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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나락 그리고 물고구마 서 양 순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해남 황토밭 꿀 호박고구마’ 장수를 만났다. 길거리에서 “해남”이라 써 있는 간판만 보아도 그냥 자나 칠 수가 없어 발걸음을 멈추곤 했던 나로선 반갑기 그지없었다. 해남 고구마는 나에게 많은 향수를 느끼게 한다. 목포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얼마나 많이 듣던 이름인가? 아마 해남 하면 풋 나락과 물고구마가 대명사처럼 따라 다녔다. 학년 초 신입생이 들어오면 의래 환영회가 열렸다. “해남 풋 나락모여라”, “해남 물고구마 모여라” 하며 놀려 대던 친구들이 얄밉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금은 풋 나락이며 물고구마를 생각하면 향수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해남은 산수(山水)가 수려(秀麗)할 뿐 아니라 농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벼, 보리, 고구마, 감자 등 농산물이 풍족하여 예로부터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벼 수확의 명성은 여전하다. 그러나 너무 많이 생산 되어 농가의 고민이 되고 있다. 요즈음엔 FTA 협상에서 우리의 쌀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저항이 강하다. 왜 “풋 나락”이라고 이름 하였을까?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초가을에 나락(벼)을 큰 돛배에 가득 싫고 목포에 나가서 술과 여흥으로 다 먹어 치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왔다는 말도 있고, 벼농사를 많이 지어 가을에 벼가 풍성하다는데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벼가 풍성하다는데서 나온 말임엔 틀림이 없다. 나는 벼농사 덕택으로 깊은 산골 촌놈이 목포에까지 학교를 다녔으니 벼에 대한 고마움과 애착은 잊을 수가 없다. 벼는 지금부터 4,000여 년 전부터 우리민족의 식량작물로 제배 되어 왔다. 농경사회에서는 농토가 부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했으며 농가 소득의 주류를 이뤘다. 벼는 우리 국민의 주식이었다. 쌀에 함유된 탄수화물이며 단백질 지방은 우리 국민의 영양원 이었다. 우리나라는 벼농사를 짓기에 기후가 적합하여 벼농사를 많이 지었다. 가족은 농경의 자산이었다. 그래서 한 가정에서 많은 가족들이 함께 사는 대가족제도가 이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모심기를 할 때면 농악이 함께 울렸다. 농악은 농경문화의 꽃이었다. 농민들의 협동심과 유대감 일체감을 일으키는데 농악과 줄다리는 큰 기여를 했다. 농악과 줄다리기는 길이길이 전승 보존해야 할 우리의 문화자산이다. 고구마는 메꽃의 다년초 식물이다. 줄기는 땅 위로 길게 뻗고 땅 속 뿌리가 살이 쪄서 방추형으로 자란다. 고구마의 색깔은 여러 가지다. 안은 흰색이나 오랜지 색으로 되어 있고 바깥색은 연한 황갈색 갈색 또는 흰색이다.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년대는 약 200년 전이라고 한다. 영조 39년(1783년)에 일본에 갔던 사신이 가지고 들어 왔다고 한다. 고구마는 밤고구마와 물고구마로 구분 된다. 해남 물고구마는 추운 겨울에 효력을 발휘한다. 겨울에 먹던 고구마는 꿀처럼 달았다. 입술을 뾰쪽하게 하고 고구마의 끝부분을 입술에 대고 뽁 빨면 입술엔 고구마 껍질만 남고 달콤한 내용물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고구마를 쪄서 소쿠리에 담아 놓으면 단물이 줄줄 흐른다. 그 맛이나 먹는 멋에 있어선 해남 물고구마에 겨눌만한 고구마는 없다. 한참 뛰어 놀다가 배가 고플 때면 솥뚜껑을 열고 따뜻한 고구마를 꺼내 먹던 추억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물고구마가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대신 “해남황토밭 꿀 호박고구마”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는 사람의 생활양식을 변화 시킨다. 왜 그 달콤한 물고구마가 해남에서 살아졌을까? 아쉽기 그지없다. 지금이라도 물고구마를 재생 시켜 해남의 향토 식품으로 개발하면 각광을 받으리라 생각 된다. 일제 강점기 때 땀 흘려 지은 벼는 강제로 송두리째 일본에게 빼앗기고 그 대신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 찌꺼기(대두박)를 배급으로 주었다. 이 어려웠던 시기에 물고구마는 우리들 굶주린 배를 채워 주는 주식으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참으로 고마웠던 물고구마였다. 고구마는 미국 아메리카 열대지방과 기후가 따뜻한 태평양의 섬과 일본 소련을 비롯한 우리나라에서 많이 제배 되고 있다. 쌀이 떨어 졌을 때 밥 대신 먹었고 간식으로도 먹었다. 과자를 만들거나 기름에 튀겨서 먹기도 했으며 알콜이나 녹말 원료로도 쓰였다. 고구마를 바라보며 서있는 동안 신호등이 몇 차례 바뀌었을 것이다. 내 머리 속에는 영화 필름처럼 고향에 대한 추억들이 떠오른다. 고향은 왜 잊혀지지 않고 새로워지는 것일까? 며칠 있으면 추석이 다가 온다. 민족의 대 이동이 시작 될 것이다. 보고 싶었던 부모님을 만나고 그리운 가족들과 재회를 하게 된다. 돌아 갈 때면 알뜰한 선물 보따리에 고향에 대한 향수도 가득 담아 갈 것이다. 고향은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처럼 항상 우리의 가슴 속에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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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읽고 새삼 고향의 짙은 향수를 일깨워 보네요~ 부모님 계지지 않은 고향은 적막강산입니다. [광고문학관]이 광주고등학교에 개관되었습니다. 한번 들르셔서 보아주시기를..^ ^(특히 제 문학세계도 맛보시구요~)
이 글을 읽으면서 고향보다 물고구마 먹고싶은 생각이 났었는데 그 일본놈의 횡포에 분노가 치밀더니...마지막엔 어머니 생각이 나서 콧등이 시큰했어요. 선생님, 늘 건강하세요...참, 시조 한 수 올릴게요,
선생님 저도 이 글을 읽다가 문득 고구마 생각이 납니다 어릴적 끈끈하고 물렁물렁한 그 고구마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가슴속에 고향같은 고구마, 그리워 집니다.
고구마...물감자...하지감자가 아닌...해남 물감자...ㅋㅋ 한입에 퐁~ 스르륵~우와 달보드레한 그 맛~ 겨울날 화로불에 군고구마는 어떻고!!!ㅎㅎㅎ
지금은 해남의 명물 우수 브랜드 농산물입니다 넉넉한 향수가 물신 풍겨 줍니다