 모두 피조물입니다’라는 교훈도 들어 있습니다.
이 창조신앙은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기본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감리회 신앙고백’도 첫 번째 신앙고백이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주관하시는 거룩하시고 자비하시며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나는 진흙 한 덩이입니다.
토기장이신 하나님은 진흙 한 덩이로 우리를 만드실 때 정성을 다 하십니다.
대강 대강 하시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쉬운 한글성경들, 『공동번역성서』나 『표준새번역』이나 『새한글성경』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를 모두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때,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성악가가 노래를 부를 때, 문학가가 글을 쓸 때 얼마나 정성을 기울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애를 써서 만든 명작들입니다.
경기도 이천은 도예단지로 유명합니다.
거기에 가면 도예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가끔 있습니다.
이천까지 가지 않더라도 영화나 TV 또는 유튜브를 통해 도예가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모습을 대할 수 있습니다.
도예가들, 오늘 본문의 용어를 빌리면 토기장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 작업합니까?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여 그릇을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상의 정성을 기울여 여러분과 저를 빚으셨습니다.
본문에 그릇이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그릇은 무조건 커야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저희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습니다.
저희 집이 박물관에서 가까워서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 주로 연휴인 때 가 봅니다.
도자기전시실에 가 보면 큰 도자기들과 함께 작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도자기 앞에 ‘보물 몇 호’ 나가서 ‘국보 몇 호’ 이런 표시가 붙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나는 작은 그릇이라고, 볼품 없는 존재라고 불평하지 마세요.
국보 같은 도자기가 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이 정성을 다 해 빚은 가치 있는 존재이다’ 스스로 생각하면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도자기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삼십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선교기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중구용산지방 한 교회의 목사님이 유학을 가시면서 저에게 유학기간 중에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를 돌 봐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별로 어렵자 않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몰랐는데 그 교회에 복잡한 문제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냥 묵묵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교회의 권사님 가운데 잘 알려진 도예가가 있었습니다.
연말에 그 권사님이 밤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권사님은 “목사님, 저희 교회에 어려운 문제들이 얽혀 있는데 저희들이 안정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제가 제 작품을 한 점 가지고 왔습니다. 제 작품 가운데 가장 잘 되었다고 여겨지는 것을 골라 가지고 왔습니다. 정성으로 알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가지고 온 도자기를 주셨습니다.
그 말과 태도에 진심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 도자기 지금도 가지고 있는 데요 참 못생겼습니다.
녹자, 녹색 도자기인데 우둘두툴하고 균형도 맞지 않고 주둥이 부분은 멋없이 큽니다.
내가 보기에는 참 볼품없는 도자기입니다.
그런데 그 도자기를 만든 잘 알려진 도예가는 ‘이 작품이 내 작품 가운데 최고입니다’하셨습니다.
거기에 비해 나는 도자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박물관에서 국보 고려청자를 보면서도 ‘이걸 왜 국보라고 하지?’ 히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나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 분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이사갈 때는 그 도자기부터 잘 챙기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 ‘참 못 생겼다’ ‘값어치가 없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너는 나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명작이다’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나는 진흙 한 덩이입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도 만드시고, 긍휼의 그롯도 만드셨습니다.
22절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쉬운 한글성경인 『표준새번역개정판』은 이 말씀을
멸망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면서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라고 번역했습니다.
지난 주일 낮예배에서 김병연 목사님이 설교하시고 오후 예배에서 담임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모두 긍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14절까지를 본문으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자, 거룩한 자, 사랑 맏는 자임을 말씀하시고 그런 자의 첫 번째 특징이 긍휼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도 “긍휼의 그릇”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그리고 이어서 24절에서 “이 그릇은 우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긍휼의 그릇으로 빚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나는 진흙 한 덩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20절에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라는 말씀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목적이 있어서 나를 이런 모습의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어요?“ 불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런 모습으로 만드셨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어느 교향악단에 트라이앵글 악기 연주자가 있었습니다.
트라이앵글, 잘 아시는대로 쇠막대를 세모꼴로 구부려 만든 타악기입니다.
볼픔도 없고, 연주할 때 연주할 기회도 몇 차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한번은 교향악단이 연습을 하는데 트라이앵글 연주자가 그 날따라 골이 났습니다.
’다른 연주자들은 현악기, 관악기, 큰 악기, 다 신이 나서 연주하는데, 소리도 웅장하고 큰 데 나는 이게 뭐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연주해야 할 대목에서 연주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뭐 내가 연주하지 않고 넘어가도 아무도 모르겠지!‘했습니다.
그랬더니 지휘자가 당장 연습을 중단시키고 ’트라이앵글은 어디 있지?‘했습니다.
트라이앵글 연주자가 머리를 긁자 지휘자는 트라이앵글 소리는 등산가가 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 지르는 ’'호!‘ 소리와 같은 것인데 빠뜨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야 이 연주자는 자기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다른 나리에 갈 때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것을 가지고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섯 달란트 남긴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크게 칭찬을 들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23), 큰 칭찬이지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 25:26)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까?
성경에는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짐작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다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잘란트를 주면서 나에게는 왜 한 달란트만 주는 거야?‘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요.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는 왜 저렇게 좋은 환경, 여러 재능, 많은 물질을 주고 내게는 요것만 주시는 거야?‘라고 불평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면 주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주인은 틀림없이 ’오, 너는 내가 많은 것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힘써 일했구나. 최선을 다 했구나!‘ 더 많이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적게 주셨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주신 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은 내게 알맞춤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감사하며 그것을 가지고 힘써 일하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가지고 만들어진 찬송가가 있습니다.
597장입니다.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다
지극한 그 은혜 내게 넘쳐 날 불러 주시니 고마워라
나 받은 달란트 얼마런가 나 힘써 그것을 남기어서
갑절로 주님께 바치오면 충성된 종이라 상주시리
천하고 무능한 나에게도 귀중한 직분을 맡기셨다
그 은혜 고맙고 고마워라 이 생명 바쳐서 충성하리
나 하는 일들이 하도 적어 큰 열매 눈앞에 안뵈어도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 얻으리라
우리나라의 찬송 가운데는 서양 사람들이 작사, 작곡한 것을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찬송가는 반대로 정용철이라는 장로교 목사님이 작사를 하고 감리교 이유선 장로님이 작곡해서 1967년부터 부르기 시작했는데 1990년에 미국 장로교에서 영어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 받은 달란트가 다른 사람보다 많은가, 적은가 그것을 따지지 말고 천하고 무능한 나에게 달란트를 주신 것을, 맡기신 것을 감사하면서, 내가 하는 일들이 하도 적어 큰 열매 눈 앞에 뵈이지 않더라도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저는 석 주일 전에 미국 LA에 다녀왔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 교회들이 4년에 한 번씩 선교대회를 열어 세계 여러 곳에 나가서 일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격려를 하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름이 한인세계선교대회인데 36년 전, 1988년에 차현회라는 감리교회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 제1차 대회를 열었습니다.
제가 1회 때부터 몇 번 참석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동안은 시카고 부근에 있는 휫튼대학에서 열렸는데 동부와 서부에서 번갈아 열자고 해서 올해 10회 대회는 LA에서 열렸습니다..
대회 안에 여러 분과가 있는데 올해 처음으로 통일선교 분과가 생겼습니다.
통일선교분과 실무책임을 맡은 목사님이 모처럼 통일선교 분과가 생겼는데 이 분야에서 오래 일하신 목사님이 오시면 좋겠다고 카톡을 여러 번 보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차라 건강이나 여러 형편이 다소 무리이기는 했지만 참석을 해서 여러 면에서 매우 유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회가 끝난 다음에 나흘 더 LA에 머물렀습니다.
’내가 나이로 보아 앞으로 또 LA를 방문할 기회가 있겠나?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 LA에 있는 친구들, 동료들을 많이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용산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친구들, 선후배들도 여럿 만났습니다.
교포사회에서는 ’누가 왔다‘ 하면 그 소문이 금방 퍼지지요.
저는 1950년대 후반, 중학생 때 용산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때 분들과 만나기도 하고 전화도 나누고 했습니다.
만난 분 가운데 조건갑이라는 목사님이 계신데 저를 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중학생 때 목사님이 저를 담임하셨는데 저도 이제는 은퇴를 해서 원로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아,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했습니다.
1950년대 때부터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나라는 진흙 한 덩이를 어떻게 빚어오셨는지를 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들, 신학교 동창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같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진흙 한 덩이인데, 내가 토기장이라면 ’이거 쓸모 없어! 이걸 가지고 뭐해?‘ 하면서 버렸을 것 같은데 이렇게 잘 빚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돌아보면서 특히 신앙의 길을 돌아보면서 같은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기도하는 마음이 담긴 찬송가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에 일바트 아우스틴 폴라르드(Albert Austin Pollard)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여러 가지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건강에 큰 문제가 있었고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했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 모임에 참석했는데 옆자리의 할머니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주님의 뜻만 이뤄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반복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폴라르드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찬송시를 하나 썼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425장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강건케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행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십니다.
나는 진흙 한 덩이입니다.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선한 피조물로 살아가기에 힘쓰는, 사람들로부터 ’아, 저 사람은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야‘ 인정을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바울 사도를 통해 저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여러가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은 토기장이, 우리를 지으시는 분이고, 우리는 진흙 한 덩이, 지음을 받은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왔고, 나의 주인은 나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때가 많았던 것을 회개합니다.
나의 모습과 처지에 대해 불평을 많이 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기에 힘쓰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들로부터 '아, 저 사람은 그를 지으신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힘쓰는구나' 인정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그와 같은 일들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전도가 이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이멘
![둔지산(屯之山)의 종소리[山鍾 유관지 글모음]](http://t1.daumcdn.net/cafe_image/cf_img2/img_blank2.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